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의 지명 변천
정동(貞洞)이란 지명은 태조가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姜氏)의 능침(陵寢)을 이곳에 정함으로 발생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지역이 넓기 때문에 "대정동" "소정동" 으로 나뉘어 불리기도 했다.
본래의 서부 황화방 (皇華坊) 일대와 일부 취현방 (聚賢坊) 도 포함된 지역 이었다. 대정동은 비교적 서쪽 (서울 시립미술관, 배재학당, 이화학당). 소정동은 동쪽 (덕수궁, 대한문, 서울광장)을 지칭 하였다.
그런데 이들 지명이 사라진 것은 언제일까? 몰론 일제가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일제는 "총독부관보" 1914.4.27 자에 "조선총독부 경기도 고시 제7호 경성부 정동의 명칭 및 구역" 을 공시하고 그 이름들을 모두 바꾸어 버렸다. 대개는 "서소문정"과 같은 그들만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그런데 앞서 신덕왕후 능침이
이 이곳에 있었다고 했는데 바로 그옆에 (興天寺) 를 건립했던 것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태조 이성계는 계비 신덕왕후 능을 이곳에 안장하였다. 그리고 정릉 (貞陵 , 정릉동) 이라하였다. 지금의 정동은 이렇게 하여 그 지명이 되었다. 임진왜란 직후 선조가 환궁 하려 하였으나 궁궐이 모두 훼손되어 들어갈수 없게되자 당시 월산대군의 저택을 행궁으로 하여 지금의 덕수궁에 머물렀다. 광해군은 창덕궁으로 이어하지 전 이곳 정릉동 행궁 서청에서 즉위 하였다. 이때 정릉동 행궁 서청에서 즉위 하였다. 이때 정릉동 행궁은 정식으로 궁의 지위를 얻어 경운궁이라하고 이궁으로써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경운궁은 인조 이후에 다시 명례궁이라는 이름으로 이궁의 위상을 읽고 그 지위를 경희궁에 양보하게 된다.
덕수궁 (월산대군저택, 경운궁, 명례궁) 을 중심으로 개화기 이후 형성된 정동의 현재, 근대의 흔적을 찿아간다. 불과 100여년 정의 일이지만 아직도 밝혀지지 않는 역사적 흔적들이 있는가 하면 지금도 그 흔적이 사라져 가는 것도 있다.
근대 정동은 "가구거리" 왜?
개화기 이후 서울 정동은 외국 공사관이 집중되어 외교가를 이루었다. 그러자 주변에 그 외국인 들을 대상으로 상점들이 들어섰다. 그 대부분이 대한문이나 서대문 부근에 몰렸다. ㄱ중에는 대창양행, 고샬기상회 주지상회 등이 있었고 파는 물건들은 모자, 우산, 버터등 생활 필수품들도 많았지만 자전거나 가구들도 많이 팔았다. 특히 가구는 유명해서 "가구거리"란 이름도 붙었다.
이처럼 정동이 외교가로 부상하자 서구 지향의 개화파 정치인들도 몰려들기 시작했고 이들은 고종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이른비 "정동파"로 불리우는 사람들 이었다. 이처럼 정가와 외교가 사람들이 몰리자 러시아 공사 웨베르를 따라 들어온 손탁 (A Sontag, 1894~1925) 가 크게 활약하게된다.
위베르를 따라온 손탁은 고종이러시아와 친하게 되자 같이 가까워진다. 고종은 그녀에게 한옥을 하사하고 손탁은 그곳에 사교장을 만든다.(현 스위스대사관자리) 손탁은 그걸로 부족해 결국 러시아 출신 건축가 사바틴에게 건너편인 지금의 이화여고 안에 손탁호텔을 짓게한다 (1988) 여기에 서양요리가 등장하고 커피숖이 사교장의 중심이 된다.
사바티니 설계한 인천의 제물표구락부 역시 사교장 건물로 현존하는 사바틴의 건축을 엿볼수 있게한다. 그런데 당시 (1903~1904)에 찍은 사진에는 유사한 보습의 모델이 등등장하여 호기심을 자아낸다. 사진사가 동일한 인물 이었을까 ? 위치와 포즈가 아주 비슷하지 않은가? 둘다 사바틴이 설계한 건물이니 의심해 볼만 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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