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양동교회
이 건물은 미국 남장로교의 선교사 유진벨 (한국이름: 배유지)이 목포지역 최초의 교회를 설립 하였던 양동교회 본당이다. 양동교회는 1897년 선교사들과 신도들이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린 것이 시초가 되어, 교인들의 노력으로 건립 되었다. 교인들이 유달산에서 날라 온 석재를 주 재료로 축조 하였으며, 특이하게 왼쪽 출입문 위족에 태극무늬가 새겨져 있다. (등록문화재 114호 1910년건립)
정명여학교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나와 다시 우회전하여 조금 걸으면 석조건물의 목포양동교회 (전남 목포시 양동 127번지 등록문화재 114호)가 보인다. 1911년 겨울 준공된 목포양동교회 에배당은 전형적인 서양식 조적조 (組積阻: 벽돌 등을 쌓아 올려서 벽을 만드는 건축구조) 건물로서 1982년 한차례의 증축 과정을 거처 계속 사용중이다. 예배당 왼쪽 출입구 위에는 大韓隆熙4년(대한융희4년)이라는 글씨가 태극문양과 함께 선명하게 남아있다.
1919년 4월8일 목포3.1운동을 계획하고 만세시위를 이끈 곳도 이곳이다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양동교회 교인들은 영흥학교, 정명여학교 학생들과 태극기와 전단을 제작하여 만세시위를 준비했다. 목포상업학교와 목포공립 보통학교 학생들도 참여시키기로 하고 각각 임무를 분담한 뒤, 목포 시내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계획했다. 목포상업학교와 목포공립 보통학교 학생들도 참여시키기로 하고 각각 임무를 분담한 뒤, 목포 시내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계획했다. 4월8일 양동교회 교인들은 학생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들고 앞장섰다. 이날의 만세시위로 수많은 교인들과 학생들이 일제 경찰에 붇잡혀 시련을 겪었다. 건물 옆에는 “선교107년 기념비”와 “순교 박연세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926년 목포양동교회에 부임한 박연세 목사는 1942년 일본의 황민화정책을 비판하는 설교를 했다가 체포되어 결국1944년 대구형무소 독방에서 동사(凍死)하였다. 그의 유해는 지난 1988년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목포의 기독교 전래
1897년 12월 벨 9배유지)은 목포 스테이션의 부지를 매입 할수 있었다. 처음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안전과 쾌적한 환경을 위해 한국인들이 밀집해 살고 있는 읍성에서 조금떨어진 곳의 구릉지를 넓게 확보하고자 했는데, 벨 역시 그런 안복을 지니고 있었다. 몰론 이때 매입한 토지의 양은 그 일부 였지만 그 후 벨른 언덕 전체를 매입하게 된다. 선교사들은 처음부터 장차 조겅될 대규모의 선교타운을 염두에 두고 몇 차례에 걸쳐 점진적으로 땅을 사들였던 것이다. 최초의 토지매입 계약이 완료된 1898년봄 벨은 비좁은 초가집에서 한국인들과 지내며 우선 임시 주택을 짓는 것 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재 일부를 서울에서 가져와야하는 등 시간이 꽤 걸리는 일이었으므로 1년 정도 거주할 한국식 주택을 지어 잠정적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이것은 벨뿐만 아니라 지방에서 내려온 선교사들의 전형적인 단계별 주거방식이다.
벨은 1898년 12월 새 집으로 이사하였다. 진료소를 겸한 오웬(오기원)의 사택도 그 집 뒤에 위치해 있었다. 벨의 계획은 폭포 양동의 언덕위 스테이션 구내에 나란히 세채의 주택을 지으려는 것 이었다. 새로운 집을 짓는 사이 벨은 의료선교사의 입국을 고대하고 있었다. 1차적으로는 자신의 가족의 안전을 위해서 의사가 필요 했다. 그러나 벨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스테이션에 전도-의료-여성 사역자를 안배하여 효과를 높인다는 협력 선교의 구상이 들어 있었다. 이러한 태도는 몇 년 뒤 벨의 광주스태이션 개설 과정에서도 또다시 반복된다. 광주스테이션의 시작을 몇 달 앞둔 1904년 4월, 그때는 벨 자신이 직접 미국에 가서 광주 근무 의료선교사를 물색하였던 것이다. 벨의 스테이션 개설의 필요조건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원칙은 다른 선교사들에 의해서도 줄곧 견지되었다.
1898년 11월 의료선교사 오웬이 목포에 도착하였다. 오웬은 1899년 7월 진료소를 열고 환자들을 맞았다. 오웬은 불과 몇 달 만에 400여명의 환자를 진료하며 스테이션을 일약 도시의 명소로 만들었다. 벨이 바라던 바였다. 1899년 12월 말에는 독신여성 선교사 스트래퍼 가 합류하여 목포스테이션의 얼개가 갖추어졌다. 스트래퍼는 여성 어린이 사역을 전담하는 한편 소녀들을 위한 교육을 시작하였다.
벨이 한참스테이션을 건설하고 있던 1898년 6월 경, 벨의 임시주택에ㅓ 주일에배를 본 한국인의 수는 30여 명에 달하였다. 그들은 주로 다른지역에서 목포로 이사온 기성 신자 들 이었다. 당시 목포는 1897ᅟᅧᆫ 10월 1일의 개항이후 새로운 기회를 찿아 사람들이 몰려 들고 있었다. 목포에 새로 자리를 잡은 “ 각국공동거류지” 구역의 “조선인 마을” 역시 식민지 도시문화의 영향을 받게된다. 얼마안가서 목포은 남선 굴지의 양항만으로서 땅값이 오르고 “다수의 자산가” 가 사는곳이 되었다. 개항 이전의 목포는 대체로 150호 정도의 가구가 목포진의 관할하에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여 살던 그런 곳이었다. 그러나 근대도시 목포의 인구는 1910년 1만 2천여 명을 넘어서 1925년에는 3만 7천여 명에 이르렀다. 목포교회의 기반은 바로 그 도시의 증가하는 인구에 있었다.
오웬의 진료소가 한참 성과를 날리고 있을 무렵 벨도 본격적인 선교활동에 들어 갔다. 우선 신입교인들을 교육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온전한 신앙을 고백할 때까지 별도의 학습반을 두어 평일에 그들을 가르쳤다. 까다로운 문답 시험이 요구 되었다. 1900년 8월 목포교회의 첫 세레식은 그 결과였다. 교인들은 주일 오후 두사람씩 짝을 지어 읍내에 나가 전도했다. 1900년 여름 목포교회의 회중은 75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전도와 신앙교육에 이어 벨에게 주어진 또하나의 임무는 지방 순회사역 이었다. 벨은 한 때 스테이션이 설치될 뻔했던 나주외곽의 마을들에서 활동했다. 오웬 역시 진료 외의 시간을 순회사역에 투자하고 있었다. 그결과 목포 바깥에 모두8개의 신앙동동체가 생겨났다.
비록 벨 부인의 사망 (1901.4.12.)과 오웬의 일시귀국 (1902. 7- 1903.10)으로 레이놀즈(이눌서 와 맥커첸(마로덕) 이 잠시 그 공백을 매운적도 있었지만 목포 스테이션은 그 구성의 핵심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안전한 선교 구내의 조성과 기본적인 선교인력의 충원이 지속되면서 위와 같이 초기 전남 선교의 교두보의 역할을수행하고 있음을 본다. 1903년 이후에도 스테이션의 성장은 계속 되었는데, 선교사가 담임으로 있던 목포교회의 300명 회중은 힘을 모아 벨 부인을 기념하는 “로티 위더스푼 기념 에배당”을 건립하였고 소규모의 납,여 학교과정이 선교사들에 의해 운여되기 시작했다. 또 1903년 11월 목포에 부임한 프레스톤은 벨과 오웬이 광주로 이동하는 스테이션의 전환기에 신임의료선교사 놀란 그리고 스트래퍼와 함께 목포 사역을 이어 나갔다. 광주스테이션이 설치되면서 1905년 10월 잠정 페쇄 되엇던 목포스테이션은 프레스톤의 주도로 1907년 10월 다시 그 운영이 재개되었다.
전남 지역의 기독교 선교
1893년의 장로교 선교부 연합공의회에서 전라도 선교를 책임지게 된 남장로교 선교부는 어느정도의 준비기간을 거쳐 1895년 6월 레이놀즈(이눌서)와 유진벨 (배유지)에게 목포 스테이션 개설 업무를 맡겼다. 전주와 군산에 이어 이제 전남 선교에 나선 것이다. 그때 미미 전주에는 데이트 남매 군산에는 진킨 (전위렴) 과 드루(유대모) 가 상주하기로 결정이 난 상태엿다. 레이놀즈와 벨은 이듬해인 1896년 2워 목포에 내려와 약 2에이커 (2,500평)에 이르는 땅을 매입 하였다. 그러나 당초 1896년 4월에 예정이었던 목포의 자유무역항 개항이 갑자기 연기되었다. 아관파천으로 정국이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때 전마먼교의 중심지로 나주가 물망에 오른 적도 있었지만 1897년 뒤늦게 목포가 개항이 되자 남장로교 선교부는 그 해 10월 군산에서 열린 제6차 연례회의에서 전남 목포에 스테이션을 두기로 최종 결정했다.
이 자리에는 선교사들과 아울러 본국 선교본부에 총무 체스터가 함께 참석하고 있었다. 선교부는 목포스테이션 개설작업에 필요한 자금 1,500달러를 선교본부에 요청하는 동시에 선교사 벨을 그 책이마로 단독 지명하였다. 벨은 약1년간의 준비작업을 거쳐 1898년 가을 남장로교 한국선교부의 세 번째 지역 선교거범인 목포로 이주 하였다. 그후 선교사들이 잠정적으로 철수하는 1940년 까지 목포 스테이션은 전남 서부지역의 선교기지로서 복음 전파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 하게된다. 남녀 중등학교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와 병원 9프렌치기 기념병원) 그리고 스테이션 직할교회 (목포양동교회)를 아우르고 있었던 14,000평 규모의 넓은 선교구내에 상주했던 연인원 400여 명의 선교사들은 이 지역 거의 모든 기독교 현상의 제공자로 있으면서 지역교회의 형성과 발전에 기여하였다. 전형적인 미국 남부 장로교회의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던 소속 선교사들은, 안전한 선교 구내에서 미국식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한편 전도0교육-의료-여성 파트로 각기 역할을 나누어 조직적이고 전방위적인 협동 선교활동을 펼쳐 나갔다. 또 그 선교사들과 조사 들의 발걱ㄹ음은 내륙은 몰론 멀리 남해안 4개군 230개 섬에 걸쳐 있었던 천 여개의 마을들에 다다랏다. 설치 이듬해 30여명에 불과했던 목포스테이션 지경 내의 기독교인구는 1936년 약 6,400명으로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1개소에 불과했던 에배당은 모두 131개로 증가하였다. 당시 목포스테이션 관할 구역 내의 한구인 안수목사가 모두 4명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총3,177명에 달했던 세례교인 상당수는 선교사들이 직접 수세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부는 1904년 봄 열린 연레회의에서 광주에 스텡션을 하나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미 목포스테이션 개설경험을 갖고 있었던 벨에게 그 일을 맡겼다. 벨은 광주가 내려다 보이는 양림동 언덕에 기지를 확보하고 의료선교사 오웬(오기원)과 함께 1904년 12월 광주로 이사 하였다. 본격적인 선교 구내 조성 사업은 1905년 벨과 오웬의 양옥을 짓는 것으로 시작되어 대개 1914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그곳 10만여 평의 땅 위에는 프레스톤(변요한) 윌슨 (우일선) 코잇 (고라복)의 집 등 주택 9채와 병원 (광주기독병원) 학교(숭일과 수피아), 성경학원 건물이 들어 섰다. 당시 광주스테이션은 지역의 명물이었다. 구경꾼들이 몰려왔고 그들은 모두 탄성을 질렀다.양림덕 언덕에서 발원한 근대화 바람은 이렇게 광주를 강타했다.
전남 동부지역 기독교의 시작은 남장로교 순천 스테이션과 관련되어있다. 광주스테이션 소속 남장로교 선교사 오웬(오기원) 의 선교 노력으로 처음 교회가 세워졌던 이곳은 그후 프레스톤 (변요한)과 코잇 (고라복)의 순회 사역으로 강화되었다. 순천의 가능성에 주목한 남장로교 선교부는 결국 매곡동 언덕을 사들여 스테이션 조성에 나섰다. 이 때 미국 남부의 재력가 조지 왓츠가 기부한 거액의 현금이 답지하여, 춘천 스테이션은 종합적인 계획에 의해 학교와 병원 그리고 선교사 사택을 일괄적으로 지울 수 있었다. 순천 스테이션의 통게를 보면 1913년 전남 동부지역의 기독교인 총수는 1,549명 이었는데, 3년 후인 1916년에는 모두 2,507명으로 많이 늘었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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