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정명여자중학교 구선교사 사택 [ 木浦貞明女子中學校舊宣敎師舍宅 ]
전라남도 목포시 양동(陽洞)에 있는 선교 시설이다. 2003년 6월 30일 등록문화재 제62호로 지정되었다. 학교법인 호남기독학원에서 소유, 관리한다.
1912년 화강석을 이용해 선교사들의 사택용으로 지은 건물이다. 평면 구조는 사각 형태를 이루며 전면은 좌우 대칭의 균형미를 이룬다. 일반적인 붉은색 벽돌을 이용하지 않고 이 지역에서 산출되는 화강석으로 지은 건물이라는 점에서 희소성이 있다. 정명여학교(지금의 정명여자중학교)는 3·1운동 당시 만세시위 등에 참여하였던 신식 교육 기관이다. 일제강점기의 선교 시설로 교육적·종교적 연구 가치가 있는 건축물이다. 전라남도 목포시 양동 86번지에 있다.
정명여중 구내 목포스테이션유적
1904년 겨울 광주 스테이션이 시작되면서 잠정 폐쇄되었던 목포 스테이션이 1907년 가을 다시 문을 열게되자 곧 선교사 주택의 건축필요성이 제기 되었다. 선교부는 1908년 6,000달러의 예산을 목포에 배정하여 2채의 주택을 짓도록 했다. 그 10여 년 전 벨이 지은 세 채의 벽돌 주택만으로는 늘어나는 선교 인력을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09년 단단한 서양식 2층 석조주택 두 동이 목포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 1910년에서 1912년까지 모두3개의 사택이 추가로 건축되었다. 목포 남학사 교사 역시 1909년 봄 완공되었다. 하나의 강당과 두 개의 교실을 갖춘 목포 남학교는 건축비를 제공한 교회의 담임목사의 이름을 따서 john wakins academy 로 명명 되었다. 그 다음으로 선교부는 1909년에 여학교 건물 (105평의 2층 석조)과 병원 신축을 위해 각각 2,600달러와 7,000달러 (병원건물 5,000달러, 시설2,000달러)의 예산을 책정하여 건물을 짓도록 했다. 그 후 여학교(맥컬리기념여학교)는 다시 미국의 그레이스맥컬리 의 지원으로 1922년 최신식의 기숙사와 건물을 신축하였고, 1914년 화재로 전소된 목포병원은 거액의 후원을 qked아 1916년 2층의 석조 “프랜치기념병원”으로 거듭났다.
그 결과 1924년 현재 목포스테이션의 1만 4천평 구내에는 5채의 선교사 주택과 남학교 여학교 병원 시약소 그리고 한국애는 직원 숙소 등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자산가치는 모두 6만달러에 달했다. 1940년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철수할 무렵 한국에는 모두 8개 지역 (5개 스테이션과 서울, 평양, 지리산)에 373동의 건물이 선교부 재산으로 등록되어 있었는데, 건물과 토지를 합친 전체 재산의 규모는100만달러 (320만엔, 현재가치 3,200억원)를 상회하고 있었다. 북장로교 한국선교부는 그3배인 300만달러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목포 선교와 근대화의 진앙지 였던 목포스테이션의 모습도 이제는 많이 달라졌다. 우선 그 많던 땅이 스테이션 패쇄 이후 계속줄어들어 지금은 정명 여학교가 갖고 있는 3천여 평과 폭포양동교회(기장)가 소유하고 있는 850평이 전부이다. 영흥학교 터는 1980년 상동으로 학교가 이전되면서 고층아파트가 들어섰고, 정명여학교 주변 3천여 평도 지금은 주택가와 상가로 변했다. 길 건너 프렌치 병원 건물도 허물어 없어졌다. 현재 양동에서 옛 스테이션의 흔적을 찿아볼 수 있는 곳은 정명여학교와 목포양동교회뿐이다. 다행히 이곳에서는 선교사 주택 2채와 교회건물이 남아있다.
학교에 들어서 왼쪽 언덕을 오르면 먼저보이는 것이 석조 2호주택이지만 석조1호 주택부터 소개하고자 한다. 지난 2003년 문화재청에 의해 등록문화재 92호로 지정되어 현재 정명여중 (전남목포시 양동86번지)의 “백주년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이 바로 1909년 지어진 목포스테이션의 석조 1호 주택이다. 한남대 초대학장을 역임한 남편 린튼 의 소천후 다시 목포로 돌아와 1960년 까지 활동한 린튼 부인은 이집을 가리켜 선교구내에 지어진 첫 번째 주택이라고 술회하였다.
린튼부인은 목포선교를 시작한 벨 선교사의 딸로 1899년 바로 이곳 양동스테이션 구내에서 태어 났으니 목포가 고향인 셈이다 1960년대에는 린튼 부인외에 보이어와 스미스 선교사 등이 여기서 살앗다. 1971년 선교사들이 떠나면서 방치되어 화재를 당하기도 했지만 지난 2001년 보수 공사로 어느정도 원형을 희복했고, 2010년에는 지붕을 올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정명여학교 안에는 또하나의 선교사 주택이 남아 있다 바로 중학교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석조 2호 주택이다. 이 건물 역시 1909년 1호 주택과 동시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벨과 프레스톤 (변요한) 이후 목포 선교를 이끌었던 헤리슨(하위렴)그리고 커밍 (김아각) 선교사가 살았다고 전해진다 석조 2층의 이 집은 그 후 양 옆으로 시멘트 건물을 이어 붙여 본래 모습과는 많이 많이 달라졌다. 그언데 이 건물은 목포 뿐만 아니라 3.1운동과 관련되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83년 이 건물 1층 천장에서 독립운동사와 관련된 귀중한 자료가 발견 되었기 때문이다. 그 자료 들은 “ 2.8선언서” 원본과 “3.1운동서 사본”, 광주에서 인쇄된 것으로 보이는 警告我二千萬同胞 (경고아이천만동포) 라는 격문과 朝鮮獨立 光州新聞(조선독립광주신문)그리고 만세 시위도중 널리 불렸던 “독립가”사본 등 모두5장으로 3.1운동당시 광주의 누군가가 정명여학교와 관련을 맺고 있던 (커밍선교사로 여겨짐) 석조 2호 주택 앞에는 1985년 건립된 “목포독립운동기념비”가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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