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성지순례 (1997~2018) <답사지>/8.중국심양 (존로스)

24. 고려문(鳳凰城 邊門)

동방박사님 2017. 7. 12.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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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문(鳳凰城 邊門)

[요녕성 단동시 봉성시 변문진]


  청나라 초기 황태극이 국호를 '대청'으로 변경한 이듬해인 1637년부터 류조변(柳條邊)을 설치하기 시작한 청정부는 1681년(강희 20년)까지 무려 43년에 걸쳐 1300여km에 달하는 책성을 완성하였다. 류조변은 말 그대로 버드나무 가지를 꽂아 만든 사람들의 출입을 막는 울타리였다. 이 긴 울타리에 봉금령의 실행에 따라 20곳에만 문을 설치하였는데 이 문을 변문 혹은 책문이라고 불렀다. 봉성에 있는 당시 유일하게 조선과 통하는 변문을 고려문이라고 불렀으며 그 자리가 현재의 봉성시 변문진이다. 변문진은 봉성의 동남쪽 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단동까지 40km의 거리이다.





  로스 선교사는 1874년과 1876년에 두 차례에 거쳐 고려문을 방문하였다. 로스 선교사의 고려문 방문 루트를 살펴보면 1차 방문은 1874년 10월 9일에 영구에서 출발하여 대석교(大石橋)와 수암(岫岩)을 걸쳐 봉성(鳳凰城)에 이르러 고려문에 도착하였고, 2차 방문은 1876년 4월말에 영구에서 출발하여 1차와 똑 같은 루트로 고려문에 도착하였는데 2차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려문을 지나 애하(曖河)와 압록강의 합수목인 구련성에 까지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농사 짓고 있는 중국인과 조선인들을 보게 되었으며 또한 이응찬을 만나게 되었다. 



  로스 선교사가 두 번째 여행에서 고려문을 지나 구련성까지 갈 수 있었던 이유는 봉금령의 전면적인 해제와 책문의 구련성으로의 이동 때문이었다. 청나라 말기에 들어서면서 생계를 위해 류조변을 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 청정부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1874년에 전면적인 봉금령 해재를 선포하였고 1876년에는 아예 고려문 밖의 대동구 지역에 정식으로 안동현을 설립하고 이듬해에는 관전현과 환인현, 그리고 통화현을 설치하였다.  긴긴 세월동안 보수의 손길이 닿지 않아 망가질대로 망가진 류조변은 새로운 지방행정기구들의 출현과 더불어 그 기능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