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기독교 문화유산 (2016~) <답사지>/4.청주.충북

성공회 병천교회와 3.1운동

동방박사님 2019. 3. 26. 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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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병천교회와 3.1운동

  3.1운동에 대한 성공회의 공식 입장과 외국인 선교사들의 입장을 살펴보면서 이에 비추어 병천 성공회의 입장과 비교을 해보면 다음과 같다.

  당시 성공회의 공식입장을 알기 위해 1919년부터 [宗古聖敎會月報, 聖公會報]를 보면 3.1운동에 대한 기사나 글이 부재하다는 점이다. 이것으로 성공회의 공식입장을 알 수 없다고 추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3.1운동에 대해 성공회는 냉담내지는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를 것이다.

  일본과 영국은 1902년 러시아의 남진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군사 의무를 수반하는 英日同盟을 체결한 각별한 사이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에 성공회는 철저하게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세워 이런 애매한 입장표명을 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을 애써 외면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이는 비단 성공회에만 국한되는 경우는 아니고 당시 모든 교파의 기독교와 선교사들이 3.1운동에 대해 취했던 입장이다. 그러나 지배세력에 대해 정치적 중립이라는 논리 자체가 실상은 反日의 강한 의지가 아닐 수 없다는 사실이다. 통치자에 대한 정치적 중립 선언은 저항의 선언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선교사들의 정치적 중립 원칙이 논리적으로 親韓反日의 태도의 천명이란 사실을 목격할 수 있다.

  이런 논리로 볼 때 당시의 성공회 입장을 알 수 있는 宗古聖敎會月報에 이에 대한 기사가 없었다는 것은, 그리고 그 사태에 대하여 한국민에 대한 책망의 글 또한 없는 것도 철저하게 중립적 처신을 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결국 일본에 대한 무언의 저항이요, 친한반일의 태도의 천명이라고 볼 수 있겠다.

  또한 선교사들의 중대한 관심사가 한국의 독립이나 또 반대로 일본의 제국주의 확장과 같은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었다는데, 그 하나님 나라 건설이라는 것이 결국은 제국주의의 폭정이나 인권유린에 반대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하니 선교사들은 혹은 성공회의 직접적인 3.1운동 참여는 없었겠으나 '운동이 태동할 때부터 국제정세를 알려주고 운동의 방법을 조언하고 회의장소를 제공하는 등의 간접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운동이 전개된 후에는 피해상황과 한국민의 입장을 세계 여론에 호소하였다.


   병천 성공회도 예외는 아니어서 아우내 만세운동에서 모든 비밀회의 장소는 진명학교(성공회 선교학교)를 이용하였고, 그 젊은 학생들과 또 병천 성공회의 조직이었던 '기독청년회'가 적극 가담하였을 뿐만 아니라 학교 교사인 김구응 선생과 교회 전도사였던 박병무가 참여하였다는 것을 병천 성공회는 그리고 당시 교회 관할사제였던 구세실 신부는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저지하거나 만류하지 않고 묵인했다는 것은 결국 소극적인 도움으로 봐야 할 것이다. 

  또 진명학교의 선생과 젊은 학생들이 그리고 교인들이 대거 참여한 것은 물론 지역적인 문제도 있겠으나 단지 참여가 아니라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것은 그간의 희생의 기독교 정신과 학교 교육을 통한 민족정신 함양이 한 몫 했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병천 성공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