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1.다산정약용의 성장기
다산은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공부를 잘했다고 한다. 7세에 "작은 산이 큰산을 가리니 멀고 가까움이 달라서라네"라는 시를써서 아버지엑게 칭찬을 받았다. 9세에 어머니 해남 윤씨가 별세하고, 10세에 부친에게서 경서와 역사서를 배우기 시작했다. 15세 풍산 홍씨와 결혼하여 서울 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 남인계 소장학자들인 이가환, 이벽, 이승훈 등과 교유하면서 실학의 증시조로 할 수 있는 이익의 유고를 읽게 되었는데, 깊은 감명을 받고 사숙하기로 했다. 이후 다산은 20세를 전후 해 과거공부에 본격적으로 힘을 기울였으며 급기야 22세에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기에 나아갔다.
2.정약용의 사환기 (벼슬시절)
28세때 벼슬에 나아간 다산은 규장각 초계문신으로 발탁되는 등 정조의 총애 속에서 제주와 능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30세때 진산사건이 발생한 후로 정적들에게 시달리게 되었다. 배다리 설계에서 재주를 보인 다산은 31세에 부친상으로 여막살이 하는동안 정조로부터 수원화성(水源華城) 설계를 명령 받는다. 33세에 경기북부 암행어사로 나아가 백성들의 참혹상을 목격하고, 권세를 휘둘러 민폐를 끼친 관리들을 처벌하도록 정조에게 보고 했다. 1797년 6월 정조는 자산을 동부승지로 임용했다. 이에 대해 다산은'동부승지을 사양하는 상소문'을 올려 천주교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사직상소를 낸 다음 달 정조느 다산을 황해도 곡산부사로특별히 임명했다. 곡산 부임길에 데모주동자 이계심을 만났다. 다산은 관청의 행정에 항의하느 그의 태도가 오히려 관청이 밝은행정을 하는데 필요하다고강조 했다. 권위적 지배를 부정하고 백성의 고통을 해결해주려는 목민관의 자세를 모소 실천했던 것이다. 38세 (1799)때 정조는 다산을 다시 조정에 불러 형조참의를 재수했다. 다산 39세 (1800) 봄에 처자식을 거느리고 마현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낙향해 있던 다산은 노자의 <도덕경> 중 "머뭇머뭇" 뎌울시내를 거너듯 조심조심, 사방을 두러워 하듯 이라는 구절에서 따온 여유당 이란 당호를 짓고 세상과 거리를 두고자 했다. 그러나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한 '신유사옥 이 일어났다
4.다산의 유배기
신유사옥으로 셋째형 정약용은 순교하고, 한때 천주교를 받아들였다가 이제는 거리를 둔 둘째형 정약전과 다산은 기나긴 유배생활이 시작되었다. 다산의 첫 유배지는 경상북도 장기 (현:포항)였다. 황사영 백사사건 으로 서울로 압송된 다산은 그해 11월 하순에 둘째형 약전은 훅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길에 올랐다. 현제는 나주 율정에서 눈물로 헤어진 뒤 서로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채 형은 흑산도와 우이동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16년 후에 죽고, 다산은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18년 후에 귀향했다.
다산이 강진에 도착했을 때는 추운 겨울이었다. (40세. 1801) 대역 죄인이라 모두 접촉을 피했는데 이때 불상히 여겨 챙겨준 사람이 동문매반가의 주모였다. 다산은 자신이 거처하는 누추한 방에 "사의재" 라는 이름을 붙이고" 네가지 마땅함" 즉 "생강이 맑아야, 용모는 장엄해야, 말은과묵해야,행동은 중후해야 한다". 는 다짐을 하면서 학문에 열중하였다. 초기의 엄혹한 감시와 압박이 조금씩 풀리면서 다산은 1808년 다산초당 으로 거처를 옮겼다. 다산초당은 제자들과 함께 학업에 정진하는 연구공간이 되었으며 방대한 저술을 낳는 곳이 되었다. 다산의 제자에는 읍중시절에 수학한 제장 (읍중제자)들과 다산초당에서 수학한 제자(다산 18제자)들이 있다. 다산의 제자들은 다산의 저술활동에 큰 힘이 되었다. 다산은 4서 6경에 대한 연구를 하였으며 1818년 해배 되기까지의 마지막 기간에는 (경세학 經世學) 연구서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마쳤다 <경세유표 經世遺表. <목민심서 牧民心書>등을 저술하였고, 미처 끝내지 못한 <흠흠신서 欽欽新書>는 고향빕에 돌아가서 저술을 마친다. 또한 다산은 수많은 서정 및 사회시를 지어 19세기 초반 강진 일대의 풍속과 세테를 읊으며, 압제와 핍박에 시달리던 농어민 참상을 눈물어린 시어로 대변해 주었다.
18년 유배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간 다산은 저술의 수정보완을 계속했다. 한편 소론계의 석천 신작, 노론계의 김매순, 인천, 홍석주 등과 같은 석학들과 학문교류를 했다. 다산은 회갑때 자신의 삶을 정리한" 자찬묘지 명'을 썼는데, 여기에서 자신의 호를 사암 이라 했다. 이는백세이후 성인을 기다려도 미혹됨이 없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학문의 자부심일 수도 있고, 훗날에 대한 기다림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1836년 회혼인 2월22일 (양력 4월7일) 회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자족들이 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다산 정약용의 생각들
<흠흠신서 欽欽 新書> 는 법제에 대한 연구서이자 살인사건 실무의 지침서. 형벌 규정에 기본원리에 대해 설명하고, 조선은 몰론 중국의 역대 모범적인 판례를 선별하여 해설과 비평을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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