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조선시대사 이해 (독서>책소개)/4.조선역사문화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동방박사님 2022. 2. 7.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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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송시열의 신화를 파헤치다

역사학자 이덕일, 투철한 역사의식으로 그 비극적 진실을 추적하다
지금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300년 전 인물의 실체는 무엇인가?


이 책은 2000년 출간과 함께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한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의 전면 개정판이다. 송시열에 대한 엄정한 서술로 논쟁을 촉발시켰고, 대중 역사서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초판의 내용과 사진을 수정·보완하였고, 올컬러로 인쇄해 글의 생동감을 더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지금까지 접근조차 금지되어 있던 송시열 300년 신화의 가면을 벗겨냈다. 지금까지 나왔던 송시열에 대한 글들처럼 그를 성인으로 만드는, 그럼으로써 서로가 좋고 좋은 그런 유의 글이 아니다. 그를 인간의 자리, 그리고 그가 살았던 시대의 파탄에 대한 부채를 지녀야 하는 한 정치가의 자리로 끌어내려 객관적인 분석 대상으로 삼아 그 비극적 실체를 추적한 역사서다. 사대부와 당의 이익을 대변한 송시열과 이에 맞선 정적 윤휴, 허목, 윤선도, 이경석, 김육 등의 주장은 무엇이며, 당시 조선의 역사는 어떤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는지도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목차

개정판 서문
책머리에
들어가는 글

1부 흔들리는 주자학의 나라에서
어찌 감히 농민들이 사대부를 넘보랴

2부 인조반정, 그 비극의 뿌리
서인들의 쿠데타, 인조반정이 낳은 비극들
소현세자, 그 진보성과 개방성의 좌절

3부 북벌의 시대, 대동법의 시대
북벌, 말인가 실천인가?
농민을 잃을지언정 사대부를 잃을 수는 없다
숭무주의자 효종과 숭무주의자 송시열
스러진 북벌의 꿈

4부 왕위에 올랐다고 가통까지 이은 것은 아니다 - 예송논쟁
임금이라도 차자가 아닌가?
적자라는 호칭은 임금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종통과 적통이 어찌 다르랴
어찌 감히 주자와 달리 해석하랴
온양 행궁에서 벌어진 싸움
왜 15년 전과 다르단 말인가

5부 국익(國益)보다는 당익(當益)이 앞선다
스승만 알고 임금은 알지 못하는구나
아버지가 중한가 스승이 중한가
정권을 놓치면 모든 것을 잃는다
남인들의 원한을 어찌 풀겠는가?
남인 소생 왕자가 어찌 임금이…
숙종의 분노

나가는 글
이 책을 쓰는 데 직접 도움을 받은 자료와 책
 

저자 소개

저 : 이덕일 (李德一)
 
1961년 생으로 충남 아산에서 자랐다. 숭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7년『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를 시작으로 세상에 그의 이름을 알렸다. 그는 역사학자로서 사료에 대한 철저하고 세심한 고증, 대중과 호흡하는 집필가로서의 본능적인 감각과 날카로운 문체로 한국사에서 숨겨져 있고 뒤틀려 있는 가장 비밀한 부분을 건드려왔다. 언제나 발표하는 저술마다 논쟁의 중심에 섰으며 역사 인...
 

책 속으로

솔직히 토로하면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처음 집필할 때만 해도 이 도그마가 가진 현실 규정력이 이렇게 깊고 넓으며, 우리 사회 곳곳에 내면화되어 있는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송시열이 절대화시킨 주자학 유일사상은 양명학과 천주학을 비롯한 다른 사상의 씨를 말렸다. 송시열과 노론은 주자학 세상을 만든다는 빌미로 현실 권력을 쟁취해 주자학을 종교교리로 변질시켰다. 송시열 자신은 이 과정에서 사약을 마시고 생을 마쳐야 했지만 그가 만든 주자학 절대주의 체제, 즉 노론 일당의 장기집권 체제는 국왕까지도 그 범주에 가둬두는 데 성공했다. 권력을 잡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는 제로섬 게임은 수단과 목적을 혼재시켰고 주자학은 형해만 남았다. 급기야 마지막 노론 당수 이완용이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는 지경까지 타락했다. 그리고 해방 후 친일 청산에 실패하면서 이들은 여전히 현실의 권력이 되었다. --- p.6

이 책을 재출간하기 위해 원고를 다시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후로도 필자는 꾸준히 공부를 했기에 그 시대는 물론 현 시대에 대한 인식의 폭과 깊이가 넓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이 책을 쓰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가졌던 문제의식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출간 이후 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필자의 고난이 그치기는커녕 그 정도가 심해지는 작금의 사태는 아직도 우리 사회가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는 증거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부디 이 책이 아직도 한국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여러 도그마를 해체하고, 정상적인 사회로 나아가는 데 작은 역할이나마 계속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 p.7

한 인간의 생애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죽음의 순간이지만 송시열의 죽음만큼 한 인간의 생애를 잘 보여주는 예를 나는 찾아보지 못했다. 그의 나이 83세는 바로 사약을 마시고 사사(賜死)당한 나이인 것이다. 조선에서 숙종 때를 제외하고 역모가 아닌데도 대신을 사형시킨 예는 없었다. 심지어 역모가 아닌 한 대신은 국문도 하지 않을 정도로 대신을 우대한 나라가 조선이었다. 그러나 송시열이 죽임을 당한 이유는 역모가 아니었다. 83세의 노인을 사사(賜死)한 죄목은 ‘죄인들의 수괴’라는 애매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죄인들’이란 서인(西人), 보다 좁혀 말하면 노론(老論)이란 한 당파에 소속된 당인(黨人)들을 말한다. 그가 죄인들, 즉 노론의 소괴로 몰려 죽었다는 사실은 그의 죽음이 당쟁과 관련이 있음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 p.19

우암 송시열이 태어나고 성장할 무렵, 조선 지배층인 사대부 계급은 개국 이래 최대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송시열은 선조 40년(1607)에 태어났다. 권좌에서 몰락한 남인 영수 류성룡(柳成龍)이 쓸쓸히 세상을 떠난 그해였다. 그 15년 전에 임진왜란이 발생했다. 조선이 개국한 지 정확히 200년 후인 1592년 발생한 임진왜란은 사대부 중심의 조선 지배체제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왜군이 조선을 침범한 것은 선조 25년(1592) 4월 14일이었다. 불과 보름 후인 4월 29일 조선 조정은 서울을 버리고 평양으로 도망가기로 결정했고, 다음 날 새벽 선조는 궁궐을 빠져나갔다. 국왕이 도성 수비에 전력을 다하기보다 왜군이 나타나기도 전에 도망가자 백성들뿐 아니라 양반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나라는 반드시 망할 것이다”라는 소문이 횡행했다. --- p.26

이들이 예학을 조선 성리학의 주류로 만든 이유는 당시 그만큼 사대부 계급에 대한 농민들의 반발이 컸기 때문이었다. 농민들은 더 이상 사대부를 특권층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는 하나의 사회적 추세이자 역사 발전이기도 했는데, 왜냐하면 더 이상 사대부 지배체제로는 사회를 유지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사대부들에 대한 농민들의 반발을 무력화시키고 사회의 지배계급인 자신들의 기득권을 계속 누리기 위해 예학을 조선 성리학의 주류로 발전시킨 것이다.
--- p.42
 

출판사 리뷰

한국사 최대 금기, 송시열 신화를 파헤친 최대 논쟁작
“조선이 배출한 최고의 성인인가, 시대를 망친 편협한 정치꾼인가?”


역사상 가장 치열한 논란의 대상, 《조선왕조실록》에 3천 번 이상 언급된 조선 최대의 당쟁가 송시열. 그는 조선과 한국사에 비극을 잉태했다. 300년 넘게 유지되어 온 송시열 신화의 비밀, 성인과 악마라는 극단적 찬사와 저주 사이에 놓인 그의 진정한 모습은 무엇인가? 서인들의 쿠데타, 인조반정은 그 비극의 뿌리였다. 소현세자의 좌절과 북벌왕 효종의 급서, 이를 둘러싼 예송논쟁, 그리고 현종의 의문의 죽음…. 송시열이 살았던 시대는 가장 치열한 당쟁의 와중이었으며, 사회체제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한 때였다.

송시열은 83세의 나이에 사약을 마시고 사사당했다. 숙종 때를 제외하고는 역모가 아닌 경우 대신을 사형시킨 예가 없고 국문도 하지 않을 만큼 대신을 우대한 조선에서 그는 ‘죄인들의 수괴’라는 애매한 죄목으로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그는 죽고 난 이후 다시 노론의 재집권과 함께 유학자로서의 최대 영광인 성균관 문묘에 공자와 함께 배향되고, 공자, 맹자, 주자처럼 송자로 불리는 영광을 누리는 등 우리 역사에서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대부분의 신화들이 과장되었거나 상당 부분 조작되었듯이 송시열도 마찬가지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지금까지 접근조차 금지되어 있던 송시열 300년 신화의 가면을 벗겨냈다. 지금까지 나왔던 송시열에 대한 글들처럼 그를 성인으로 만드는, 그럼으로써 서로가 좋고 좋은 그런 유의 글이 아니다. 그를 인간의 자리, 그리고 그가 살았던 시대의 파탄에 대한 부채를 지녀야 하는 한 정치가의 자리로 끌어내려 객관적인 분석 대상으로 삼아 그 비극적 실체를 추적한 역사서다. 사대부와 당의 이익을 대변한 송시열과 이에 맞선 정적 윤휴, 허목, 윤선도, 이경석, 김육 등의 주장은 무엇이며, 당시 조선의 역사는 어떤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는지도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송시열과 그들이 만들어낸 조선사와 이로부터 이어지는 한국사의 그늘
“지금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300년 전 인물의 실체는 무엇인가?”


처음 이 책을 쓰겠다고 했을 때 여러 지인들이 저자를 말렸다. 다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우암 송시열이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난 숙종 15년(1689)에서 300년도 더 지난 시점이었다. 17세기 말에 세상을 떠난 인물의 이야기가 21세기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을까? 정상적인 문명국가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이런 일들이 우리 사회에서는 현실이었고, 아직도 현실이다. 이는 17세기의 사회 구조가 우리 사회 일각에 그대로 계승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된 이후 저자의 지인들이 우려했던 여러 일들이 벌어졌는데, 화형식까지 치러졌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이 책을 둘러싼 여러 사태들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러나 이 책을 둘러싼 논쟁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유학이 유교로 변질되면서 여러 비극이 발생했는데, 송시열을 둘러싼 논쟁의 핵심도 사실 여기에 있고, 저자가 이 책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이 문제 때문이었다. 유학이 유교로 변질된 것이 우리 역사에, 그리고 현재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뜻을 펼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불우하게 세상을 떠난 공자의 학문이 교리, 즉 도그마로 변질되면서 공자로서는 꿈도 꾸지 못했을 숱한 사건이 발생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공자의 사상이 도그마가 된 것이 아니라 공자의 사상을 중세 중국인의 관점에서 해석한 주희(朱熹 : 1130~1200, 주자)의 사상, 즉 주자학이 도그마가 된 것이다. 주희 역시 살아생전에는 뜻을 펼치지 못했던 학자이자 정치가였지만 조선에서 송시열을 필두로 한 주자학자들에 의해 신격화되었다. 송시열이 주희를 신격화시키면서 그 자신도 제자들에 의해 비슷한 존재로 격상되어 갔다.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는 조선 후기 사회를 시대에 동떨어진 신정(神政) 국가로 만들었다.

그렇지만 이 책의 목적은 송시열과 그가 이끌었던 한 시대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그를 통해 현 시대를 바라보는 것이지 송시열에 대한 비난이 목적은 아니다. 그가 동지에게 받은 무수한 찬사와 적에게 받은 무수한 저주는 그 시대를 읽어내는, 그가 현재의 우리 사회에 미치고 있는 영향을 평가하는 자료일 뿐이다. 송시열은 과연 극단적 찬사의 자리에 합당한 인물이었을까, 아니면 극단적 저주의 자리에 합당한 인물이었을까? 그가 이끌었던 한 시대는 뒤의 세대에게 존경받을 만한 시대였을까, 아니면 부정되어 마땅한 시대였을 뿐일까? 아니면 찬사와 저주의 중간쯤에 위치하는 시대였을까?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받고 있었던 당시 조선의 모습과 인물들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통해 지역감정이나 비이성적인 논쟁과 다툼을 반복하고 있는 현 시대를 비춰볼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