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한국근대사 [역사지식여행]/3.일제시대 (1910~1945)

[웹북] 09월 01일 (1923 일본관동대지진)

동방박사님 2024. 9. 1. 0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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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 통감부,기관지 경성일보발간 / 1923 조선철도주식회사 설립 / 1923 일본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 1937  일제보통학교의 조선어 과목페지 / 1955 전국인구조사 실시 /1963 노동청 철도청 발족 / 1975 여의도 국회의사당 준공 /1981 서울 지하철공사 발족 / 1983, KAL007편 소련기에 피격 (탑승자 269면 전원사망) / 1986 외국산 담배 국내판매 개시 / 1989 과천 경매장 개장 / 1994 지하철 분당선 개통 / 1995 브라질과 범죄인 인도협정 - 투자보험협정체결

간토 대지진 / 1923년에 일어난 대지진

일본의 첫 번째 서양식 고층건물 료운카쿠가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

간토 대지진

본진

UTC 시각 1923-09-01 02:58:35 / ISC 지진번호 911526 / USGS-ANSS ComCat / 현지일 192391일 / 현지시간 오전 1158(일본 표준시) / 지속시간 48(첫 지진만) / 4에서 10분 이상(지진 시작부터 진동 끝까지) / 규모 모멘트 규모 Mw 7.9 / - 8.2 / 일본 기상청 규모 Mj7.9 - 8.1 / 표면파 규모 Ms8.2 - 8.3 / 최대 진도 일본 기상청 진도 계급 진도 6 : 일본 도쿄부 도쿄시 / 진원 깊이 0-10km,25 km / 진앙 일본 야마나시현 동부, 가나가와현 서부, 사가미만 등 / 종류 해구형지진 / 우향 주향성분이 포함된 충상단층

여진

횟수 규모 M7 이상 6

피해

피해 지역 일본 제국 일본 제국 / 피해액 45억 엔 /지진해일 시즈오카현 다가타군 아타미정 최대 12m / 산사태 네부카와역 인근에서 대규모 산사태 (네부카와역 열차 전락 사고) / 사상자 105,385142,800

간토 대지진(일본어: 関東大地震 간토다이지신) 또는 한국에서는 관동 대지진192391(다이쇼 12) 1158(일본 표준시)에 일본 도쿄도 등을 포함한 미나미칸토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해구형 지진이다. 지진의 진동은 본진이 시작될 때부터 완전히 멈출 때까지 4분에서 최대 10분까지 걸린 오래 지속된 지진이다. 이 지진으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 및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적인 간토 대학살등을 통틀어 간토 대진재(일본어: 関東大震災 かんとうだいしんさい)라고 부른다.

1703(겐로쿠 16)에 일어난 지진도 간토 대지진과 거의 비슷한 구조로 일어났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이 지진을 다이쇼 간토 지진(일본어: 大正関東地震)으로 부르고 1703년 간토 지진을 겐로쿠 간토 지진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 이 두 지진은 사가미 해곡의 판 경계를 따라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두 지진을 한데 묶어 사가미 해곡 거대지진으로 부르며 간단하게 사가미 해곡에서 일어나는 지진을 총칭하여 간토지진으로 묶어 부르기도 한다.

개요

2004년 지진조사위원회가 가정한 1923년 간토 지진(빨간 실선), 겐로쿠 지진(빨간 점선)의 추정 진원 영역.

도쿄부 혼고구의 도쿄제국대학 지진교실 안에 있던 지진계에 관측된 동서방향의 지진파형이다. 매우 큰 흔들림 때문에 지진계가 측정할 수 있는 한계 끝까지 바늘이 흔들렸다.

1971년 가나모리 히로가 발표한 지진 매커니즘에 따르면 간토 대지진은 미우라반도 연장선 방향의 사가미 해곡의 주축에 평행한 우향 낮은 섭입 각도의 역단층으로 일어난 지진으로 추정된다. 1996년 다케무라 마사유키도 P파의 초동분포를 통해 진원 매커니즘을 분석하여 가나모리가 말한 대로 필리핀해판의 섭입 방향으로 추정되는 북동동 방향으로 34도 정도 경사진 경사면이 단층면으로 추정되며 옆으로 어긋난 성분이 많다고 추정하였으나 다른 가설들도 많아 이것이 확실한 것은 아니다. 일본 지진조사위원회에서는 필리핀해판이 침강하는 판 경계간 지역에서 북아메리카판이 끌려 내려가다 반대로 튕겨 올라가면서 일어난 지진으로 보고 있다. 반면 필리핀해판의 혼슈 쪽 판 사이 경계 지점은 지질학적으로 제니스 부근에 있으며, 지질학적 시간 척도에서 스루가 해곡에서 일어날 것으로 추정되는 도카이 지진을 볼 때 간토 대지진은 판 내부에서 일어난 지진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지각변동을 통한 추정으로는 진원단층이 쇼난 지역 내륙 안쪽까지 있다고 추정되며 지진의 진동은 오다와라 지역이 제일 심했다. 도쿄도에서 진도6을 관측했으나 이 간토 대지진을 마지막으로 2000년 미야케섬 화산 분화로 인한 지진을 제외하고는 도쿄도에서 진도6 이상을 지진을 관측한 적이 없다.

지진의 전조

지진 예측

간토 대지진이 발생하기 전인 1905, 도쿄제국대학 교수 오모리 후사키치와 이마무라 아키쓰네 사이에 다음과 같은 논쟁이 있었다. 이마무라 교수는 잡지 태양에 도쿄 남쪽의 사가미만에서 50년 안에 대지진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측했고, 사설을 통해 도쿄 전역은 대지진과 그로 인한 화재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마무라의 예측은 명확한 근거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잡지 기고가 선정적으로 보도되었기 때문에 다른 학자들의 신뢰를 얻는 데에 실패했다. 특히 여러 번 지진 예측에 성공한 세계적인 지진학자였던 오모리 교수는 이 예측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 오모리 교수는 정기적인 소규모의 지진 발생은 단층의 지진응력을 해소하여 지진의 위험성을 줄인다는 가설을 내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간토 대지진 발생 직전까지도, 도쿄에서 1921년 말(M6.4-7.0 이바라키현 남부 지진), 1922년 중반(M6.8 가나가와현 동부 지진), 1923년 초(M6 이바라키현 해역 지진)에 주기적으로 지진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도쿄 지역에서의 대지진의 위험성이 해소되었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1923년 간토 대지진의 발생으로 오모리의 이러한 가설은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도쿄부   혼고구 의  도쿄제국대학  지진교실 안에 있던 지진계에 관측된 동서방향의 지진파형이다. 매우 큰 흔들림 때문에 지진계가 측정할 수 있는 한계 끝까지 바늘이 흔들렸다.

전진

아래는 간토 대지진 이전 전진으로 추정되는 지진이다.

2004년 지진조사위원회가 가정한 1923년 간토 지진(빨간 실선),  겐로쿠 지진 (빨간 점선)의 추정 진원 영역.

8년 전 :

1915(다이쇼 4) 11월 도쿄에서 유감지진이 과거 최다인 18회 이상 일어났다. 이후 지진이 진정되었으며 오모리-이마무라 간토 대지진 논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1-2년 전

1921년 규모 M7.0의 이바라키 남부 지진 발생.

1922년 규모 M6.8의 우라가 수도 지진 발생. 사상자 25.

2-3개월 전

19235-6월 이바라키현 동부에서 2-300회가 넘는 군발지진이 발생. 유감지진이 미토 73, 조시 64, 도쿄 17회 일어났다.

경과

본진은 1923(다이쇼 12) 91일 오전 115832초 간토 지방 남부를 진원으로 일어났다. 당시 지진학자인 이시모토 미시오는 도쿄 혼고구의 가속도가 대략 300gal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도쿄 요코하마의 야마노테에서 최대 가속도의 주기가 0.3초 정도였다고 추정한다.본진의 흔들림은 진원에서 약 9,000 km 떨어진 오스트리아 기상청에도 관측이 되었으며 오스트리아 기상청 측에서 재빨리 간토 대지진의 발생을 알렸다.

진앙

각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간토 대지진의 진앙 위치

간토 대지진의 진앙은 연구자마다 견해가 전부 다르다. 주된 설에는 다음이 있다.

사가미만 거의 중앙부가 진앙이라는 설

1924년 이마무라 아키노리 : 북위 34° 58.6동경 139° 21.8[13][39] (지도 Im)

1927년 허버트 터너 : 북위 35.0° 동경 139.5° (지도 Tu)

1979년 우쓰토 구지 : 북위 35.1° 동경 139.5° (震源域中心) (지도 Ut)

사가미만 북부가 진앙이라는 설

1928년 마쓰자와 다케오 : 북위 35° 16동경 139° 20 (지도 Ma)

1954년 베노 구텐베르크-찰스 릭터 : 북위 35° 1500동경 139° 3000 (지도 Gu)

1966년 우사미 다쓰오 : 북위 35.2° 동경 139.3° (지도 Us)

야마나시현 가와구치호 동쪽 4km가 진앙이라는 설 : 히라노 레스케가 주장 북위 35° 3003동경 138° 4807 (지도 Hi)

가나가와현 서부가 진앙이라는 설

1970년 가나모리 히로, 미야무라 셋조 : 북위 35.4° 동경 139.2° ±15km (지도 Ka)

1986년 하마다 노부오 : 북위 35° 2048동경 139° 0854 또한 가나모리와 미야무라는 진원 깊이를 대략 0-10km로 추정하였으나 하마다는 진원단층이 지표상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진원 깊이가 10km 미만일 수는 없으며 최소 25km 이상이라고 추정했다. (지도 Ha)

2015년 이과연표 기준 : 북위 35.33° 동경 139.13° 

규모

1951년 가와즈미 히로시는 간토 대지진의 규모를 M7.9로 추정했는데, 도쿄에서 진도가 대략 진도6이라고 했을 때 진앙과의 거리가 100km라고 가정해 계산한 값이었다. 1964년 쓰보이도 규모는 대략 M7.9라고 추정했으나 일본 국외 지역의 지진파형을 이용해 분석하면 규모 M8 이상이 타당하다고 주장했으며 표면파 규모는 대략 Ms8.2에서 Ms8.3까지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다케무라 마사유키, 이케무라 도모노리, 노자와 히로시(1999-2000)는 아키타, 센다이, 나가사키 등 7개 지역의 이마무라식 강진지진계 기록 데이터를 바탕으로 규모를 Mj8.1±0.2로 추정하였다. 하지만 원래 사용하였던 규모 M7.9도 오차 범위 안에 있으므로 타당한 값이라고 결론내렸다. 이 규모는 당시 관측기록에서 벗어나지 않은 완전한 기록을 바탕으로 추정한 것으로 일본 중앙방재회의 재해교훈계승에 관한 전문조사회 20067월 보고서(1923년 간토대진재보고서 제1)에 개재되어 있다.

1977년 가나모리 히로는 모멘트 규모를 Mw7.9, 2011년 나메가야는 Mw8.0으로 추정했다. 일본 중앙방재회의 수도직하지진모델 검토회에서는 간토 대지진의 모멘트 규모를 Mw8.2로 추정하였으며 이 규모가 지각 변동이나 쓰나미 높이를 잘 재현하였다고 발표하였다.

단층 모델

간토 대지진의 주요 학자들의 단층 모델.

간토 대지진의 단층 모델은 1971년 가나모리 및 여러 학자들이 가설을 내놓았으며 이들 가설 모두 우향으로 어긋난 낮은 섭입각의 역단층이 주성분이지만 관측 데이터가 충분하지 않아 확정적인 단층 모델을 얻고 있지 못하며 진원 또한 여러 곳인 것으로 추정되지만 데이터 부족으로 지진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1971년 가나모리 : 주향 290°, 경사각 34°, 미끄럼각 162°, 길이 130 km, 70 km, 미끄러진 길이 2.1 m

1971년 안도 : 주향 315°, 경사각 45°, 미끄럼각 153°, 길이 130 km, 65 km, 미끄러진 길이 6.7 m

1974년 안도 : 주향 315°, 경사각 30°, 미끄럼각 153°, 길이 85 km, 55 km, 미끄러진 길이 6.7 m

1980년 이시바시 : 주향 325°, 경사각 45°, 미끄럼각 160°, 길이 40 km, 40 km, 미끄러진 길이 7.0 m, 주향 325°, 경사각 35°, 미끄럼각 160°, 길이 45 km, 60 km, 미끄러진 길이 7.0 m, 주향 195°, 경사각 30°, 미끄럼각 60°, 길이 15 km, 30 km, 미끄러진 길이 6.0 m, 주향 195°, 경사각 30°, 미끄럼각 60°, 길이 15 km, 15 km, 미끄러진 길이 4.0 m 4개 단층

1980년 마쓰우라 : 주향 294°, 경사각 25°, 미끄럼각 140°, 길이 95 km, 54 km, 미끄러진 길이 4.8 m 1개 모델

지진의 다원성

1929년 이마무라는 지진파형을 분석하여 간토 대지진은 3개의 서로 다른 진원에서 일어난 지진이 합쳐진 다원지진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제1진원은 사가미만 중앙, 2진원은 단자와 산지 지역, 3진원은 사가미만 오다와라 지역으로 추정했다. 또한 육지측량부 정밀측량 결과 단층선 서부는 남쪽으로 내려가고 동부는 북쪽으로 내려가는 등 비국부적인 대지진으로 큰 지각변동이 보였다고 말했다.

북아메리카판과 필리핀해판이 서로 어긋나기 시작하고 40초에서 50초동안 단층파괴가 방사형으로 퍼지며 북쪽은 현재의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 지하 35km 지점, 남쪽으로는 현재의 지바현 다테야마시 지하 5km 지점까지, 동쪽으로는 보소반도 지역까지 총 동서 130 km, 남북 70 km 넓이의 암반층 단층이 평균 2.1 m 정도 움직였다.(1971년 가나모리 연구 기준)

1995년 다케무라는 이마무라식 2배강진지진계 해석이나 지진 체험담을 통해[64] 가장 강한 흔들림이 일어난 때는 단층파괴 시작 수 초 후 일어난 오다와라-하다노 직하지역의 단층파괴(1지진) 및 이로부터 약 10-15초 후 시작된 미우라반도 직하지역의 단층파괴(2지진)이고 간토 대지진은 다원지진이라고 주장하였다. 진원에서 가까운 지역은 지진계가 나타낼 수 있는 범위 끝까지 흔들려서 정확한 흔들림의 세기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지진 체험담을 토대로 흔들린 지역의 진도를 추정하여 구현한 결과이다.

1지진이 일어난 지역과 가까운 오다와라 지역은 흔들림이 시작된 직후 곧바로 상하 수평의 강한 흔들림이 덮쳤다가 10-20초간 약간 약해진 후 다시 강한 수평진동이 찾아왔다. 2지진이 일어난 지역과 가까운 가마쿠라 및 후지사와 지역은 첫 흔들림은 다소 약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강한 흔들림이 덮쳐 왔다고 전해진다. 도쿄부에서도 중앙기상대에서 지진을 관측한 지진학자 나카무라 사에몬타로는 지진의 주요동이 온 와중 흔들림의 방향이 남북에서 동서 방향으로 바뀌었다고 증언했다. 이렇듯 간토 대지진은 서로 다른 2개의 단층파괴가 합쳐져 있기 때문에 간토 대지진을 "이중지진"이나 "2개 지진의 조합"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간토 대지진의 일본 각지 진도

진도

일본 중앙기상대(현 일본 기상청)의 관측 기록에서는 최대 진도가 도쿄부에서 진도6이었으나 당시에는 진도7이라는 계급이 없었기 때문에 최고 등급인 진도6으로 측정한 것이고 피해 상황을 토대로 볼때 오다와라 등 사가미만 연안과 보소반도 남부에서 진도7급의 진동을 느꼈다고 추정하고 있다. 또한 도쿄 내에서도 스나초나 하네다 등 도쿄만 연안 지역과 미카와시마 등 내륙 일부 지역에서 진도7급의 진동이 있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아래는 간토 대지진 당시 일본 각지에서 진도를 느낀 지역이다.

진도 관측된 지역

6 구마가야, 도미사토, 도쿄 지요다 오오데마, 요코스카, 고후

5 우쓰노미야, 조시, 나가노, 이이다, 누마즈, 하마마쓰, 미야즈

4 후쿠시마, 미토, 쓰쿠바, 아시오, 마에바시, 마쓰모토, 후시키, 후쿠이, 나고야, 히코네, 오사카, 사카이시, 도쿠시마

3 이니마키, 하치조섬, 타가, 니가타, 가나자와, 고난, 와츠, 가시하라, 와카야마, 마츠야마, 구마모토

2 하코다테, 아키타, 야마가타, 교토, 도요오카, 오카야마, 히로시마

1 시오노, 미사키, 하마다

쓰나미

지진 수 분 후 태평양 연안 혼슈 지역에서 이즈 제도에 걸쳐 쓰나미가 몰아닥쳤다.

아타미에서는 지진 5-6분만에 물이 빠진지 얼마 되지 않아 제1파가 덮쳤고, 5-6분 후에 다시 높이 7-8 m 정도의 제2파가 덮쳤으며 일부 지역은 12 m에 달하는 쓰나미가 덮쳐 가옥 유실 피해 162, 사망자 및 실종자 92명의 피해가 일어났다. 또한 해안에서 200 m 안쪽 지역까지 지반 높이에서 대략 7m 정도가 침수되었다.

하쓰시마섬에서는 지진으로 섬이 융기하는 지각변동이 일어나 마을에 쓰나미가 덮치지 않았다. 항구 부근에서는 쓰나미 높이가 1.8 m 정도, 최대 높이임 섬 서부에서는 3 m를 기록하였다.

이토에서는 높이 9 m의 쓰나미가 덮쳐 해안에서 빈카이도 사이 마을이 거의 다 유실되었으며 우사미촌도 집이 111채가 유실되었다. 시모다정에서는 높이 2.5 m, 만 바깥쪽에서는 높이 4 m의 쓰나미가 덮쳤다.

가마쿠라는 지진 직후 2-300 m 정도 바닷물이 빠지다가 10분 후 제1파가 덮쳤고, 2파가 가장 높았는데 자이모쿠자에서는 5-6 m 높이의 쓰나미가 덮쳤다.

보소반도 이즈 지역의 쓰나미는 높지 않아 평균 2 m의 쓰나미가 덮쳤고 3 m 이상의 쓰나미가 덮친 곳은 적었지만 아이하마에서는 9 m 높이의 쓰나미가 덮쳐 주택 63채가 유실되었다. 다테야마 측후소 인근은 200 m 안쪽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최대 수심이 9 m 정도에 달했고 내습한 쓰나미 크기는 1.8 m였다.

소토보 연안은 겐로쿠 지진 당시 막대한 피해가 있었던 것과는 반대로 겐로쿠 시기에는 평균 7-10 m의 쓰나미가 덮쳤으나 간토 대지진 때에는 평균 2 m의 쓰나미가 덮쳤다.

도쿄만의 검조소 기록에서는 후카가와, 시바우라, 지바에서 1 m 정도의 쓰나미를 관측했으며 우치보 연안에서 도쿄만 안쪽으로 가는 쓰나미는 겐로쿠 지진때보다는 높이가 낮았다.

지각 변동

간토 대지진으로 인한 지각 변동 기록. 도쿄시가 편찬한 "THE RECONSTRUCTION OF TOKYO"의 기록이다. 빨간색이 짙을수록 융기량이 크고 파란색이 짙을수록 침강량이 크다.

간토 대지진으로 위에 있는 북아메리카판이 동남쪽 방향으로 필리핀해판 위에 올라타 보소반도 남쪽은 융기하였고 단자와 산지 등 내륙 지역은 침강하였다. 이 침강으로 단자와 산지 지역은 토석류 피해가 일어났다. 겐로쿠 지진 당시에도 지각 변동으로 보이는 기록이 있으며, 특히 보소반도에서는 간토 대지진, 겐로쿠 지진 및 이전의 지진 시기 융기하며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해안단구 지형이 발달하였는데 겐로쿠 지진으로 만들어진 단구의 높이는 다른 곳보다도 훨씬 높다. 보소 반도 가운데 진원에 가까운 남쪽이나 사가미만에 접하는 미우라반도 전역, 사가미만 북부 연안(현재의 에노섬 지역)에서 지반의 융기가 컸고 도쿄부 미나미카쓰시카군에서 지반 침하가 컸다. 각 융기나 침하량은 일본 육지측량부 및 해군수로부의 측량 기록을 토대로 추정하였다.

아래 표는 당시의 지각 변동 크기이다.

지역 융기/침강 융기/침강 높이

고코노에 융기 1.81m

호조 융기 1.57m

오이소 융기 1.81m

지가사키 융기 1.4m

하쓰시마섬 융기 1.8m

에노섬 융기 0.9m

구 히라이촌 침강 0.38m

스나마치 침강 0.27m

가메이도 침강 0.24m

여진

지진 직후 큰 규모의 여진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아래는 규모 M6.0이나 최대진도 4 이상을 기록한 여진을 기록했다.

91

120분 규모 불명 지진 - 누마즈 측후소에서 최대진도 5를 기록하였다.

121M7.2 도쿄만 북부 지진 - 도쿄 23구 및 가나가와현 동부의 요코하마-가와사키 지역에서 매우 강한 흔들림을 느꼈다.

123M7.3 가나가와현-야마나시현-시즈오카현 경계 지역 지진 - 가나가와현 서부, 시즈오카현 동부, 야마나시현에서 매우 강한 흔들림을 느꼈다.

127M6.0 이즈오섬 근해 지진, 최대진도 3

1211분 규모 불명 지진 - 사이타마현 북부 구마가야시에서 최대 진도 4를 기록하였다.

1211M5.6 이즈오섬 근해 지진, 최대진도 5

1217M6.4 이즈오섬 근해 지진, 최대진도 5

1223M6.5 사가미만 지진, 최대진도 5

1236M6.0 이바라키현 남부 지진, 최대진도 3

1240M6.5 사가미만 지진, 최대진도 3

1247M6.8 야마나시현 중서부 지진, 최대진도 5

1313M6.2 지바현 동남쪽 해역 지진, 최대진도 3

1320M6.2 이즈오섬 근해 지진, 최대진도 5

1331M6.1 시즈오카현 동부 지진, 최대진도 5

1422M6.6 시즈오카현 이즈 지방 지진, 최대진도 5

1519M6.3 이바라키현 해역 지진, 최대진도 3

1637M6.6 시즈오카현 동부 지진, 최대진도 5

170M4.3 가나가와현 서부 지진, 최대진도 5

2252M6.1 이즈오섬 근해 지진, 최대진도 4

92

34분 규모 불명 지진 - 야마나시현 고후시에서 최대진도 5를 기록하였다.

413M4.6 야마나시현 동부 후지 5호 지진, 최대진도 5

1146M7.3 지바현 동남쪽 해역 지진, 최대진도 5

1826M6.9 지바현 동쪽 해역 지진, 최대진도 5

1848M6.3 지바현 동쪽 해역 지진, 최대진도 4

229M6.5 시즈오카현 이즈 지방 지진, 최대진도 5

2316M6.2 가나가와현 서부 지진, 최대진도 4

98232M6.1 이즈오섬 근해 지진, 최대진도 2

9141532M5.2 이바라키현 남부 지진, 최대진도 5

926

1723M6.8 이즈오섬 근해 지진, 최대진도 4

1726분 규모 불명 지진 - 누마즈 측후소에서 최대진도 4를 기록하였다.

104

054M6.3 시즈오카현 동부 지진, 최대진도 4

145분 규모 불명 지진 - 사이타마현 구마가야시에서 최대진도 4를 기록하였다.

105225M6.2 야마나시현 동부 후지 5호 지진, 최대진도 3

115545M6.3 도쿄 다마 지역 동부 지진, 최대진도 4

192415M7.3 단자와 지진 - 19명 사망, 638명 부상

피해

이 부분의 본문은 간토대진재입니다.

지진 이후 화재가 일어난 지역()과 화재로 파괴된 지역을 그린 지도.

간토 대지진으로 가나가와현 및 도쿄부(현 도쿄도)를 중심으로 인접한 이바라키현과 지바현, 시즈오카현 동부 등 간토 지방 내륙 및 연안 넓은 지역에 큰 피해를 입었다. 20049월 일본의 건설회사인 가지마 고보리의 보고서에서는 지진으로 인한 총 사망자를 105,385명으로 추정하였다.

또한 지진이 여러 곳에서 불을 사용하는 점심 시간즈음에 있었기 때문에 지진 직후 화재가 발생하였다. 이들 화재는 화염폭풍으로 발전하여 도시 전체를 쓸고 지나가기도 했다. 화재로 인한 단일 최대 인명피해는 도쿄 시내에 있는 리쿠군 혼조 히후쿠쇼(구 일본 육군의류창고)를 화염폭풍이 휩쓸며 일어났는데 지진 후 도쿄 시내에서 약 38,000명이 화재로 사망하였다. 또한 간토 대지진으로 간토의 수도관도 끊겨 93일이 되어서야 화재를 소화하는 등 이틀이 걸렸다. 6,000명의 한국인이 목숨을 잃었다.

쓰나미 피해도 커 최대 10m 높이의 쓰나미가 사가미만, 보소반도, 이즈 제도, 이즈반도 동부 해안을 덮쳐 총 57만 가구의 주택이 유실되고 190만 가구가 집을 잃었다. 피난민들은 배를 타고 간토에서 간사이 및 고베까지 이동하였다. 피해액은 대략 10억 달러(현재의 150억 달러) 이상으로 추정된다.

간토 대학살

이 부분의 본문은 간토대진재 § 지진 이후 충돌 및 학살 및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입니다.

1923910일자 매일신보. 신문에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이 폭동을 조장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글로 전면을 다루고 있다.

간토 대지진의 조선인 학살

1923년 도쿄 일원의 간토 지방은 지진으로 인하여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흉흉해진 민심 덕분에 일반인들 사이에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이 싹트는 가운데, 내무성은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각 지역의 경찰서에 지역의 치안유지에 최선을 다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런데, 이때 내무성이 각 경찰서에 하달한 내용 중에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라는 내용이 있었다. 이 내용은 일부 신문에 보도되었고 보도내용에 의해 더욱더 내용이 과격해진 유언비어들이 신문에 다시 실림으로써 "조선인들이 폭도로 돌변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약탈을 하며 일본인들을 습격하고 있다"라는 헛소문이 각지에 나돌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지진으로 인하여 물 공급이 끊긴 상태였고, 목조 건물이 대부분인 일본의 특징 때문에 일본인들은 화재를 굉장히 두려워하였으므로, 이러한 소문은 진위여부를 떠나 일본 민간인들에게 조선인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을 유발하였다. 이에 곳곳에서 민간인들이 자경단을 조직해 불시검문을 하면서 조선인으로 확인되면 가차없이 살해하는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죽창이나 몽둥이, 일본도 등으로 무장하였고, 일부는 총기로 무장하기도 하였다.

우선 조선식 복장을 한 이는 바로 살해당하였으며, 학살 사실을 알고 신분을 숨기기 위해 일본식 복장을 한 조선인들을 식별해 내기 위해서 조선인에게 어려운 일본어 발음 한국어에 없는 어두유성음 및 종종 정확하게 발음되지 않는 장음 발음(撥音)등으로 이루어진) 十五円五十銭じゅうごえんごじっせん(쥬고엔 고주센)을 시켜보아 발음이 이상하면 바로 살해하였다. 예를 들어 '쥬고엔 고쥬센'을 일본어가 어눌한 발음의 '츄고엔 고쥬센'으로 발음하는 것이다. 이 때,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류큐인, 외자 성을 강제당해 조선인으로 오인받은 아마미 제도 출신, 지방에서 도쿄로 와 살고 있었던 지방의 일본인(특히 도호쿠 출신)들도 발음상의 차이로 조선인으로 오인받고 살해당하는 등, 자경단의 학살은 마구잡이식이었다.

일부 조선인들은 학살을 피해 경찰서 유치장으로까지 피신하였으나, 일부 지역에서는 경찰서 안까지 쳐들어와 끄집어 내어 학살하는 일도 일어났다. 경찰은 학살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경우가 흔하였고 오히려 조선인을 조직원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야쿠자 등 비공권력 범죄 집단의 일부가 조선인을 숨겨주는 일이 있었다. 조선인 학살과 더불어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인권운동가, 반정부 행위자 등으로 경찰에 요주인물로 등록되어 있던, 주로 좌파 계열의 운동가에 대한 학살 사건도 동시에 진행되었는데 육군 대위 아마카스 마사히코에 의해 사회주의자 오스기 사카에와 가족이 살해당한 아마카스 사건이 잘 알려져 있다.

치안 당국은 "조선인들이 폭동을 저지르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헛소문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혼란 수습과 질서 회복의 명분하에 자경단의 난행을 수수방관하였고, 일부는 가담, 조장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점차 자경단의 만행이 도를 넘어서 공권력을 위협할 정도가 되어, 그제서야 개입하였으나, 이미 수많은 조선인들이 학살당한 후였다. 자경단의 살상 대상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으며, 상당수는 암매장되었다. 학살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에는 도쿄에 흐르는 스미다강과 아라카와강은 시체의 피로 인해 핏빛으로 물들었다고 한다. 일본 정부는 최종적으로 유언비어를 공식확인하였으나, 피해자의 수를 축소 발표하고, 자경단 일부를 연행,조사하였으나, 형식상의 조치에 불과하였으며, 기소된 사람들도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무죄 방면되었다. 학살 사건으로 인한 사법적 책임 또는 도의적 책임을 진 사람이나 기구는 전혀 없었다.

일본인 요시노 사쿠조는 그의 저서 압박과 학살에서 2,534명으로, 김승학은 한국독립운동사에 피해자가 6,066명이라고 적었지만, 그에 비해 당시 일본정부의 추산은 233명이었다.

복구

이 부분의 본문은 간토대진재  복구와 부흥입니다.

지진 이후 수도를 이전하자는 주장이 잠시 대두되었다. 일본 참모부의 이마무라 히토시는 후보지에 히메지, 경성이 거론되기도 하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진 11일 후인 912일에는 도쿄를 수도로 계속 두고 복구하겠다는 조서를 발표하면서 천도 논의는 흐지부지되었다. 복구를 하면서 현재의 도쿄의 기틀을 구성하는 도로와 철도 그리고 공원등이 계획되어 보다 근대적 모습으로 도시가 다시 재건되었다. 특히 공원은 이후 있을지 모르는 대지진의 피난처 구실을 하게끔 만들어졌다.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도쿄대공습을 거치면서 다시 파괴되는 경험을 겪게 된다. [Sources Wikipedia]

책소개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지도 벌써 100주년을 앞두고 있다. 2013년 관동대지진 90주년을 맞아 사회적으로 반짝 관심을 가졌지만 1년이 지난 2014년부터 점차 잊힌 역사가 되어 기억의 저편으로 점점 멀어져갔다. 이렇게 잊혀 가는 역사가 된 것은 관동대지진이 일본에서 일어난 일본의 역사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동대지진에 대한 연구도 이러한 인식 때문에 국내에서는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그런 점에서 관동대지진의 연구는 재일사학자에 의해 먼저 시작되었다. 그리고 연구의 핵심적인 주제는 ‘재일조선인 학살’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연구는 식민지 조선과 관동대지진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한계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나아가 한국근대사에서 전혀 다루어지지 않는 역사가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실제적으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서 관동대지진에 대해서 폭넓게 다루지 못하는 한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관동대지진 재일조선인 학살과 관련된 연구는 주로 학살당한 재일조선인의 수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연구의 공간이 ‘일본’이었다는 점을 아쉬워하던 저자는 좀 더 새롭게 접근해 볼 수 있는 방안이 없을까 하다가 관동대지진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의 동향은 어떠하였을까 하는 생각이 미치게 되었다. 평소 신문을 통해 식민지의 동향을 파악하던 필자는 관동대지진 당시 신문 보도에 대해 보다 관심을 집중하였고, 나름대로 주제를 설정해 보았다. 이를 계기로 한국연구재단에 지원하였고 다행스럽게 선정되었다. 덕분에 관동대지진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하게 되었고, 오늘 연구서를 출간하게 되었다.

목차

머리말

제1장 서론
제1절 선행 연구에 대한 검토
제2절 연구주제와 내용

제2장 관동대지진과 식민지 조선의 언론
제1절 ??매일신보??와 관동대지진
1. 관동대지진의 보도와 내용
2. 재일조선인에 대한 보도
제2절 ??동아일보??·??조선일보??와 관동대지진
1. 관동대지진에 대한 보도와 인식
2. 관동대지진의 기억과 전승

제3절 ??독립신문??과 관동대지진
1. 관동대지진과 일본에 대한 인식
2. 관동대지진의 피해 상황 보도
3. 재일조선인 학살에 대한 대응
제4절 관동대지진과 식민지 조선 언론 사설의 분석
1. 관동대지진과 ??매일신보?? 사설
2. 관동대지진과 ??동아일보?? 사설
3. 관동대지진과 ??조선일보?? 사설

제3장 관동대지진과 식민지배 정책
제1절 관동대지진과 재일조선인의 귀향
1. 관동대지진과 재일조선인 동향
2. 관동대지진과 재일조선인의 귀향과 도항
제2절 관동대지진과 조선총독부의 민심 동향 파악
1. 조선총독부의 민심 동향 파악
2. 언론을 통한 민심 회유
3. 관동대지진과 식민지배정책의 변화
제3절 관동대지진과 국외 한인사회의 동향
1. 중국 관내와 만주지역 한인사회의 대응과 동향
2. 일본지역 한인사회의 대응과 동향
3. 미주지역 한인사회의 대응과 동향
4. 유럽 한인유학생의 대응과 동향

제4장 관동대지진과 의연금 모금
제1절 ??매일신보??를 통해 본 의연금 모금
제2절 중앙의 구제 조직과 의연금 모금
1. 경성과 인천지역의 의연금 모금
2. ‘조선인구제회’와 ‘의연금조성회’ 조직과 활동
제3절 지방의 구제 조직과 의연금 모금
1. 중소 지방의 구제회 조직
2. 지방 의연금 모금 활동과 특성

제5장 결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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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 : 성주현 (成周鉉)

 
한양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근대사 가운데 동학·천도교와 민족운동사를 연구하며, 청암대학교 재일코리안연구소 연구실장, (사)한국역사문화원 대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참여자조사위원을 맡고 있다. 천도교중앙총부 자료실장,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을 지냈다. 주요 논저에는 『식민지 조선과 매일신보-1910년대』(공저, 2002), 『동학과 동학혁명의 재인식』...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6406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

 

책소개

동학농민전쟁, 3·1운동, 관동대지진을 둘러싼
‘일본인의 눈에 벗어난’ 한국 역사의 진실을 파헤치다

와타나베 노부유키의 질문은 이렇다. “한국과 일본은 왜 역사를 두고 다투는가?” 일본군 위안부와 독도 영유권 등의 역사 문제를 둘러싸고 양국은 오랜 세월 갈등을 겪었다. 서로를 향해 혐한과 반일의 감정을 서슴지 않고 드러낸다. 왜 다투는 걸까? 서로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역사 인식의 근원은 무엇인가? 역사 전문 기자로서 40년간 일선에서 활동한 와타나베 노부유키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스스로 직접 사료를 찾아 나선다. “우선 해야 할 일은 상대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모습을 다시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 아래 일본인들의 시야에서 벗어난, 일본인들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사실史實을 하나둘 찾아간다. 동학동민전쟁, 3·1운동, 관동대지진에 얽힌 숨겨진 역사와 그 진상을 밝혀내고, 그 자신도 몰랐던 역사에 관해 놀라며 그는 거듭해서 이렇게 묻는다. “과연 일본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학계에도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자료까지 찾아내는 등 저자의 세밀하고 성실한 노력은 결국 결실을 거두었다. 이 책은 2021년에 일본의 퓰리처상이라는 불리는 ‘평화?협동 저널리스트 기금상’ 대상을 수상했다.

이 책의 시작은 ‘징용공(강제동원 노동자) 소송’을 둘러싼 한일 갈등의 원인을 찾고자 하는 탐색이지만, 그 원인을 찾아가면서 숱한 의문점과 마주한다. 그 대부분이 한국인들은 분명하게 알고 있지만, 일본인들은 모르거나 모호하게 아는 사실들이다. ‘불법적인 한국병합’ ‘동학농민전쟁의 의병 진압’ ‘관동대지진의 조선인 학살’ ‘빨치산과의 전쟁’ 등이 그것이다. 기자로서 또 일본인으로서 이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은 객관적이며 냉철하다. 이러한 입장과 자세는 어쩌면 한일 간의 역사 인식의 차를 좁히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역사를 정치의 도구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무엇보다 요구되는 것은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냉정하게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인 것 같다.”

목차

한국어판 서문
머리말

제1장 징용공 소송

1. 징용공을 둘러싼 대립
2. “일본의 조선 지배는 불법이었다”
3. 한반도에서 무엇을 했는가?

제2장 동학농민전쟁

1. 숨겨진 역사
2. 일본군 수뇌부의 철저한 의도

제3장 관동대지진

1. 강해지는 주장, “학살은 없었다”
2. 어린이들이 본 요코하마 지진
3. 왜 유언비어를 믿었을까?

제4장 두 학살을 연결하는 선

1. 일본군 병사의 실상
2. 정체불명의 적

제5장 잊힌 과거

1. 개찬된 『일청전사』
2. 전쟁사 개찬의 진상

제6장 3.1운동

1. 새로 발견된 자료
2. 하라 다카시 총리와 조선총독부의 대응

제7장 모호한 자화상

1. 없었던 일로 치부된 학살
2. ‘갑자기 탄생한’ 자경단

제8장 여러 개의 전후

1. 말할 수 없는 전장 체험
2. ‘일본인의 마음의 틈을 겨냥한 속임수

제9장 다음 시대를 전망하는 역사상의 힌트

맺음말
옮긴이의 말
자료
참고문헌
찾아보기

저자 소개

저널리스트이자 논픽션 작가. 1955년에 태어나 와세다대학교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했다. 2018년까지 아시히신문사의 기자로 일하면서, 아오모리시 산나이마루야마三?丸山 유적 출현, 중국 시안 견당사 묘지墓誌 발견, 지바시 가소리패총加?利貝塚 재평가 등 여러 특종을 보도하고 역사 자료 발굴에 힘썼다. 논문으로 「「731부대―묻혀버린 세균전의 연구 보고(731部隊―埋もれていた細菌?の?究報告)」(《세카이(世界)》 2012...

역 : 이규수

역사학자. 1962년에 태어나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히토쓰바시대학 대학원 사회학연구과를 졸업했다. 히토쓰바시대학 한국학연구센터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는 전북대학교 고려인연구센터 학술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 수탈과 궁삼면 토지탈환운동』(2021), 『제국과 식민지 사이』(2018), 『한국과 일본, 상호 인식의 변용과 기억』(2014), 『제국 일본의 한국 인식, 그 왜...

책 속으로

이 둘은 국토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벌어진 싸움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보신전쟁의 기억이 일본 사회에서 어떻게 계승되어 오늘날에 전해지고 있는지를 상기하면, 한국 의병의 존재가 한국인에게 어떤 의미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보신전쟁은 양 진영 사망자의 합계지만, 의병은 한쪽의 사망자 숫자다. 게다가 일본군과 의병의 희생자 수 격차에 놀랄 수밖에 없다. 이 역사는 한국과 일본의 사회에서 각각 어떻게 전해졌을까? 한일 간의 기억 격차는 희생자 격차 이상으로 크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p.53

조선인을 지속적으로 학살한 이유는, 부대 지휘관의 일탈이라든가 병사의 개인적인 폭주 때문이 아니었다. 일본군 수장의 뜻이 병사들에게까지 철저히 전해진 결과였다. 동학농민전쟁은 근대 일본이 조선 민중과 직접 대면한 첫 번째 경험이었다. 자신을 따르지 않는 민중에 대한 대처로 일본이 선택한 조치는 “모조리 살육한다”였다. ‘숨겨진 역사’의 정체가 이렇게 밝혀졌다. 2019년부터 한국에서 전개된 일본 제품 불매운동에서 저항의 상징으로 자주 언급된 것이 ‘죽창’이었다. “죽창을 들고 일어나자”는 식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막강한 적에 맞선 동학 농민들의 정신이었다. 이를 깨달은 일본인은 과연 얼마나 될까? 한국 사람들에게는 상식이지만, 일본인들은 전혀 몰랐던 큰 희생의 역사가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얼마나 억울한 일이었을까.
---p.75

지진이 덮쳐 불안과 공포의 혼란 속에서 유언비어가 흘러나왔다. 많은 재향군인에게는 박진감 넘치는 상황이었고, 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유언비어를 믿었다. 저런 일을 저질렀으니 앙갚음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실체도 없는 ‘불령선인’이나 ‘빨치산’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가 되살아났을지 모른다. 지진으로 경찰은 기능을 잃었다. 가장 먼저 유언비어가 나돌고 학살이 시작된 요코하마에서는 일곱 곳의 경찰서 중 여섯 곳이 붕괴 소실되었다. 경찰 기능을 보완하기 위해 준비된 것이 자경단이었다. 치안 공백 상태에서 ‘민중의 경찰’로서의 직무를 다해야 한다는 의식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그 때문에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적을 찾는 일에 조금도 멈칫거리지 않았다. 살의에 차서 과거 한반도나 대륙에서 자행했던 만행을 일본 내에서 재현했다. 그것이 관동대지진의 자경단에 의한 조선인 학살의 기본적인 구도였던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p.137~138

너무 많은 민중이 가해자였다. 지역사회는 누가 가해자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모든 사람에게 죄를 추궁하면 엄청나게 큰 사건이 되는 것이었다.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지도 못했다. 그러니 유독 악질적인 범죄를 제외하고는 학살은 없던 일로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부도 군도 경찰도 그리고 민중도 일본 사회가 하나가 되어 은폐하고 잊어버리려 했을 것이다.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다며, 책임을 묻지 않고 반성도 없이 애매하게 방치하면서 흐지부지하다가 그냥 잊히기를 기다린 것이 아닐까?
---p.199

조금 냉정하게 따져보면 “학살은 없었다”는 주장은 근거 없는 속임수가 명백하다. 그것이 힘을 갖게 된 것은 ‘믿을 수 없다’는 일본인의 소박한 생각 때문일 것이다. 무엇이 사실인지 따지지 않고 지내왔기 때문에 애매한 자화상밖에 그릴 수 없는, 오늘날 일본인들 마음의 틈을 노린 속임수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인은 선량하다, 어떤 때라도 나쁜 짓은 하지 않는다. 그런 심정을 노린 속임수다. 앞에서 조선인의 처지를 생각하는 소녀의 글을 소개했는데, 그 글에 묘사된 서로를 돕는 일본인의 모습은 어디까지나 선량하다. 그러나 바로 옆에서는 가차 없는 박해와 학살이 자행되고 있었다. 두 모습 사이의 간극은 엄청나게 커 보이지만 둘 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양자를 냉정하게 바라보아야만 일본인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사실 그대로의 역사적인 자화상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짙음과 옅음, 밝음과 어두움, 빛과 그림자를 동반한 등신대의 자화상 말이다.
---p.223

동학 농민의 봉기만 해도 파견된 관리들의 가혹한 수탈에 대한 항거가 그 시작이었다. 양반이라 불린 고위 관리들은 파벌 싸움을 거듭하여 관직 매매가 일상화됐고, 직책을 맡으면 수탈에 힘쓰는 게 관례였다. 일본이 가해자였고, 조선은 피해자였다. 물론 그렇지만 국가를 단위로 한 그런 이원론만으로는 말할 수 없는 영역, 그런 영역에 다음 시대를 전망하는 역사상의 힌트가 숨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p.243

출판사 리뷰

일본인의 시야에서 벗어난 역사들

와타나베 노부유키가 한일 역사 인식의 차이로 가장 먼저 언급하는 것은, 징용공 소송에서 한국 대법원 판결의 골격이기도 한 ‘한국병합은 무효이자 불법’이라는 논리다. 이는 일본인으로서는 ‘헛소리’로 들릴 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그래서 그는 이태진 교수가 말한 병합을 위한 일본의 “분명히 계산된 지속적인 노력”이 무엇인지 사료를 찾아 나선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동학농민전쟁의 ‘의병’이란 존재와 마주한다. “일본군의 의병 토벌은 1911년까지 계속되었다. 그간의 전투 횟수는 총 2,852회이며, 일본군은 1만 7,779명의 폭도를 살육했고, 일본군 전사자는 136명이었다. 싸움이 가장 치열했던 1908년에는 1,451회의 전투에서 일본군은 의병 1만 1,562명을 살육했다. 다시 말해, 1908년 한 해 동안 한반도 어딘가에서 매일 평균 4회의 전투가 벌어졌고, 30명 정도의 의병이 살해된 셈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이런 사실을 아는 일본인은 얼마나 될까? 부끄럽지만 나는 몰랐다.” 그는 의병 토벌대로 참여한 한 일본군의 종군일지를 살피며 한반도에서 일어난 끔찍한 살육의 현장을 되살려낸다.

다음은 관동대지진의 조선인 학살 사건이다. 이 역시 많은 일본인이 “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하고 대부분 그렇게 믿고 있다. 저자는 지진 재해 당시 소학교 아이들이 쓴 작문 등의 자료를 찾아 그 현장 상황을 생생히 복원한다. “많은 사람이 조선인을 다리 위에서 칼로 베거나 쇠몽둥이로 때리고 창으로 찔렀다. 결국에는 강물에 던져버렸다.” “한 사람이 쇠갈고리로 놈의 머리를 찍어 나룻배로 끌어당겼어요. 마치 목재를 끌어당기는 것 같았어요. (…) 쇠갈고리 한 방으로 이미 죽은 놈을 다시 칼로 베고 죽창으로 찔렀어요.”

저자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동학농민전쟁과 관동대지진이라는 두 학살을 연결하는 고리를 찾아낸다. 그 가해자인 후비역 병사와 재향군인회 그리고 그들이 속한 자경단에 대해 당시 사회적인 상황과 연결하여 그 조직의 성격을 분석하고 이렇게 말한다. “지진이 덮쳐 불안과 공포의 혼란 속에서 유언비어가 흘러나왔다. 재향군인에게는 박진감 넘치는 상황이었고, 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유언비어를 믿었다. (…) 경찰 기능을 보완하기 위해 준비된 것이 자경단이었다. 치안 공백 상태에서 ‘민중의 경찰’로서의 직무를 다해야 한다는 의식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그 때문에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적을 찾는 일에 조금도 멈칫거리지 않았다. 살의에 차서 과거 한반도나 대륙에서 자행했던 만행을 일본 내에서 재현했다. 그것이 관동대지진 당시 자경단에 의한 조선인 학살의 기본적인 구도였던 게 아닐까?”

왜 일본인의 기억에 사라졌을까?

그렇다면 왜 이러한 역사는 일본인의 기억에서 사라진 것일까? 저자는 개찬된 『청일전사』를 예로 들며, 정부와 군이 역사 “기록을 처분하거나 정사正史를 날조”했고, 그로 인해 동학농민전쟁과 3?1운동에서의 조선인들의 희생은 일본인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됐다고 말한다. 관동대지진의 기록 또한 마찬가지다. “누군가에 의해 조직적으로 처분”되어 조선인 학살과 관련된 자료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진 재해 직후 일본 정부의 조선인 학살에 대한 방침은 “정상참작을 해야 할 점이 적지 않다. 소요에 가담한 전원을 검거하지 않고 현저한 행위를 한 자로 검거 범위를 한정한다”고 발표한다. 그리하여 “모든 시와 마을 구석구석까지 폭동을 일으키고, 폭동을 일으킨 민중에 의한 살해가 있었던” 요코하마시에서 조선인을 살해한 행위로 기소된 사람은 ‘단 한 명’으로 기록된다. 저자는 이렇게 덧붙인다.

“너무 많은 민중이 가해자였다. 지역사회는 누가 가해자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모든 사람에게 죄를 추궁하면 엄청나게 큰 사건이 되는 것이었다.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지도 못했다. 그러니 유독 악질적인 범죄를 제외하고는 학살은 없던 일로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부도 군도 경찰도 그리고 민중도 일본 사회가 하나가 되어 은폐하고 잊어버리려 했을 것이다.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다며, 책임을 묻지 않고 반성도 없이 애매하게 방치하면서 흐지부지하다가 그냥 잊히기를 기다린 것이 아닐까?”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6408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