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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보통의 일반 독자라면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고 배워왔으며 그렇게 알고 있을 것이다. 이른바 삼국통일전쟁론이며 학계의 주류로 자리 잡은 통설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끊임없는 반론이 제기되었는데, 이른바 백제병합(통합)전쟁론이다. 신라는 고구려까지 통합한 것이 아니라 백제만을 병합했을 뿐이며 고구려가 발해로 계승되었음을 중시하여 남북국시대론을 주장한다. 또한 일통삼한 의식의 형성 역시 전쟁의 와중에 혹은 전쟁 직후에 생겨났다는 7세기 성립설과 신라 말 김헌창의 난 때 국가 분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이데올로기로서 출현했다는 9세기 성립설이 논쟁을 거듭하고 있다. 신라는 정말 ‘삼국’을 ‘통일’했을까? 이 책은 ‘삼국통일’을 둘러싸고 사료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그에 따른 치열한 논쟁을 담고 있다.
목차
1부 일통삼한 의식
신라의 영토의식과 삼한일통 의식 ┃ 윤경진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려고 하였을까 ┃ 전덕재
‘일통삼한 의식’과 표상으로서의 ‘삼한’ ┃ 기경량
신라 ‘삼국통일’ 논쟁의 논점과 방향 ┃ 윤경진
김춘추, 당 태종의 협약과 ‘일통삼한’ ┃ 임기환
2부 전쟁과 외교, 그리고 교류
7세기 중·후반 동북아시아의 전쟁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 ┃ 이재환
고구려-수·당 전쟁, 무엇을 바꾸었나? ┃ 이정빈
7세기 만주·한반도 전쟁과 지정학 구도의 재편 ┃ 여호규
7~8세기 나당 관계의 추이 ┃ 김종복
당의 입장에서 본 신라의 통일 ┃ 이기천
왜국(일본)에서 본 백제·고구려의 멸망 ┃ 이재석
물질문화로 보는 삼국통일?─?고고학적 접근 ┃ 홍보식
본문 인용
신라의 영토의식과 삼한일통 의식 ┃ 윤경진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려고 하였을까 ┃ 전덕재
‘일통삼한 의식’과 표상으로서의 ‘삼한’ ┃ 기경량
신라 ‘삼국통일’ 논쟁의 논점과 방향 ┃ 윤경진
김춘추, 당 태종의 협약과 ‘일통삼한’ ┃ 임기환
2부 전쟁과 외교, 그리고 교류
7세기 중·후반 동북아시아의 전쟁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 ┃ 이재환
고구려-수·당 전쟁, 무엇을 바꾸었나? ┃ 이정빈
7세기 만주·한반도 전쟁과 지정학 구도의 재편 ┃ 여호규
7~8세기 나당 관계의 추이 ┃ 김종복
당의 입장에서 본 신라의 통일 ┃ 이기천
왜국(일본)에서 본 백제·고구려의 멸망 ┃ 이재석
물질문화로 보는 삼국통일?─?고고학적 접근 ┃ 홍보식
본문 인용
책 속으로
‘평양이남’은 신라에 귀속될 영토의 지리적 범위를 나타내고, ‘백제토지’는 이 지역이 신라로 귀속되는 이유 또는 속성을 나타낸다.
--- p.20
7세기 삼한일통 의식을 뒷받침하던 자료들은 모두 후대의 것으로 파악된다.
--- p.38
7세기?전·중반에?신라인과?당나라?사람들이?임진강?이북이?고구려의?영토였다고?인지하고?있었던?현실을?전제한다면,?‘평양이남?백제토지’를?‘평양?이남의?백제?토지’라고?해석하기보다는?평양?이남의?고구려?영토와?백제?토지를?모두?망라한다고?해석하는?것이?자연스럽다고?볼?수밖에?없다.
--- p.53
‘표상으로서의?삼한’의?공간적?범주는?고조선?및?낙랑군의?과거?치소가?있었던?평양?일대를?포함하여?그?남쪽의?한반도?전역을?가리키는?것으로?볼?수?있다.
--- p.74
신라가?확보하기로?한?영토가?오직?‘백제토지’뿐이라면?애초에?아무런?의미를?담지?못하는?‘평양이남’을?그?앞에?운운할?필요는?없을?것이다.
--- p.77
‘평양이남’과?‘백제토지’는?‘지리적?기준’과?‘국가적?귀속’이라는?서로?다른?층위의?지표를?통해?특정?영역을?표현한?것이다.?이런?표현은?문법적으로?서로?다른?두?영역을?나타낼?수?없다.?
--- p.124
‘일통삼한’은?전쟁의?결과가?아니라?당과?손을?잡고?백제·고구려를?정벌하는?신라?자신의?행위를?정당화하는?명분으로?만들어진?것이었으며,?‘일통삼한’이라는?이념을?만든?주역은?다름?아니라?김춘추와?김유신?두?사람이었을?것으로?추정한다.
--- p.153
전쟁의?이름을?둘러싼?논쟁의?핵심은?‘민족사’와?‘민족사’의?싸움에?있었다고?하겠다.
--- p.180
7세기?전쟁은?동아시아?여러?나라의?중앙집권성을?강화했고?교통의?발달을?동반함으로써?동아시아?국제관계망을?확대했다.?
--- p.196
7세기?전쟁이 끝난 이후 …… 서북한과?요동?지역이?각각?국경지대와?완충지대로?변모함에?따라?만주와?한반도?일대를?하나의?권역으로?묶어주던?지정학적?중심지가?사라진?것이다.
--- p.227
신라는?고구려?고지에서?고구려?유민이?말갈족을?규합하여?건국한?발해를?미개한?말갈로?치부함으로써?일통삼한을?견지해나갔다.
--- p.250
신라의?통일은?단순히?평양?이남의?고구려·백제?고지를?통합한?것에?그치지?않고?당의?이민족?지배를?변화시킨?도화선으로?해석할?수도?있을?것이다.
--- p.278
신라?지배층에게는?‘일통삼한(삼국)’의?정치적?의미였지만,?왜국?지배층에게는?‘삼한복속’이라는?이데올로기의?설정이?중요한?의미를?지니고?있었다.?
--- p.296
피정복지의?선진?문화요소들을?수용함으로써?식생활에서?삼국민이?통합되는?계기가?이루어진?것이다.
--- p.20
7세기 삼한일통 의식을 뒷받침하던 자료들은 모두 후대의 것으로 파악된다.
--- p.38
7세기?전·중반에?신라인과?당나라?사람들이?임진강?이북이?고구려의?영토였다고?인지하고?있었던?현실을?전제한다면,?‘평양이남?백제토지’를?‘평양?이남의?백제?토지’라고?해석하기보다는?평양?이남의?고구려?영토와?백제?토지를?모두?망라한다고?해석하는?것이?자연스럽다고?볼?수밖에?없다.
--- p.53
‘표상으로서의?삼한’의?공간적?범주는?고조선?및?낙랑군의?과거?치소가?있었던?평양?일대를?포함하여?그?남쪽의?한반도?전역을?가리키는?것으로?볼?수?있다.
--- p.74
신라가?확보하기로?한?영토가?오직?‘백제토지’뿐이라면?애초에?아무런?의미를?담지?못하는?‘평양이남’을?그?앞에?운운할?필요는?없을?것이다.
--- p.77
‘평양이남’과?‘백제토지’는?‘지리적?기준’과?‘국가적?귀속’이라는?서로?다른?층위의?지표를?통해?특정?영역을?표현한?것이다.?이런?표현은?문법적으로?서로?다른?두?영역을?나타낼?수?없다.?
--- p.124
‘일통삼한’은?전쟁의?결과가?아니라?당과?손을?잡고?백제·고구려를?정벌하는?신라?자신의?행위를?정당화하는?명분으로?만들어진?것이었으며,?‘일통삼한’이라는?이념을?만든?주역은?다름?아니라?김춘추와?김유신?두?사람이었을?것으로?추정한다.
--- p.153
전쟁의?이름을?둘러싼?논쟁의?핵심은?‘민족사’와?‘민족사’의?싸움에?있었다고?하겠다.
--- p.180
7세기?전쟁은?동아시아?여러?나라의?중앙집권성을?강화했고?교통의?발달을?동반함으로써?동아시아?국제관계망을?확대했다.?
--- p.196
7세기?전쟁이 끝난 이후 …… 서북한과?요동?지역이?각각?국경지대와?완충지대로?변모함에?따라?만주와?한반도?일대를?하나의?권역으로?묶어주던?지정학적?중심지가?사라진?것이다.
--- p.227
신라는?고구려?고지에서?고구려?유민이?말갈족을?규합하여?건국한?발해를?미개한?말갈로?치부함으로써?일통삼한을?견지해나갔다.
--- p.250
신라의?통일은?단순히?평양?이남의?고구려·백제?고지를?통합한?것에?그치지?않고?당의?이민족?지배를?변화시킨?도화선으로?해석할?수도?있을?것이다.
--- p.278
신라?지배층에게는?‘일통삼한(삼국)’의?정치적?의미였지만,?왜국?지배층에게는?‘삼한복속’이라는?이데올로기의?설정이?중요한?의미를?지니고?있었다.?
--- p.296
피정복지의?선진?문화요소들을?수용함으로써?식생활에서?삼국민이?통합되는?계기가?이루어진?것이다.
--- p.319
출판사 리뷰
삼국통일전쟁인가 vs 백제병합전쟁인가
당 태종이 신라에 주기로 했다는 ‘평양이남 백제토지’
648년 김춘추가 당에 건너가 당 태종을 만났다. 백제의 침략으로 인해 신라가 위험에 빠졌음을 알리고 청병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마침 고구려 정벌에 실패했던 당 태종은 신라와 이해관계가 부합하면서 밀약을 맺게 된다.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한 후에 ‘평양이남 백제토지’를 모두 신라에 주겠다는 협약이었다. 이에 해당하는 『삼국사기』 원문은 이렇다.
“我平定兩國?平壤已南百濟土地??乞?新羅?永爲安逸”
여기서 ‘평양이남(平壤已南) 백제토지(百濟土地)’의 문구 해석을 둘러싸고 크게 두 개의 학설로 나뉜다.
먼저, 삼국통일전쟁을 긍정하는 학자들은 ‘평양 이남의 고구려 토지와 백제 토지’ 또는 ‘(고구려 영토인 / 고구려 영역 가운데) 평양 이남과 백제 토지’로 해석하여 당 태종이 김춘추에게 약속한 것은 평양 이남의 고구려 영토와 백제 토지였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7세기 중후반에 일어난 전쟁은 신라가 백제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영토 일부까지 병합하기 위해 일어났다고 본다. 또한 신라가 비록 고구려의 영역이나 주민을 제대로 포괄하지 못한 채 불완전한 통일을 이루었지만 당과 전쟁을 벌여 평양 이남 고구려 영역 일부를 신라의 군현으로 편제했음을 강조한다.
한편, 신라의 백제병합(통합)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평양 이남의 백제 영토’, ‘평양 이남이 곧 백제 영토’, ‘평양(=고구려) 이남의 백제 토지’라고 해석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신라는 당초 고구려를 통합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고 백제 병합만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삼국통일전쟁’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676년 신라와 당의 전쟁이 종결되었을 때 신라의 북쪽 경계는 임진강이었는데, 이는 원래 신라 지역과 백제 영토에 불과했으므로 7세기 중후반에 일어난 전쟁은 신라에 의한 백제병합전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특히 ‘평양 이남이 곧 백제 토지’라고 해석하는 학자는 대동강까지를 백제의 고유 영토로 인식하고, 고구려 영토를 통해 신라의 ‘통일’을 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삼한이 한집안이 되었다(三韓爲一家)”
삼한일통 7세기 성립설 vs 9세기 성립설
고구려와 백제까지 아우르는 일통삼한(삼한일통) 의식은 삼국의 연원적 동질성에 입각하여 삼국을 하나로 합쳐야 한다는 이념, 혹은 이들이 하나로 합쳐졌다는 의식이다. “삼한이 한집안이 되었다”라는 말에서 나온 일통삼한 의식은 언제 형성되었을까? 이 이념의 형성 시기와 관련해서도 두 가지 학설로 나뉜다. 바로 7세기 성립설과 9세기 성립설이다.
7세기 성립설은 다시 두 가지 견해로 나뉘는데, 하나는 삼국통일전쟁 과정에서 형성된 역사적 산물로서 실재의 반영물로 이해하며, 다른 하나는 정치적 목적, 즉 태종무열왕의 묘호를 둘러싼 당과의 외교전에서 파생된 것으로 전쟁이 끝난 뒤 신라 지배층에 의해 개발된 허위의식에 불과하다고 본다. 먼저 전자에 따르면 신라인들은 삼국민을 하나로 융합 또는 통합하기 위해, 다시 말해 ‘일통삼한’을 이루기 위해 정복전쟁을 벌였다고 강조한다. 비록 실제로 차지한 고구려의 영역과 주민은 백제를 차지한 것에 비해 아주 작지만, 648년 당 태종과의 합의하에 평양 이남의 고구려 땅을 영유하기로 합의했고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당과 정복전쟁을 벌였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일통삼한 의식이 7세기에 성립했으나 어디까지나 실재에 기반하지 않은 허위의식이라고 보는 견해는 신라가 백제에 대한 실제적 통합을 이루었지만 고구려는 부분적 통합을 했을 뿐이라며 그것을 고구려 전체 통합으로 관념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으로 본다.(태종무열왕과 김유신의 ‘일통삼한’ 공훈을 드러내고 당에 대해 ‘태종’이라는 묘호를 고수하기 위해 진골귀족이 만들어낸 허위의식이라고 보는 설도 있다)
9세기 성립설은 7세기 성립설의 이론적 기반이 되는 자료가 모두 후대의 것이며, 특히 청주 운천동 사적비의 경우 고려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서 7세기 삼한일통 의식의 성립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못 된다고 본다. 이 외에도 7세기 성립설의 근거로 보는 태종 시호를 둘러싼 신라와 당의 갈등이나 김유신 헌의에 보이는 ‘삼한이 한집안이 되었다’는 기사 역시 후대에 만들어졌다며 일통삼한 의식은 후삼국 분열의 시기에 사회를 다시 통합해야 한다는 역사적 당위와 뚜렷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다고 본다. 그리고 이는 고려의 통일을 통해 실현되었다고 본다.
당 태종이 신라에 주기로 했다는 ‘평양이남 백제토지’
648년 김춘추가 당에 건너가 당 태종을 만났다. 백제의 침략으로 인해 신라가 위험에 빠졌음을 알리고 청병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마침 고구려 정벌에 실패했던 당 태종은 신라와 이해관계가 부합하면서 밀약을 맺게 된다.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한 후에 ‘평양이남 백제토지’를 모두 신라에 주겠다는 협약이었다. 이에 해당하는 『삼국사기』 원문은 이렇다.
“我平定兩國?平壤已南百濟土地??乞?新羅?永爲安逸”
여기서 ‘평양이남(平壤已南) 백제토지(百濟土地)’의 문구 해석을 둘러싸고 크게 두 개의 학설로 나뉜다.
먼저, 삼국통일전쟁을 긍정하는 학자들은 ‘평양 이남의 고구려 토지와 백제 토지’ 또는 ‘(고구려 영토인 / 고구려 영역 가운데) 평양 이남과 백제 토지’로 해석하여 당 태종이 김춘추에게 약속한 것은 평양 이남의 고구려 영토와 백제 토지였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7세기 중후반에 일어난 전쟁은 신라가 백제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영토 일부까지 병합하기 위해 일어났다고 본다. 또한 신라가 비록 고구려의 영역이나 주민을 제대로 포괄하지 못한 채 불완전한 통일을 이루었지만 당과 전쟁을 벌여 평양 이남 고구려 영역 일부를 신라의 군현으로 편제했음을 강조한다.
한편, 신라의 백제병합(통합)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평양 이남의 백제 영토’, ‘평양 이남이 곧 백제 영토’, ‘평양(=고구려) 이남의 백제 토지’라고 해석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신라는 당초 고구려를 통합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고 백제 병합만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삼국통일전쟁’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676년 신라와 당의 전쟁이 종결되었을 때 신라의 북쪽 경계는 임진강이었는데, 이는 원래 신라 지역과 백제 영토에 불과했으므로 7세기 중후반에 일어난 전쟁은 신라에 의한 백제병합전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특히 ‘평양 이남이 곧 백제 토지’라고 해석하는 학자는 대동강까지를 백제의 고유 영토로 인식하고, 고구려 영토를 통해 신라의 ‘통일’을 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삼한이 한집안이 되었다(三韓爲一家)”
삼한일통 7세기 성립설 vs 9세기 성립설
고구려와 백제까지 아우르는 일통삼한(삼한일통) 의식은 삼국의 연원적 동질성에 입각하여 삼국을 하나로 합쳐야 한다는 이념, 혹은 이들이 하나로 합쳐졌다는 의식이다. “삼한이 한집안이 되었다”라는 말에서 나온 일통삼한 의식은 언제 형성되었을까? 이 이념의 형성 시기와 관련해서도 두 가지 학설로 나뉜다. 바로 7세기 성립설과 9세기 성립설이다.
7세기 성립설은 다시 두 가지 견해로 나뉘는데, 하나는 삼국통일전쟁 과정에서 형성된 역사적 산물로서 실재의 반영물로 이해하며, 다른 하나는 정치적 목적, 즉 태종무열왕의 묘호를 둘러싼 당과의 외교전에서 파생된 것으로 전쟁이 끝난 뒤 신라 지배층에 의해 개발된 허위의식에 불과하다고 본다. 먼저 전자에 따르면 신라인들은 삼국민을 하나로 융합 또는 통합하기 위해, 다시 말해 ‘일통삼한’을 이루기 위해 정복전쟁을 벌였다고 강조한다. 비록 실제로 차지한 고구려의 영역과 주민은 백제를 차지한 것에 비해 아주 작지만, 648년 당 태종과의 합의하에 평양 이남의 고구려 땅을 영유하기로 합의했고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당과 정복전쟁을 벌였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일통삼한 의식이 7세기에 성립했으나 어디까지나 실재에 기반하지 않은 허위의식이라고 보는 견해는 신라가 백제에 대한 실제적 통합을 이루었지만 고구려는 부분적 통합을 했을 뿐이라며 그것을 고구려 전체 통합으로 관념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으로 본다.(태종무열왕과 김유신의 ‘일통삼한’ 공훈을 드러내고 당에 대해 ‘태종’이라는 묘호를 고수하기 위해 진골귀족이 만들어낸 허위의식이라고 보는 설도 있다)
9세기 성립설은 7세기 성립설의 이론적 기반이 되는 자료가 모두 후대의 것이며, 특히 청주 운천동 사적비의 경우 고려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서 7세기 삼한일통 의식의 성립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못 된다고 본다. 이 외에도 7세기 성립설의 근거로 보는 태종 시호를 둘러싼 신라와 당의 갈등이나 김유신 헌의에 보이는 ‘삼한이 한집안이 되었다’는 기사 역시 후대에 만들어졌다며 일통삼한 의식은 후삼국 분열의 시기에 사회를 다시 통합해야 한다는 역사적 당위와 뚜렷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다고 본다. 그리고 이는 고려의 통일을 통해 실현되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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