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대한민국 현대사 (독서>책소개)/1.해방전후.미군정

해방일기 8권

동방박사님 2021. 11. 28.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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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분단건국의 마지막 수순, 미소공위를 떠나 유엔으로”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에서 미국이 제안한 유엔 감시하의 남북총선거를 통한 한국정부 수립안이 가결됨으로써 유엔의 한국문제 개입이 시작되었다. ‘반탁’을 내걸고 미소공위 반대투쟁을 해온 친일파 중심의 ‘대한민국 건국 주도세력’은, 미국이 드디어 미소공위를 버리고 유엔으로 가자, 분단건국의 마지막 수순에 열을 올렸다. 소련이 이북 지역을 점령하고 있는 상태에서 유엔의 조선문제 개입은 그야말로 전쟁의 위험을 만들어낸 조치였다. 이 위험에 대해 조선의 정치세력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해방공간’의 역사적 의미를 되살리는 역사학자 김기협의 대장정, 그 여덟 번째 책『해방일기 권 - 의미를 잃어버린 해방』은 조선 문제가 미소공동위원회를 떠나 유엔으로 가게 된 까닭과 함께 이에 대한 조선의 정치세력의 대응을 주시하며 대한민국 건국과정에 있었던 문제점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가장 큰 문제는 분단 상태다. 건국 과정에 어떤 문제들이 있었는지, 그 문제들에 대한 어떤 책임이 이승만 세력과 김일성 세력, 미국과 소련에 있었는지 치밀하게 따지는 것이 분단 극복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일 것이다.

목차

머리말 분단건국의 길이 뚜렷해져 가고 있는데······

1. 미소공동위원회를 떠나 유엔으로
1947년 9월 3~26일

1947. 9. 3. 미국 정책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 웨드마이어 특사
1947. 9. 7. 갈림길에 선 이승만과 김구
1947. 9. 17. 조선 문제, 드디어 유엔으로
1947. 9. 19. 1947년의 유엔은 어떤 기구였나?
1947. 9. 21. 유엔 안보리의 거부권, ‘비민주적’인 것인가?
1947. 9. 24. “미소공위 끝났어요? 그럼 집에 갑시다”
1947. 9. 26. 민족주의자 이시영의 세 차례 퇴진 성명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미국은 왜 미소공위를 버리는가?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7년 9월

2. 미군정이 키워낸 ‘부패공화국’
1947년 10월 3~31일

1947. 10. 3. 미국인이 본 일본인 그리고 조선인
1947. 10. 5. 마셜플랜이 미소공동위원회에 끼친 영향
1947. 10. 8. 친일파 옹호는 미군정의 임무!
1947. 10. 12. 군정청 상무부는 이권의 복마전?
1947. 10. 15. 장택상식 ‘거지 단속’과 ‘폭동음모 분쇄’
1947. 10. 17. 조선 문제 드디어 유엔에 상정
1947. 10. 19. 미국 ‘좌경 저널리스트’가 본 조선의 분단건국 과정
1947. 10. 21. 10월 21일, 대한민국 ‘경찰의 날’이 될 수 없다
1947. 10. 24. 재산 뺏긴 김지태, 인격까지 짓밟아야 하나?
1947. 10. 29. “나는 대한민국을 비판적으로 지지한다”
1947. 10. 31. 미·소 간 적대적 공생관계의 산물, 조선 분단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김구 선생도 불순부정(不純不正)한 우익인가요?”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7년 10월

3. 38선을 굳힌 것은 누구였던가?
1947년 11월 2~30일

1947. 11. 2. 38선 이야기(1) 30분 만에 그어진 38선, 정말인가?
1947. 11. 5. 38선 이야기(2) 전기를 북쪽에서 얻어 쓰려니······
1947. 11. 7. 38선 이야기(3) 연백평야의 물값 시비
1947. 11. 14. 미국 속셈은 알겠는데, 소련 속셈은?
1947. 11. 16. 김구, 드디어 이승만과 갈라지려나?
1947. 11. 19. 드러나는 ‘민족진영’의 정체
1947. 11. 21. 송전(送電) 문제에 대한 한 수필가의 증언
1947. 11. 23. 김구, 다시 이승만 밑으로
1947. 11. 26. 허울이 벗겨진 ‘남조선과도정부’
1947. 11. 28. “의회 만드는 게 소꿉장난인 줄 아나?”
1947. 11. 30. 민족의 지도자는 어디에?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군정 연장을 획책하셨다고요?”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7년 11월

4. 어지러워진 김구의 행보
1947년 12월 2~31일

1947. 12. 2. 장덕수의 암살, 배후는 역시 김구?
1947. 12. 7. 김구의 ‘남조선 총선거’ 지지, 너무 빠른 표변
1947. 12. 10. 김구가 돌아서고 중간파만 남아서······
1947. 12. 13. 전력 운용 하나도 감당 못하던 ‘과도정부’
1947. 12. 14. 장덕수 암살로 궁지에 몰린 김구
1947. 12. 17. 동력 꺼진 기계와 같은 남조선 경제
1947. 12. 21. 김구의 오락가락 행보, “조직이 뭐길래······”
1947. 12. 24. 남조선의 도깨비방망이, 군정재판
1947. 12. 26. 전쟁 중에도 유화적 태도를 지킨 호찌민
1947. 12. 28. 엉망으로 돌아가는 도쿄전범재판
1947. 12. 31. “해방일기”를 잇는 “대한민국 실록”을 내다보며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경제민주화를 벌써 주장하셨군요”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7년 12월
 

저자 소개

저 : 김기협
 
195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이공계 수석으로 물리학과에 입학한 뒤, 사학과로 전과한 보기 드문 배경의 역사학자다. 문명사의 거시적인 관점에서 우리 역사와 동아시아 역사를 바라보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으며, ‘역사에세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통해 독자들과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경북대학교에서 중국 고대 천문학 연구로 석사학위를, 연세대학교에서 마테오 리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
 

책 속으로

올바른 경찰관이라면 식민지시대 경찰을 부끄러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군정시대 경찰을 부끄러워할 것이다. 그런데 군정청 경찰국 만든 날짜가 ‘경찰의 날’로 버티고 있는 것이 어찌된 일인가? 미군정이 백성을 억누르기 위해 식민지 경찰을 주축으로 만들었던 미군정 경찰, 그것과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대한민국 경찰이 당당히 선포할 대가 되었다. 그리고 국가경찰 제도는 민주국가에서 사라져야 한다. 민주국가다운 민주국가 중에는 일원화된 국가경찰 제도를 가진 곳이 없다. 경찰은 민주국가에서 봉사기관이고 독재국가에서 억압기구다. 봉사기관이라면 각자 자기 지역사회에 속해 있어야지, 상명하복의 전국적 일원체계를 가질 것이 아니다. 사회와 타협하고 구합할 필요 없이 임명권자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조병옥의 경찰은 파시스트 경찰이었다. 독재정치가 계속되는 동안 대한민국 경찰은 억압기구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봉사기관의 성격을 분명히 할 때가 한참 지났다. 극소구 정치경찰이 요직을 독점하고 경찰의 이름을 더럽히며 사회 발전을 가로막는 일이 잦은 것도 국가경찰 제도에 큰 원인이 있다. “국가경찰은 정의상 곧 경찰국가입니다.” 1947년 7월 웨드마이어 중장이 트루먼 대통령 특사로 조선을 시찰할 때 경찰의 미국인 고문 한 사람에게서 들었다는 말이다.
-1947. 10. 21. 일기 중에서

(전략) 마지막 문장은 김구를 장덕수의 암살 배후로 보는 시각이 적용된 것이다. 김구에 대한 장덕수의 존경심은 한결같은데도 김구가 장덕수를 죽였다는 의미에서 저자는 ‘비극’이란 표현을 썼다. 장덕수가 정말로 한결같이 김구를 존경했을까? 그 무렵에 실제로 일어난 일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인용된 장덕수의 주장에 거짓이 있음을 알아보지 못할 수 없다. 파탄의 원인을 국민당계와 신한민족당계의 질투심으로 돌린 말인데, 그들은 한민당이 친일파 지주정당이기 때문에 합당을 반대한 것이지, 지분이 줄어들까봐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한민당과의 합당이 실패했음에도 그들은 노선 차이 때문에 한독당과 곧 결별하게 되지 않는가.
송진우와 여운형의 암살 때도 김구가 배후라는 이야기가 유력하게 떠돌았다. 나는 그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장덕수의 암살에 대해서는 김구의 역할을 믿지 않을 수 없다.
- 1947. 12. 2. 일기 중에서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분단건국의 마지막 수순, 미소공위를 떠나 유엔으로”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에서 미국이 제안한 유엔 감시하의 남북총선거를 통한 한국정부 수립안이 가결됨으로써 유엔의 한국문제 개입이 시작되었다. ‘반탁’을 내걸고 미소공위 반대투쟁을 해온 친일파 중심의 ‘대한민국 건국 주도세력’은, 미국이 드디어 미소공위를 버리고 유엔으로 가자, 분단건국의 마지막 수순에 열을 올렸다. 소련이 이북 지역을 점령하고 있는 상태에서 유엔의 조선문제 개입은 그야말로 전쟁의 위험을 만들어낸 조치였다. 이 위험에 대해 조선의 정치세력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해방공간’의 역사적 의미를 되살리는 역사학자 김기협의 대장정, 그 여덟 번째 책『해방일기 권 - 의미를 잃어버린 해방』은 조선 문제가 미소공동위원회를 떠나 유엔으로 가게 된 까닭과 함께 이에 대한 조선의 정치세력의 대응을 주시하며 대한민국 건국과정에 있었던 문제점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가장 큰 문제는 분단 상태다. 건국 과정에 어떤 문제들이 있었는지, 그 문제들에 대한 어떤 책임이 이승만 세력과 김일성 세력, 미국과 소련에 있었는지 치밀하게 따지는 것이 분단 극복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일 것이다.


미·소 간 적대적 공생관계의 산물, 조선 분단

미국은 미소공위를 배제하고 안보리마저 회피하며 수적 우세를 자신할 수 있는 유엔총회로 조선 문제를 가져간 것은 소련의 동의 없이 한국의 정부수립을 추진하겠다는 뜻이었다. 유엔에서는 일사천리로 미국이 원하는 ‘가능지역 총선거’가 결정되었다. ‘가능지역’이란 바로 미국 점령하의 이남 지역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소련은 ‘조기 철군’과 조선인의 자주적 결정을 주장하며 유엔 결정을 보이콧했다. 저자는 소련의 대응 방식을 ‘모 아니면 도’로 평가하며, 미·소간 적대적 공생관계가 한반도의 분단건국의 조건을 완성되었다고 본다. 소련은 왜 현실성 없는 주장만 하다가 원치 않는 결의안이 나오자 향후 진행을 보이콧한다고 했을까? 저자는 두 나라의 직접 작용을 없앨 경우 이북의 친소세력이 이남의 친미세력보다 우위에 설 것으로 소련은 예상되었기 때문에 소련은 미국에서 함께 조선을 떠나자고 주장했다고 본다. 그러지 못할 경우 북쪽 절반을 확실히 움켜쥐는 편이 낫다고 스탈린이 판단했다는 것이다.


친일파, 분단건국의 마지막 수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도착이 임박한 1947년 연말, 한국현대사의 가장 큰 불행의 씨앗인 ‘분단’ 정국 앞에 선 정치상황은 어떠했던가. 친일파집단은 한민당과 이승만을 중심으로 모여 1947년 봄부터 미소 대립이 뚜렷해지자 분단건국 추진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평양의 집권세력은 겉으로 분단건국에 반대하면서 속으로는 독자적 정부 수립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른바 ‘혁명기지’를 세워 극우파의 ‘반공통일’에 ‘국토완정’으로 맞선다는 복안이었다. 좌우합작을 통한 분단건국 저지만이 유일한 목표였던 중간파는 영수 여운형이 암살당하자 행방을 잃고 있었다. 막강한 공권력과 자금(테러자금 포함)을 장악한 극우파의 반공 공세에 위축된 중간파는 1947년 연말 민족주주연맹을 결성하면서도 좌익 인사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일 수 없었다. 그 대신 김구가 이끄는 한독당이 분단건국 저지 노력에 참여할 기색을 보임에 따라 ‘좌우합작’이 아닌 ‘우익연합’으로 중간파의 노선이 돌아서게 된다.


분단건국 앞에서 갈팡질팡하는 김구

김구는 이승만, 한민당 등 분단건국 추진세력과 반탁운동을 함께했다. 그런데 미소공위가 최종 결렬에 이르고 분단건국의 가능성이 뚜렷해지자 다른 입장을 보이기 시작했다. 민족주의 입장을 초지일관 지킨 것이라고 불 수 있지만 저자는 분단건국 방안이 구체화함에 따라 ‘임정 봉대’ 주장이 분단건국 추진세력 내에서 외면당하게 되었기 때문이라 분석한다. 1947년 가을 중 김구의 행보에는 그가 민족주의 이념보다 전략적 득실에 따라 분단건국에 대한 입장을 선택했다고 보는 견해를 뒷받침하는 대목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12월 초 김구는 이승만과의 빅딜, 즉 자신의 세력 확장을 꾀하는 조건으로 ‘남조선 총선거’를 지지한다며 돌아섰다. 유엔에서 분단건국의 결과를 초래할 조선 문제 처리가 진행되는 동안 세력 확장에만 몰두해서 오락가락 행보를 보였던 백범 김구의 너무
빠른 표변이었다. 이제는 중도 우익을 크게 넘어서지 못하는 중간파의 민족자주연맹만이 분단건국에 확고히 반대하는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추천평

『해방일기』를 읽으면서 통쾌하면서 낄낄댔던 부분이 바로 대담한 해석과 과감한 추측입니다. 그리고 가장 돋보이는 대목은 ‘한 일’이 아니라 ‘안 한 일’에 주목한 것입니다.
- 한홍구 / 성공회대 교수ㆍ『대한민국사』저자

저자가 해방 정국을 통해 찾아낸 것은 오늘의 비이성적인 정치의 기원이었습니다.
- 박태균 / 서울대 교수ㆍ『한국전쟁』저자

김기협의 『해방일기』에는 『해방전후사의 인식』 이후 근 20년 동안 축적된 한국 현대사 연구의 성과가 망라되어 있습니다.
- 장정일 / 소설가
 

 

우리는 일제의 식민지지배에서 해방되고, 대한민국이 건국되는 해방공간에서 일어난 일들을 피상적으로 알고 있다. 광복에서부터 대한민국이 수립되던 그 때까지, 미군정청과의 갈등 그리고 극심한 좌우대립을 겪었던 것이 전부인양 알고 있기도 하다. 또한 반탁운동과 미소공위의 결렬, 그리고 유엔이 총회에서 결의한 남북한 총선거에 대해, 일방의 주장만이 진실이고 전부인양 배워왔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역사학자 김기협이 해방공간의 역사적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 쓰는 해방일기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는 1945 8월 해방 전후부터 시작하여 대한민국이 건국되는 1948 8월까지, 해방 후 3년 동안 일어났던 일을 총 10권의 책에 일기형식으로 담겠다고 한다. 이 책은 그 여덟 번째 책으로 1947 9월부터 그 해 연말까지를 담고 있다.

 

1947 10 30, 유엔총회 정치위원회는 남북총선거를 위한 유엔감시위원회를 조선에 파견하는 것을 결의 하였고, 마침내 11 14일 미국이 제안한 유엔감시하의 남북총선거를 통한 정부 수립안이 유엔총회에서 가결되었다. 이제 조선의 건국은 미소공위를 떠나 유엔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1947 5월 미소공위가 재개되고, 미소 양국이 진지하게 회담에 임하면서 통일건국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었다. 그러나 이승만으로 대표되는 극우파의 극렬한 저항과 중간파로 미소공위를 주도하고 있던 여운형의 암살, 그리고 미국측의 태도변화는 끝내 미소공위가 결렬되게 만들었다. 미국은 9월이 들어서면서 조선문제를 미소공위가 아닌, 자신들이 확실하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엔으로 옮기는 것을 확정했고, 마침내 10 22일 소련대표단이 서울을 떠남으로써 조선 독립건국의 통로로 여겨지던 미소공위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미국은 소련과의 타협대신 조정이 가능한 유엔총회로 조선문제를 가져갔고, 내용은 미소 양국 군대의 철수 없이 총선거를 치르자는 것이었다. 당시 유엔은 미국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기에 아무리 말이 안 되는 것이라도 미국이 밀어 부치면 가능했다. 그러나 평화와 안보에 관한 것은 안보리를 거치게 되어 있었고, 이 경우 소련의 거부권을 의식한 미국은 자신들의 행동이 유엔의 안전보장 기능을 위협하는 조치임에도 불구하고 총회상정이라는 수를 택한 것이다. 이는 미국이 이남만이라도 확실한 자기세력권 안에 두겠다는 것을 의미했다면, 소련의 대응방식 역시 이북만이라도 자신들의 세력권 안에 두겠다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고 저자는 말한다. 결국 소련도 내심으로는 분단건국을 바라고 있었으며, 이는 미국과 소련이 조선문제에 있어 적대적 공생관계에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1948 8월 분단건국 후, 남북은 각기 정통성을 주장하며 상대방을 괴뢰로 규정했다. 대한민국은 정통성을 내세우는 근거로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고, 유엔의 승인을 받았다는 것을 국민에게 선전했으며, 이는 1991년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가입 하기 전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유엔에 회원가입이 안되었기에 유엔의 승인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국내정치 세력 중 이런 분단건국을 가장 반긴 것은 바로 극우세력이었다.

 

해방 후, 조선의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반탁세력은 김구, 이승만, 한민당의 세 갈래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신탁통치 반대와 좌익을 극도로 배척하는 극우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당시까지 민족주의 이념을 지키는 정상적인 극우는 김구뿐이었다고 한다. 한민당은 친일지주들이 주축이 된 반동적인 이익집단이었고, 이승만은 권력만을 노리는 정상배 집단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정치적 동기는 이념이 아니라 이해관계였다. 해방이전 확보한 기득권을 지키고 미국의 비호아래 더 키워 나가려는 한민당에 기회주의적 정상배들이 반공을 핑계로 손 잡은 것이다. 유엔총회의 유엔감시하 가능한 지역의 총선거 가결을 계기로 이들 사이의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민당과 이승만은 이미 분단건국을 기정사실화 했기 때문에, 유엔감시조차 필요 없다며 빨리 실시하자고 미군정을 압박했고, 김구는 남북총선거를 주장했다. 그러나 이승만과 회담 후, 그는 돌연 남조선만의 총선거를 지지하기에 이른다. 분단건국 앞에서 갈팡질팡하는 김구의 행보에 대해 저자는, 김구가 민족주의 이념보다는 전략적 득실에 따라 입장을 선택했다고 보는 견해를 뒷받침하는 대목이 많이 있었다고 말한다. 이승만은 이후 김구를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게 만든다. 이승만과 한민당은 반탁운동이 시작될 때는 김구의 도움이 필요했고, 김구는 임정추대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해관계가 일치했었으나, 1947년 이후 이승만 등 단정세력에게 김구의 매력은 거의 없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 이었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해방공간에서 일어났던 일을 살펴보면서 주로 건국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그 당시 국민들의 생활에 대한 면은 소홀한 감이 있지만, 당시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 미군정은 경찰을 전위로 하여 점령지를 유지하였다. 다시 말해 당시의 조선은 경찰국가의 면모를 띠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경찰의 숫자는 일제강점기보다 갑절이 더 많았고, 이는 미군정 통치가 일본의 식민통치보다도 더 억압적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더욱이 경찰은 자신들의 충성대상이 조선인 사회가 아니라, 미군정이라는 사실을 스스럼없이 표방하고 있었으니, 국민들의 삶이 얼마나 피폐하였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혼란스러웠던 그 시절, 우리가 그 때의 일들을 살펴보는 까닭은 과거를 한탄하고, 아쉬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공간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교훈 삼아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우리는 객관적인 사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해방일기를 읽으면서 알아가는 사실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그 공간에서 일어난 일들을 얼마나 왜곡되고 편파적으로 알아왔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제 분단건국이 완성되는 1948년이 시작되었다. 9권과 10권에서는 과연 어떤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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