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이데올로기 연구 (독서)/3.트로츠키

트로츠키와 마르크스주의 (비운의 혁명가 트로츠키)

동방박사님 2022. 2. 22.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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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비운의 혁명가 트로츠키

트로츠키는 레닌과 함께 러시아 혁명을 승리로 이끈 지도자이자 적군을 창설해 혁명을 방어한 전략가,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노선에 반대해 세계혁명을 주장하다 추방돼 끝내 암살당한 비운의 혁명가로 알려져 있다. 무엇보다 “제국주의 첩자”(스탈린)라는 비난에서부터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계승자”(아이작 도이처)라는 찬사에 이르기까지 평가가 양극단으로 엇갈린 인물이며, 냉전 시대에는 흔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아예 무시당하기도 했다.

『트로츠키와 마르크스주의』는 트로츠키의 사상을 찬양이나 비난 일색으로 다루지 않고 공과를 엄밀히 따진다. 트로츠키 사상의 강점과 약점을 모두 다뤘다는 점이 이 책의 장점이다. 책은 러시아 혁명과 그 뒤 식민지나 반식민지 나라들, 즉 제3세계에서 전개된 상황을 돌아보며 연속혁명론의 타당성을 따져 보며 트로츠키의 스탈린주의 분석을 살펴보고 그 강점과 약점을 지적한다. 혁명 운동이 노동자 대중과 관계 맺는 문제도 트로츠키카 고심했던 부분이다.

목차

옮긴이 머리말
감사의 말
머리말

1장|연속혁명
멘셰비즘/볼셰비즘/트로츠키의 대안/검증/1925~1927년 중국 혁명
2장|스탈린 체제
변질된 노동자 국가/노동자 국가, 테르미도르 반동, 보나파르트 체제/전망
3장|전략과 전술
중간주의와 초좌파주의/공동전선/영-소 노동조합위원회/‘제3기’의 독일/민중전선과 스페인 혁명
4장|당과 계급
역사적으로 좌우되는 도구/변칙/연속성의 파괴/새 인터내셔널
5장|트로츠키가 남긴 유산
1938~1940년의 세계 전망/소련, 스탈린주의, 제2차세계대전과 그 결과/빗나간 연속혁명/트로츠키 사후의 트로츠키주의
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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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역 : 최일붕
 
노동자연대 운영위원이다. 지은 책으로는 《그들의 윤리, 우리의 윤리》(편저, 2017), 《러시아 혁명: 희망과 좌절》(2017), 《마르크스주의의 방법: 소외, 변증법, 역사유물론》(2016), 《자본주의 국가: 마르크스주의의 관점》(편저, 2015) 등이 있고, 엮은 책으로는 《박근혜 퇴진 촛불 운동: 현장 보고와 분석》(2017) 등이 있다.

저자 : 던컨 핼러스 Duncan Hallas

맨체스터의 노동계급 가정에서 태어났다. 제2차세계대전 동안 젊은 노동자였던 그는 국제 트로츠키주의 노동자연맹에 가입했다. 1943년 군대에 징집돼 이집트에서 병사 파업을 주도했다가 군사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영국에 돌아온 뒤 토니 클리프와 함께 지금의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전신인 ≪소셜리스트 리뷰≫ 그룹의 창립 멤버가 됐다. 교사 운동 출신으로 한때 영국의 전국교직원노동조합NUT: Nationa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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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 트로츠키의 간략한 생애
우크라이나 지방의 유대인 농민 가정에서 태어난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슈타인Lev Davidovich Bronstein(트로츠키라는 이름은 교도소 교도관 이름을 빌어 온 것이다)이 그러한 세계관을 갖게 된 것은 비교적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의 아버지 브론슈타인은 부농, 즉 러시아어로 쿨락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트로츠키는 정식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유대인 증오가 공식적으로 조장되고 실제로 유대인 학살이 드물지 않게 일어나던 나라에 살고 있던 유대인이었다.
어쨌든, 청년 트로츠키는 초기에 가졌던 낭만적 혁명주의를 버리고 마르크스주의자가 됐다. 그리고는 곧 제정의 전제정치하에서 활동하는 직업혁명가가 됐고 정치범이 됐다. 그는 19살에 처음 체포돼 18개월 동안 수감된 뒤 4년간의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1902년에 탈출해 이후 죽을 때까지 혁명 운동을 자신의 직업으로 삼았다. ……
그는 망명한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지도자들을 만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노동당 1903년 대회 ― 사실상의 창당 대회 ― 에서 두드러진 구실을 한다.
1902년 여름 트로츠키는 건초더미 속에 숨어서 시베리아의 베르홀렌스크에서 탈출했다. 10월에 그는 런던 킹크로스 기차역 근처에 있는,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지도부가 일하고 있는 건물에 도착했다. 레닌, 크룹스카야, 마르토프, 베라 자술리치가 모두 그 곳에 살고 있었고, 중앙집권적이고 규율 있는 당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기관지 「이스크라」가 바로 그 곳에서 제작돼 러시아로 몰래 반입돼 지하 활동가들 사이에서 배포됐다. 레닌은 편집부에 트로츠키를 충원하기를 원했지만, 플레하노프가 강력히 반대했다. 트로츠키는 곧 「이스크라」 팀 내의 논쟁에 연루됐다. 그리하여 트로츠키는 레닌뿐 아니라 장차 멘셰비즘의 지도자가 되는 플레하노프, 마르토프와도 가까이 지내게 됐다. 이미 「이스크라」 그룹 내에서 분열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
1903년 여름에 열린 대의원회의에서 분열 양상이 노골화했다. 「이스크라」 지지자들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활동하는 문제에 관한 한 자율권을 요구하는 유대인 사회주의 조직 분트와 경제주의자들의 개혁주의 경향에 맞서 함께 싸웠다. 그런 다음, 「이스크라」 그룹 자체가 다수파, 즉 볼셰비키와 소수파, 즉 멘셰비키로 분열했다.
처음에는 분열의 양상이 명확하지 않았다. 문제 자체가 아직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에 플레하노프는 레닌을 편들었고, 트로츠키는 멘셰비키 지도자 마르토프를 편들었다.
그로부터 두 해가 지난 뒤 트로츠키는 러시아로 돌아왔다. 1905년 혁명이 진행되고 있었다. 혁명 과정에서 트로츠키는 중심인물로 우뚝 섰다. 겨우 스물여섯 살에 그는 가장 뛰어난 혁명 지도자이자 국제적 유명 인사가 됐다. 망명 정치 소그룹 출신인 그는 이제 기가 막힌 웅변가이자 대중 지도자로 변신했다.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의장으로서 그는 전술 지도를 상당 정도 할 수 있었고, 1917년 혁명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확신에 찬 정치 감각과 강철 같은 대담성을 보여 주었다.
1905년 혁명은 패배했다. 제정 군대는 뒤흔들리기는 했지만 와해되지는 않았다. 1905년 혁명 ― 레닌은 그것을 “예행 총연습”이라 불렀다 ― 을 겪고 나서 사회민주주의의 다양한 경향들이 더욱 분화됐다. 여전히 명목상 멘셰비크였던 트로츠키는 자기만의 독특한 이론인 연속혁명론을 발전시켰다.
이후 10년 동안 트로츠키는 다시 소규모 망명자 서클에서 활동했고, 이제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경향들[볼셰비즘과 멘셰비즘]을 통합하려는 헛된 노력을 했다. 그 뒤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나, 트로츠키는 반전 활동을 했다. 1917년 2월 혁명이 일어나 차르가 타도됐다. 트로츠키는 1917년 7월 이제는 진정한 대중적 노동자 당이 돼 있는 볼셰비키당에 입당했다. 그의 개성과 재능과 명성 덕분에 트로츠키는 입당한 지 몇 주 만에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대중의 눈에 레닌 다음가는 인물로 비쳤다. 그는 38세에 10월 봉기를 실제로 조직하는 임무를 떠맡았고 당과 국가에서 두세 번째 중요한 인물이 됐다. 얼마 뒤 그는 세계 공산주의 운동인 코민테른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 가운데 하나가 됐다. 그는 적군赤軍을 창설하고 지휘했고, 모든 정책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이러한 위치에서 밀려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개인의 비극이 아니었다. 트로츠키는 혁명이 일어남에 따라 일어났고 혁명이 가라앉음에 따라 가라앉았다. 트로츠키의 개인 역사는 러시아 혁명과 국제 사회주의의 역사와 융합돼 있다. 1923년부터 그는 러시아에서 고개를 쳐들기 시작하던 반동, 즉 스탈린주의에 맞섰다. 1927년에 그는 당에서 출당당하고 1929년에는 소련에서 국? 추방당한다. 이후 죽을 때까지 11년 동안 그는 진정한 공산주의 전통을 살리고 그것을 혁명 조직으로 구현하기 위해 이길 가망이 없었는데도 영웅적 투쟁을 벌였다. 고립당하고 온갖 비방을 듣던 그는 마침내 1940년 스탈린의 지령으로 암살당했다. 그는 불안정한 국제적 조직과, 응용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풍부한 보고 가운데 하나인 방대한 저작들을 남겼다.

●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
트로츠키도 레닌만큼이나 굳게 ‘혁명적 부르주아지’에 대한 의존을 배격했다. 그는 멘셰비키의 도식을 다음과 같이 조롱했다.

민주주의 혁명가들인 자코뱅 당이 프랑스 혁명을 끝까지 수행했듯이 러시아 혁명도 혁명적 부르주아지의 민주주의에만 권력을 이양할 수 있다는 것은 …… 언론인적 유추와 연역을 통해 만든 초역사적 범주다. 멘셰비키는 이런 식으로 혁명에 대해 확고한 대수적 공식을 만들어 놓고는 거기에다가 있지도 않은 산술적 가치를 대입시키려 한다.5

이 밖의 다른 모든 점에서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은 볼셰비키의 주장과 달랐다. 그 이론은 러시아계 독일인 마르크스주의자 파르부스에게 큰 빚을 지고 있었다.
첫째, 연속혁명론은 농민이 독립적인 정치적 구실을 할 수 있다고 보지 않았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점이었다.

농민은 혁명적이기는 하지만 혁명을 지도하는 구실을 할 수 없다. 역사는 부르주아 국민을 속박에서 해방시키는 과제를 농민에게 맡길 수 없을 것이다. 분산성, 정치적 후진성, 그리고 특히 자본주의 체제의 틀 안에서는 해결될 수 없는 심층적인 내적 모순으로 말미암아 농민은 한편으로 농촌에서 자생적 반란을 일으키고 다른 한편으로 군대 내에서 불만을 터뜨리는 것을 통해 구질서의 뒤통수를 조금 세게 때릴 수 있을 뿐이다.

…… 이것은 결국 노동자 정부 수립을 뜻할 수밖에 없고, 레닌의 ‘민주주의 독재’는 단순히 착각일 뿐이다.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지배는 그들의 경제적 노예 상태와 양립할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가 어떠한 정치적 깃발 아래 권력을 장악하든지 간에 프롤레타리아는 사회주의적 정책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다. 부르주아 혁명의 내적 메커니즘에 의해 정치적으로 지배적 위치에 올라선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의 사명을 부르주아지의 사회적 지배를 위한 민주공화국적 조건들을 조성하는 데 국한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설사 프롤레타리아 자신이 그러길 원한다 해도, 허황하기 이를 데 없는 공상이다.8

그러나 이러한 시나리오는 즉시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모두 사회주의의 물질적·인간적 토대, 즉 고도로 발전한 산업과, 인구의 다수를 점하고 마르크스가 말한 ‘대자적’ 계급으로서 조직과 의식을 획득한 근대 프롤레타리아가 러시아에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
그럼에도 트로츠키는 오직 노동계급만이 러시아 혁명에서 지도 역할을 할 수 있고 그렇게 한다면 반드시 수중에 권력을 장악하고야 말리라고 확신했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

혁명 정부는 사회주의의 객관적인 문제들에 직면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단계에서 이 문제들의 해결은 러시아의 경제적 후진성 때문에 가로막힐 것이다. 일국 혁명의 틀 안에서는 이 모순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노동자 정부는 처음부터 자신의 세력과 서유럽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 세력의 단결이라는 과제에 직면할 것이다. 오직 이렇게 함으로써만 노동자 정부의 일시적인 혁명적 헤게모니가 비로소 사회주의 독재의 서막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러시아 프롤레타리아에게 연속혁명은 계급의 자기 보존 문제가 될 것이다.10

엥겔스가 처음에 세운 가설은 [트로츠키에 와서] 뒤집혔다. 즉,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 때문에 후진 러시아가 일시적으로 국제 사회주의 혁명의 전위가 되는 결합 발전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연속혁명론은 트로츠키가 죽을 때까지 줄곧 그의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이었다. 오직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만 1917년 이후 그의 연속혁명론 사상은 위에서 요약한 내용과 달랐다. 1917년 이전 그의 연속혁명론 사상은 노동계급의 자생적 행동에 크게 의존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이 시기의 트로츠키는 볼셰비키의 ‘중앙집권제’에 반대했고 당의 지도적 구실이라는 개념을 실천에서 배격했다. 1917년에는 이 문제[중앙집권과 당의 구실]에 대한 그의 입장을 완전히 바꾸었다. 이후의 연속혁명론은 혁명적 노동자 당의 역할에 바탕을 두고 구성됐다.

●1925~1927년 중국 혁명에 대해
당시 중국은 영국·프랑스·미국·일본 제국주의들 사이에 비공식적으로 분할된 반식민지였다. 독일 제국주의와 러시아 제국주의는 1919년 이전에 전쟁과 혁명으로 말미암아 중국에서 축출당했다.
각 제국주의 열강은 자신의 ‘영향권’을 유지하고 있었고 ‘자신의’ 지방 호족이나 군벌 또는 ‘국민정부’를 지지하고 있었다. ……
광둥과 그 인근 지역은 예외, 그것도 매우 부분적인 예외였?. 바로 이 지역에서 중국 민족주의의 창시자 쑨원孫文이 모호한 ‘좌파적’ 언사들로 꾸며진 민족 독립과 근대화와 사회개혁 강령에 바탕을 두고 기반을 다져 놓았다. 1922년 이전까지는 무정형의 거의 있으나마나 한 조직이었던 쑨원의 국민당은 광둥 지방의 ‘진보적’ 군벌의 관용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2년부터 사전 준비 작업을 한 국민당 지도부는 소련 정부와 협정을 체결했는데, 이 협정에 따라 소련은 1924년 정치·군사 고문단을 광둥에 파견하고 무기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 게다가 1922년 말부터 중국 공산당원들은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했다. 그들 가운데 세 명은 심지어 국민당 집행부의 자리에 올라갔다. 이 정책은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 어느 정도 저항에 부딪혔음에도 공산주의인터내셔널(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강요해 관철됐다.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에 사실상 매이게 됐다.
이후 1925년 초여름에 대중파업 운동이 상하이에서 일어나 광둥과 홍콩을 포함한 중국 중부와 남부의 주요 도시들로 확산됐다. 이 파업은 처음에는 부분적으로 경제적인 것이었으나 외국 군대와 경찰의 탄압으로 급속히 정치적인 성격을 띠게 됐다. 거대한 대중 반란 운동이 고양과 침체를 여러 차례 거듭하는 가운데 1927년 초까지 그 도시들에서 벌어졌다. 중국 공산당이 지도하는 파업위원회들이 ‘제2정부’를 이루는 일종의 이중권력 상황도 몇 차례 있었다. …… 1926년 초에 국민당은 코민테른에게서 동조 정당이라는 인정을 받았다!
1925년경 트로츠키는 여전히 소련 공산당의 정치국원이기는 했지만, 정책에 직접적 영향력은 전혀 행사할 수 없었다. 아이작 도이처에 따르면, 1926년 4월 트로츠키는 공산당이 국민당에서 탈당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해 9월 처음으로 충실한 논설을 통해 소련 공산당의 중국 정책을 비판했다.

중국의 혁명 투쟁은 1925년부터 새로운 국면에 돌입했다. 이 국면의 두드러진 특징은 프롤레타리아의 광범한 계층들의 능동적 개입이다. 그와 동시에, 상업 부르주아지와 그들과 연계된 지식층 인자들은 파업과 공산주의자, 소련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우경화로 치닫고 있다. 이러한 기본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공산당과 국민당의 관계를 새로 정립하는 문제가 반드시 제기될 필요가 있음이 명백하다. ……
중국 부르주아지가 우경화하고 있다는 점 못지않게 중국 노동자 대중운동이 좌경화해 가고 있다는 것도 확실한 사실이다. 국민당이 노동자들과 부르주아 계급의 정치적·조직적 연합에 기반을 두고 있으므로 이제 계급투쟁의 원심분리적 경향 때문에 분열할 것임에 틀림없다. ……
공산당의 국민당 참여는 공산당이 겨우 향후의 독자적 정치 활동을 준비하면서 그와 동시에 계속되는 민족 해방 투쟁에 참여하려는 선전 단체였던 시기에는 완전히 올바른 것이었다. …… 그러나 중국 프롤레타리아가 대규모로 각성하고 있고 투쟁과 독자적 계급 조직을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 이제 공산당의 당면한 정치적 임무는 각성한 노동계급이 직접 독자적인 지도력을 발휘하도록 투쟁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국민혁명 투쟁에서 노동계급을 철수시키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이 중국 대중의 투쟁에서 가장 단호한 투사가 되는 것뿐 아니라 헤게모니를 쥔 정치 지도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
국민당 안에서 영리한 책략과 훌륭한 조언을 통해 프티부르주아지를 설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망 없는 공상이다. 공산당이 스스로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즉 중국 노동계급의 지지를 더 많이 받을수록 공산당은 도시와 농촌 프티부르주아지에 대한 직접·간접적 영향력을 더 많이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독자적인 계급정당과 계급정책에 바탕을 두고서만 가능한 것이다.14

이러한 주장은 스탈린과 그의 분파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의 정책은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국민당에 달라붙어 공산당을 국민당에 강제로 예속시키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소련의 믿음직스러운 동맹[국민당]이 중국 남부에 계속 존속할 수 있고 그러다가 나중에는 전국적으로 권력을 잡을 수 있기를 희망했다.
이 정책은 ‘민주주의 독재’라는 테제를 부활시킴으로써 이론으로 정당화됐다. 즉, 중국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며 따라서 중국 혁명의 목표는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여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서 운동은 ‘민주주의적’ 요구들에 애써 머무를 필요가 있다. 사회주의 혁명은 일정에 오르지 않았다. 국민당이 농민 정당이 명백히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생긴 어려움은 국민당이 실제로는 다계급 정당, 즉 ‘4계급 동맹’(부르주아지, 도시 프티부르주아지, 노동자, 농민)이라는 주장으로 대응했다.

도대체 4계급 동맹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지금껏 한 번이라도 이러한 표현을 마르크스주의 문헌에서 읽어 본 적이 있습니까? 만약 부르주아지가 부르주아지의 깃발 아래 피억압 인민대중을 이끌고 자신의 지도로 국가권력을 장악한다면, 그것은 동맹이 아니라 부르주아지가 피억압 대중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핵심 문제는 부르주아지가 제국주의자들에게 투항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국민당은 반드시 반혁명적 역할을 할 것이다.

중국 부르주아지는 현실적이고 세계 제국주의의 본질을 잘 알고 있어서, 세계 제국주의에 맞서 정말로 진지하게 벌이는 투쟁은 주로 부르주아지 자신에게 위협이 될 혁명적 대격변을 불가피하게 수반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다. …… 우리는 러시아 노동자들에게 자유주의자들과 프티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이 차르 제정을 분쇄하고 봉건제를 타파할 능력과 각오를 갖고 있다고 믿지 말라고 애초부터 가르쳤다. 그렇다면 그 못지않게 정력적으로 중국 노동자들에게도 똑같은 불신을 잔뜩 고취해야 할 것이다. 식민지 부르주아지의 마음속에는 혁명성이 ‘내재해 있다’며 스탈린-부하린이 퍼뜨리는 완전히 잘못된 새 이론은 본질적으로 멘셰비즘을 중국 정치의 언어로 옮겨 놓은 것이다.16

결과는 잘 알려져 있다. 1926년 3월 광둥에서 국민당 군대의 사령관 장제스는 좌파에 맞서 첫 번째 쿠데타를 일으켰다. 소련의 압력을 받아 중국 공산당은 굴복했다. 장제스 군대가 ‘북벌’에 나서자 노동자·농민의 반란 물결이 군벌 세력들을 분쇄했지만, ‘동맹’에 충실한 공산당은 ‘과격한 행동’을 막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1927년 3월에 장제스가 상하이에 입성하기 전에 군벌 세력들은 중국 공산당이 지도한 두 번의 총파업과 한 차례의 봉기로 패배했다. 장제스는 노동자들에게 무장해제를 명령했다. 중국 공산당은 저항하지 않았다. 그 직후 4월에 노동계급은 학살당하고 노동운동은 분쇄당했다. 국민당의 분열이 뒤따랐다.

● 민중전선과 스페인 혁명에 대해
1936년 7월 프랑코의 권력 장악 기도에 대응해 스페인 혁명이 분출했을 때 스페인 공산당은 2월 선거에서 승리해 권력을 장악한 스페인 민중전선의 일부로서 전력을 기울여 운동을 ‘민주주의’의 틀 안에 가두어 두려 애썼다. 소련의 외교 활동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도움으로 그러한 노력은 성공했다. 스페인 공산당 일간지 편집자 헤수스 에르난데스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지금의 노동자 운동이 내전 종식 뒤 프롤레타리아 독재 수립을 목표로 삼는다는 것은 절대로 잘못된 것이다. ……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가정을 최초로 부정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오직 민주공화국을 수호하고자 하는 염원 때문에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36

스페인 공산당과 그들의 부르주아 동맹들은 이러한 노선을 따라 공화국 정부의 정책을 점점 더 우파적 방향으로 밀고 나갔다. 오랫동안 지속된 내전 과정에서 공산당은 자신보다 좌파적인 정당인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POUM을 맨 먼저 정부에서 축출했다. 트로츠키는 POUM이 민중전선에 참여할 때부터 혹독하게 비판했다. POUM은 민중전선에 참여한 결과 정치적으로 무장해제당하고 공산당한테 ‘좌파적’ 커버를 제공하게 됐다. 공산당은 POUM을 쫓아낸 다음 스페인 사회당 내 좌파 지도자들을 축출했다.
“공화국 질서를 수호하면서 재산을 보호하는 것”은 공화국 스페인에서 좌파에 대항한 공포정치를 불렀다. 그리고 트로츠키가 경고한 대로 이 덕분에 프랑코가 승리할 수 있게 됐다. 1937년 12월에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스페인 프롤레타리아는 일급의 군사적 자질을 갖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스페인의 경제생활에서 차지하는 고유한 비중에서, 또 정치와 문화 수준에서 스페인 프롤레타리아는 혁명의 첫날부터 1917년 초의 러시아 프롤레타리아보다 한수 아래가 아니라 한수 위에 있었다. 승리로 나아가는 길에서 주로 프롤레타리아 자신의 조직들이 프롤레타리아의 전진을 가로막았다. 지령을 내리는 스탈린주의자 도당들은 자신들의 반혁명적 역할에 어울리게 고용주, 출세주의자, 탈계급화한 인자들, 그리고 일반으로 갖가지 사회적 쓰레기들로 이뤄져 있었다. 다른 노동자 조직들의 대표자들 ― 구제 불능의 개혁주의자들, 아나키스트 공론가들, POUM의 가망 없는 중간주의자들 ― 은 투덜거리고, 끙끙거리고, 우왕좌왕하고, 책략을 부리다가 결국에는 스탈린주의자들에게 순응했다. 그들이 공동 활동을 한 결과, 사회혁명 진영 ― 노동자와 농민 ― 은 부르주아지에게, 더 정확히 말하면 부르주아지의 그늘에 묻혀 버렸다. 혁명 진영은 몰락했고 혁명성도 잃어버렸다.
대중의 영웅적 투쟁이나 개별 혁명가들의 영웅적 행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중은 자신들의 힘에만 의존해야 했던 한편, 혁명가들은 강령이나 행동 계획도 없이 분산돼 있었다. ‘공화국’ 군대의 지휘관들은 군사적 승리를 이룩하는 것보다는 사회혁명을 분쇄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병사들은 더는 지휘관들을 신뢰하지 않았고, 대중은 정부를 믿지 않았다. 농민들은 한켠에 비켜섰고 노동자들은 기진맥진해져서 패배에 패배를 거듭해 갈수록 사기가 저하했다. 이 모든 것은 내전의 초기부터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자본주의 체제의 구출을 과제로 설정함으로써 민중전선은 군사적 패배를 자초했다. 볼셰비즘을 거꾸로 세움으로써 스탈린은 혁명의 무덤을 파는 자 노릇을 완전히 성공적으로 했다.

오늘날 ‘제3기’ 스탈린주의 노선을 옹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전에 마오주의자들이었던 소종파들을 제외하면 말이다). 민중전선은 전혀 별개 문제다.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유러코뮤니즘’과 이른바 ‘역사적 타협’이 민중전선과 본질적으로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더욱이, 형식상의 기준으로 유러코뮤니즘 경향보다 분명히 왼쪽에 있는 사람들이 ‘영-소 노동조합위원회’ 하에서 공산당이 범했고 트로츠키가 비판한 것과 본질적으로 똑같은 오류들[좌파 노조 지도자들에 대한 환상]을 되풀이한다.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트로츠키는 레닌과 함께 러시아 혁명을 승리로 이끈 지도자이자 적군을 창설해 혁명을 방어한 전략가,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노선에 반대해 세계혁명을 주장하다 추방돼 끝내 암살당한 비운의 혁명가로 알려져 있다. 무엇보다 “제국주의 첩자”(스탈린)라는 비난에서부터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계승자”(아이작 도이처)라는 찬사에 이르기까지 평가가 양극단으로 엇갈린 인물이며, 냉전 시대에는 흔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아예 무시당하기도 했다.

또한 트로츠키는 레닌의 두 배가 넘는 글을 쓰고 다양한 분야에 걸쳐 방대한 저작을 남긴 저술가이자 이론가였다. 그러나 트로츠키의 사상을 왜곡 없이 간결 명료하게 정리한 책은 찾아보기 어렵다. 영국의 교사 출신 트로츠키주의자 던컨 핼러스가 트로츠키의 사상을 핵심만 추려 이 작은 책 한 권에 담았다. 이 책은 네 가지 주제에 초점을 맞추며 트로츠키의 사상을 찬양이나 비난 일색으로 다루지 않고 공과를 엄밀히 따진다.

첫째는 트로츠키의 사상에서 가장 유명한 연속혁명론이다. 연속혁명론은 후진국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한지에 대한 트로츠키의 답변이었다. 이 책은 러시아 혁명과 그 뒤 식민지나 반식민지 나라들, 즉 제3세계에서 전개된 상황을 돌아보며 연속혁명론의 타당성을 따져 본다.

둘째는 러시아 혁명의 결과와 스탈린주의, 소련 국가의 성격 문제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역사유물론적 분석을 최초로 꾸준히 시도했던 사람이다. 이 책은 트로츠키의 스탈린주의 분석을 살펴보고 그 강점과 약점을 지적한다.

셋째는 매우 상이한 상황에서 대중적 혁명 정당이 사용하는 전략과 전술 문제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주의가 재앙적 영향을 끼친 중국 혁명(1925~1927년)의 패배, 파시즘의 승리, 소련과 코민테른의 타락 등을 비판하고 분석하면서 전략과 전술 부문에서 마르크스와 레닌 못지 않은 공헌을 했다.
넷째는 당과 계급의 관계다. 혁명 운동이 노동자 대중과 관계 맺는 문제에 관해 트로츠키는 무어라 말했을까?

트로츠키의 스탈린주의 비판은 오늘날과 상관없는 먼 과거의 일만은 아니다. 최근 한국의 진보 진영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민주대연합’의 뿌리가 바로 스탈린의 민중전선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진정한 변화를 바라는 모든 사람이 이 책을 꼭 읽어야 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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