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문화예술 입문 (독서>책소개)/2.음악세계

바그너 평전 (2025)

동방박사님 2025. 1. 11.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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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끝없는 욕망과 엄청난 재능이 결합하면 어떤 인간이 태어나는가?
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힌 문제적 인간, 작곡가 바그너의 모든 것

바그너의 삶은 그의 음악만큼이나 드라마틱하고 모순적이었다. 그는 낭만주의자이면서 기회주의자였고, 사회주의를 지지하면서 자본의 영향력을 탐했으며, 많은 여성들과 염문을 뿌리면서도 이상적인 사랑을 노래했다. 

그는 [음악에서의 반유대주의]와 같은 저작으로 논란을 일으켰고, 사후에는 히틀러의 우상이 되었다. 

이 복잡하고 모순된 삶은 부풀려지고 왜곡된 인상들을 탄생시켰다. 

때문에 바그너는 지금까지도 많은 분석과 연구가 이어지는 인물이다. 

이번 『바그너 평전』은 전작 『인간 바그너』을 보완한 것으로서 보다 객관적인 바그너의 모습을 그려내려 노력한 노작이다.

 사실상 바그너에 대한 국내 최초의 총론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을 통해 그의 복잡한 인간성과 끝없는 욕망 그리고 천재적인 음악성을 동시에 조망해볼 수 있을 것이다.

목차
머리말

제1장 악극 같은 삶을 산 예술가
제2장 종합예술가의 등장
제3장 종합예술가의 산실
제4장 종합예술가의 길잡이
제5장 바그너 음악의 정체
제6장 바그너의 천재성과 인성
제7장 바그너와 유대인 문제
제8장 바그너와 여성
제9장 리가로부터의 탈출
제10장 바그너와 혁명
제11장 망명으로 시작한 제2의 창작 여정
제12장 재난, 그리고 구원
제13장 바그너의 수호천사와 젊은 호적수
제14장 바이로이트로 가는 길
제15장 오페라의 금자탑 니벨룽의 반지
제16장 거장의 마지막 임무
제17장 비판과 찬사
제18장 베네치아에서 맞은 임종

맺음말
바그너의 가계도
바그너의 음악작품 목록
바그너의 저작물 목록
연보
참고문헌
인명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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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 이미지

저자 소개 
저 : 오해수
음악 교양서 작가. 저서로 『신의 소리를 훔친 거장(상, 하)』, 『혼을 깨우는 음악』, 『노래극의 연금술사』, 『인간 바그너』, 『바그너의 마지막 인터뷰』 등이 있다.

책 속으로
바그너는 루터, 니체와 더불어 가장 독일적인 인물로 불린다.

 이들은 모두 자기 확신이 강하고 카리스마가 넘치며 신비로운 마력을 지녔다. 

특히 바그너는 루터의 용기와 교활함을 닮았으며, 니체로부터 존경과 질시를 받은 외에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점에서도 게르만 정신의 정수에 속한다. 니체는 “바이로이트 극장이야말로 독일의 진정한 표상”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 p.9

그는 감당 못 할 돈을 꾸어 쓰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담보는 완성되지 않은 오페라의 판권이었으나, 여기에 그의 입담과 넉살이 보태졌음은 물론이다. 

빚이 눈덩이처럼 쌓일 때를 기다려 채권자로부터 달아나는 게 해결책이었는데, 1839년(26세) 7월 그가 악장으로 재직하던 라트비아의 리가에서 영국과 파리 등지로 도주한 것이 그 예다. 

당시는 채무 상환을 강제하는 채무구류법이 있었으므로, 그로서는 필사적이었을 것이다. 

대신 그는 24일간의 도피 여행을 하는 중에 배가 난파당할 뻔한 위험도 겪고 마차가 뒤집혀 거름 더미에 빠지는 등 갖은 고생을 했으니, 그 값은 치른 셈이다.
--- p.30

바그너는 신동이 아니었다. 그는 1831년(18세)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수학할 때까지 음악과 관련한 제도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그마저도 중퇴하여 정규 과정을 모두 이수한 것도 아니다. 천재성을 타고난 이에게 교육이란 단지 원석을 연마하여 보석을 만드는 과정일 뿐이다. 

그동안 그는 악전樂典 지식을 개인 교습과 독학으로 습득했으니, 이른바 딜레탕트Dilettante(전문가에 버금가는 지식을 가진 호사가)로 음악 수련을 시작한 셈이다.
--- p.80

바그너의 철학적 사고는 1854년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1788~1860)의 철학을 접하면서 극적인 전환을 맞는다. 그것은 지적 충격으로 새로운 사상에 눈뜸이고 세계관의 개종이었다. 

그의 사상은 바그너와 니체를 든든하게 맺어 준 고리였으며, 각자는 상대방의 음악과 철학을 지지해 주었다. [...] 만일 바그너에게 쇼펜하우어의 영향이 없었다면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대본은 달라졌을 것이며,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 제3막에서 한스 작스가 부르는 「망상의 독백Wahn monologue」은 넣을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파르지팔』의 주제인 속죄와 구원은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핵심 동기다. 

『니벨룽의 반지』의 등장인물에 대한 관점 역시 대본 집필 중에 바꾸었다. 

즉 인간성은 도덕에 근거하며 너와 나의 관계는 상호주의에 따른다는 포이어바흐의 입장을, 인간성은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며 나의 의지는 너에게 이기적이라는 쇼펜하우어의 입장으로 재구성했다.

 그래서 인물은 더욱 입체적이 되었고, 사건은 더욱 극적으로 꾸며졌다.
--- p.102~103

유도동기는 청각화한 이미지로 사건의 연쇄를 알기 쉽게 풀어 가는 극음악의 열쇠다. 

또 극에 긴장감을 조성하고 반전을 암시하며, 파국을 예고하므로 악극의 삼림에서 길을 안내하는 길잡이다. 

유도동기는 첫째, 듣는 이의 귀를 잡아끄는 시그널 곡조를 요소에 배치함으로써 흥미로운 것을 기대하게 만들거나 새로운 것을 상기하게 만든다. 

둘째, 사건을 암시함으로써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감정·정서·분위기 등을 실감 나게 전달함으로써 관객의 이해를 돕는다. 

셋째, 배경과 인물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준다. 

또한 유도동기는 세 가지 기능을 한다. 하나는 기대Anticipation로, 인물·사건·전조 등이 나타나게 되리라는 동기다. 

둘은 상기Recollection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동기다. 

셋은 회고Reminiscence로, 회상·반성·원한 등 기억을 되씹게 하는 동기다. 그래서 유도동기는 음악으로 설명하는 기억 장치이면서 전조 장치인 셈이다.
--- p.137

바그너의 양면성은 천재가 지닌 특징이기도 하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Die Geburt der Tragodie》(1872)에서 예술을 디오니소스(감성: 충동적, 낙천적)적인 것과 아폴론(이성: 논리적, 이지적)적인 것으로 나누어 비교한 바 있다. 

그는 이 두 유형을 조화롭게 구사할 줄 아는 예술가가 훌륭한 작품을 낳을 수 있다면서 그 예로 바그너를 들었다. 

즉 그는 바그너의 악극을 ‘디오니소스의 정신이 낳은 아폴론적 작품’으로 보았는데, 당사자는 니체의 주장을 입증하듯 비망록에 “나는 햄릿(아폴론형, 숙고형 자아)과 돈키호테(디오니소스형, 행동형 자아)의 혼합형이다” 12라고 적었다. 그 점에서 바그너의 상충되는 성향은 인간으로서는 결함이었으나, 예술가로서는 바람직한 자질이었던 셈이다.
--- p.167

특히 《음악에서의 유대주의》는 유대인에 대한 한 음악가의 악의적 저술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는 바그너에게 실책이었고, 유대인에게는 불행이었으며, 독일인에게는 수치였다. 사실, “음악은 악마의 적이며, 신에게서 받은 최고의 선물이다.”(마르틴 루터) 

그러나 음악은 감정을 고조시키는 열광성으로 인하여 때로는 악마의 동반자가 된다.
--- p.200

결국 코지마는 뷜로가 자신의 제우스(바그너)에게 바친 최상의 제물이었던 셈이다.

 뷜로가 코지마의 이혼 제의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는 그로 인해 바그너와의 인연이 아주 끊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공적으로는 모른 척 함구한 것이 그렇게 보는 이유다. 뷜로는 바그너의 장례식 다음 날 “19세기는 나폴레옹과 비스마르크, 바그너라는 걸출한 세 인물을 낳았다”고 공언했을 정도이니 저간의 사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결국 바그너는 뷜로의 배려로 바이로이트 극장을 운영할 최고의 선물인 세 자녀를 얻었고, 뷜로는 바그너의 배려로 자신이 연주할 최고의 선물인 오페라를 얻었다.
--- p.258~259

바그너가 드레스덴 봉기에 기여한 몫은 어느 정도일까. 

그는 《나의 생애》에서 혁명의 정신에는 공감하지만 본인의 입장과 태도는 방관자에 가까웠다고 적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자기에게 불리한 주제를 언급하거나 곤란하게 만드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축소나 왜곡을 서슴지 않았다. 따라서 봉기에 관한 부분은 믿을 게 못 된다. 

그는 장차 후원자로 나선 루트비히 2세를 위해서도 왕정에 반기를 든 자신의 행적을 감추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바그너의 활약상을 살펴보면 그의 개입 정도는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뢰켈과 함께 놋쇠 제작 업체에 수류탄 1,500개를 주문했으며, 바쿠닌과 별도로 시위대를 독려하고 작센군의 반란을 선동했으며, 선전물을 인쇄하여 전단을 뿌리도록 했고, 십자가 교회 망루에서 적의 동태를 살핀 뒤 수시로 그 상황을 시청에 있는 바쿠닌과 휴브너에게 알리는 등 지휘자와 행동대원을 겸했다. 

그가 관여한 범위는 전방위에 미쳤고, 그의 동선은 최전선에 달하여 그의 목숨은 순전히 운에 맡겨야 할 판이었다. 

따라서 바그너는 주모 그룹에 협조한 자로 보였으나, 실제로는 바쿠닌과 뢰켈을 조종한 총괄지도자인 셈이었다. 그에게 혁명을 지휘하는 일은 오페라를 지휘하는 일과 다름없었다.
--- p.353~354

바이에른의 왕 루트비히 2세Ludwig Otto Wilhelm(1845~1886)가 정치적 수완 대신 예술적 소질을 타고난 것은 불운일까. 

그가 예술에 무관심한 현군이었다면, 왕국에 이롭고 신민에게 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권력이 없었다면, 바그너를 후원하여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을 짓게 하고, 노이슈반슈타인성을 만들어 지금까지도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 있었을까. 

그가 예술을 좋아하는 동시에 통치도 잘한 군주가 아니었다면, 예술을 모르는 유능한 통치자였기보다 예술에 애정을 쏟는 무능한 통치자였길 바라고 싶다. 권력은 한 사람에 속하지만, 영향력은 만인에 속하기 때문이다.
--- p.439

니체의 바그너에 대한 저항은 그에 대한 애증의 다른 표현이며, 여기에 코지마에 대한 동경이 어우러진 것으로 보는 편이 옳다. 

니체의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감성은 바그너와의 갈등 중에 광기로 나타났으며, 그의 광기는 바그너에 대한 공격을 담은 저서를 집필하는 중에 한층 깊어졌다. 

니체의 문장이 갈수록 공격적이고 강건체로 굳어진 것 역시 그 영향이다.

 다만 그의 바그너에 대한 반발심이 정신질환을 불러온 것인지, 정신질환 증세가 바그너에 대한 반발심에 영향을 끼쳤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니체의 바그너에 대한 절교가 그에 대한 사랑의 위장된 표현인 것만은 확실하다.

결국 니체가 바그너를 거부한 뒤에도 바그너는 여전히 극복하지 못한 디오니소스로 남았으며, 바그너의 아내였던 코지마는 니체의 영원한 아리아드네였다. 

하지만 정신질환이 심각해진 그는 자신을 디오니소스라고 여겼고, 따라서 아리아드네는 곧 자신의 아내였다. 

그는 예나 대학교 부속 정신병원에 수용되었을 때 누가 여기로 데리고 왔느냐고 묻는 원장 오토 빈스방거Otto Ludwig Binswanger의 물음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내 아내 코지마가 이곳으로 데려왔습니다.”

또한 그가 1897년부터 마지막 안식처로 삼은 바이마르의 빌라 질버블리크에서 어느 날 누이동생 엘리자베트가 책을 읽어 주었을 때, 그는 바그너란 이름을 듣자 낭독을 중단시켰다. 그러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렇지? 내가 그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게 맞지?”
--- p.478

그해 4월 초순 니체는 바이로이트를 방문하여 며칠간 묵었다.

 바그너는 그가 반가웠으나 워낙 걱정이 많은 탓에 좀체 말문을 열지 않았다. 

여느 때 같으면 수다에 가까운 변설을 늘어놓았을 터였다. 

니체는 그가 자신을 홀대한다고 생각했다. 

그즈음 바그너는 축제극장의 총감독직뿐 아니라 『신들의 황혼』 총보 작업에 들어간 상태였다. 하지만 극장 건립비를 보탤 생각에 4월 중에 쾰른와 카셀, 라이프치히 등 지로 다시 연주 여행을 떠났다. 

5월 3일에는 『신들의 황혼』 프롤로그와 제1막 일부의 총보를 완성했다. 

그의 투혼이 체력을 이끌고 있었다. 그는 바이로이트라는 용과 대적하는 지그프리트였고, 온갖 역경을 헤치며 홀로 싸우는 헤라클레스였다. 

동시에 그는 당대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말했듯 ‘바이로이트의 돈 먹는 괴수’이기도 했다.
--- p.493

참고로 반지 4부작의 배역을 당시 사회상과 비교한 일반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알베리히는 신흥자본가 계급으로 독일 금융계를 쥐고 있던 유대인을 가리키고, 보탄(불완전한 신)은 난쟁이와 거인, 인간 위에 군림하지만 그들과 다를 바 없는 근세 이전의 교회와 같다. 

파프너는 보탄을 위해 발할라성을 건설할 능력(토지와 노동력)을 갖고 있으므로 농노를 거느리는 봉건 영주와 같다. 또한 그는 통일을 주도한 프로이센으로, 그의 동생 파졸트는 이름뿐인 오스트리아로 비유되기도 한다. 인간은 시민 계급이면서 미래를 이끄는 주도 세력을 가리킨다.

반지 4부작의 영역은 바그너가 만든 별세계이므로 어느 시대, 계층, 집단과도 연결 지을 수 있다. 

이 악극을 공연할 무렵(1876)은 산업혁명에 의한 자본주의가 만개하였으며, 논쟁을 몰고 온 진화론이 사회와 정치 부문에까지 영향을 끼치던 때였다.

 물론 그에 따른 부작용도 심해서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에 처하게 되었고, 그 결과 사회주의 운동이 크게 번졌다. 또 약육강식이란 진화론의 논리에 따라 각국이 식민지를 가지느라 혈안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 악극을 대본에 기초한 텍스트로서 풀이할 것인가, 시대 상황을 반영한 콘텍스트로서 풀이할 것인가는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 p.524~525

드디어 바그너가 기다리던 1876년 8월 13일이 왔다. 그날은 제1회 바이로이트 축제일이었고, 바이로이트 극장의 준공일이었으며, 『라인의 황금』 초연일이었다. 

그는 축제에 앞서 공연진 모두에게 특별 메시지를 전달하여 유의할 일들을 당부했다. 

극장으로 이어진 대로에는 기나긴 마차 행렬이 줄을 이었고, 극장 앞마당은 개막 한 시간 전부터 쇄도한 초청객들로 부산했다. 

초청인사 중에는 통일 독일의 황제 빌헬름 1세와 브라질 황제 동 페드루 2세를 비롯한 57명의 왕족, 다수의 귀족과 정치인, 지역 유지가 있었으며, 리스트·차이콥스키·그리그·구노·생상·브루크너·말러·담로슈·르누아르·니체 남매(프리드리히와 엘리자베트) 등 문화계 인사들, 베젠동크 부부, 한때 그가 사랑했던 마틸데 마이어·쥐디트 고티에와 바그너의 초상화를 잘 그린 프란츠 폰 렌바흐와 역사화로 유명한 아돌프 멘첼, 그리고 바이로이트의 핵심 멤버인 레비·노이만·볼초겐 등 친지들이 참석했다.
--- p.539~540

쿤드리는 바그너가 가장 애착을 가진 등장인물이다. 그녀는 악극에 극적 재미를 더하고 긴장감을 불어넣는 인물이다. 악역인 클링조르를 견제하고 파르지팔을 각성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쿤드리는 요부의 가면을 벗어 던지고 싶어 하는 인물로 모성의 면모도 지녔다. 

그녀는 바그너가 사랑한 쥐디트 고티에를 모델로 삼았다는 말이 있지만 실은 어머니와 큰누나 로잘리에, 소프라노 빌헬미네 슈뢰더데프린트, 쥐디트 고티에의 이미지가 복합된 캐릭터다. 따라서 오페라를 통틀어 가장 입체적인 자아 발전형 인물이고, 자아 분열적 여주인공이다. 

또한 노래와 함께 연기도 해야 하는 어려운 배역으로, 절절한 사연과 다양한 감정을 전하는 가창력은 물론 위로하고 간청하며 호소하고 겁박하는 연기를 해야 한다.
--- p.561

검은색으로 칠한 곤돌라가 바그너의 유해를 싣고 육지로 향했다. 

그의 육신은 곤돌라에 실려 바이로이트의 묘소로 향했지만, 영혼은 지상의 리알토Rialto 다리를 건너 천상의 발할라로 향하고 있었다.
--- p.632

출판사 리뷰
모순적 인간, 종합적 예술가
그는 어떻게 인간적 모순을 예술적으로 종합할 수 있었는가

바그너의 현대성: 바그너는 여전히 살아 있다

흔히 고전음악 작곡가라고 하면 흘러간 시대의 음악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몇몇 천재들의 성과는 현재까지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특히 리하르트 바그너가 그렇다.

 그가 기존의 오페라를 완전히 혁신시켜 새롭게 내놓은 장르인‘악극(뮤직드라마)’은 시각적인 스펙터클과 강렬한 음악을 동시에 선보임으로써 관객들의 넋을 빼 놓았다. 

이는 요즘에 가장 인기 있는 예술 장르인 영화, 특히 스펙터클한 힘을 가진 영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바그너가 확립한 유도동기(특정 인물이나 환경에 테마 선율을 부여함으로써 그 선율이 연주되면 대상을 자동으로 떠올리게 만든다)는 영화음악의 기틀이 되었고, 

그가 열어젖힌 불협화음의 세계는 20세기 예술 영화들을 거쳐 이제는 블록버스터 영화의 사운드트랙에서도 쉽게 들을 수 있다. 

작곡 당시에는 충격적이고 전위적인 음악으로 받아들여졌던 바그너의 음악언어는 긴 시간이 흘러 대중들에게도 친숙해질 정도로 가까워졌다.

이렇듯 바그너는 이전까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독자적인 방식으로 음악의 영토를 넓혔다. 

예를 들어 스토리 자체는 길다고 할 수 없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공연 시간은 네 시간 가까이 되는데, 그 긴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 음악의 긴장감을 해소시키지 않는 불협화음을 끝없이 이어간다. 

게다가 그 불협화음 자체가 너무나도 매력적이라는 점은 경이적이다(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 「멜랑콜리아」에서 그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바그너는 누구보다도 명성과 인기를 원했지만, 당대 관객들이 원하는 작품을 쓰지는 않았다

. 그는 관객의 취향을 바꿔버릴 음악을 쓰기를 원했다.

종합 예술가의 탄생

바그너는 단순한 음악가가 아니었다. 그의 영역은 음악에 갇히지 않았고, 심지어 예술 영역에 갇히지도 않았다. 

그는 작곡가이자 지휘자요, 대본가이자 연출가, 신화 연구자이자 음악이론가, 저널리스트이자 기획자, 극장 설립자이자 사업가이기도 했다. 

그가 이렇게 다방면으로 자신을 넓힌 것은 그때까지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꿈꾸고 실현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그너가 꿈꾼 이 예술은 역사, 현실, 사회와 두루 연결되어 있었다. 

그가 독일 신화를 소재로 다룬 것은 물론 독일 민족의 자유와 독립이라는 민족적 사명을 인식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 신화는 독일인만의 것이 아니어서 권력과 욕망, 연민과 사랑 같은 보편적 인간성을 깊이 있게 건드린다. 또한 자본주의와 그 파국이라든지, 무의식과 억압된 환상 등과 같은 현대적인 면면을 다루고 있다.

대부분의 음악가들이 예술이라는 순수 영역에 머무르며 작곡과 연주라는 음악활동에 자신을 제한시켰다면, 바그너는 자신이 꿈꾸는 예술을 위해 세상 그 자체를 변화시키고자 했다.

 말하자면 그는 극장이라는 무대뿐만 아니라 인생과 사회라는 더 큰 무대를 늘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바그너의 음악극은 예술 양식의 문제 너머로 나아갔다. 그가 창안한 종합예술작품Gesamtkunstwerk의 이상은 단지 문학, 음악, 연극, 미술만의 결합이 아니었다. 

근대성과 역사적 지평, 심리와 무의식, 형이상학, 자본 등의 문제를 깊이 반영하는 새로운 작품이 되었다. 그가 바이로이트에 별도의 축제극장을 마련한 것은 그의 예술 인생에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욕망과 모순으로 가득한 처세의 달인

사람들의 사랑을 얻기 위해 내가 그들을 바꾸어버리겠다는 생각은 아무나 할 수 없다. 

하지만 바그너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런 삶을 살아온 인간이었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좀처럼 제어하거나 숨기려 들지 않았다. 아무 대책 없이 빚을 져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다가 독촉에 시달리게 되면 야반도주를 했으며, 자신의 작품만을 공연하는 대규모 전용 극장을 세우리라는 꿈을 갖고 있었고(놀랍게도 이 꿈은 이루어졌다),

 기혼자를 포함한 수많은 여성들과 사귀었으며, 자신이 원하는 만큼 자신을 지원해주지 않은 이에게는 악담을 퍼부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져야만 했다. 

아부와 아첨, 읍소, 협박, 지키지 못할 약속… 바그너에게는 그 모든 수단은 말 그대로 수단일 뿐이었다.

심지어 그는 모순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드레스덴 시민 봉기의 주요 인물로 좌파 인사들과도 친분이 있었지만, 돈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느 권력자에게도 고개를 조아릴 수 있었다. 

또 그는 유대인들을 비난하는 글을 쓰면서 당대의 유대인 혐오 풍조에 힘을 보탰지만,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유대인들과는 끝까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점에서 ‘처세의 달인’ 바그너는 주로 자기 안으로 가라앉아서 작품을 탄생시킨 낭만주의의 여느 거장들과는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체면이나 윤리, 관습이나 법칙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욕망만을 좇았던 그였기에 당대 음악의 틀을 부수고 그 바깥으로 나아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바그너는 그야말로 복잡한 내면을 지닌, 그리고 그 다양한 면모를 모두 스스럼없이 표출하는 인간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바그너의 이련 면모를 알고 있었지만, 대부분 그를 거부하지 못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사례는 바그너에 대한 애증으로 얼룩진 인물, 프리드리히 니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일단 바그너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모순을 통합하다

바그너가 창조한 인간상들에는 이러한 모순들이 가득하다. 예를 들어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인 보탄은 동시에 약속을 어기고 보물을 강탈하는 ‘악당’이다.

 권위 있는 신이지만, 약점 많은 존재다. 바그너의 악극은 여전히 미덕을 말하지만, 미덕을 실행하는 존재들은 실수투성이요, 욕심에 사로잡히며 결함으로 인해 잘못을 저지른다.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보물이 놓여 있다. 바그너 [니벨룽엔의 반지]에 나오는 ‘보물’은 모두를 윤택하게 해 주지 못한다. 

탐심을 불러일으키지만, 소유하는 이에게 저주를 건다. 영원히 사랑을 단념해야 한다는 저주 말이다.

 바그너가 물질과 사랑의 관계를 이처럼 양자택일적으로 다룬다. 

사랑할 때의 인간과 욕심에 이끌리는 인간은 같은 존재가 아님을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다. 

바그너 악극에 나타나는 모순적 인간상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바그너 또한 성취할 때와 사랑할 때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다면적 예술가인 그에게 물질과 사랑은 복잡하게 엮여 있었다. 

왕이 아니고서는 이룰 수 없는 거대한 꿈을 힘없는 예술가인 그가 꾸고 있다.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그 위대한 꿈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왕을 이용하기로 한다. 바그너는 꿈을 포기하는 죄가, 타인을 이용하는 잘못보다 더 크다고 여겼던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꿈을 성취하는 도정에서 바그너는 자기를 크게 하려는 욕심에 이끌린 것일까? 아니면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에 온전히 헌신한 것일까? 이 둘을 가르기란 쉽지 않다.

악명과 루머를 넘어서

오직 애호가로서 바그너의 음악과 삶을 오랫동안 연구해 온 저자 오해수는 바그너의 복잡한 면모를 알려주면서 거기에 드리워진 편견과 환상을 벗기고자 한다.

 특히 바그너를 추종한 히틀러가 대량 학살을 자행했고 그의 음악을 정치에 이용했으며, 실제로 반유대주의를 주장하는 글을 쓰기도 했던 바그너도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은 오래도록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저자는 바그너의 반유대주의가 진심이었다기보다는 자신의 기회주의를 포장하려는 술책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를 비판하는 시점이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바그너의 과오를 모두 옹호할 수는 없으며, 저자 역시 바그너의 특정한 면모에 대해서는 ‘뻔뻔하다’거나 ‘용서하기 어렵다’는 등의 표현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 행한 과오와 그것을 부풀린 루머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저자는 이 책을 쓰면서 자신이 종종 바그너의 편에 섰다고 말하지만, 명성보다 더 부풀려지기 쉬운 악명을 바로잡으려는 저자의 노력은 의미 있는 결과물로 태어났다.

이처럼 『바그너 평전』는 엄청난 명성에 비해 국내에서는 제대로 된 사료를 찾아볼 수 없었던 바그너에 대한 최초의 총론이다. 

저자는 전작의 구성에서 제13장, 제15장, 제16장을 보충했다. 바그너의 후원자 루트비히 2세, 그의 숭배자였다

가 반대자로 돌아선 니체 관련 내용이 보강되었고, 

바그너의 바이로이트 프로그램인 [니벨룽의 반지]와 신성무대축전극 [파르지팔]이 별도의 장으로 더 깊게 다뤄지면서 분량도 160페이지 가량 추가되었다.

바그너의 복잡한 인간성과 끝없는 욕망 그리고 천재적인 음악성을 모두 조망하는 이 책을 통해 서양음악사상 가장 거대한 인물 중 한 명을 비로소 조감해볼 수 있을 것이다.

* 출처 : 예스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41208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