이극로
이극로
출생 1893년 8월 28일 / 조선 경상도 의령현 지산면 / 사망 1978년 9월 13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시 / 사인 병사 / 성별 남성 / 국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본관 전의 / 별칭 호 고루, 물불 / 학력 동제대학, 독일 훔볼트 대학교 / 경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무임소상 /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 / 직업 국어학자 / 종교 대종교 / 부모 이근주 / 배우자 김공순 / 자녀 이억세, 이대세
이극로(李克魯, 문화어: 리극로, 1893년 8월 28일 ~ 1978년 9월 13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어학자, 정치인이다. 본관(本貫)은 전의(全義)이며 예조 참판(禮曹叅判) 이함장(李諴長)의 후손으로 경상남도 의령(宜寧) 출생이다. 호는 고루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어사전 편찬 집행위원, 한글맞춤법 제정위원,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 등을 역임하고,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징역 6년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45년 광복되자 출소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의 무임소상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생애
1920년 중국 상하이 동제대학(同濟大學) 예과를 거쳐 1927년 독일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현 훔볼트대학) 철학부를 졸업하였다. 일제강점기 중반 한글 연구에 참여, 1929년 조선어사전 편찬 집행위원, 1930년 한글맞춤법 제정위원, 1935년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회 위원, 1936년 조선어사전 편찬위원회 전임위원 등으로 활동했고, 조선어학회 간사장에도 선출되었다.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체포, 함흥재판소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45년 8월 광복 후 석방되었다. 1946년 건민회(建民會) 위원장을 지냈고, 1948년 4월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 참석차 평양에 갔다가 잔류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활동하였다.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1차내각의 무임소상이 되고, 1949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이 되었으며, 공화국 과학원 후보원사, 1953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1962년 과학원 조선어 및 조선문학연구소 소장, 1966년 조국전선 중앙위 의장, 1970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1972년 양강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생애 초기
출생과 수학
이극로는 1893년 8월 28일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의 농가에서 출생하였다. 전의 이씨 전서파 28세손이다. 서당에서 공부한 뒤 1910년 마산 창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2년에 독립군이 되고자 서간도에 망명했다.
1912년 회인현 동창학교에서 후일 대종교의 제3세 교주가 된 윤세복을 만나 대종교에 귀의하였고, 교사로서 박은식 등 저명한 민족주의자들과 활약하였다. 동창학교 폐교 후 1915년 무송현 백산학교에서 다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독일인이 운영하는 동제대학에 입학하여 서구 학문을 체계적으로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유학생활 및 독립운동 활동
1920년 상하이 동제대학(同濟大學) 예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영수 이동휘가 고려공산당 내의 분쟁을 해결하려고 국제공산당의 지시를 받기 위해 모스크바로 가는 데에 이동휘와 동행하였다가, 독일 프리드리히-
국내 독립운동 활동 및 한글연구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미국, 일본 등 여러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조선에서의 활동을 구상했던 이극로는 1929년 1월 귀국했다. 이후 한글학자와 교육자로서 많은 활동을 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한글 연구단체인 한글학회의 전신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맡아 조선어사전 편찬 작업에 참여하고,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한글 맞춤법 통일안 작성에도 참여하였다.
1929년 <조선어사전> 편찬 집행위원(뒷날 조선어학회의 '조선말 큰사전'으로 이어진다), 1930년 한글 맞춤법 제정위원, 1935년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 1936년 조선어사전 편찬 전임위원 및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지냈다. 그밖에 1930년 신간회 대표로 동포구제의 목적을 띠고 만주지방을 돌아보다가 귀국했다.
조선어학회 사건 투옥
1942년 7월 조선어학회 사건에서 최현배, 이윤재와 함께 가장 핵심적인 인사로 지목되어 구속당했다. 10월 1일 함흥재판소에서 그는 징역 6년형 선고받았고, 같은 한글학자로 조선어학회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최현배는 4년형을 선고받았다.(역시 중추적인 역할을 해오던 이윤재는 수감 중 옥사했다.)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가 1945년 광복 이틀 후 8월 17일 출소했다. 이 당시 상황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있는데,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로 지내는 이근엽 교수가 당시 출옥당시를 직접 목격했다고 한다. 이근엽 교수 증언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1945년 8월 17일 내가 15살 때인데 조선어학회 회원인 모기윤 선생이 교회 청년 30여 명을 함흥형무소 앞으로 모이게 해서 영문도 모르고 따라갔었다. 모기윤 선생이 조선인 검사에게 광복이 되었는데 왜 독립운동가들을 풀어주지 않느냐고 항의해서 네 분이 감옥에서 나오게 되었는데 그 분들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살이를 한 이극로, 최현배, 정인승, 이희승님인 것을 그 뒤 알게 되었다. 그 때 한 분(이극로 선생으로 보임)은 들것에 들려나오고 세 분은 부축해 나오는데 처참한 모습이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이틀이 지났지만 일제가 무서워 태극기를 들고 환영도 못했다. (하략)
광복 이후
광복 직후
1945년 8월 광복 후 석방되었다. 해방정국 이극로는 다시 한글연구에 몰두하였다. 재건된 조선어학회 회장에 취임하면서 한글연구를 다시 이끌었다. 그런데 1945년말,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신탁통치 문제'가 불거져, 반탁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자 김구가 이끌던 1945년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운동본부'의 위원으로 반탁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부활된 조선어학회 회장에 선출되고, 전국정치운동자후원회 회장에 위촉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1946년 건민회(建民會)에 입당, 그해 건민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46년 봄부터 미군정 주도로 좌우합작운동이 대두되자, 그는 좌우합작에 지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입법기관(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대해서는 좌우합작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1948년 4월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하려고 평양에 갔다가 잔류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활동하였다.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협상
1947년 초에는 조봉암과 함께 민주주의독립전선을 결성했다. 이후 제2차 미소공위 재개 조짐이 보이자, 좌우합작위원회에 가담해 '시국대책협의회'에 참가한다. 그러나, 제2차 미소공위가 결렬되어 좌우합작위원회는 12월에 해체되었다. 그 해 12월 20일, 김규식이 주도한 민족자주연맹 결성식에 정치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1948년 4월 김구가 주도하던 남북협상 위원으로 참가해 평양을 방문한다. 이 때, 김구는 서울로 귀환하지만, 이극로는 북한에 잔류하면서 결과적으로 월북하게 되었다. 한편 월북 전 주요논저로 《조선어 임자씨의 토》(1935)·《조선어 단어성립의 분계선》(1936)·《짓말에 대하여》(1937) 등과 《실험도해 조선어 음성학》(1947)·《고투 40년》(1947) 등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수립에 참여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자 1953년 12월까지 제1차내각의 무임소상(無任所相)에 발탁되었으며[5] 이후 1949년 조국통일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회 의장단, 공화국 과학원 후보원사, 1953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등을 지냈으나, 정치적인 발언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추후에 북한에서 숙청 바람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1961년 3월 25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직에서 해임되었다.
1962년 과학원 조선어 및 조선문학연구소 소장, 1966년 조국전선 중앙위 의장에 선출되었다. 1966년 이후 본격화된 북한 언어 규범화운동인 문화어운동을 주도하였고, 논문으로 〈조선어조 연구〉 등을 남겼다. 1970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1972년 양강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주요 저서에 《실험도해 조선어 음성학》이 있다. 1978년 사망했다.
사후
일제강점기때부터 시작해서 오랜 기간의 교수 및 연구활동을 통하여 한국어 발전과 과학적 해명에 큰 공을 세웠다. 이런 공로로 살아생전 1973년 북한 정부로부터 과학원 및 사회과학원의 원사(1973년)이며 박사학위(1970년)를 받았다. 사후 조국통일상과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6]
대한민국에서는 그가 '월북자'였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학계 관심이 멀어졌었다. 그러나, 최근 이극로가 1920년대 외국(독일)에서 유학했을 시절 한글을 보급하는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다시 재조명을 받아 주목받고 있다.
일화
대한민국의 안과의사인 공병우의 세벌식과도 약간 관련이 있는데, 이극로가 눈병으로 공병우가 운영하는 병원에 찾아왔었다고 한다. 여기서 공병우는 한글학자 이극로에 대한 열정에 자극을 받아 공병우는 본격적으로 한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기타
이극로는 '좌익'계열 인물이 아닌 중도우파 성향의 노선을 견지했던 한글학자였다.는 시각도 있다.
이극로는 1940년대 조선어학회(한글학회)의 대표로 2019년도 영화<말모이>의 주인공 류정환(윤계상)의 실제 모델이 되었던 인물이다.
논문 및 저서
논문
〈조선어 어음의 된소리 음리에 대한 과학적 천명〉(1928)
〈훈민정음의 독특한 음성 관찰〉(1932)
〈'·'의 음가에 대하여〉(1937)
〈조선말 역점연구〉(1957)
[Sources Wikipedia]
책소개
빼앗으려는 일제와 사수하려는 조선어학회의 치열한 두뇌싸움,
그리고 끝내 법정에 선 한글의 운명을 다룬 역사 버라이어티
어느 날 갑자기 매일 말하고 듣고 썼던 우리말을 빼앗긴다면? 한국어를 쓰면 위법이고, 영어나 중국어, 일본어를 써야 한다면 어찌해야 할까? 한국인의 모어는 한국어이고, 고유문자는 한글이다. 당연히 한국어 금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런 시대가 있었다. 『나라말이 사라진 날』은 지금, 우리가 너무도 당연히 쓰고 있는 우리말글, 이것이 당연해지기까지…… 사명으로 다듬고, 피땀으로 지킨 사람들의 이야기다. ‘우리말글 지킴이’로 유명한 방송인 출신의 역사학자 정재환은 이 책을 통해 일제 치하에서 우리말글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조선어학회의 활동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으로서의 한글운동을 살펴본다.
책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1장에서는 처음 훈민정음이 창제되고, 그것이 ‘한글’이란 이름을 얻기까지 우리글의 탄생 과정을 추적하는 동시에, 일제에 나라말을 빼앗기게 된 상황을 살펴본다. 2장에서는 일제의 동화정책에 맞서 우리말글을 지키기 위해 사전을 편찬하고, 민족어 3대 규범을 만든 조선어학회의 활동에 집중한다. 3장에서는 민족주의자를 일망타진하겠다는 일제의 야심으로 빚어진 조선어학회사건의 전모를 파헤친다. 4장에서는 해방 이후, 비로소 열린 한글의 시대를 조명하며, 학회가 사전 편찬을 시작한 지 28년 만에 이룩한 감격적인 쾌거 『큰사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흔히 독립운동 하면 만세시위나 임시정부 등을 떠올리지만, 민족어를 지키고자 했던 노력 또한 독립운동이었다. 조선어학회사건을 되짚는 일은 또 다른 형태의 독립운동과 마주하는 경험이자, 우리말글이 만들어지고 성장해온 과정을 목격하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목차
1장. 나라말이 사라졌다
‘혼용’이냐 ‘전용’이냐, 문자 전쟁의 시작
450년 만에 이루어진 세종의 꿈
그런데, 그 나라말이 사라졌다
스승의 죽음과 한글의 탄생
2장. 언어와 겨레의 운명은 하나! 나라말을 지켜라
조선어사전을 펴내라! 말모이 대작전
조선어의 근대화, 민족어 3대 규범을 만들다
몸은 빈궁해도, 마음은 가난하지 않았던 사람들
3장. 일제의 조선어학회 죽이기
‘노력하라. 인생은 힘쓰는 자의 것이다’
조선어학회의 운명을 가른 한 줄
민족주의자를 일망타진하겠다는 일제의 야심, ‘조선어학회사건’
고문기술자들과 사라진 인권
한글, 법정에 서다
4장. 해방 이후, 한글의 시대를 열다
새 나라와 새 사회, 새로운 출발
한글의 시대를 열다, 그리고
28년 만에 이룩한 감격적인 쾌거, 『큰사전』
나가며. 만약 우리에게 조선어학회가 없었다면
책 속으로
--- 「‘쟁여놓은 포대’처럼 무서운 힘」 중에서
이극로는 오로지 뜻과 굳은 의지로 살아왔다. 시련과 고난은 극복의 대상일 뿐이었다. 이극로의 호는 온 백성이 골고루 잘 사는 정의로운 세상을 꿈꾼다는 뜻의 ‘고루’였지만, 사람들은 그를 ‘물불’이라고도 불렀다. 하고 싶은 일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실행하는 열정의 화신인 그에게 안성맞춤인 별명이었다. 백절불굴의 사나이 이극로가 사전 편찬의 꿈을 품고 조선어연구회에 들어갔으니, 연구회의 활동은 비단 연구나 저술에만 머무를 수 없었다. 훈민정음 반포 483주년에 해당하는 1929년 10월 31일 오후 7시, 조선교육협회에서 열린 한글날 기념식에서 연구회가 중심이 되어 사회 각계 인사 108인이 참여한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직되었다.
--- 「‘백절불굴의 사나이’ 이극로의 꿈」 중에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사전 편찬 작업이 해를 거듭하면서, 편찬원들의 몸과 마음은 형사에게 쫓기는 도망자처럼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 편찬실 입구에는 ‘일 없는 사람은 들어오지 마시고 이야기는 간단히 하시오’라는 문구를 붙여 불필요한 출입자를 제한할 정도였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온갖 자료 더미와 원고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이들의 모습은 엄숙?경건하다 못해 비장미마저 내뿜고 있었다.
--- 「일 없는 사람 출입 금지, ‘화동1 29번지’」 중에서
‘말모이 작전’은 조선어학회가 주도했지만, 전 조선인들이 참여한 민족적인 사업이었다. 학회는 사전 편찬의 열망을 이루기 위해 낱말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방언을 모았고, 체계적으로 어휘를 분류하고 정리했다. 방언은 표준어와 구분되어 ‘사투리’라고 불리면서 놀림을 받기도 했지만, 5천 년 민족의 정이 담긴 말이었고, 표준어와 다름없는 어엿한 조선어였다. 학회의 방언 수집에 전국의 교사와 학생들이 일심동체가 되어 움직인 것은, 일본의 조선어 말살 정책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민족의 혼이 담긴 민족의 언어를 지키기 위한 언어 수호 투쟁이었다.
--- 「민족의 혼을 지키기 위한 언어 수호 투쟁」 중에서
처음 홍원에 갇혀 있는 동안 최현배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굶주림과 추위, 병고와 고독, 모욕과 박해 속에서 정신과 육체가 피폐해졌다. 그러나 그는 ‘뉘우치지도 실망하지도’ 않았다. 무슨 의미일까? 최현배는 스승의 뜻을 좇아 한글 연구와 한글운동, 조선어사전 편찬에 전념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영어의 몸이 되었다. 형언할 수 없는 옥살이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자신이 한 일을 후회하지도, 갇힌 몸이 된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지도 않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라고 하지만, 때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감방에는 책도 없고 종이도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최현배는 학문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고, 오랜 숙제인 가로쓰기안 연구에 착수했다. 손바닥에 쓰고 살갗에 그리고 이불에 쓰고, 천장에 그리기를 반복했다. 함흥으로 이감된 후에도 밤낮으로 쓰고 그리기를 거듭한 끝에 드디어 가로쓰기안을 완성했다.
출판사 리뷰
빼앗으려는 일제와 사수하려는 조선어학회의 치열한 두뇌싸움,
그리고 끝내 법정에 선 한글의 운명을 다룬 역사 버라이어티
2020년 10월 9일은 574번째 맞이하는 한글날이다. 한글의 창제와 반포를 기념하고 그 우수성을 기리고자 제정된 국경일, ‘한글’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그것을 만든 사람과 반포일, 글자를 만든 원리까지 알고 있는 문자이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도 등재된 위대한 문화유산이다.
그런데 이 소중한 ‘한글’이 사라졌던, 아니 빼앗겼던 시대가 있었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있었다. 단말마의 비명조차 토해내지 못한 채 대한제국은 소멸했다. 일제는 강력한 동화정책을 시행했다. 조선인을 천황의 신민으로 만드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조선의 정체성은 소멸되어야 할 대상이었고, 조선어와 조선 글자는 반드시 사라져야 할 조선 역사와 문화의 정수였다.
조선이란 존재 자체가 위협받던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는 우리말글 연구와 조선어사전 만들기에 전념했다. 금지된 것, 없애려는 것을 살리고 지키려는 행위는 저항이자 투쟁이었고, 일본의 국시 위반 행위였다.
조선총독부의 사찰과 회유, 압박과 통제가 이어졌지만, 학회의 활동은 흔들림 없이 지속되었다. 학회는 1929년 조선어사전 편찬을 시작해 1940년까지 「한글 마춤법 통일안」,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등 ‘민족어 3대 규범’을 제정하며 조선 어문의 근대화를 이룩했다.
과연 사전을 편찬함으로써 독립을 이룰 수 있을까?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독립군이 대승을 거두고, 목숨을 던져 의열단 투쟁을 전개하고, 도쿄에서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고, 홍커우공원에서 일본군 수뇌와 정치인들을 폭살했지만 조선 땅에서 일제를 몰아내지는 못했다. 그런데 조선어를 정리하고 통일하고 사전을 만들어서 독립한다고? 애당초 번지수가 틀렸다고 할 수도 있지만, 조선어학회 회원 중 한 명인 이윤재는 사전 편찬실을 찾아오는 젊은이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했다.
“말과 글은 민족과 운명을 같이한다. 일본이 조선의 글과 말을 없애 동화정책을 쓰고 있으니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글과 우리말을 아끼고 다듬어 길이 후세에 전해야 한다. 말과 글이 없어져 민족이 없어진 가까운 예로 만주족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우리의 말과 글에 대한 글을 써두고 조선어사전을 편찬해두면, 불행한 일이 있더라도 후세에 이것을 근거하여 제 글과 말을 찾아 되살아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민족의 말과 글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나라를 사랑하는 길이 되고 민족운동이 되는 것이야.”
“그때, 그들에게 한글은 ‘목숨’이었다”
독립운동으로서의 한글운동,
그리고 한글의 탄생과 발달, 진화 과정을 추적하다
조선어학회는 어문운동을 통해 조선의 독립을 꿈꾸었다. 학술 단체였기에 사전을 편찬하고 민족어 3대 규범을 마련하고, 잡지 『한글』을 발행하면서도 일제의 탄압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는 국면에서 일본은 다급했다. 완벽한 동화의 실현을 위해 조선적인 것은 모조리 박멸해야 하는 상황에서 조선 민족의 정수인 조선어를 지키는 학회를 일망타진하고자 했다.
그렇게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이 터졌다.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줄줄이 잡혀가면서 사전 편찬은 중단되었고, 잡지 『한글』도 발행할 수 없었다. 수난자들은 고문과 불법적인 사법행정으로 2년 넘게 생지옥을 경험해야 했다. 하지만 회원 중 2명이 옥중에서 사망하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회원들은 조선어에 대한 사명과 열정을 놓지 않았다. 최현배가 가로쓰기를 완성한 것 역시 옥중에서였다.
감방에는 책도 없고 종이도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최현배는 학문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고, 오랜 숙제인 가로쓰기안 연구에 착수했다. 손바닥에 쓰고 살갗에 그리고 이불에 쓰고, 천장에 그리기를 반복한 끝에 드디어 가로쓰기안을 완성했다. 하지만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만일 내가 끝내 옥에서 나가지 못한다면, 과연 가로쓰기안이 세상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달될 수 있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던 그 앞에 천우신조처럼 나타난 것은 같은 방을 쓰게 된 젊은 청년 둘이었다. 최현배는 생각했다.
‘내가 옥에서 죽더라도 이들은 살아 나갈 수 있을 거야! 그래, 이들에게 가로쓰기안을 가르치자!’
서울의 한 음식점에서 1932년부터 1936년 사이에 사용하던 ‘금서집’이란 방명록에 ‘한글이 목숨’이라는 최현배의 친필 휘호가 남아 있다. 날짜가 없어 정확히 언제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글 마춤법 통일안」 제정을 전후해 활발히 전개되던 한글 강습회가 조선총독부에 의해 폐지되는 것을 보면서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로 한글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민족과 한글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있다’는 절박감에서 최현배는 마지막 희망의 끈을 붙잡는 심정으로 ‘한글이 목숨’이라 썼을 것이다.
그랬다. 그때 그들에게 한글은 목숨이었다.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목숨 같은 한글을 지키고자 피땀을 흘렸고, 해방 이후 비로소 한글의 시대를 열 수 있었다. 35년간 강요된 일본어와 일제 교육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국어 교육의 기틀을 신속하게 마련하도록, 한글 교과서를 만들고, 한글 강습회를 열었으며, 한글전용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1947년 10월 9일, 『조선말 큰사전』 1권을 출간했다. 1957년 6권으로 완간된 『큰사전』은 우리말을 우리말로 풀이한 본격적인 조선어사전이었고, 일제의 조선어 억압 정책에 맞서 조선어를 수호하고 보전하고자 한 민족정신의 산물이었다. 『큰사전』 완간은 자기 나라 말을 풀이한 사전 한 권조차 없다는 문화적 수치를 씻고 민족갱생의 첩경을 닦고자 1929년 사전 편찬에 착수한 지 무려 28년 만에 온갖 시련과 난관을 극복하고 이룬 감격적인 쾌거였다.
지금, 우리가 너무도 당연히 쓰고 있는 우리말글,
이것이 당연해지기까지……
사명으로 다듬고, 피땀으로 지킨 사람들이 있었다
이렇듯 『나라말이 사라진 날』은 지금, 우리가 너무도 당연히 쓰고 있는 우리말글, 이것이 당연해지기까지…… 사명으로 다듬고, 피땀으로 지킨 사람들의 이야기다. ‘우리말글 지킴이’로 유명한 방송인 출신의 역사학자 정재환은 이 책을 통해 일제 치하에서 우리말글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조선어학회의 활동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으로서의 한글운동을 살펴본다.
책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1장에서는 처음 훈민정음이 창제되고, 그것이 ‘한글’이란 이름을 얻기까지 우리글의 탄생 과정을 추적하는 동시에 일제에 나라말을 빼앗기게 된 상황을 살펴본다. 2장에서는 일제의 동화정책에 맞서 우리말글을 지키기 위해 사전을 편찬하고, 민족어 3대 규범을 만든 조선어학회의 활동에 집중한다. 3장에서는 민족주의자를 일망타진하겠다는 일제의 야심으로 빚어진 조선어학회사건의 전모를 파헤친다. 4장에서는 해방 이후, 비로소 열린 한글의 시대를 조명하며, 조선어학회가 사전 편찬을 시작한 지 28년 만에 이룩한 감격적인 쾌거 『큰사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흔히 독립운동 하면 만세시위나 임시정부 등을 떠올리지만, 민족어를 지키고자 했던 노력 또한 독립운동이었다. 조선어학회사건을 되짚는 일은 또 다른 형태의 독립운동과 마주하는 경험이자, 우리말글이 만들어지고 성장해온 과정을 목격하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조선어학회사건은 교과서에도 나오는 중요한 사건이지만, 사건의 전모는 역사나 언어에 관심 있는 소수만이 알고 있는 형편이다. 언어는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이루는 기초이자 토대다. 사람의 뿌리다. 그 뿌리가 짓밟혔던 치욕스러운 과거, 그리고 그 뿌리를 되살리고자 끈질기게 버티고 싸웠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르고서야, 어찌 뿌리에 기대 열매를 맺고 꽃을 피우는 일이 가능할까.” - 본문 중에서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1538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
책소개
목차
글머리에
제1장 해방 : 망국의 책임을 묻지 않는 역사
제2장 제2차 세계대전 전시 회담 : 4대국 영수들의 꿈과 좌절
제3장 한반도 분단의 결정 과정 : 3성조정위원회의 젊은 장교들
제4장 신탁 통치 파동 : 돌아오지 않는 다리
제5장 중도파의 비극적 운명 : 송진우
제6장 장덕수의 소설 같은 삶
제7장 미소공동위원회 : 하지 장군의 꿈과 야망
제8장 여운형과 김규식의 꿈과 좌절(1) : 일제 시대와 해방정국
제9장 여운형과 김규식의 꿈과 좌절(2) : 좌우합작의 희생자들
제10장 이승만과 김구의 만남과 헤어짐(1) : 은원의 30년, 임시정부
제11장 이승만과 김구의 만남과 헤어짐(2) : 단독 정부를 둘러싼 갈등
제12장 백관수 : 한 애국자의 얼룩진 삶
제13장 친일 논쟁 : 그 떨쳐야 할 업장
제14장 박헌영 : 한 공산주의자의 사랑과 야망
제15장 김일성 신화의 진실(1) : 청년 마르크시스트의 탄생
제16장 세 번의 비극(1) : 대구 사건
제17장 남북협상(1) : 김구와 김일성의 다른 계산
제18장 남북협상(2) : 돌아오지 않은 사람, 홍명희
제19장 남북협상(3) : 돌아오지 않은 사람, 백남운과 이극로
제20장 한숨 돌려 잠시 쉬어가는 이야기
제21장 세 번의 비극(2) : 제주 4·3 사건
제22장 세 번의 비극(3) : 여수·순천 사건
제23장 김일성 신화의 진실(2) : 한국전쟁
제24장 한국전쟁의 미스터리 : 미국의 함정이었나?
제25장 맥아더 : “미국의 시저”
제26장 자식을 가슴에 묻은 모택동
제27장 휴전 회담(1) : 후회하지 않는 전쟁은 없다
제28장 휴전 회담(2) : 밀사들의 막전 막후
제29장 휴전 회담(3) : 북방한계선(NLL)의 실체
제30장 죽산 조봉암의 해원
제31장 통일 논의를 둘러싼 허구들
제32장 무엇이 통일을 가로막는가?
책 속으로
--- p.80~81
지금 일부 김구를 숭모하는 사람은 “이승만이 김구를 죽였다”고 내놓고 말하고 있고, 이에 질세라 이승만 측에서는 “김구가 장덕수와 여운형을 죽인 것”으로 믿고 있다. 이 진실을 밝히기는 그리 쉽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암살의 배후란 본디 희미하며, 이와 같은 갈등과 마찰이 서로에게는 상처를 주며 누군가에겐 기쁨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덮어야 한다.
--- p.90
격동기의 정치적 양상은 “질주”이다. 그것이 오른쪽으로 치닫든 왼쪽으로 치닫든, 격정의 소음 속에서 민중에게 호소하려면 먼저 크게 외칠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도 사태를 관망하며, 야심을 버리지 않고 처신을 조심하는 무리가 있는데, 해방정국에서 그들을 중도파라 부른다. 온건파(Moderate)라는 용어는 들어봤지만, 중도파(Middle-of-the-Road)라는 용어에 생소했던 미군정은 저들이 “왔다 갔다 하는 무리”(wobbler)인가 의심하면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우선 미국인들이 보기에 저들이 “뻘갱이”(pinko)인지 “퍼랭이”(blue)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낮에 보면 퍼랭이 같고 밤에 보면 뻘갱이 같기도 하고, 그 반대이기도 했다.
--- p.115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과 김구가 갈등하게 된 첫 번째 사건은 통속적이게도 돈 문제였다. 이승만이 상해에서 대통령의 직무를 수행한 3개월 동안 임정이 그에게 가장 기대했던 것은 독립운동 자금의 문제였다. 이승만도 그 문제에 관해서는 책임질 수 있다는 언질을 주었다. 하와이 교포와 미국 동부 교포들의 헌금이 있었으나 “푼돈” 정도에 그쳤고, 이승만 자신도 생활이 여유롭지 않았다.(서재필의 증언) 그가 임정을 도와준 것은 공식적으로 200달러가 전부였다. 구매력을 기준으로 볼 때 그때의 1달러는 지금의 한화 2만 원 정도이다. 이것은 이승만이 임정을 홀대해서가 아니라 실은 그 자신도 어려운 삶을 살고 있어 임정을 재정적으로 도와줄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 p.141~142
김일성의 가짜 논쟁에 관한 나의 논문이 발표된 다음 나는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나의 글을 읽는 독자의 소감에는 “아슬아슬하다”는 평가가 많은데 드디어 사고가 났다. 곧 “김일성은 가짜라고 일관되게 주장한 성균관대학교 이명영 교수는 중앙정보부 요원이었다”는 구절이 필화(筆禍)가 되었다. 정확히 말해서 이명영이 중앙정보부 요원이 아니었는데 일부 항간에서 오고 가던 이야기와 인터넷에 오르내리던 이야기를 확인하지 않고 쓴 것이 나의 실수였다. 유족의 입장에서 볼 때 선대가 중앙정보부의 요원이었다는 기록에 불쾌감을 느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이 사자명예훼손죄에 해당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몹시 당황했다.
--- p.246
일본이 전후 복구에 몰두하고 있는 가운데 1950년 6월 25일에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개전의 보고가 태평양사령부에 전달되었을 때 맥아더의 부관들은 잠자는 그를 깨우지도 않았다. 전투는 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M. Higgins, 1951, p. 15) 6월 29일 아침, 그는 수원(오산) 비행장에 도착하여 곧 한강 남쪽 연안에서 전선을 살펴보았다. 그러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한국이 공산화되면 일본은 어찌 되나?”(“And what of Japan?” Reminiscences, p. 333)
--- p.395
남북한의 통일이 지연되는 것은 냉전의 잔재나 열강의 이해관계나 이념의 이질성 때문이 아니라 남북한 지배 계급의 의지박약과 이해관계의 상충 그리고 부패와 공의롭지 않은 경제 구조 때문이다. 부패한 정권이 통일을 이룩한 역사적 사례가 없다. 그러므로 정치와 경제가 이토록 부패한 상황에서 통일은 쉽게 오지는 않을 것이다. 역사가 가르쳐주는 교훈에 따르면, 국가사는 대체로 500년 동안의 통일 시대를 지속한 다음 100년의 분열의 시기를 겪었다. 바꿔 말해서 한국의 분단은 100년 정도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통일은 “문득” 찾아올 가능성도 있다. 이는 체제 경쟁에서 남한의 승리나 북한의 붕괴에 의한 통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우발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출판사 리뷰
비통하고도 찬란한 역사의 거울을 다시금 비춰주는 책!
본 도서의 제목자로 쓰인 해방정국解防政局은 한국 현대사에서 이념 대림이 가장 극심했던 시기다. 한국사에서는 보통 이 시기를 현대사로 간주한다. 저자는 책을 통해 대한민국의 미군정 기간(1945~1948)은 사실상 1907년부터 1910년까지의 일본의 통감(統監) 정치보다 더 자유롭거나 주권적인 국가가 아니었다고 설명한다. 4대 강국의 `해방을 시켜주지만, 독립을 시키지 않는다`는 확고한 정책 하에서 한국은 미국의 준식민지로 불리었다. 그러다 대한민국이 수립되었으나 곧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3개월 정도 `공화국 군대` 가 지배하던 시대를 맞이했고, 이는 중공군이 참전했다 물러난 `겨울 피난`(1·4후퇴)이 끝난 1952년 3월까지 계속되었다. 다시 대한민국은 주권을 찾았으나, 그 과정에서 일본, 미군정, 대한민국, 이른바 인민공화국(북한), 미8군 사령관(UN군 사령관)을 거쳐 다시 대한민국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었다. 통치권자가 여섯 번은 바뀐 셈인데, 저자는 현대사에 이렇게 팔자가 드센 세대가 일찍이 없었으며, 이 기간에 겪은 10년의 세월은 누구에게나 소설이었고, 밤새 이야기를 해도 쉬이 끝내기 어려운 한국전쟁의 전말이라 이야기한다.
현재 팔순을 훌쩍 넘긴 저자는 지금껏 강의나 연구서에서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이 책을 통해 비로소 풀어놓는다. 저자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은 결국 사람이 저지른 업보였고, 그 가운데 일부만을 우발이론(contingency theory)으로 메꿀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격동의 시대에 이념, 체제, 강대국의 입김이 세태를 좌지우지했을 수 있지만, 어느 시대이든 사람이 독립 변수였기에, 이 책은 바로 그 사람, 현대사의 주요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최근 세간의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이승만 대통령과 건국 1세대들의 희생과 투쟁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2024) 을 본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그 당시의 생생한 상황과 이승만 대통령, 김구 등 당시 건국 1세대 인물들에 대한 저자 특유의 분석을 엿볼 수도 있다. 저자는 책을 통해 이승만과 김구는 현실 인식에서도 많은 차이를 보였다고 지적한다. 김구는 민중적인 지지 기반이 취약해 민중 봉기나 지지에 대한 국가 건설이 당초 불가능하다는 점을 파악하고, 윤봉길이나 이봉창 의사처럼 순교자적 희생정신으로 무장된 개별적 테러리스트에 의한 효과에 대한 기대감이 그를 테러리즘에 몰두하게 했다고도 전한다. 이는 김구를 숭모하는 무리에게는 반발을 살 수도 있는 분석이나, 저자는 테러리즘에 대한 학술적인 정의는 ‘자금이나 훈련이 부족해 조직적인 투쟁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중략) 순교자적 우국심으로 무장된 개별적 투사가 적군에게 무장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중략) 적군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투쟁 방법‘을 뜻한다고 전한다. 또한 한국 독립운동사를 전공하는 학자들은 이를 ’의열 투쟁’이라고도 일컫는데, 본질적으로 테러리즘과 큰 차이가 있지는 않다는 흥미로운 의견도 덧붙이고 있다.
영화 ‘건국전쟁’(2024)에는 “이승만이 민주주의자였기 때문에 혁명이 일어났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저자는 이에 대해 역사의 평가가 그렇게 바뀐다면, 수유리에 묻힌 150명의 영혼은 누가 위로할 수 있을까? 라며 반문한다. 역사에는 모든 정치인이 과오와 공덕을 함께 이루었으나, 그렇다고 공덕이 과오를 덮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저자는 무엇보다 지금 와서 이승만이나 김구의 숭모자들이 해야 할 일은 누구의 죄를 묻기보다는 양쪽 후손들이 먼저 화해하고 좌익에 대해 항거하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승만과 김구의 기일에 서로 초대장을 보내고, 그 답례로 조화를 들고 찾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것이 저자의 소망이다.
십수 년 전, 매체 사이에서도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화제작,
2025년 광복 80주년을 앞두고 새롭게 출간되다
이 책은 본래 2015년에 광복 70주년을 맞아 『주간조선』에 연재되던 글을 엮어 2017년에 1판이 출간되었으며, 본판은 절판 상태였는데 이번에 중앙북스에서 새롭게 출간됐다. 저자는 연재를 진행하던 당시 좌우익 모두로부터 십자포화를 맞았다고 전한다. 우익들은 저자를 빨갱이라고 몰아붙였고, 좌익들은 보수 신문에 기생(寄生)한다고 댓글을 달았다. 대구 사건과 여순 사건, 제주 4·3사건, 그리고 김일성(金日成)의 항일 투쟁과 가짜 논쟁의 진위와 같은 민감한 문제를 다룰 무렵 『주간조선』 데스크로부터 저자의 글이 『조선일보』의 입장과는 달리 다소 좌경의 색채를 보이고 있으니 용어들을 수정해 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했다. 결국 연재는 끝을 보지 못하고 17회로 마감됐다.
2025년은 곧 해방 80주년을 맞는 해이다. 2025년을 앞두고 저자는 논란이 많았던 원고를 새롭게 더중앙플러스에서 온라인상으로 연재하고, 또 책을 다시 펴낼 기회를 얻게 됐다. 이 책은 역사학의 주류 논쟁에서 조금 비켜 서서 교과서나 연구서 또는 강의실에서 말할 수 없었던 해방정국의 모습을 담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이 해방정국의 공부에 몰두하는 것은 대단한 고뇌의 결과도 아니고 이념의 경도나 편들기도 아니며, 그저 담담하고 소박한 소망, 곧 왜 해방정국은 파열했는가에 관한 질문일 뿐이라 이야기한다. 한국 5,000년 역사에서 망국과 일제, 해방 그리고 한국전쟁과 지금의 암울한 현실의 밑바닥에는 분단이라는 업장(karma)이 깔려 있다고 확신하기에 염력(念力)도 없이 이 화두를 잡고 몇십 년을 보냈다고 한다. 저자는 해방과 분단 80년을 앞둔 현재의 상황에서 그 시대를 돌아보는 것은 그때나 이제나 역사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고, 그래서 그저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고치려는 소망‘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전한다. 저자의 바람처럼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해방정국 시기를 제대로 돌아보며, 대한민국의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로서 진정한 역사적 의미를 나름대로 찾게 될 것이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21130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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