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역사기억여행 (2010~) <여행지>/3.삼일운동기억

일제의 탄압

동방박사님 2019. 4. 9.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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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탄압

일제는 3.1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하였습니다. 경찰과 헌병과 함께 소방대원도 동원 하였는데. 총과 칼은 몰론 소방용 갈고리 까지 휘둘러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 하였습니다. 또한 보병과 기병 등 군대를 배치하엿였니다.

4월에는 추가로 4천여 명의 중무장한 군인을 일본으로부터 파견하여 전국에 주둔시켰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된 사람들은 경무총감부와 종로경찰서 등으로 잡혀 갔으며, 모진 고문과 조사를 받았습니다. 그 후에는 재판을 받기위해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되었습니다. 서대문 형무소는 수용인원을 몇배나 넘겻지만 일제는 계속 사람들을 가두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모진고문을 견디고 더위, 추위와 싸우며 전염병등 각종질병을 이겨내야만 했습니다. 애석하게도 양한묵 유관순 등 많은 사람들이 옥중에서 사망하게 됩니다.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 지혈사]에 다르면 3.1운동 당시 수감자는 46,948명에 이르렀고 15,961명이 사망 하였다고 합니다,


군대의 증파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반응은 즉각적이엇다. 헌병과 경찰뿐 아니라 철도엄호대와 보병들 일반 군인들도 동원하여 만세운동을 진압하기 시작하였다. 서울에 보병 3개 주애와 기병 1개소대. 평양에 보병 기개 중대를 즉각 배치할것을 시작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역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탄압하였다. 이러한 조치에도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번지자 이를 저지하기위해  두차례에  걸쳐 만세운동이 발생하지 않은 지역까지 군대를 분산배치하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 해군함정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4월5일에는 일본에서 헌병 65명 보조헌병 339명이 증파되었고, 조선파견 보병대대의 파견이 결정되었다. 4월10일 부터 부산을 통해 조선에 들어온 6개대대 약 4,200명의 병사는 4월22일 전국 주요 도시에 주둔하였다. 단순히 부족한 헌병 인력의 증원일 뿐이라는 일제의 주장과 달리 이들은 개인화기뿐 아니라 기관총과 수류탄을 중무장한 상태였다.   


군대분산배치에정요도

임시조선파견 보병대대의 관할에정도이다. 이들은 원산, 조치원과 , 수원.평강, 사리원, 평양, 이리와 송정 나주에 각각 배치되어 만세운동의 확산을 차단하고 기존에 있던 일제 군경의 경게망을 보와나는 역할을 하였다.


군대분산배치에정요도

임시조선파견 보병대대의 관할에정도이다. 이들은 원산, 조치원과 , 수원.평강, 사리원, 평양, 이리와 송정 나주에 각각 배치되어 만세운동의 확산을 차단하고 기존에 있던 일제 군경의 경게망을 보와나는 역할을 하였다.

조선주차군 배치도

1917.11.9. 조선주차군사령부 / 개인소장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의 배치 상황을 알수 있다. 일제는 한반도의 무력통치와 대륙침략을 준비하기 위해 2개사단을 상주시켰는데, 1918년 조선군 사령부가 설치되기 전까지는 조선 주차권이라 불렀다.


경무총감부와 종로경찰서

태화관에서 자수한 민족대표들은 경무총감부로 끌려갔다.경무총감부는 조선의 경찰행정을 총괄하는 기관이었다.일제는 조선을 지배하기위해 런병과 경찰을 통합하여 치안을 담당하게 하였고, 그 수장인 경무총감은 헌병대 사령관이 겸직하도록 하였다. 특히 경무총감부의 고등경찰과는 독립운동가를 탄압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백범일지]에 이곳에는 밤이나 낮이나 고문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다른사람들은 인근 경찰서로 잡혀갔다. 그중 종로경찰서는 독립운동 사찰과 탄압으로 악명이 높은 곳이었다. 종로경찰서는 1915년 경성의 경찰 조직개편과 함께 북부경찰서가 폐지되면서 설치되었는데. 기존 한성 전기회사 건물을 고쳐 사용하였다. 많은 조선이 이곳에 구금되었으며 모진 고문으로 인해 성한 몸으로 돌아오기 어려웠다.




조선푸영인속 사진첩 1911


조선의 정무기관

조선의 경무기관 사진첩이다. 평양 헌병대장이 평양 경무부장을 겸하고 있으며 헌병중위는 경시, 헌병조장은 경부를 겸하고 있는 것을 통해 헌병경찰제도의 단면을 살펴볼수 있다.


종로 경찰서 사진엽서 1917

순사와 순사보을 위해 편찬한 국한문 혼용의 경찰업무 지침서이다. 대한제국때 부터 번역관과 통역생으로 일했던 일본인이 조선인 순사와 순사보의 교육을 목적으로 작성하였다. 경찰의 개념과 법규 해설, 경찰이 담당할 방대한 업무 등을 간단하고 쉽게 소개하고 있다. 


법원의 판결

경무총감부, 종로경찰서 등에 구금된 사람들은 경찰과 지방법원의 검사에게 조사를 받았고 공소가 결정되면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아여 했다. 민족대표 48인의 재판을 담당한 경성 지방법워능 에심에서 보안법고 출판법 위반이라는 검사의 의견을 뒤집고 내란죄를 적용하여 조선고등법원으로 사건을 넘겼지만, 최종적으로 1920년 10월30일 보안법, 출판법 등이 적용되어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들에게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은것은 일제가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질것을 우려하여 그 의미를 축소하고 왜곡하기 위함이었다. 


3.1운동 게보도 (1919년 3.22/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1919년 3월22일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에서 작성하여 조선총독과 육군대신 등에게 보고한 것이다. 민족대표 33인을 비롯하여 3.1운동이 어떻게 조직되었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이자료는 KBS탐사보도부 다큐멘터리 제작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어머님께 올린 글월. 1919/심훈 .

3.1운동에 참여하여 투옥된 당시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4학년이었던. 심훈이 감옥에서 어머니에게 쓴 편지이다. 생지옥과 같은 감옥살이을 하고 있지만 독립운동에 대한 강한 의지를 담고 있다.

"(전략) 어머님. 날이 몹시 더워서 풀 한포기 없는 감옥마당에 뙤약볕이 내려 쪼이고, 주황빛의 벽돌담으로 화로 속처럼 달고 방속에는 똥통이 끊습니다. 밤이면 가뜩이나 다리도 뻗어보지 못하는데, 반대, 벼룩이 다투어 가며 짓무른 살을 뜯습니다.(중략) 

우리가 천 번 기도를 올리기로서니 굳게 닫힌 옥문이 저절로 열려질리는 없겠지요, 우리가 아무리  






조선형무소 사진첩 1926

전국 각 도시마다 있었던 일제강범기의 형무소 모습과 내부시설 사진을 모아 발간한 사진첩이다.


원비 잔몽 1920





조선법령 집람 전 1920/ 조선총독부
















총검으로 눈을 찔린 조선인 / 사건이 지난지 일주일 후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