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연암이며 조선 후기의 문신, 실학자이다.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배우고 실천하려고 하였던 북학 운동의 선두 주자였으며 많은 문장을 후세에 남긴 작가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출생하여 자랐으며, 할아버지는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박필균(朴弼均)이고, 아버지는 박사유(朴師愈)이며, 어머니는 함평 이씨이다. 아버지가 벼슬 없는 선비로 지냈기 때문에 할아버지 박필균이 양육하였다. 1765년 처음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후로는 과거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 서상수(徐常修), 유득공(柳得恭), 유금(柳琴) 등과 학문적으로 깊은 교유를 가졌다. 홍대용(洪大容), 이덕무(李德懋), 정철조(鄭喆祚) 등과 ‘이용후생에 대해 자주 토론하였다. 생활이 어려워지고 파벌 싸움의 여파까지 겹쳐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으로 은거하였다. 1780년(정조 4년) 친척인 박명원(朴明源)이 사신으로 북경에 가게 되자 수행원이 되어 6월부터 10월까지 북경과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이때의 견문을 정리해 쓴 책이『열하일기(熱河日記)』이다. 저서로는『열하일기(熱河日記)』, 작품으로는「허생전(許生傳)」,「민옹전(閔翁傳)」,「광문자전(廣文者傳)」,「양반전(兩班傳)」,「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