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계여행 (1987~2023) <여행지>/3.동유럽 6개국

프라하 베들레헴교회

동방박사님 2015. 3. 15.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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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들레헴교회

얀 후스는 1400년에 사제로 인수 받았다. 그다음해는 프리하대학 철학과 학장이 되었다. 1402년에는 대학 전체의 총장이 되었다. 그이 영향력은 그 주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록 커져갔다. 프라하대학의 새 총장으로서 베들레헴 예배당의 전도자의 책임을 맡았다.1000개이상의 좌석이 있는 이예배당은 프라하에서 가장크고 영향력있는 예배당 이었다. 이 예배당은 특별히 일반적인 라틴어가 아닌 대중의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1391년 지어졌다. 그리하여 얀 후스가 에배당에서 말씀을 전했을때,그는 사람들이 이해할수 있는 언어로 말을 했다.

 

 

 

 

 

 

 

후스가 살던 그 시대에는 카톨릭 교회의 불만이 확산되고 증가 했다. 사람들은 이제 까지 생각없이 받아 들이던 것들에 관해 의문을 같기 시작 했다  초대교회의  단순함이 되풀이 되기를 바라는 막연한 단순함이 있었지만, 이러한 움직임에  방향을 제시하고 초점을 맞출사람, 분명한 생각을 하고 강하게 말하고  또한 무었보다도 확신을 갖고 태도를 취하는 사람이 필요했다. 하나님은 안후스를 그러한 사람으로 예비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베들레헴 예베당에서 "성경은 말하기를.." 이라고 선포 했을때, 회중의 마음은 그와 함께했다. 후스는 사람들이 막연하게만 느꼈던 것을 분명하게 설명 해주었다. 후스는 위클리프가 취했던 입장을 취하여 하나님 말씀 안에서 진리를 향해 서 있었다.

 

 

그는 73일간 감옥에 갇힌 후 1415년에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그일로 인해 1419년에는 일반대중에 의한 프라하를 점령하는 사건으로 발전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위클리프가 영구에서 했던 것처럼 위클리프에게 영향을 받은 그는 로마 천주교의 오류를 지적하며  위클리프의 노선을 계속하여 동유럽에 말씀을 전했던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