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한국근대사 [역사지식여행]/3.일제시대 (1910~1945)

[웹북] 조선신궁

동방박사님 2024. 10. 12.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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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메이지 천황
사격 관폐대사·칙제사
창건 1925년
제례 10월 17일

조선신궁(朝鮮神宮 일본어: 朝鮮神宮) 조센진구은 일제강점기에 경성부의 남산에 세워졌던 신토의 신사이다. 1925년 당시에는 여의도 면적의 두 배에 가까운 43만 제곱미터의 대지 위에 15개의 건물이 있었다.

역사

일본의 민족종교 장려

1910년에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된 후 조선총독부는 각 지역에 관립 신사를 세우고 민간 신사도 지원하는 방식으로 신토를 장려했다. 조선에서 일본의 식민행정, 황민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1912년부터는 조선신궁 건립 예산을 편성하여 경성부 남산 한양공원에 자리를 정했다.

1920년에 기공식을 갖고 15개의 건물과 돌계단, 참도 등을 조성했다. 조선교육회는 헌목 운동을 벌여 학생들의 헌금을 모아 나무를 심었다. 5년 동안 작업한 끝에 1925년에는 조선신사에서 조선신궁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1015일에 진좌제 행사를 열었다.

전쟁 시국 신사참배 강요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 조금 위에는 원래의 국사당이 있었다. 원래의 국사당은 조선 태조가 현재 남산타워 옆 팔각정 자리에 세운 제사시설로, 태조 이성계를 비롯해 무학대사 등의 위패를 봉안하고 국가의 안녕을 위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일제는 조선신궁 위에 있던 원래의 국사당을 인왕산으로 이전하면서 국사당의 이름에서 ''에서 로 바꾸고 무학대사만을 위한 사당으로 바꾸었다.

조선신궁의 주제신은 일본 건국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메이지 천황이다. 제신 후보로는 신공황후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거론되었다. 1930년대 후반부터는 전쟁 시국을 맞아 총독부가 신궁 참배를 강요하여 참배객이 크게 늘어났다.

태평양 전쟁 종전 이튿날인 1945년 8월 16일에 일본인들은 스스로 하늘로 돌려보냄을 의미하는 승신식을 연 뒤 해체 작업을 벌였고, 10월 7일에 남은 시설을 소각하였다. 한국에 있던 많은 신사들이 한국인들에 의하여 불태워졌던데 비하여, 조선신궁은 일본인 자신들이 스스로 폐쇄행사를 하였고, 각종 신물은 일본으로 보내어졌다. 이후 조선신궁 자리에는 남산공원이 조성되고 안중근을 기념하는 안중근의사기념관이 건립되었다.

사진

도리이와 계단

도리이와 계단

입구 도리이와 계단

입구 도리이와 계단

항공 사진

항공 사진

 

부여신궁

제신

오진 천황 / 고교쿠 천황 / 덴지 천황 / 진구 황후

사격 관폐대사

창건 미완공

주소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면

부여신궁(扶餘神宮)은 일제강점기에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건축 공사 중이었던 신토의 신사이다. 부여신사(扶餘神社)라고도 불렀다.

건축

일제 강점기 말기에 일본 제국은 내선일체 이념의 선전을 위하여, 고대 일본과 관련이 깊은 지역이며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에 신도(神都)를 건설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신도 건설 계획의 핵심으로 부여신궁이라는 이름으로 신사를 짓기로 하였고, 19396월에 관폐대사(官弊大社)로 정식으로 인가를 받았다.

부여신궁에 주제신으로 봉안될 신은 오진 천황, 진구 황후, 고교쿠 천황, 덴지 천황으로 결정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고대 한일 관계와 관련이 깊은 천황들이다. 본래 1943년에 완공될 예정이었으나 공사가 늦어졌고, 태평양 전쟁이 1945815일에 일본 제국의 항복으로 종전되면서 완공되지는 못하였다.

의의

부여신궁은 완공되지 못했음에도 공사 중 이미 경성부의 조선신궁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신사로 알려졌다. 영화 너와 나에는 충청도 출신의 지원병이자 조선인 최초의 중일 전쟁 전사자인 이인석이 출정 전에 부여신궁에 참배하는 내용이 나오는 등, 일제 강점기 말기의 내선일체 선전과 홍보에 널리 이용되었다.

특히 조선총독부는 1940년부터 봉사대라는 이름으로 조선인을 동원하여 무료 봉사하도록 했다. 봉사대에는 지식인들이 대거 동원되어, 조선영화인협회 소속의 영화인들이나 조선문인협회 소속 문인들, 개신교 목사들도 신사 조영 작업에 참여하여 육체노동을 하였다.

Sources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