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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우리가 몰랐던 이완용
단단한 봉인을 열고 실체를 들여다본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완용은 어린 시절 명문 반가의 양자로 들어가 고전을 익혔으며 과거 급제 후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배우고 주미대사관 참찬관으로 파견되었던, 동양의 전통과 서양의 지식에 두루 열려 있는 인물이었다. 또한 각종 교육 개혁을 이끌고 독립협회 회장을 지내며 정동파의 수장으로 자리매김하는 등 복잡다단했던 구한말 정계에서 주목받는 기민한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이완용은 을사조약 체결과 함께 국망의 원인 제공자이자 인간적으로도 타락한 존재로 낙인찍혔다. 물론 그의 매국 행위는 비판받아야 하겠지만, 대한제국의 정치 구조 속에 배태되어 있던 문제들이 이완용 개인의 문제로 환원됨으로써 이완용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국가 혹은 민족의 이름 아래 일종의 탈출구를 얻었던 것은 아닐까.
이러한 의문을 품고 추적해본 이완용은 기존의 평가처럼 탐욕스러운 인물도, 근대적인 주권 개념을 받아들이지 못한 전통적인 관료도 아니었다. ‘매국노’ 이완용은 오히려 합리적인 근대인이었다. 제국주의의 폭력에 분노하기보다는 자신을 포함한 다수의 혜택을 위해 절대로 분노하지 않는 이성적 인간, 위기 앞에서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기보다는 국가와 민족의 가치를 미래로 밀어내고 현재를 껴안으려 했던 현실적 인간이었다. 근대적 합리성이 극단의 시대와 마주했을 때 어떻게 발현되는지 이완용의 행적을 따라가보자.
단단한 봉인을 열고 실체를 들여다본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완용은 어린 시절 명문 반가의 양자로 들어가 고전을 익혔으며 과거 급제 후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배우고 주미대사관 참찬관으로 파견되었던, 동양의 전통과 서양의 지식에 두루 열려 있는 인물이었다. 또한 각종 교육 개혁을 이끌고 독립협회 회장을 지내며 정동파의 수장으로 자리매김하는 등 복잡다단했던 구한말 정계에서 주목받는 기민한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이완용은 을사조약 체결과 함께 국망의 원인 제공자이자 인간적으로도 타락한 존재로 낙인찍혔다. 물론 그의 매국 행위는 비판받아야 하겠지만, 대한제국의 정치 구조 속에 배태되어 있던 문제들이 이완용 개인의 문제로 환원됨으로써 이완용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국가 혹은 민족의 이름 아래 일종의 탈출구를 얻었던 것은 아닐까.
이러한 의문을 품고 추적해본 이완용은 기존의 평가처럼 탐욕스러운 인물도, 근대적인 주권 개념을 받아들이지 못한 전통적인 관료도 아니었다. ‘매국노’ 이완용은 오히려 합리적인 근대인이었다. 제국주의의 폭력에 분노하기보다는 자신을 포함한 다수의 혜택을 위해 절대로 분노하지 않는 이성적 인간, 위기 앞에서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기보다는 국가와 민족의 가치를 미래로 밀어내고 현재를 껴안으려 했던 현실적 인간이었다. 근대적 합리성이 극단의 시대와 마주했을 때 어떻게 발현되는지 이완용의 행적을 따라가보자.
목차
발간의 글 _‘한겨레역사인물평전’을 기획하며 (정출헌|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점필재연구소 소장)
머리말 _배제된 타자의 봉인을 열다
1장 관료로 내딛은 첫발, 그 신중한 한 걸음
당돌한 아이, 명문 반가에 발 들이다|과거 급제, 고종과의 첫 만남|육영공원 입학, 신문물을 익히다|급변하는 정세 속에 결행한 미국행|서양의 눈에 비친 우리, 그 조선을 돌아보다|자못 신중한 행보, 뜻 펼칠 때를 기다리다
2장 충성스러운 신하에서 기민한 정치인으로
갑오개혁, 급박한 정치적 소용돌이 가운데서|정동파의 입각, 그리고 친일 세력의 척결|성균관 개혁과 근대적 교육기관의 설립|친미파 수장으로 정치적 도박을 시작하다|정쟁을 가르며, 축출과 제휴를 거듭하며
3장 정계의 중심에서 세상과 만나다
보수 세력과 고종의 틈바구니에서|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세력 결집을 시도하다|정계의 주도권 다툼, 그리고 고종의 환궁|고종과의 대립, 뒤이은 중앙 정계에서의 퇴출|러시아 견제의 배후 세력으로 재기를 노리다|상반된 평판의 기로에 서서
4장 정계 밖에서 설움을 겪다
지방의 부정부패와 민심의 이반 가운데서|정계에서 물러났으나 무시할 수 없는 정치인으로|시세를 관망하며 재기를 기다리다|정계의 혼란, 그리고 다시 찾아온 기회
5장 애국과 매국의 갈림길에서
대한제국 점령을 위한 일본의 압박이 시작되다|누구도 찬성하지 않았으나 체결된 을사조약|조약 체결의 책임은 누구에게?|합리성과 실용성을 갖춘 역적의 논리, 사회에 침윤되다
6장 현실주의와 실용주의를 표방하며 친일로 나아가다
노련한 정치 편력으로 입지를 강화하다|신중한 개혁 노선의 표방, 그리고 제국의 분열|대한제국 통치권의 상징, 사법권이 일제의 손으로|정치적 위기, 칼을 맞고 쓰러지다|한 달간의 고민, 그리고 결단|의리와 매국 사이에서
7장 권력의 정점에서 지탄의 절정으로
병합의 회오리 속에서 조선 상류층의 버팀목이 되다|일본인과의 인맥 형성을 통해 구가한 화려한 시절|격렬한 저항 운동의 발발, 내선융화의 논리가 강고해지다|일상생활에 대한 이완용의 소신|‘매국노’ 이완용의 죽음
주요 저술 및 참고도서 목록|연보|찾아보기
머리말 _배제된 타자의 봉인을 열다
1장 관료로 내딛은 첫발, 그 신중한 한 걸음
당돌한 아이, 명문 반가에 발 들이다|과거 급제, 고종과의 첫 만남|육영공원 입학, 신문물을 익히다|급변하는 정세 속에 결행한 미국행|서양의 눈에 비친 우리, 그 조선을 돌아보다|자못 신중한 행보, 뜻 펼칠 때를 기다리다
2장 충성스러운 신하에서 기민한 정치인으로
갑오개혁, 급박한 정치적 소용돌이 가운데서|정동파의 입각, 그리고 친일 세력의 척결|성균관 개혁과 근대적 교육기관의 설립|친미파 수장으로 정치적 도박을 시작하다|정쟁을 가르며, 축출과 제휴를 거듭하며
3장 정계의 중심에서 세상과 만나다
보수 세력과 고종의 틈바구니에서|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세력 결집을 시도하다|정계의 주도권 다툼, 그리고 고종의 환궁|고종과의 대립, 뒤이은 중앙 정계에서의 퇴출|러시아 견제의 배후 세력으로 재기를 노리다|상반된 평판의 기로에 서서
4장 정계 밖에서 설움을 겪다
지방의 부정부패와 민심의 이반 가운데서|정계에서 물러났으나 무시할 수 없는 정치인으로|시세를 관망하며 재기를 기다리다|정계의 혼란, 그리고 다시 찾아온 기회
5장 애국과 매국의 갈림길에서
대한제국 점령을 위한 일본의 압박이 시작되다|누구도 찬성하지 않았으나 체결된 을사조약|조약 체결의 책임은 누구에게?|합리성과 실용성을 갖춘 역적의 논리, 사회에 침윤되다
6장 현실주의와 실용주의를 표방하며 친일로 나아가다
노련한 정치 편력으로 입지를 강화하다|신중한 개혁 노선의 표방, 그리고 제국의 분열|대한제국 통치권의 상징, 사법권이 일제의 손으로|정치적 위기, 칼을 맞고 쓰러지다|한 달간의 고민, 그리고 결단|의리와 매국 사이에서
7장 권력의 정점에서 지탄의 절정으로
병합의 회오리 속에서 조선 상류층의 버팀목이 되다|일본인과의 인맥 형성을 통해 구가한 화려한 시절|격렬한 저항 운동의 발발, 내선융화의 논리가 강고해지다|일상생활에 대한 이완용의 소신|‘매국노’ 이완용의 죽음
주요 저술 및 참고도서 목록|연보|찾아보기
책 속으로
“그는 합리적인 근대인이었다. ‘충군’과 ‘애국’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가치를 위해 용기를 내거나 또는 제국주의의 폭력에 분노하기보다는 자신을 포함한 다수가 문명화의 혜택을 누리기 위해 절대로 분노하지 않는 이성적 인간이었다. 왕과 국가, 개인과 민족 사이에 심각한 균열이 빚어질 때 이완용이 선택한 것은 어느 한쪽도 아니었다. 균열을 직시하고 그것을 파열시켜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고 용기를 내기보다는 국가와 민족의 가치를 ‘미래’로 밀어내고 왕과 개인이 살아갈 현실을 끌어안으려 했다. 근대적 합리성이 극단의 시대와 마주했을 때 어떻게 발현될 수 있는지를 그는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었다.”--- p.13
“그는 현재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갑오개혁, 1898년 독립협회운동 등 부조리에 대한 분노와 체제 변화를 향한 열정이 사라진 이후 현실의 삶이 갑자기 무겁게 다가왔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분노와 열정의 피로감을 덜기 위해 안정을 원했다. 개화와 개혁보다는 근면하고 성실한 노력과 노동, 그리고 그것이 보장해주리라 기대되는 미래를 위해 현실을 감내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민주화 이후 개혁의 피로감이 실용주의에 인도되어 경제적 안정을 희구하는 분위기로 나아간 것처럼 이완용의 동양 문명화론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잡아끄는 자장의 하나였다.
이완용은 현실에 분노하기보다는 현실을 조망하려고 했다. 그에게는 분노해야 할 현실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조약을 주도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평소 자신의 소신이었던 왕과 왕실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그리고 기존 체제가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이들에게 일시적이고 허구적인 ‘안정’을 주었다. 분노해야 할 현실이 없었던 이완용은 현실의 부조리를 극복하고자 하는 그 어떤 사회적 가치의 부름에도 호응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는 분노할 현실이 없거나 또는 그것을 외면하려 하는 지금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는 현재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갑오개혁, 1898년 독립협회운동 등 부조리에 대한 분노와 체제 변화를 향한 열정이 사라진 이후 현실의 삶이 갑자기 무겁게 다가왔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분노와 열정의 피로감을 덜기 위해 안정을 원했다. 개화와 개혁보다는 근면하고 성실한 노력과 노동, 그리고 그것이 보장해주리라 기대되는 미래를 위해 현실을 감내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민주화 이후 개혁의 피로감이 실용주의에 인도되어 경제적 안정을 희구하는 분위기로 나아간 것처럼 이완용의 동양 문명화론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잡아끄는 자장의 하나였다.
이완용은 현실에 분노하기보다는 현실을 조망하려고 했다. 그에게는 분노해야 할 현실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조약을 주도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평소 자신의 소신이었던 왕과 왕실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그리고 기존 체제가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이들에게 일시적이고 허구적인 ‘안정’을 주었다. 분노해야 할 현실이 없었던 이완용은 현실의 부조리를 극복하고자 하는 그 어떤 사회적 가치의 부름에도 호응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는 분노할 현실이 없거나 또는 그것을 외면하려 하는 지금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 p.14
출판사 리뷰
우리가 몰랐던 이완용?
구한말 근왕적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개혁 성향을 드러냈던 관료, 이완용
일반적으로 이완용은 매국노, 친일파, 혹은 변신의 귀재 등으로 낙인찍혀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을 잠시 유보해두고 그의 이력을 따라가다 보면, 이제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흥미로운 사실들을 여럿 발견할 수 있다. 명문 반가에 양자로 들어가서 스물다섯에 과거에 급제한 이완용은 관직 생활을 시작한 지 5개월이 지나 육영공원에 입학한다. 조선 최초의 근대식 교육 기관이었던 육영공원은 영어 등 신문물을 가르쳤지만, 이 신식 학교의 입학생들은 정부의 명령이나 주변 사람의 권유로 들어온 고위 관료 자제들이 많았다. 반면에 이완용은 전통 학문만으로는 시세의 변화를 따라갈 수 없다고 판단하여 자발적으로 육영공원에 입학했다. 이러한 식견은 당시 미국에 대한 짝사랑이 대단했던 고종의 의중을 꿰뚫는 것이기도 했다. 이후 이완용은 조선에서 맨 처음 주미공사를 파견했을 때 참찬관으로 임명되어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는 미국이라는 문명화된 사회를 목도하면서 조선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갖춰 나갔다. 귀국 후 제3차 갑오내각 때 학부대신으로 등용된 이완용은 미국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근대적인 인민 교육을 위한 체제를 정비하고 이를 실행한다. 그의 손을 거치면서 근대적 초등교육기관을 비롯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고등교육기관인 한성사범학교의 관제도 개정되었다.
이완용은 왕이 부재하는 미국의 정치 체제를 일견하고 돌아왔으나 공화정이나 입헌군주제 같은 변화를 주장하는 급진성을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정계가 혼란스러울 때 주도 세력과 거리를 두면서 절대군주인 왕의 의중을 헤아려 자신의 행보를 조정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갑오내각 당시 그는 명문 반가 출신답게 군신(君臣)의 예를 지키는 근왕적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서양 문명을 받아들이고 교육을 진작시킴으로써 조선의 점진적 개혁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이완용은 당시 조선 정계에서 개혁적 관료로 지목되는 인물이었다. 이 시기에 이완용은 러시아와 미국을 배후로 삼으며 반일적 색채를 띠었던 정동파의 수장으로 부상한다. 을미사변이 벌어지면서 일본 세력이 득세했을 때, 이완용을 비롯한 정동파는 목숨을 걸고 아관파천을 감행, 이를 성공시킨다. 또한 정동파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사회정치단체이자 개혁 세력의 결집체인 독립협회에도 깊숙이 개입한다. 독립협회는 정동파를 지지하는 여론을 조성하는 역할을 했으며, 정동파를 이끌던 이완용은 독립협회의 발기인이자 초대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1898년 정부의 친러시아 정책과 비자주적 외교에 반발하여 열렸던 대중 집회인 만민공동회의 배후에도 이완용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속해 있는 독립협회가 대규모 민중 집회를 주도한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시전 상인을 만민공동회 회장으로 선출하는 주도면밀함도 갖고 있었다. 이처럼 이완용은 자파 세력을 결집ㆍ확대하면서 활용 가능한 세력과 연합을 모색하는 법도 익혀갔고, 아관파천처럼 목숨을 건 정치 도박을 감행하는 과감성도 갖춘 경륜 있는 정치인으로 성장해갔다.
을사조약 체결을 주도한 합리적 현실주의자, 이완용
그를 둘러싼 대한제국의 구조와 관계의 문제들
이완용이 관직 생활에서 항상 승승장구했던 것만은 아니다. 그는 중앙 정계에서 배제되면서 전라북도 관찰사로 내려가 지방관으로서의 설움을 느끼기도 했고, 비록 무죄로 판결났지만 탐학의 죄를 쓰고 법부의 재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시세를 관망하면서 재기를 기다릴 줄 알았고, 이완용의 뒤에는 그를 신임하는 고종이 있었다. 이완용의 행적을 논할 때 고종과의 관계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통치자로서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지만 이로 인해 자신의 권력이 해체되는 것을 우려했던 고종은, 정치 개혁의 요구는 차단하되 경제적ㆍ사회적으로 근대 제도와 문물을 도입하고, 이 과정에서 외세를 끌어들여 다른 외세를 견제하는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종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조응한 것이 바로 이완용이었다. 유교적 소양을 갖춘 그는 국왕의 권력을 문제 삼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일본이 협상 파트너로 받아들일 수 있는 손색없는 경력과 연륜을 갖추었기에 고종의 공식 라인이 될 수 있었다.
처음에 이완용은 을사조약 체결에 대한 거부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강력한 관철 의지를 확인한 후 고종이 이에 대해 분명한 거절 의사를 표명하지 못할 것을 알고서 자신의 역할을 결정했다. 그렇다면 그의 친일은 자신의 부귀영화와 호의호식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기존의 권력 가운데서 자신의 입지와 역할을 규정하는 관료로서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는 국가의 위기 앞에서 울분과 분노에 치를 떨기보다는, 또 현실을 바꾸려고 몸부림치기보다는, 상황에 자신을 맞추는 실용성을 갖춘 관료였던 것이다. 을사조약 체결 즈음부터 이완용은 조약 체결에 나선 을사5적과 함께 매국노로 호명되었다. 대한제국 지식인들이 지향했던 입헌군주제를 위해 왕은 여전히 국민 통합의 구심으로 존재해야 했고, 덕분에 고종은 매국의 책임론에서 구출될 수 있었다. 유생들 역시 절대적인 존재로 추상화된 왕에게 국망의 책임을 물을 수 없었기에, 조약 반대 상소를 올리면서 모든 책임을 을사5적에게 돌렸다. 이완용은 상소를 올려 이에 대응했다. 대한제국이 부강해지면 권리를 되찾을 수 있으며 을사조약이 한일의정서와 신협약의 결론에 불과하다는 그의 변명은 을사조약의 의미를 축소시키고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정치적 발언이었다. 현실주의적 입장을 견지한 그의 논리는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유생들에게 선뜻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이완용의 행동은 그 누구에게도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합리성과 실용주의로 포장된 그의 주장은 조금씩 대한제국 지식인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한다. 계몽운동 단체들과 유학파 지식인들은 한국이 부강해질 때까지 일본이 대한제국을 보호하겠다는 을사조약의 문안에 근거해 부강을 위한 실력 양성의 기치를 더욱 높이 내걸었다. 저항과 투쟁이 사회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일본의 강압을 더 불러온다고 생각했던 지식인들은 실력 양성만이 독립 주권을 되찾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부강해지면 나라를 되찾을 날이 있을 것이라는 이완용의 주장은 그렇게 대한제국 사회를 지배하는 논리가 되어 갔다.
매국의 책임에 갇힌 배제된 타자, 이완용
그에게서 발견하는 지금 우리의 모습
우리가 전혀 불편하지 않게 비난할 수 있고 “난 너와는 달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대상이란, 반대급부로 공동체의 소속감을 지속시켜주는 존재일 수 있다. ‘매국노’ 이완용은 이런 측면에서 우리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기제였는지도 모른다. 매국의 책임에 갇혀 있던 이완용이 그 자리에 놓이게 된 배후에는 그의 현실주의와 실용주의적인 인생철학이 있었다. 엄혹한 현실과 맞부딪혔을 때, 모든 것을 포기하기보다는 최대한 얻을 수 있는 것을 고민하는 것이 이완용의 선택이었다. 을사조약을 맺을 것이라면 수정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해야 하고,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할 것이라면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어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는 규정된 법적 절차를 정확히 수행하는 관료의 자세에서 도구적 합리성을 발견하고서, 그것이 자본주의 합리성의 기본 전제라고 보았던 막스 베버의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주어진 현실에서 최대의 결과를 얻기 위해 효율성과 실용성을 최대의 가치로 삼아 자신의 활동과 역할을 규정하는, 베버가 말하는 근대의 합리적인 개인상에서 이완용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어진 현실에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위안하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과 함께, 현실에 순응하여 실리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현명한 세상살이라고 생각하는 오늘날의 세태를 발견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한반도 역사의 색인, 시대를 가로지른 인간 탐구
한겨레역사인물평전
평전을 쓰고 읽는다는 것은 앞서 살아간 옛사람이 남긴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그의 마음과 시대를 헤아려보는 여정일 겁니다. 우리는 그런 여정에서 나 자신이 옛사람이 되어 헤아려보기도 하고, 옛사람이 내 귀에 속내를 속삭여주는 경이로운 체험을 맛보기도 할 것입니다. 때론 앞길을 설계하는 지침이 되기도 하겠지요. 퇴계 이황은 그런 경지를 이렇게 읊었습니다. “고인(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을 못 뵈어, 고인을 못 뵈어도 가던 길 앞에 있네, 가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가고 어찌할까”라고. 우리도 그런 마음으로 옛사람이 맞닥뜨린 갈등과 옛사람이 고민했던 선택을 헤아리며 그의 길을 따라 걸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세월의 간극을 훌쩍 뛰어넘는 그런 가슴 벅찬 공명이 가능한 까닭은 그도 나도 시대를 벗어나서는 잠시도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란 이유 때문이겠지요. 그것이야말로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우리 시대에 굳이 평전이 필요한 까닭일 것입니다. _한겨레역사인물평전 ‘발간의 글’ 중에서
부산대학교 점필재연구소와 한겨레출판이 공동 기획한 ‘한겨레역사인물평전’을 선보입니다. 한겨레역사인물평전은 현재 우리의 삶이 과거와 유리되어 있지 않다는 전제하에 우리 과거사 인물들을 현재의 시각으로 조명해보려는 야심찬 시리즈입니다. 우선 인물 선정에서는, 고대부터 근대를 아우르는 시간 동안 우리 역사에 다채로운 무늬를 아로새긴 수많은 인물들 중에서 그간 주목받았던 인물을 비롯하여 최근 학계에 새로이 소개된 인물까지 골고루 포함하였습니다. 또한 그간 평전에서 주목받았던 정치 관련 인물뿐만 아니라 종교, 사상, 예술 등 다방면에서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을 선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번 시리즈는 각 권마다 단독의 인물을 평하되 여러 권을 근사(近似)한 주제별로 묶어 선보임으로써 여러 인물들을 통해 공통의 시대, 환경, 기타 조건을 고민할 수 있게 할 예정입니다.
총 100권의 평전 발간을 목표로 하고 있는 한겨레역사인물평전은, 그 첫걸음으로 ‘근대를 바라보는 3인의 스펙트럼’이라는 기치 아래 세 권의 평전을 선보입니다. 동양의 평화를 위해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을 겨누었던 독립운동가 안중근, 민족을 대표할 만한 지성으로 주목받았으나 결국 변절의 길을 걸었던 육당 최남선, 그간 ‘매국노’로 낙인찍혀 거의 실체를 조명받지 못했던 이완용이 이번에 선보이는 세 인물입니다. 특히 이들 세 권의 평전은 신진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모아 출간한 것으로, 참신한 필자들의 새로운 시각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점필재연구소와 한겨레출판은 그간 기획 의도, 인물 선정, 필자 선정, 집필 방향 등을 함께 논의하며 평전 출간 작업에 임했습니다. 특히 점필재연구소는 필자의 논지를 학술적으로 보완하는 작업을 통해 더욱 엄밀한 결과물을 도출할 수 있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한겨레출판은 대중성을 갖춘 평전을 집필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작업을 조율했습니다. 이러한 공동 작업이 학계와 출판계가 서로 힘을 모으는 새로운 풍토를 마련하는 데도 적잖이 기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차후에 한겨레역사인물평전에서 다룰 인물과 필자는 아래와 같습니다. 향후 출간될 평전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근대 인물: 신채호(박노자), 고종(강상규), 명성황후(서영희), 정인보(심경호), 유길준(안외순),
김옥균(이희환)
* 조선 인물: 윤선도(고미숙), 조광조(신병주), 남효온(정출헌), 서거정(김풍기), 김인후(이종범),
남곤(김범), 유자광(김용철), 박팽년(김종서), 김종직(정경주), 김택영(김승룡)
* 여성 인물: 지소태후(김선주), 이매창(김준형), 황진이(박애경), 신소당(홍인숙), 최송설당(백순철)
구한말 근왕적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개혁 성향을 드러냈던 관료, 이완용
일반적으로 이완용은 매국노, 친일파, 혹은 변신의 귀재 등으로 낙인찍혀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을 잠시 유보해두고 그의 이력을 따라가다 보면, 이제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흥미로운 사실들을 여럿 발견할 수 있다. 명문 반가에 양자로 들어가서 스물다섯에 과거에 급제한 이완용은 관직 생활을 시작한 지 5개월이 지나 육영공원에 입학한다. 조선 최초의 근대식 교육 기관이었던 육영공원은 영어 등 신문물을 가르쳤지만, 이 신식 학교의 입학생들은 정부의 명령이나 주변 사람의 권유로 들어온 고위 관료 자제들이 많았다. 반면에 이완용은 전통 학문만으로는 시세의 변화를 따라갈 수 없다고 판단하여 자발적으로 육영공원에 입학했다. 이러한 식견은 당시 미국에 대한 짝사랑이 대단했던 고종의 의중을 꿰뚫는 것이기도 했다. 이후 이완용은 조선에서 맨 처음 주미공사를 파견했을 때 참찬관으로 임명되어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는 미국이라는 문명화된 사회를 목도하면서 조선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갖춰 나갔다. 귀국 후 제3차 갑오내각 때 학부대신으로 등용된 이완용은 미국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근대적인 인민 교육을 위한 체제를 정비하고 이를 실행한다. 그의 손을 거치면서 근대적 초등교육기관을 비롯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고등교육기관인 한성사범학교의 관제도 개정되었다.
이완용은 왕이 부재하는 미국의 정치 체제를 일견하고 돌아왔으나 공화정이나 입헌군주제 같은 변화를 주장하는 급진성을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정계가 혼란스러울 때 주도 세력과 거리를 두면서 절대군주인 왕의 의중을 헤아려 자신의 행보를 조정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갑오내각 당시 그는 명문 반가 출신답게 군신(君臣)의 예를 지키는 근왕적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서양 문명을 받아들이고 교육을 진작시킴으로써 조선의 점진적 개혁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이완용은 당시 조선 정계에서 개혁적 관료로 지목되는 인물이었다. 이 시기에 이완용은 러시아와 미국을 배후로 삼으며 반일적 색채를 띠었던 정동파의 수장으로 부상한다. 을미사변이 벌어지면서 일본 세력이 득세했을 때, 이완용을 비롯한 정동파는 목숨을 걸고 아관파천을 감행, 이를 성공시킨다. 또한 정동파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사회정치단체이자 개혁 세력의 결집체인 독립협회에도 깊숙이 개입한다. 독립협회는 정동파를 지지하는 여론을 조성하는 역할을 했으며, 정동파를 이끌던 이완용은 독립협회의 발기인이자 초대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1898년 정부의 친러시아 정책과 비자주적 외교에 반발하여 열렸던 대중 집회인 만민공동회의 배후에도 이완용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속해 있는 독립협회가 대규모 민중 집회를 주도한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시전 상인을 만민공동회 회장으로 선출하는 주도면밀함도 갖고 있었다. 이처럼 이완용은 자파 세력을 결집ㆍ확대하면서 활용 가능한 세력과 연합을 모색하는 법도 익혀갔고, 아관파천처럼 목숨을 건 정치 도박을 감행하는 과감성도 갖춘 경륜 있는 정치인으로 성장해갔다.
을사조약 체결을 주도한 합리적 현실주의자, 이완용
그를 둘러싼 대한제국의 구조와 관계의 문제들
이완용이 관직 생활에서 항상 승승장구했던 것만은 아니다. 그는 중앙 정계에서 배제되면서 전라북도 관찰사로 내려가 지방관으로서의 설움을 느끼기도 했고, 비록 무죄로 판결났지만 탐학의 죄를 쓰고 법부의 재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시세를 관망하면서 재기를 기다릴 줄 알았고, 이완용의 뒤에는 그를 신임하는 고종이 있었다. 이완용의 행적을 논할 때 고종과의 관계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통치자로서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지만 이로 인해 자신의 권력이 해체되는 것을 우려했던 고종은, 정치 개혁의 요구는 차단하되 경제적ㆍ사회적으로 근대 제도와 문물을 도입하고, 이 과정에서 외세를 끌어들여 다른 외세를 견제하는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종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조응한 것이 바로 이완용이었다. 유교적 소양을 갖춘 그는 국왕의 권력을 문제 삼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일본이 협상 파트너로 받아들일 수 있는 손색없는 경력과 연륜을 갖추었기에 고종의 공식 라인이 될 수 있었다.
처음에 이완용은 을사조약 체결에 대한 거부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강력한 관철 의지를 확인한 후 고종이 이에 대해 분명한 거절 의사를 표명하지 못할 것을 알고서 자신의 역할을 결정했다. 그렇다면 그의 친일은 자신의 부귀영화와 호의호식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기존의 권력 가운데서 자신의 입지와 역할을 규정하는 관료로서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는 국가의 위기 앞에서 울분과 분노에 치를 떨기보다는, 또 현실을 바꾸려고 몸부림치기보다는, 상황에 자신을 맞추는 실용성을 갖춘 관료였던 것이다. 을사조약 체결 즈음부터 이완용은 조약 체결에 나선 을사5적과 함께 매국노로 호명되었다. 대한제국 지식인들이 지향했던 입헌군주제를 위해 왕은 여전히 국민 통합의 구심으로 존재해야 했고, 덕분에 고종은 매국의 책임론에서 구출될 수 있었다. 유생들 역시 절대적인 존재로 추상화된 왕에게 국망의 책임을 물을 수 없었기에, 조약 반대 상소를 올리면서 모든 책임을 을사5적에게 돌렸다. 이완용은 상소를 올려 이에 대응했다. 대한제국이 부강해지면 권리를 되찾을 수 있으며 을사조약이 한일의정서와 신협약의 결론에 불과하다는 그의 변명은 을사조약의 의미를 축소시키고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정치적 발언이었다. 현실주의적 입장을 견지한 그의 논리는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유생들에게 선뜻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이완용의 행동은 그 누구에게도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합리성과 실용주의로 포장된 그의 주장은 조금씩 대한제국 지식인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한다. 계몽운동 단체들과 유학파 지식인들은 한국이 부강해질 때까지 일본이 대한제국을 보호하겠다는 을사조약의 문안에 근거해 부강을 위한 실력 양성의 기치를 더욱 높이 내걸었다. 저항과 투쟁이 사회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일본의 강압을 더 불러온다고 생각했던 지식인들은 실력 양성만이 독립 주권을 되찾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부강해지면 나라를 되찾을 날이 있을 것이라는 이완용의 주장은 그렇게 대한제국 사회를 지배하는 논리가 되어 갔다.
매국의 책임에 갇힌 배제된 타자, 이완용
그에게서 발견하는 지금 우리의 모습
우리가 전혀 불편하지 않게 비난할 수 있고 “난 너와는 달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대상이란, 반대급부로 공동체의 소속감을 지속시켜주는 존재일 수 있다. ‘매국노’ 이완용은 이런 측면에서 우리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기제였는지도 모른다. 매국의 책임에 갇혀 있던 이완용이 그 자리에 놓이게 된 배후에는 그의 현실주의와 실용주의적인 인생철학이 있었다. 엄혹한 현실과 맞부딪혔을 때, 모든 것을 포기하기보다는 최대한 얻을 수 있는 것을 고민하는 것이 이완용의 선택이었다. 을사조약을 맺을 것이라면 수정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해야 하고,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할 것이라면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어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는 규정된 법적 절차를 정확히 수행하는 관료의 자세에서 도구적 합리성을 발견하고서, 그것이 자본주의 합리성의 기본 전제라고 보았던 막스 베버의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주어진 현실에서 최대의 결과를 얻기 위해 효율성과 실용성을 최대의 가치로 삼아 자신의 활동과 역할을 규정하는, 베버가 말하는 근대의 합리적인 개인상에서 이완용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어진 현실에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위안하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과 함께, 현실에 순응하여 실리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현명한 세상살이라고 생각하는 오늘날의 세태를 발견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한반도 역사의 색인, 시대를 가로지른 인간 탐구
한겨레역사인물평전
평전을 쓰고 읽는다는 것은 앞서 살아간 옛사람이 남긴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그의 마음과 시대를 헤아려보는 여정일 겁니다. 우리는 그런 여정에서 나 자신이 옛사람이 되어 헤아려보기도 하고, 옛사람이 내 귀에 속내를 속삭여주는 경이로운 체험을 맛보기도 할 것입니다. 때론 앞길을 설계하는 지침이 되기도 하겠지요. 퇴계 이황은 그런 경지를 이렇게 읊었습니다. “고인(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을 못 뵈어, 고인을 못 뵈어도 가던 길 앞에 있네, 가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가고 어찌할까”라고. 우리도 그런 마음으로 옛사람이 맞닥뜨린 갈등과 옛사람이 고민했던 선택을 헤아리며 그의 길을 따라 걸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세월의 간극을 훌쩍 뛰어넘는 그런 가슴 벅찬 공명이 가능한 까닭은 그도 나도 시대를 벗어나서는 잠시도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란 이유 때문이겠지요. 그것이야말로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우리 시대에 굳이 평전이 필요한 까닭일 것입니다. _한겨레역사인물평전 ‘발간의 글’ 중에서
부산대학교 점필재연구소와 한겨레출판이 공동 기획한 ‘한겨레역사인물평전’을 선보입니다. 한겨레역사인물평전은 현재 우리의 삶이 과거와 유리되어 있지 않다는 전제하에 우리 과거사 인물들을 현재의 시각으로 조명해보려는 야심찬 시리즈입니다. 우선 인물 선정에서는, 고대부터 근대를 아우르는 시간 동안 우리 역사에 다채로운 무늬를 아로새긴 수많은 인물들 중에서 그간 주목받았던 인물을 비롯하여 최근 학계에 새로이 소개된 인물까지 골고루 포함하였습니다. 또한 그간 평전에서 주목받았던 정치 관련 인물뿐만 아니라 종교, 사상, 예술 등 다방면에서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을 선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번 시리즈는 각 권마다 단독의 인물을 평하되 여러 권을 근사(近似)한 주제별로 묶어 선보임으로써 여러 인물들을 통해 공통의 시대, 환경, 기타 조건을 고민할 수 있게 할 예정입니다.
총 100권의 평전 발간을 목표로 하고 있는 한겨레역사인물평전은, 그 첫걸음으로 ‘근대를 바라보는 3인의 스펙트럼’이라는 기치 아래 세 권의 평전을 선보입니다. 동양의 평화를 위해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을 겨누었던 독립운동가 안중근, 민족을 대표할 만한 지성으로 주목받았으나 결국 변절의 길을 걸었던 육당 최남선, 그간 ‘매국노’로 낙인찍혀 거의 실체를 조명받지 못했던 이완용이 이번에 선보이는 세 인물입니다. 특히 이들 세 권의 평전은 신진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모아 출간한 것으로, 참신한 필자들의 새로운 시각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점필재연구소와 한겨레출판은 그간 기획 의도, 인물 선정, 필자 선정, 집필 방향 등을 함께 논의하며 평전 출간 작업에 임했습니다. 특히 점필재연구소는 필자의 논지를 학술적으로 보완하는 작업을 통해 더욱 엄밀한 결과물을 도출할 수 있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한겨레출판은 대중성을 갖춘 평전을 집필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작업을 조율했습니다. 이러한 공동 작업이 학계와 출판계가 서로 힘을 모으는 새로운 풍토를 마련하는 데도 적잖이 기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차후에 한겨레역사인물평전에서 다룰 인물과 필자는 아래와 같습니다. 향후 출간될 평전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근대 인물: 신채호(박노자), 고종(강상규), 명성황후(서영희), 정인보(심경호), 유길준(안외순),
김옥균(이희환)
* 조선 인물: 윤선도(고미숙), 조광조(신병주), 남효온(정출헌), 서거정(김풍기), 김인후(이종범),
남곤(김범), 유자광(김용철), 박팽년(김종서), 김종직(정경주), 김택영(김승룡)
* 여성 인물: 지소태후(김선주), 이매창(김준형), 황진이(박애경), 신소당(홍인숙), 최송설당(백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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