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대한민국 현대사 (독서>책소개)/1.해방전후.미군정

자유공동체를 향한 대장정

동방박사님 2022. 9. 26.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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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20세기 후반 한국 자유공동체운동의 생생한 역사

이 책은 현재 생존해 있는 한국 아나키스트 중 최고령인 수민 이문창 선생(1927년생 95세)이 (사)국민문화연구소를 중심으로 전개한 20세기 후반 자유공동체운동의 대장정(아나키즘 실천 운동)을 현장에서의 실천과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직접 저술한 것이다.

이문창 선생은 2008년에 해방 후 약 10년간의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투쟁과 활동을 그린 『해방 공간의 아나키스트』(이학사)를 출간한 바 있다. 이 책은 『해방 공간의 아나키스트』에 이어 그후 약 50년간의 아나키스트들과 학생들, 활동가들의 사회운동을 그린 것이다.

권력 부정과 자유 탈환을 신조로 항일 투쟁을 하던 한국 아나키스트들은 해방이 되자 크게 두 그룹, 즉 신사회 건설 운동에 중점을 둔 자유사회건설자연맹과 정치운동에 중점을 둔 독립노농당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두 그룹 모두 해방 정국에서 여러 활동이 좌초를 겪음으로써 전자는 주로 교육계로 돌아가 후진 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대중 계몽에 전념하였다(후자의 정치 실험도 실패로 끝나고 그후 그 역할이 민주사회당, 민주통일당 등으로 이어졌다). 이 무렵(1947년) 위당 정인보, 회관 이을규(임정 국무위원), 우관 이정규(독립운동가), 수주 변영로, 수곡 유정렬 등 주요 인사 10여 명이 모여서 교육 계몽 활동을 위해 설립한 것이 국민문화연구소였다(이때 지은이 이문창도 약관 20세에 참여함).

 

목차

책머리에

서장: 자주협동이 우리의 길이다

1장 폐허 위에서의 사회운동 설계

민주사회주의와 혁신정당운동
또 하나의 아나키스트 정당
민주사회당의 조직 원리와 노선
한국 사회주의운동의 현황
자유공동체운동의 맹아 ― 농촌자치운동
4?19혁명의 봉화와 더불어
5?16 군사 쿠데타 발발

2장 전원 · 공장 · 작업장의 모형을 목표로

문화반 조직부터
진건면 모습
농촌의 현실과 농촌운동의 목표
국민문화연구소 재건 총회
손으로 생각하라
향토애에 불타는 오룡골 청년들
사회단체 등록 제1호
공개 활동 제1성 ‘국민문화교양강좌’
농촌운동의 뉴프론티어 ‘진건수산센터’ '설립
자유공동체운동의 선구자 ― 아나키스트들과 학생들

3장 낙원동 시절

새 보금자리에서
대학생 향토 활동 지도
우관 선생의 사상의 편린
금곡수산기술훈련원
낙원동 시절의 우관과 나
『한국아나키즘운동사』 편찬 착수

4장 농촌자치운동과 생활협동운동

학생들 눈에 비친 새마을운동
도봉산 간담회
전국농촌운동자협의회 발족
실험소비조합 발족
농산물 유통 과정과 출하조합
일본 소비자생활협동조합 연수 여행
남서울지부
그 뒷이야기

5장 시련을 헤치고

민주화운동의 서막과 통일민주당
공평동 옥상 사무실 풍경
가네코 후미코 묘비 제막식
사상 서적 출판 활동
국제 교류의 문이 열리다
시련 속의 교육 문화 활동
아나키즘운동사 발간과 자주인연맹
세대교체와 우관의 서거

6장 21세기의 길목에서

세계평화국제회의와 자유사회사상 연구
재일 동포 인권 투쟁 연대
재중 동포 청소년을 위한 민족문고 사업
누구를 위한 산업화인가?
통일 문제와 자유공동체운동

종장: 갈 길은 멀다

책을 마치며

참고 문헌
찾아보기
 

저자 소개 

저 : 이문창
 
1927년 충북 진천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문을 공부하고 신식 교육을 받은 후, 10대 후반에 아나키즘운동에 투신, 평생을 아나키스트로서 자주학습운동, 문화교양운동, 농촌운동, 자유공동체운동 등 사회운동에 헌신한, 해방 후 한국 사회운동과 아나키즘운동의 산증인이다. 1943년 서울 청파동 광제한약국 점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문창은 그후 반탁운동에 가담한 것을 계기로 자유사회건설자연맹 산하의 흑백회에 참여하며...

 

출판사 리뷰

농촌과 도시, 사회의 최전선에서 자유공동체를 위해 헌신한 아나키스트 이문창과 국민문화연구소의 70년

국민문화연구소는 발족은 했으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더 이상의 활동은 못하고 회원들 각자가 나름대로 운동을 하던 시기(환력학원, 근로청소년단 등)를 거쳐 다시 1950년대 말부터 조직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폐허가 된 나라,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였지만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국민문화연구소는 농촌 청소년들을 계몽하는 운동부터 시작하여 이를 점차 농촌자치운동으로 확대하여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문고?문화반 및 자주학습운동, 국민수산授産운동, 국민문화교양강좌, 대학생 농촌활동(농활) 지도, 전국농촌운동자협의회(전농운) 창립 및 활동, 생활협동조합운동, 국제 교류, 교육 문화 활동, 재일 동포 인권 투쟁 연대, 한국자유사회운동 국제학술회의, 민족문고 보급운동 등 자유공동체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국민문화연구소는 언필칭 ‘사회단체 등록번호 제1호’다.

왜냐하면 1964년 3월 11일 문교부로부터 ‘사회단체 등록 제1호’로 정식 등록 허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때 국민문화연구소에는 1920년대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창립 맹원인 이정규 회장(청주대학장, 성균관대총장)을 중심으로 YMCA에서 협동조합운동을 오랫동안 해온 목양 홍병선 목사, 수곡 유정렬 선생, 성균관대 손우성 교수, 서울대 농대 최응상 교수, 서울대 상대 최문환 교수(서울대총장), 서울대 사대 김기석 교수, 한양대 한태수 교수 등 당시의 지도급 인사들이 참여하여 주요 활동을 지도하고, 일제강점기부터 활동해온 아나키스트 선배들이 활동을 뒷받침하는 가운데, 이 책의 지은이 이문창과 청년 학생들, 현장 활동가들이 언제나 활동의 최일선을 지켰다. 이 시기의 주요 활동 중에서 대표적인 것들을 아래에 요약한다.

문고 · 문화반 및 자주학습운동

4?19를 겪은 학생들이 일제히 자발적으로 향촌으로 들어가 농촌 청소년들을 계몽하고 조직화(문고?문화반)하는 한편 인격 수련과 교양 증진을 위한 자주학습운동을 전개하였다(1960년 겨울방학에 조직된 문화반만 전국적으로 24곳이었고 비치된 책이 1,000여 권이었다). 이는 농촌 청년들이 내 마을 문제를 보다 근원적인 자아의 정체성과 결부시켜 생각하게 함으로써 공동체 의식에 눈뜨게 하고, 이런 공동체 의식으로 단련된 청년들의 공동생활의 리더십을 지역공동체로, 온 나라로 뻗어나가게 하는 것이었다.

국민수산授産운동

1960년대에 우리나라는 가난했다. 농촌은 일이 없어 노는 유휴노동력으로 넘쳐났다. 이러한 농촌의 방대한 유휴노동력을 지역사회 내에서 가내공업 쪽으로 돌림으로써 농공병진, 도농 균형 발전의 자주협동적 국민 산업 체제를 갖추자는 운동이 국민수산운동이다. 국민문화연구소는 이를 남양주 진건면 오룡골의 문화반을 중심으로 시범 실시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자신감을 얻었으며(새끼 공동판매, 예술 염색 기술 지도, 문화 교양 강좌, 편직공업), 이후 이 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진건수산授産센터 건립과 금곡수산기술훈련원

국민문화연구소는 농촌 청년들의 공동생활 훈련장인 동시에 공동 작업장인 진건수산센터 설립을 지원했다(1965년). 오룡골 문화반 청년들은 국민문화연구소 회원들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의 힘으로 이 센터를 만들었다. 여기서 편직 기술 교육에 착수하여 스웨터 등을 생산했고, 이는 각 마을로 퍼져갔다. 그리고 이러한 국민수산운동은 곧 전국적인 규모로 뻗어갔다. 진건수산센터는 본격적으로 스웨터 편직공업 발전의 기초를 닦게 하였을 뿐 아니라 훗날 국민문화연구소 부설의 금곡수산기술훈련원(1968-1972년)을 설립하여 남양주 스웨터 공업단지 조성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국민문화교양강좌

국민문화연구소는 1964년 5월부터 일반 시민의 교양 향상과 불특정 다수의 회원 모집을 목적으로 ‘국민문화교양강좌’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이 공개강좌는 집회가 금지된 계엄 시기를 제외하고는 1980년대 초반까지 무려 220여 회에 걸쳐 연면하게 계속되었다. 초기에는 연구소 임원들을 비롯하여 최상수, 이종진, 유상근, 이병일, 최인, 정일형, 주석균, 홍승면, 조동필, 성인기, 오종식 등 사계의 전문가들이 강사로 초빙되어 봉사해주었고, 그후에도 대학교수, 언론계 중진들이 동참해주어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강좌의 주제는 정치, 경제, 산업, 사회, 문화 등 제 분야를 다루었으며 후기로 갈수록 농촌문제, 청년문제, 여성문제, 아나키즘, 사회사상 등 청강자의 요망에 따라 보다 심층적인 내용을 다루었다.

대학생 농촌활동 지도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는 대학생 농촌활동(농활)의 전성기였다. 국민문화연구소는 오랫동안 농촌운동을 해온 전문 단체로서 포괄적인 농촌활동 매뉴얼을 가지고 농촌활동을 지도해왔기 때문에 대학생 단체들의 농촌활동 지도 요청이 굉장히 많았고, 이들과 자연스럽게 깊은 유대를 가지게 되었다. 이때 함께한 학생 단체로는 서울대 총여학생회, 서울대 사범대 경암회, 향토개발회, 유네스코학생회(KUSA), 공대 향토공학회, 치대 TTC, 약대 소모임, 농대 농촌문제연구회 등 각 단과대학의 9개 서클, 고려대의 농어촌문제연구회와 4H연구회 등 3개 서클, 연세대의 기독학생회(SCA), 한국문제연구회, 아가페회, 도서관학회 등 4개 서클, 이화여대의 중앙계몽대, 아가페회 등 2개 서클, 서강대의 향토연구회, 성균관대의 농촌문제연구회, 동국대의 농어촌연구부, 서울농업대의 개척농학회, 한양대의 기독학생회, 건국대의 유네스코학생회와 이스라엘문제연구회, 경기공전의 향토봉사반, 경희대의 바인클럽, 중앙농민학교 학우회, 중앙신학교 학우회 등 10여 대학의 수십 개 농활 서클들이다. 또한 국민문화연구소 학생회가 농촌활동의 맥을 이어왔고, 모든 활동의 전위에 서서 견인차 역할을 도맡아 했다. 국민문화연구소는 (긴급조치로 인해 연구소 활동을 제약받기 전인) 1970년대 초반까지 명실공히 한국 학생 향토 활동 중심 기구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전국농촌운동자협의회 창립 및 활동

유신정권의 비상계엄이 해제된 후인 1973년 3월 16일에 이화여대 다락방 강당에서 전국의 농촌활동가들이 모여 ‘전국농촌운동자협의회(전농운)’ 창립 대회를 개최했다. 전농운은 “농촌의 경제적 몰락과 문화적 퇴폐를 걱정하는 농촌인들이 모여 우리 농촌 본연의 자주협동적 저력을 소생시키는 가운데 농가 스스로의 생존권을 수호하고 촌락공동체의 자치 능력을 신장하여 도농 간의 균형 발전을 이룩함으로써 국민 사회구조의 안정 기반을 확립하는 데 기여함을 목적”으로 창립되어 농촌?농업?농민이 당면한 문제를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활동을 했다. 특히 1980년 4월 17일에는 전농운이 중심이 되어 전국 농민 단체가 공동 주최하는 ‘헌법 및 농림 관계 법령 개정 공청회’를 개최하여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이날 행사에는 훗날 대통령이 되는 김영삼, 김대중도 참석하여 축사를 했다).

실험소비조합, 출하조합, 남서울 주민 생활협동운동

국민문화연구소는 ‘농촌인의 자주협동적 생산?출하 활동을 고무하고 도시인의 건전한 소비생활을 도모할 수 있는 농산물 공동 구매 활동을 전개해보자는’ 목적으로 1974년에 실험소비조합을 발족했고, 이어 신용협동조합을 발족(1977년)했다. 또한 전농운은 출하조합을 조직하여 운영했다(1977년). 그리고 1980년대 초반에 국민문화연구소 남서울지부가 출범하면서 남서울 주민 생활협동운동을 시작했다(남서울지역 소비자 공동 구매 조직을 개척하는 사회봉사 활동). 이 운동에는 국민문화연구소에 끝까지 남아 농촌운동의 맥을 지켜온 청년 동지들이 중심에 서서 직접적인 역할을 했다.

한국자주인연맹 창립 및 자주인연맹 제2차 대표자대회

한국자주인연맹 창립총회는 정화암, 이정규 등 원로 아나키스트들을 좌장으로 재경 동지 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1972년 6월 22일 진관사에서 거행되었다. 이 총회에서는 “우리는 각자 자기를 주재하는 자주인이다. 자주인의 자유의사로 연합한 자유로운 사회를 우리는 건설한다” 등 6개 항의 강령과 규약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그후 15년 만인 1987년에 자주인연맹 제2차 대표자대회를 대구와 경남 안의에서 개최했다. 이 대회는 각 대표가 각각 서클, 연구 그룹을 조직해서 활동할 것과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세미나 개최 등을 결의하고, 원로 아나키스트 최갑룡, 하기락과 함께 이문창 등을 사무국 간사로 선임했다.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세미나

1988년 10월 28일부터 31일까지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에서 자주인연맹 주최로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세미나’를 개최했다. 전 세계 14개국에서 온 아나키스트들과 단체들이 참석하여 ‘전쟁의 원인과 영향, 세계의 군비 현황, 발발 가능한 전쟁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등을 주제로 열띤 발표와 토론을 했다. 세미나가 끝난 후 각국 단체의 대표들은 모여서 반전?평화를 호소하는 결의문을 작성 발표하였다. 이 국제세미나에서 이문창 국민문화연구소 부회장이 영어로 사회를 보았다.

재일 동포 인권 투쟁 연대

국민문화연구소는 1970년대부터 해외 동포의 디아스포라Diaspora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연구소는 사단법인 개편 당시 김환(후일 나고야한국학교 교장), 김자산(재일 동포) 두 사람을 법인 임원으로 영입하기까지 하였다. 그때 교양강좌를 통해 김환 이사는 ‘재일 동포의 민족교육’(71. 3. 21.)을 강조하였고 김자산 이사는 ‘재일 동포의 법적 지위 문제와 실태’(70. 4. 9.)를 호소하여 해외 동포에 대한 회원들의 관심을 유도한 바 있었다. 그런 끝에 국민문화연구소는 1980년대 말에 내외 관계 인사 20여 명을 초치하여 재일 동포 ’91년문제 대책 간담회(1989. 11. 11.)를 열고 재일 동포의 ’91년문제를 집중 토의하는 자리를 만들었고, 결의문을 채택하여 각계에 호소했다.

광복 50주년 기념 한국자유사회운동 국제학술회의

국민문화연구소는 1995년 8월 10일에 동숭동 우당기념관에서 ‘광복 50주년 기념 한국자유사회운동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아시아 아나키즘운동과 한국 아나키스트들, 한국 아나키즘운동의 회고와 전망을 주제로 개최된 이날 회의에서는 ‘20세기를 풍미하던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더 이상 인류 사회를 이끌고갈 지도 이념으로서는 부적합하다는 것이 판정이 난 이상 이제 대안으로서의 아나키즘 사상을 재점검해야 할 필요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그동안 우리가 실험했던 자유공동체운동이 이제부터 진가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실천을 담당할 주역들의 사상적 재각성이 요구된다’는 결론을 얻었다(이 회의에는 1920년대 말 중국에서 이정규 선생과 아나키즘운동을 함께했던 전 상해노동대 오극강 교수가 참석하여 옛 동지들을 추념했다).

민족문고 보급운동

국민문화연구소는 ‘200만 재중 동포와의 연대를 통해 그들의 2, 3세 자녀들로 하여금 모국의 말?글?뿌리를 되깨우치게 하는 길을 열어주자’는 취지에서 책 보내기 운동을 실시했다. 민족문고 사업이 언론을 통해 소개되자 수많은 개인과 단체가 참여하여 책을 기증해왔다. 국민문화연구소는 45개 재외 동포 교육기관(중국 44개 처, 우즈베키스탄 1개 처)과 결연하여 민족문고 활동을 전개했다. 이에 따라 국민문화연구소는 1989년부터 1996년까지 8년 동안 매년 지속적으로 책을 고루 배송했다. 민족문고 사업으로 책을 받은 재외 동포 기관들이 감동적인 반응을 보내왔다.

한국아나키스트독립운동가기념사업회

국민문화연구소는 2014년 8월 12일 독립공원(서대문) 강당에서 아나키스트독립운동가 후손, 후학들이 대거 모인 가운데 한국아나키스트독립운동가기념사업회(회장 이문창)를 발족시켰다. 국민문화연구소가 아나키스트선열기념사업회를 출범시킨 목적은 그간 완전히 잊혀졌거나 산발적으로 진행되어오던 아나키스트 선열 사업을 보다 미래지향적 연대 관계로 발전시켜나가려는 데 있었다. 국민문화연구소는 이런 연대 활동을 통해 고인들의 유지 유훈을 계승해나갈 수 있는 자발적인 조직망을 확대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회원들의 회비와 후원, 봉사로 운영되는 독립 단체, 국민문화연구소의 청년 학생들, 활동가들, 아나키스트들의 발자취이자 사회운동의 한 역사

사회단체는 자율성과 독립성이 중요하다. 국민문화연구소는 1947년 4월 발족 이래 2022년 현재까지 정부를 비롯한 외부 지원은 일체 받지 않고 오로지 회원들의 회비와 후원, 봉사로만 단체를 운영해오고 있다(9번의 이사 끝에 입주한 지금의 건물도 국민문화연구소 창립자인 우관 이정규 선생이 돌아가시면서 국민문화연구소에 기증한 전 재산을 토대로 마련한 것이다).
국민문화연구소는 자율적인 독립 단체로서 언제나 우리 민중이 가장 필요로 하는 곳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해왔다. 국민문화연구소가 주요 활동을 하던 1960-70년대는 아직 대한민국이 산업화되기 전이어서 우리 민중 모두 매우 가난했다. 그때는 농촌 청년을 교육 계몽하고, 국민수산운동을 전개하고, 자주협동의 농촌자치운동을 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중요했다. 그때 국민문화연구소는 연구소의 청년 학생들, 활동가들,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그곳에 있었다. 아나키즘은 모든 권위를 부정한다. 그것은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 책은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하여 우리 민중이 필요로 하는 곳에서 헌신적으로 자유공동체운동을 쉼 없이 해온 사회단체 국민문화연구소의 청년 학생들, 활동가들, 아나키스트들의 발자취이자 쿠데타와 독재로 서슬이 퍼렇던 시절 사회운동의 한 역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