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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역사학자 김기협의 해방일기,
65년 전의 ‘오늘’에서 민족의 미래를 찾는다
『해방일기 9 : 해방된 자, 누구였던가』는 1948년 1월에서 4월까지를 들여다본다. 1947년 하반기 미소공위 결렬과 조선 문제 유엔 상정으로 분단건국의 가능성이 짙어진 가운데 1948년 봄, 이남에서는 통일건국이라는 애초의 유엔 결의(1947. 11. 17.)를 ‘가능지역 선거’(1948. 3. 12.)로 변형시켜 실질적인 단독선거를 향했다. 소련과 이북 당국이 유엔위원단의 이북 지역 활동을 허용하지 않았으므로 ‘가능지역’이란 바로 미군 점령하의 이남 지역을 뜻하는 것이었다.
분단건국 추진세력은 유엔임시조선위원단을 ‘칙사’처럼 받들었다. 미군정과 경찰의 존재 앞에서 선거의 ‘자유분위기’는 바랄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엔임시조선위원단이 곡절 끝에 선거의 정당성을 인정해줬기 때문에 후세에 모윤숙과 낙랑클럽의 ‘성 로비’ 설까지 남게 된다.
분단건국의 문제점이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했다는 미진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통일되어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민족이 두 국가로 분리되었을 때 그 부자연스러운 상황이 일으키지 않을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는 것이다. 전쟁과 독재다. 1948년의 조선은 분단, 독재, 전쟁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65년 전의 ‘오늘’에서 민족의 미래를 찾는다
『해방일기 9 : 해방된 자, 누구였던가』는 1948년 1월에서 4월까지를 들여다본다. 1947년 하반기 미소공위 결렬과 조선 문제 유엔 상정으로 분단건국의 가능성이 짙어진 가운데 1948년 봄, 이남에서는 통일건국이라는 애초의 유엔 결의(1947. 11. 17.)를 ‘가능지역 선거’(1948. 3. 12.)로 변형시켜 실질적인 단독선거를 향했다. 소련과 이북 당국이 유엔위원단의 이북 지역 활동을 허용하지 않았으므로 ‘가능지역’이란 바로 미군 점령하의 이남 지역을 뜻하는 것이었다.
분단건국 추진세력은 유엔임시조선위원단을 ‘칙사’처럼 받들었다. 미군정과 경찰의 존재 앞에서 선거의 ‘자유분위기’는 바랄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엔임시조선위원단이 곡절 끝에 선거의 정당성을 인정해줬기 때문에 후세에 모윤숙과 낙랑클럽의 ‘성 로비’ 설까지 남게 된다.
분단건국의 문제점이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했다는 미진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통일되어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민족이 두 국가로 분리되었을 때 그 부자연스러운 상황이 일으키지 않을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는 것이다. 전쟁과 독재다. 1948년의 조선은 분단, 독재, 전쟁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목차
머리말 김구의 각성은 때를 놓친 것이었던가?
1. 유엔에서 온 ‘칙사’들
1948년 1월 2~30일
1948. 1. 2. 경찰국가의 새해가 밝았다
1948. 1. 7. 유엔에서 온 ‘칙사’들
1948. 1. 9. 너무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이승만
1948. 1. 11. 전쟁과 독재는 분단건국의 당연한 결과
1948. 1. 14. 시리아대표 닥터 자비의 활약
1948. 1. 16. 김구가 과연 장덕수 암살의 배후?
1948. 1. 18. ‘족청(族靑)’은 ‘제3의 길’이었던가?
1948. 1. 21. 소련의 협력 거부에 직면한 유엔위원단
1948. 1. 23. 경성전기에서 욕보는 사람들, 누구였나?
1948. 1. 28. 김구, 남북협상의 길로 돌아서다
1948. 1. 30. “모든 것을 바칩니다!” 낙랑클럽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사실은 새해를 낙관하지 못하시는 거죠?”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8년 1월
2. 진면목을 찾은 김구
1948년 2월 1~27일
1948. 2. 1. 당대 대표적 사상가들의 조선 현실 인식
1948. 2. 4. 국익에 충실한 조선위원단 위원들
1948. 2. 8. 남북협상의 길에서 벗어난 남로당 노선
1948. 2. 11. ‘읍고(泣告)’를 통해 진면목을 찾은 김구
1948. 2. 13. 한민당 “전 조선 총선거를 이남에서 치르자!”
1948. 2. 15. 뉴욕으로 건너간 조선의 운명
1948. 2. 18. 건국에 앞서간 이북, 분단건국을 향해서?
1948. 2. 20. 메논 의장, 보고연설까지는 좋았는데······
1948. 2. 22.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막장 드라마’
1948. 2. 25. 소련도 미국의 ‘조선 결의안’ 통과를 도와줬다!
1948. 2. 27. 남북협상······ 여운형이 있었다면!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김구 선생, 또 바꾸진 않겠죠?”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8년 2월
3. 남북협상의 동상이몽
1943년 3월 1~29일
1948. 3. 1. 정면충돌로 치닫는 김구와 이승만
1948. 3. 6. 중간파의 태생적 갈등: 원칙론과 현실론
1948. 3. 8. 장덕수의 유령에게 시달리는 김구
1948. 3. 11. 단독선거안에 대한 캐나다대표의 맹렬한 반대
1948. 3. 13. “가능지역 총선거” 드디어 결정되다!
1948. 3. 15. 김구와 김석황, 누가 거짓말을 한 것인가?
1948. 3. 18. 검찰이 경찰의 횡포에 항의하던 시절
1948. 3. 20. “어떤 테러든지 보호해주겠다!” 우리 쪽 테러라면
1948. 3. 22. 핵무기 아닌 ‘돈 폭탄’을 걱정하던 이남 극우세력
1948. 3. 25. 북쪽에서 온 회답, 왜 그리 늦었나?
1948. 3. 27. 남북협상을 둘러싼 동상이몽
1948. 3. 29. 남북회담 성사를 위한 민족주의자들의 양보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장택상의 ‘빨대질’이야 개 짓는 소리로······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8년 3월
4. 목소리를 빼앗긴 민족주의
1948년 4월 3~29일
1948. 4. 3. 4·3항쟁, ‘좌익 탄압’ 아닌 ‘제주인 탄압’의 결과
1948. 4. 5. 인권을 거부당한 제주도 ‘인디언’
1948. 4. 8. 도청소재지에 한 번씩 들르는 ‘선거 감시’
1948. 4. 10. 한국여론협회: “자발적 선거인등록은 7퍼센트 미만!”
1948. 4. 12. 중간파의 선거 참여를 ‘기회주의’라니, 뭐 묻은 개가······
1948. 4. 15. 김규식, “평양에 가기는 가야겠지만······”
1948. 4. 17. 남조선을 무법천지로 만든 조병옥의 ‘향보단’
1948. 4. 19.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김구
1948. 4. 22. 되돌아온 콤비, 김구 주석과 김규식 부주석
1948. 4. 24. 홍명희는 왜 ‘연석회의’에 들러리로 나섰을까?
1948. 4. 26. 민족갈등과 좌우대립이 겹쳐진 ‘한신(阪神) 교육투쟁’
1948. 4. 29. 목소리마저 빼앗긴 민족주의자들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미국의 잘못입니까, 조선인의 잘못입니까?”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8년 4월
1. 유엔에서 온 ‘칙사’들
1948년 1월 2~30일
1948. 1. 2. 경찰국가의 새해가 밝았다
1948. 1. 7. 유엔에서 온 ‘칙사’들
1948. 1. 9. 너무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이승만
1948. 1. 11. 전쟁과 독재는 분단건국의 당연한 결과
1948. 1. 14. 시리아대표 닥터 자비의 활약
1948. 1. 16. 김구가 과연 장덕수 암살의 배후?
1948. 1. 18. ‘족청(族靑)’은 ‘제3의 길’이었던가?
1948. 1. 21. 소련의 협력 거부에 직면한 유엔위원단
1948. 1. 23. 경성전기에서 욕보는 사람들, 누구였나?
1948. 1. 28. 김구, 남북협상의 길로 돌아서다
1948. 1. 30. “모든 것을 바칩니다!” 낙랑클럽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사실은 새해를 낙관하지 못하시는 거죠?”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8년 1월
2. 진면목을 찾은 김구
1948년 2월 1~27일
1948. 2. 1. 당대 대표적 사상가들의 조선 현실 인식
1948. 2. 4. 국익에 충실한 조선위원단 위원들
1948. 2. 8. 남북협상의 길에서 벗어난 남로당 노선
1948. 2. 11. ‘읍고(泣告)’를 통해 진면목을 찾은 김구
1948. 2. 13. 한민당 “전 조선 총선거를 이남에서 치르자!”
1948. 2. 15. 뉴욕으로 건너간 조선의 운명
1948. 2. 18. 건국에 앞서간 이북, 분단건국을 향해서?
1948. 2. 20. 메논 의장, 보고연설까지는 좋았는데······
1948. 2. 22.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막장 드라마’
1948. 2. 25. 소련도 미국의 ‘조선 결의안’ 통과를 도와줬다!
1948. 2. 27. 남북협상······ 여운형이 있었다면!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김구 선생, 또 바꾸진 않겠죠?”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8년 2월
3. 남북협상의 동상이몽
1943년 3월 1~29일
1948. 3. 1. 정면충돌로 치닫는 김구와 이승만
1948. 3. 6. 중간파의 태생적 갈등: 원칙론과 현실론
1948. 3. 8. 장덕수의 유령에게 시달리는 김구
1948. 3. 11. 단독선거안에 대한 캐나다대표의 맹렬한 반대
1948. 3. 13. “가능지역 총선거” 드디어 결정되다!
1948. 3. 15. 김구와 김석황, 누가 거짓말을 한 것인가?
1948. 3. 18. 검찰이 경찰의 횡포에 항의하던 시절
1948. 3. 20. “어떤 테러든지 보호해주겠다!” 우리 쪽 테러라면
1948. 3. 22. 핵무기 아닌 ‘돈 폭탄’을 걱정하던 이남 극우세력
1948. 3. 25. 북쪽에서 온 회답, 왜 그리 늦었나?
1948. 3. 27. 남북협상을 둘러싼 동상이몽
1948. 3. 29. 남북회담 성사를 위한 민족주의자들의 양보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장택상의 ‘빨대질’이야 개 짓는 소리로······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8년 3월
4. 목소리를 빼앗긴 민족주의
1948년 4월 3~29일
1948. 4. 3. 4·3항쟁, ‘좌익 탄압’ 아닌 ‘제주인 탄압’의 결과
1948. 4. 5. 인권을 거부당한 제주도 ‘인디언’
1948. 4. 8. 도청소재지에 한 번씩 들르는 ‘선거 감시’
1948. 4. 10. 한국여론협회: “자발적 선거인등록은 7퍼센트 미만!”
1948. 4. 12. 중간파의 선거 참여를 ‘기회주의’라니, 뭐 묻은 개가······
1948. 4. 15. 김규식, “평양에 가기는 가야겠지만······”
1948. 4. 17. 남조선을 무법천지로 만든 조병옥의 ‘향보단’
1948. 4. 19.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김구
1948. 4. 22. 되돌아온 콤비, 김구 주석과 김규식 부주석
1948. 4. 24. 홍명희는 왜 ‘연석회의’에 들러리로 나섰을까?
1948. 4. 26. 민족갈등과 좌우대립이 겹쳐진 ‘한신(阪神) 교육투쟁’
1948. 4. 29. 목소리마저 빼앗긴 민족주의자들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미국의 잘못입니까, 조선인의 잘못입니까?”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8년 4월
책 속으로
‘낙랑클럽’이란 이름부터 참 고약하다. 우리 역사 초창기 이민족의 침략과 지배를 상징하는 이름이 ‘낙랑’이다. 해방 조선에서 외국인 접대를 목적으로 모인 엘리트 여성 집단이 하필 ‘낙랑’이란 이름을 쓰다니, 2,000년 전 토착문화보다 우월한 중국 문명을 이민족 지배 아래 누리던 ‘식민지 낙랑’이 이 집단의 소망이었다면 더 할 말 없다.
더 고약한 것은 ‘낙랑’과 ‘여성’이 합쳐질 때 바로 떠오르는 것은 ‘낙랑공주’의 이미지다. 이웃나라 왕자와 사랑에 빠져서 침략의 길을 열어주는 데 목숨 바친 ‘미친 년’ 아닌가. 정말 ‘문학적·문화적 교류’가 이뤄져 낙랑공주 설화를 알게 된 외국인이라면 낙랑클럽 멤버의 환대를 받으면서 상대를 어떤 눈으로 보았겠는가.
낙랑클럽과 모윤숙의 이름이 유엔조선위원회에 대한 로비활동으로 회자되는 것은 ‘매춘’의 선정성 때문이다. 나는 모윤숙의 성적 매력이 한국현대사의 전개방향에 결정적 작용을 했다고 믿을 수 없다. 중국고대사에는 말회니 달기니 포사니 하여 성적 매력으로 나라를 멸망시킨 여성의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있어서 ‘경국지색(傾國之色)’이란 말까지 만들어지기에 이르렀는데, 대중적 설화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 1948. 1. 30. 일기 중에서
소련의 역할보다는 이북 지도부의 내부문제를 생각할 여지가 많다. 우선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북로당 측에서 이남의 남북협상파에 대해 주도권을 잡고 싶어했으리라는 점을 생각할 수 있다. 김구와 김규식이 2월에 보낸 편지는 4김 ‘지도자회담’을 제안한 것이었는데, 3월 25일 평양방송이 전한 것은 ‘연석회의’ 초청이었다.
실제로 4월에 김구와 김규식이 평양에 갔을 때 김구는 연석회의에 한 차례 나가 인사만 했고 김규식은 얼굴도 비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지도자회담에 집착했던 것이다. 그런대 ‘지도자회담’이라 할 때 북로당과 인민위원회를 대표하고 영도하고 있던 김일성과 김두봉에 비해 김구와 김규식의 이남 ‘지도자’로서의 무게에는 차이가 있었다. 이북의 총체적 지도자들이 이남 일부 세력의 지도자들과 대등하게 참여하는 ‘지도자회담’이 남북협상의 보조적 역할은 몰라도 중심적 역할을 맡을 수는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남북협상에 임하는 김구와 김규식의 선의를 아무리 존중한다 해도 4인 회담에 집착한 자세에는 비판할 점이 있다. 이북 지도부는 선거 등의 절차를 통해 인민의 지지를 확보해놓은 집단인데, ‘영수’들끼리의 합의만을 통해 남북협상을 진행한다는 데는 명분과 실제 양쪽으로 한계가 있었다. 협상의 주 무대로 연석회의를 이북 측에서 준비한 것은 타당성 있는 조치였다. - 1948. 3. 25. 일기 중에서
더 고약한 것은 ‘낙랑’과 ‘여성’이 합쳐질 때 바로 떠오르는 것은 ‘낙랑공주’의 이미지다. 이웃나라 왕자와 사랑에 빠져서 침략의 길을 열어주는 데 목숨 바친 ‘미친 년’ 아닌가. 정말 ‘문학적·문화적 교류’가 이뤄져 낙랑공주 설화를 알게 된 외국인이라면 낙랑클럽 멤버의 환대를 받으면서 상대를 어떤 눈으로 보았겠는가.
낙랑클럽과 모윤숙의 이름이 유엔조선위원회에 대한 로비활동으로 회자되는 것은 ‘매춘’의 선정성 때문이다. 나는 모윤숙의 성적 매력이 한국현대사의 전개방향에 결정적 작용을 했다고 믿을 수 없다. 중국고대사에는 말회니 달기니 포사니 하여 성적 매력으로 나라를 멸망시킨 여성의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있어서 ‘경국지색(傾國之色)’이란 말까지 만들어지기에 이르렀는데, 대중적 설화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 1948. 1. 30. 일기 중에서
소련의 역할보다는 이북 지도부의 내부문제를 생각할 여지가 많다. 우선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북로당 측에서 이남의 남북협상파에 대해 주도권을 잡고 싶어했으리라는 점을 생각할 수 있다. 김구와 김규식이 2월에 보낸 편지는 4김 ‘지도자회담’을 제안한 것이었는데, 3월 25일 평양방송이 전한 것은 ‘연석회의’ 초청이었다.
실제로 4월에 김구와 김규식이 평양에 갔을 때 김구는 연석회의에 한 차례 나가 인사만 했고 김규식은 얼굴도 비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지도자회담에 집착했던 것이다. 그런대 ‘지도자회담’이라 할 때 북로당과 인민위원회를 대표하고 영도하고 있던 김일성과 김두봉에 비해 김구와 김규식의 이남 ‘지도자’로서의 무게에는 차이가 있었다. 이북의 총체적 지도자들이 이남 일부 세력의 지도자들과 대등하게 참여하는 ‘지도자회담’이 남북협상의 보조적 역할은 몰라도 중심적 역할을 맡을 수는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남북협상에 임하는 김구와 김규식의 선의를 아무리 존중한다 해도 4인 회담에 집착한 자세에는 비판할 점이 있다. 이북 지도부는 선거 등의 절차를 통해 인민의 지지를 확보해놓은 집단인데, ‘영수’들끼리의 합의만을 통해 남북협상을 진행한다는 데는 명분과 실제 양쪽으로 한계가 있었다. 협상의 주 무대로 연석회의를 이북 측에서 준비한 것은 타당성 있는 조치였다. - 1948. 3. 25. 일기 중에서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김구 선생의 각성은 때를 놓친 것이었던가?”
- 1948년의 조선은 분단, 독재, 전쟁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해방공간’의 역사적 의미를 되살리는 역사학자 김기협의 대장정 ‘해방일기 10권 완간’이 눈앞에 다가왔다.『해방일기 9-해방된 자, 누구였던가』는 1948년 1월에서 4월까지를 들여다본다. 1947년 하반기 미소공위 결렬과 조선 문제 유엔 상정으로 분단건국의 가능성이 짙어진 가운데 1948년 봄, 이남에서는 통일건국이라는 애초의 유엔 결의(1947. 11. 17.)를 ‘가능지역 선거’(1948. 3. 12.)로 변형시켜 실질적인 단독선거를 향했다. 소련과 이북 당국이 유엔위원단의 이북 지역 활동을 허용하지 않았으므로 ‘가능지역’이란 바로 미군 점령하의 이남 지역을 뜻하는 것이었다.
분단건국 추진세력은 유엔임시조선위원단을 ‘칙사’처럼 받들었다. 미군정과 경찰의 존재 앞에서 선거의 ‘자유분위기’는 바랄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엔임시조선위원단이 곡절 끝에 선거의 정당성을 인정해줬기 때문에 후세에 모윤숙과 낙랑클럽의 ‘성 로비’ 설까지 남게 된다.
1947년 12월 초, 김구는 이승만과의 빅딜, 즉 자신의 세력 확장을 꾀하는 조건으로 ‘남조선 총선거’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1948년 2월 10일 “3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을 통해 “통일정부 독립만 위하여 노력할 것”이라며 단독선거에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제창하는 쪽으로 노선을 돌린다. 민족주의자로서 진면목을 되찾은 것이다. 김구가 이승만과 정면충돌하며 분단건국 반대에 나서자 김규식이 이끌던 중도 우익의 민족자주연맹(민련)은 좌우합작 대신 우익연합으로 방향을 잡는다. 민련과 한독당을 중심으로 형성된 우익연합은 4월 중·하순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에 임했으나 분단건국 저지의 성과를 거두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미·소 군정이 들어선 후 초기에 약간의 인민 저항이 있다가 차츰 사라진 이북과는 반대로, 이남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저항이 강해졌다. 제주 4·3 사태는 미군정의 구조적 문제를 극명하게 드러내주었다. 1947년 3월 ‘민관 총파업’ 탄압으로 시작된 공포 분위기는 1년 이상을 끌면서 ‘좌익 탄압’이 아닌 ‘제주인 탄압’으로 확대되어가기만 했다. 4·3 항쟁은 좌익의 우익에 대한 항쟁이 아니라 미군정과 육지인에 대한 제주인의 항쟁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북 지도부 또한 독자적 건국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통일건국을 위한 자기네 쪽 준비라고 명분을 걸었지만 통일건국이 여의치 않을 경우 단독건국이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태세였다.
분단건국의 문제점이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했다는 미진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통일되어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민족이 두 국가로 분리되었을 때 그 부자연스러운 상황이 일으키지 않을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는 것이다. 전쟁과 독재다. 1948년의 조선은 분단, 독재, 전쟁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김기협의 『해방일기』대장정은 2015년 2월에 전10권이 완간으로 마무리된다.
읍고(泣告)를 통해 진면목을 찾은 김구
“『해방일기』작업 동안 내 마음속에서 매우 큰 변화를 겪은 것의 하나가 ‘김구 선생’의 모습이다. 서술에 일체의 경칭을 쓰지 않기로 원칙을 세우고 내 아버지(김성칠 선생)에게까지 그 원칙을 적용하면서도 김구 이야기를 할 때는 그 이름 뒤에 ‘선생’을 붙이지 않는 것이 마음속으로 불편하게 느껴졌다. 1946년이 다 지나갈 때까지도 그랬다. 그런데 1947년 들어 반탁운동을 재개할 무렵부터 그 불편함이 사라졌다. 경칭 안 쓰는 원칙에 익숙해진 탓도 있겠지만, 내 마음속의 민족의 영웅 ‘김구 선생’이 그동안 ‘상대화’ 과정을 겪었다는 데 더 큰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를 존경하는 마음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이제 그의 인간적 한계를 바탕에 깔고 그의 고뇌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본문 175~176쪽
김기협 선생은 ‘해방일기’를 통해 반탁운동의 반민족적 성격을 규명해왔다. 김구가 이승만과 손잡고 이끈 반탁운동은 순수한 ‘반탁’이 아니라 ‘반공반소’ 운동을 위한 간판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승만이 원하는 방향의 반탁운동에 김구가 말려든 이유가 무엇인가? 저자는 이 점이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라 한다. 한민당의 ‘임정 봉대(奉戴)’ 주장에 현혹되었다면 그의 지혜를 의심할 일이고, 민족주의 진영의 헤게모니를 노린 것이었다면 그의 도덕성을 의심할 일이었다. 확실한 것은, 백범 김구를 완전무결한 민족주의 지도자로 받들어 보던 우리 사회의 통념에서 거품을 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해방일기 9권』은 김구가 보여주는 태도가 과연 그의 진면목이었는지 상황 진행을 보면서 확인한다. 그는 온갖 유혹과 위협에 처해 있었다. 그런 유혹과 위협 속에서 그가 지킨 자세를 통해 민족주의자로서 그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후세의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김구의 모습은 1948년 1월 하순 이후 분단건국에 반대한 모습이다. 그로부터 불과 몇 주일 전까지 그가 이승만의 분단건국 노선을 전폭 지지하고 있던 모습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에 앞서 귀국 이래 그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온 반탁운동이 미소공위를 좌초시킴으로써 분단건국 노선을 도와준 것이라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중략) 그러나 나는 1948년 1월 이후 분단건국에 반대한 그의 태도가 그의 진면목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귀국 이래 그의 행보가 그 스스로 원치 않은 결과를 행해 움직여 온 것은 상황 인식의 결함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상황을 너무 만만하게 봤다는 것이다. 미·소 대결이 심화되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는 민족주의자들이 좌우합작에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었는데, 그가 좌익 일부에 대한 의심 때문에 좌우합작 자체를 외면한 것은 좌우합작 없이도 민족국가 건설이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민족주의 자체를 개인 영달을 위한 수단으로 여겼을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본문 176~177쪽
소련도 미국의 ‘조선 결의안’ 통과를 도와줬다!
“조선위원은 그 사업을 추진시켜 미군이 점령하고 있는 남조선에만 선거를 실시하고 남조선에 조선 전체를 위한 정부를 수립할 수도 있다.”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의 새로운 결의, 이것이 남조선 단독건국에 유엔이 나서는 출발점이었다. 미국이 제안한 이 결의안에 찬성이 31표, 반대가 2표, 기권이 11표였다. 소총회의 의결에는 참석회원의 3분의 2 찬성이 필요했다. 필요한 30표를 넘겼기 때문에 이 결의안이 통과된 것이다. 저자는 여기서 소련의 보이콧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고 한다. 애초에 소총회를 1년간의 한시적 기구로 만든 것은 소련의 거부권이 있는 안보리를 우회하기 위해 미국이 제안한 것이었다. 대다수 회원국이 미국의 제안을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에 소총회의 결의 조건을 참석국의 3분의 2 찬성으로 까다롭게 만들어놓았다. 압도적 찬성이 아니면 통과될 수 없게 한 것이다.
소련과 동구 5개국이 이날 소총회를 보이콧했기 때문에 찬성 30표가 필요했다. 6국이 참석했다면 34표가 필요했을 것이고, 조선 관계 새 결의안은 통과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면 단독건국보다 더 합당한 것으로 조선위원단이 추천했던 다른 방안, 즉 남조선만을 대표하는 임시정부를 일단 만들고 최종적 건국을 뒤로 미루는 방안이 채택되었을 것이다. 소총회 결의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조선위원단의 3월 12일 회의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과반수 찬성을 결의 요건으로 정했는데, 표결 결과 찬성 4, 반대 2(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 기권 2(시리아와 프랑스)였다. 우크라이나가 위원단에 참석했다면 그런 엉터리 결정은 막을 수 있었다. 소총회와 조선위원단에서 소련이 주도한 공산권의 보이콧은 결과적으로 미국을 도와준 셈이었다. 이것이 우연한 일일 뿐이었을까? 저자는 이것이 소련도 조선의 분단건국을 원하고 있었다는 확정적 증거는 아니라도 강한 심증을 불러일으키는 일이었다고 본다.
『해방일기』 시리즈 소개
역사학자 김기협의 해방일기,
65년 전의 ‘오늘’에서 민족의 미래를 찾는다
몇 해 전부터 왕성한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는 김기협은 특이한 배경의 역사학자다. 1968년 서울대 이공계열 수석으로 물리학과에 입학했다가 1년 후 사학과로 전과해서 중국사 전공을 시작한 뒤 석사과정은 경북대에서, 박사과정은 연세대에서 수학했다. 1990년 대학교수를 그만둔 이후 칼럼니스트와 번역가로 활동하다가 근년 들어 본격 저술활동을 시작했다.
그런 그가 환갑을 맞은 2011년 8월 1일 『해방일기』를 쓰기 시작했다.(?프레시안? 연재) 목표는 2013년 8월 31일까지 37개월간. 1945년 8월 1일 해방 전야부터 1948년 8월 31일 대한민국 건국 무렵까지의 기간 동안 ‘65년 전의 오늘’을 되살리는 작업이다.
8월 1일자 첫 회에서 김기협은 선친의 전쟁일기를 언급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 교수가 그의 선친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60년 전 세상을 떠난 선친을 스스로 들먹인 데서 새 작업에 대한 만만찮은 각오를 느낄 수 있다.
(…)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독자께서는 바로 제 아버님을 떠올리시겠죠. 그렇습니다. 이 작업에는 아버님의 전쟁일기를 흉내 내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전쟁이란 상황에 마주쳤을 때 한 역사학도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힘껏 모색하신 것이 그 일기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 역시 통상적인 서술 방법으로 한계를 느끼는 주제 앞에서 제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으로 『해방일기』에 착수합니다.
(…) 이 막막한 작업에 구상이 떠오른 지 불과 한 달 만에 착수하고 있다는 사실부터 어리둥절합니다. 가만 생각하면 바로 이런 성격의 작업을 위해 지금까지의 제 인생이 배치되어 온 것이 아닌가, 운명적인 생각까지 듭니다. (…)
그 후 3년 넘는 동안 매주 100여 매씩 글을 올렸다. 생각해 보면 황당한 일이다. 지금 1주일 동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을 누군가가 150매 분량으로 정리해준다면 재미있게 읽을 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물며 65년 후의 어느 필자가 그런 일을 할 때 그것을 참을성 있게 읽어줄 65년 후의 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럼에도 이런 서술을 꾸준히 읽은 독자가 꾸준히 늘어났다는 것이 어쩌면 놀라운 일이다. 그 방대한 서술에 독자들이 질리지 않게 해주는 것이 무엇일까?
(1) 『해방일기』에는 현장감이 있다. 저자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보다 ‘씨름’으로 보고, ‘대화록’을 정리해주기보다 ‘생중계’를 펼치겠다고 나선다. 65년 전 상황의 ‘생중계’라니! 말이 안 되는 소리 같지만, 그 대상이 ‘해방공간’이라서 그 필요가 성립된다. 한국현대사의 결정적 기로였던 그 시기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아직도 차단과 굴절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생중계’가 반가운 것이다.
“나는” 하고 거침없이 나서는 주관성이 현장감을 북돋워준다. 저자는 전문가로서의 책임감보다 동시대인으로서, 이웃으로서 독자들과의 연대감을 앞세운다. 주어진 자료와 연구결과를 놓고 독자들과 같은 입장에 서서 최선의 해석을 추구하는 것이다. 객관성을 최대한 확보하려 애쓰지만 그 한계에 이를 때는 한계를 서슴없이 인정함으로써 독자의 주체적 판단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준다.
(2) 『해방일기』는 정치적 시각을 넓혀준다. 저자는 이 사회에서 ‘진보적’ 인사로 흔히 간주되는 사람인데도 스스로 ‘보수주의자’를 자처해 왔다. 그는 이 작업에서 “원칙과 상식을 중시하는 중도의 힘을 키우기 바라는 마음”을 밝힘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분명히 했다. 그가 내세우는 ‘원론적 보수주의’는 역사만이 아니라 지금의 한국 정치상황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준다.
해방공간의 정치 상황은 지금까지 ‘좌우 대립’을 위주로 풀이되어 왔다. 저자는 ‘적대적 공생관계’로 맺어진 극좌와 극우가 함께 중도파를 억압하고 침식하고 봉쇄하던 상황을 그려 보인다. 원칙과 상식에 따르려는 중도파와 이해관계에 얽매인 극단파 사이의 ‘중극(中極) 대립’의 새 그림을 내놓는다. 원칙과 상식을 따르는 다수가 강력한 동기를 가진 소수 집단의 집요한 도발에 굴복한 해방공간의 상황이 65년 후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저자는 본다.
(3) 『해방일기』는 풍부한 관점을 제공해준다. 저자는 한국현대사 연구자가 아닐 뿐더러 학술논문 위주의 표준적 학술활동에서 벗어나 자기 식으로 오랫동안 공부해 온 사람이어서 일반 역사학자와 다른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다. 그중에는 문명사가의 관점도 있고 저널리스트의 관점도 있다.
원자폭탄의 등장은 우리 해방공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 폴란드,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일본, 중국 등지에서 펼쳐진 상황에 비추어 우리 ‘해방’의 의미를 다시 음미해 볼 점은 없는가? 미국과 소련은 당시에 어떤 변화를 겪고 있었고, 그 변화가 우리의 해방공간에 어떻게 투영되었는가? 근대적 변화가 억압체제를 통해 민족사회에 작용한 구조는 어떠한 것이었는가? 등등 해방공간의 실질적 이해에 도움이 되는 관점들이 이 작업에서 새로 제시된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20여 년 전 해방공간을 향해 이 사회의 시야를 열어주었다. 수십 년 동안 해방공간을 철저히 가로막아 온 반공체제의 장벽에 구멍을 뚫어 사람들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이제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벽을 치워버리고 통째로 바라볼 때가 되었다. 만져보고, 쓸어보고, 현미경도 들이대보고, 성분조사도 해볼 때가 되었다.
20년 전 젊은 세대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가진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그 내용을 씹어 삼켰다. 상식이 철저히 봉쇄된 상황에서 벽에 뚫린 구멍을 통해 상식의 편린에라도 접하는 것이 너무 황홀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식과의 모처럼의 만남이 일으키던 황홀함은 빛이 바랬다. 충격적인 황홀함보다 차분한 이해를 늘리기 위해 ‘인식’을 더 심화시킨 ‘재인식’이 나올 때가 되었다. 그런데 연전에 나온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은 인식의 심화가 아니라 인식의 전복을 위해 나온 것이었다.
저자가 한국근현대사 서술에 나선 계기가 3년 전의 『뉴라이트 비판』 작업이었다. ‘대한민국 체제’를 절대적으로 옹호하기 위해 역사를 자의적으로 왜곡하는 뉴라이트 진영의 입론 방식을 그는 그 작업에서 비판했다. 이제 그는 『해방일기』를 통해 뉴라이트 진영의 입론 내용을 반박하고 있다. ‘대한민국 체제’의 구조적 문제점을 밝히는 것이 이 작업의 기본 목적의 하나다.
저자는 『해방일기』가 특정 진영에 대한 반박을 넘어 『해방전후사의 인식』의 보완이 되기 바란다. 벽 틈의 구멍으로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래는 단계를 넘어 독자들이 해방공간의 역사를 품에 끌어안고 마음껏 어루만질 수 있게 해주고 싶은 것이다. 65년 전에는 우리 민족사회의 건강한 정신이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그 이후 억눌려 온 그 정신을 지금이라도 되살리는 것이 민족사회의 장래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독자들과 함께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 1948년의 조선은 분단, 독재, 전쟁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해방공간’의 역사적 의미를 되살리는 역사학자 김기협의 대장정 ‘해방일기 10권 완간’이 눈앞에 다가왔다.『해방일기 9-해방된 자, 누구였던가』는 1948년 1월에서 4월까지를 들여다본다. 1947년 하반기 미소공위 결렬과 조선 문제 유엔 상정으로 분단건국의 가능성이 짙어진 가운데 1948년 봄, 이남에서는 통일건국이라는 애초의 유엔 결의(1947. 11. 17.)를 ‘가능지역 선거’(1948. 3. 12.)로 변형시켜 실질적인 단독선거를 향했다. 소련과 이북 당국이 유엔위원단의 이북 지역 활동을 허용하지 않았으므로 ‘가능지역’이란 바로 미군 점령하의 이남 지역을 뜻하는 것이었다.
분단건국 추진세력은 유엔임시조선위원단을 ‘칙사’처럼 받들었다. 미군정과 경찰의 존재 앞에서 선거의 ‘자유분위기’는 바랄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엔임시조선위원단이 곡절 끝에 선거의 정당성을 인정해줬기 때문에 후세에 모윤숙과 낙랑클럽의 ‘성 로비’ 설까지 남게 된다.
1947년 12월 초, 김구는 이승만과의 빅딜, 즉 자신의 세력 확장을 꾀하는 조건으로 ‘남조선 총선거’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1948년 2월 10일 “3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을 통해 “통일정부 독립만 위하여 노력할 것”이라며 단독선거에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제창하는 쪽으로 노선을 돌린다. 민족주의자로서 진면목을 되찾은 것이다. 김구가 이승만과 정면충돌하며 분단건국 반대에 나서자 김규식이 이끌던 중도 우익의 민족자주연맹(민련)은 좌우합작 대신 우익연합으로 방향을 잡는다. 민련과 한독당을 중심으로 형성된 우익연합은 4월 중·하순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에 임했으나 분단건국 저지의 성과를 거두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미·소 군정이 들어선 후 초기에 약간의 인민 저항이 있다가 차츰 사라진 이북과는 반대로, 이남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저항이 강해졌다. 제주 4·3 사태는 미군정의 구조적 문제를 극명하게 드러내주었다. 1947년 3월 ‘민관 총파업’ 탄압으로 시작된 공포 분위기는 1년 이상을 끌면서 ‘좌익 탄압’이 아닌 ‘제주인 탄압’으로 확대되어가기만 했다. 4·3 항쟁은 좌익의 우익에 대한 항쟁이 아니라 미군정과 육지인에 대한 제주인의 항쟁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북 지도부 또한 독자적 건국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통일건국을 위한 자기네 쪽 준비라고 명분을 걸었지만 통일건국이 여의치 않을 경우 단독건국이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태세였다.
분단건국의 문제점이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했다는 미진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통일되어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민족이 두 국가로 분리되었을 때 그 부자연스러운 상황이 일으키지 않을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는 것이다. 전쟁과 독재다. 1948년의 조선은 분단, 독재, 전쟁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김기협의 『해방일기』대장정은 2015년 2월에 전10권이 완간으로 마무리된다.
읍고(泣告)를 통해 진면목을 찾은 김구
“『해방일기』작업 동안 내 마음속에서 매우 큰 변화를 겪은 것의 하나가 ‘김구 선생’의 모습이다. 서술에 일체의 경칭을 쓰지 않기로 원칙을 세우고 내 아버지(김성칠 선생)에게까지 그 원칙을 적용하면서도 김구 이야기를 할 때는 그 이름 뒤에 ‘선생’을 붙이지 않는 것이 마음속으로 불편하게 느껴졌다. 1946년이 다 지나갈 때까지도 그랬다. 그런데 1947년 들어 반탁운동을 재개할 무렵부터 그 불편함이 사라졌다. 경칭 안 쓰는 원칙에 익숙해진 탓도 있겠지만, 내 마음속의 민족의 영웅 ‘김구 선생’이 그동안 ‘상대화’ 과정을 겪었다는 데 더 큰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를 존경하는 마음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이제 그의 인간적 한계를 바탕에 깔고 그의 고뇌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본문 175~176쪽
김기협 선생은 ‘해방일기’를 통해 반탁운동의 반민족적 성격을 규명해왔다. 김구가 이승만과 손잡고 이끈 반탁운동은 순수한 ‘반탁’이 아니라 ‘반공반소’ 운동을 위한 간판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승만이 원하는 방향의 반탁운동에 김구가 말려든 이유가 무엇인가? 저자는 이 점이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라 한다. 한민당의 ‘임정 봉대(奉戴)’ 주장에 현혹되었다면 그의 지혜를 의심할 일이고, 민족주의 진영의 헤게모니를 노린 것이었다면 그의 도덕성을 의심할 일이었다. 확실한 것은, 백범 김구를 완전무결한 민족주의 지도자로 받들어 보던 우리 사회의 통념에서 거품을 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해방일기 9권』은 김구가 보여주는 태도가 과연 그의 진면목이었는지 상황 진행을 보면서 확인한다. 그는 온갖 유혹과 위협에 처해 있었다. 그런 유혹과 위협 속에서 그가 지킨 자세를 통해 민족주의자로서 그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후세의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김구의 모습은 1948년 1월 하순 이후 분단건국에 반대한 모습이다. 그로부터 불과 몇 주일 전까지 그가 이승만의 분단건국 노선을 전폭 지지하고 있던 모습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에 앞서 귀국 이래 그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온 반탁운동이 미소공위를 좌초시킴으로써 분단건국 노선을 도와준 것이라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중략) 그러나 나는 1948년 1월 이후 분단건국에 반대한 그의 태도가 그의 진면목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귀국 이래 그의 행보가 그 스스로 원치 않은 결과를 행해 움직여 온 것은 상황 인식의 결함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상황을 너무 만만하게 봤다는 것이다. 미·소 대결이 심화되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는 민족주의자들이 좌우합작에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었는데, 그가 좌익 일부에 대한 의심 때문에 좌우합작 자체를 외면한 것은 좌우합작 없이도 민족국가 건설이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민족주의 자체를 개인 영달을 위한 수단으로 여겼을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본문 176~177쪽
소련도 미국의 ‘조선 결의안’ 통과를 도와줬다!
“조선위원은 그 사업을 추진시켜 미군이 점령하고 있는 남조선에만 선거를 실시하고 남조선에 조선 전체를 위한 정부를 수립할 수도 있다.”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의 새로운 결의, 이것이 남조선 단독건국에 유엔이 나서는 출발점이었다. 미국이 제안한 이 결의안에 찬성이 31표, 반대가 2표, 기권이 11표였다. 소총회의 의결에는 참석회원의 3분의 2 찬성이 필요했다. 필요한 30표를 넘겼기 때문에 이 결의안이 통과된 것이다. 저자는 여기서 소련의 보이콧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고 한다. 애초에 소총회를 1년간의 한시적 기구로 만든 것은 소련의 거부권이 있는 안보리를 우회하기 위해 미국이 제안한 것이었다. 대다수 회원국이 미국의 제안을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에 소총회의 결의 조건을 참석국의 3분의 2 찬성으로 까다롭게 만들어놓았다. 압도적 찬성이 아니면 통과될 수 없게 한 것이다.
소련과 동구 5개국이 이날 소총회를 보이콧했기 때문에 찬성 30표가 필요했다. 6국이 참석했다면 34표가 필요했을 것이고, 조선 관계 새 결의안은 통과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면 단독건국보다 더 합당한 것으로 조선위원단이 추천했던 다른 방안, 즉 남조선만을 대표하는 임시정부를 일단 만들고 최종적 건국을 뒤로 미루는 방안이 채택되었을 것이다. 소총회 결의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조선위원단의 3월 12일 회의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과반수 찬성을 결의 요건으로 정했는데, 표결 결과 찬성 4, 반대 2(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 기권 2(시리아와 프랑스)였다. 우크라이나가 위원단에 참석했다면 그런 엉터리 결정은 막을 수 있었다. 소총회와 조선위원단에서 소련이 주도한 공산권의 보이콧은 결과적으로 미국을 도와준 셈이었다. 이것이 우연한 일일 뿐이었을까? 저자는 이것이 소련도 조선의 분단건국을 원하고 있었다는 확정적 증거는 아니라도 강한 심증을 불러일으키는 일이었다고 본다.
『해방일기』 시리즈 소개
역사학자 김기협의 해방일기,
65년 전의 ‘오늘’에서 민족의 미래를 찾는다
몇 해 전부터 왕성한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는 김기협은 특이한 배경의 역사학자다. 1968년 서울대 이공계열 수석으로 물리학과에 입학했다가 1년 후 사학과로 전과해서 중국사 전공을 시작한 뒤 석사과정은 경북대에서, 박사과정은 연세대에서 수학했다. 1990년 대학교수를 그만둔 이후 칼럼니스트와 번역가로 활동하다가 근년 들어 본격 저술활동을 시작했다.
그런 그가 환갑을 맞은 2011년 8월 1일 『해방일기』를 쓰기 시작했다.(?프레시안? 연재) 목표는 2013년 8월 31일까지 37개월간. 1945년 8월 1일 해방 전야부터 1948년 8월 31일 대한민국 건국 무렵까지의 기간 동안 ‘65년 전의 오늘’을 되살리는 작업이다.
8월 1일자 첫 회에서 김기협은 선친의 전쟁일기를 언급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 교수가 그의 선친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60년 전 세상을 떠난 선친을 스스로 들먹인 데서 새 작업에 대한 만만찮은 각오를 느낄 수 있다.
(…)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독자께서는 바로 제 아버님을 떠올리시겠죠. 그렇습니다. 이 작업에는 아버님의 전쟁일기를 흉내 내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전쟁이란 상황에 마주쳤을 때 한 역사학도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힘껏 모색하신 것이 그 일기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 역시 통상적인 서술 방법으로 한계를 느끼는 주제 앞에서 제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으로 『해방일기』에 착수합니다.
(…) 이 막막한 작업에 구상이 떠오른 지 불과 한 달 만에 착수하고 있다는 사실부터 어리둥절합니다. 가만 생각하면 바로 이런 성격의 작업을 위해 지금까지의 제 인생이 배치되어 온 것이 아닌가, 운명적인 생각까지 듭니다. (…)
그 후 3년 넘는 동안 매주 100여 매씩 글을 올렸다. 생각해 보면 황당한 일이다. 지금 1주일 동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을 누군가가 150매 분량으로 정리해준다면 재미있게 읽을 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물며 65년 후의 어느 필자가 그런 일을 할 때 그것을 참을성 있게 읽어줄 65년 후의 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럼에도 이런 서술을 꾸준히 읽은 독자가 꾸준히 늘어났다는 것이 어쩌면 놀라운 일이다. 그 방대한 서술에 독자들이 질리지 않게 해주는 것이 무엇일까?
(1) 『해방일기』에는 현장감이 있다. 저자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보다 ‘씨름’으로 보고, ‘대화록’을 정리해주기보다 ‘생중계’를 펼치겠다고 나선다. 65년 전 상황의 ‘생중계’라니! 말이 안 되는 소리 같지만, 그 대상이 ‘해방공간’이라서 그 필요가 성립된다. 한국현대사의 결정적 기로였던 그 시기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아직도 차단과 굴절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생중계’가 반가운 것이다.
“나는” 하고 거침없이 나서는 주관성이 현장감을 북돋워준다. 저자는 전문가로서의 책임감보다 동시대인으로서, 이웃으로서 독자들과의 연대감을 앞세운다. 주어진 자료와 연구결과를 놓고 독자들과 같은 입장에 서서 최선의 해석을 추구하는 것이다. 객관성을 최대한 확보하려 애쓰지만 그 한계에 이를 때는 한계를 서슴없이 인정함으로써 독자의 주체적 판단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준다.
(2) 『해방일기』는 정치적 시각을 넓혀준다. 저자는 이 사회에서 ‘진보적’ 인사로 흔히 간주되는 사람인데도 스스로 ‘보수주의자’를 자처해 왔다. 그는 이 작업에서 “원칙과 상식을 중시하는 중도의 힘을 키우기 바라는 마음”을 밝힘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분명히 했다. 그가 내세우는 ‘원론적 보수주의’는 역사만이 아니라 지금의 한국 정치상황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준다.
해방공간의 정치 상황은 지금까지 ‘좌우 대립’을 위주로 풀이되어 왔다. 저자는 ‘적대적 공생관계’로 맺어진 극좌와 극우가 함께 중도파를 억압하고 침식하고 봉쇄하던 상황을 그려 보인다. 원칙과 상식에 따르려는 중도파와 이해관계에 얽매인 극단파 사이의 ‘중극(中極) 대립’의 새 그림을 내놓는다. 원칙과 상식을 따르는 다수가 강력한 동기를 가진 소수 집단의 집요한 도발에 굴복한 해방공간의 상황이 65년 후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저자는 본다.
(3) 『해방일기』는 풍부한 관점을 제공해준다. 저자는 한국현대사 연구자가 아닐 뿐더러 학술논문 위주의 표준적 학술활동에서 벗어나 자기 식으로 오랫동안 공부해 온 사람이어서 일반 역사학자와 다른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다. 그중에는 문명사가의 관점도 있고 저널리스트의 관점도 있다.
원자폭탄의 등장은 우리 해방공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 폴란드,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일본, 중국 등지에서 펼쳐진 상황에 비추어 우리 ‘해방’의 의미를 다시 음미해 볼 점은 없는가? 미국과 소련은 당시에 어떤 변화를 겪고 있었고, 그 변화가 우리의 해방공간에 어떻게 투영되었는가? 근대적 변화가 억압체제를 통해 민족사회에 작용한 구조는 어떠한 것이었는가? 등등 해방공간의 실질적 이해에 도움이 되는 관점들이 이 작업에서 새로 제시된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20여 년 전 해방공간을 향해 이 사회의 시야를 열어주었다. 수십 년 동안 해방공간을 철저히 가로막아 온 반공체제의 장벽에 구멍을 뚫어 사람들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이제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벽을 치워버리고 통째로 바라볼 때가 되었다. 만져보고, 쓸어보고, 현미경도 들이대보고, 성분조사도 해볼 때가 되었다.
20년 전 젊은 세대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가진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그 내용을 씹어 삼켰다. 상식이 철저히 봉쇄된 상황에서 벽에 뚫린 구멍을 통해 상식의 편린에라도 접하는 것이 너무 황홀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식과의 모처럼의 만남이 일으키던 황홀함은 빛이 바랬다. 충격적인 황홀함보다 차분한 이해를 늘리기 위해 ‘인식’을 더 심화시킨 ‘재인식’이 나올 때가 되었다. 그런데 연전에 나온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은 인식의 심화가 아니라 인식의 전복을 위해 나온 것이었다.
저자가 한국근현대사 서술에 나선 계기가 3년 전의 『뉴라이트 비판』 작업이었다. ‘대한민국 체제’를 절대적으로 옹호하기 위해 역사를 자의적으로 왜곡하는 뉴라이트 진영의 입론 방식을 그는 그 작업에서 비판했다. 이제 그는 『해방일기』를 통해 뉴라이트 진영의 입론 내용을 반박하고 있다. ‘대한민국 체제’의 구조적 문제점을 밝히는 것이 이 작업의 기본 목적의 하나다.
저자는 『해방일기』가 특정 진영에 대한 반박을 넘어 『해방전후사의 인식』의 보완이 되기 바란다. 벽 틈의 구멍으로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래는 단계를 넘어 독자들이 해방공간의 역사를 품에 끌어안고 마음껏 어루만질 수 있게 해주고 싶은 것이다. 65년 전에는 우리 민족사회의 건강한 정신이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그 이후 억눌려 온 그 정신을 지금이라도 되살리는 것이 민족사회의 장래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독자들과 함께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추천평
『해방일기』를 읽으면서 통쾌하면서 낄낄댔던 부분이 바로 대담한 해석과 과감한 추측입니다. 그리고 가장 돋보이는 대목은 ‘한 일’이 아니라 ‘안 한 일’에 주목한 것입니다.
- 한홍구 / 성공회대 교수ㆍ『대한민국사』저자
저자가 해방 정국을 통해 찾아낸 것은 오늘의 비이성적인 정치의 기원이었습니다.
- 박태균 / 서울대 교수ㆍ『한국전쟁』저자
김기협의 『해방일기』에는 『해방전후사의 인식』 이후 근 20년 동안 축적된 한국 현대사 연구의 성과가 망라되어 있습니다.
- 장정일 / 소설가
- 한홍구 / 성공회대 교수ㆍ『대한민국사』저자
저자가 해방 정국을 통해 찾아낸 것은 오늘의 비이성적인 정치의 기원이었습니다.
- 박태균 / 서울대 교수ㆍ『한국전쟁』저자
김기협의 『해방일기』에는 『해방전후사의 인식』 이후 근 20년 동안 축적된 한국 현대사 연구의 성과가 망라되어 있습니다.
- 장정일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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