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기독교 문화유산 (2016~) <답사지>/1.서울지역

광혜원 (제중원)

동방박사님 2017. 8. 24.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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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혜원 (제중원)

제중원(濟衆院)은 조선정부가 최초로 설립한 서양식병원이다. 본래 광헤원 (廣惠院)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으나, 같은해 4월26일 광혜원이라는 명칭이 취소되고 제중원 (濟衆院) 이라 명명되었다. 제중원의 운영권이 믹국 북장로교회 선교부로 이관된 이후에는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부가 조선 (서울,대구.광주, 평안남도 선천 등)에 설립한 병원은 어느곳에서나 제중원이라 불렸다.


설립 배경 및 설립과정

미 공사관 의사로 활동하던 선교사 알렌은 갑신정변 당시 부상을 입은 민영익을 치료 하게 되는데 다른 서양 문물들과 함께 서양 의료의 필요성에 대해 탐색하고 있던 조선 정부에게 아는 외과술을 통한 서양의학의 장점을 잘 보여준 사건이 되었다. 고종의 신임을 얻은 알렌은 고종에게 서양식 병원의 필요성에 대해 건의하게 되고 고종의 승인을 거쳐, 1885년 4월 갑신정변으로 역적이 된 홍영식 (洪英植)의 집에서 최초의 성양식 병원인 제중원(濟衆院)을 개원하게된다. 조선정부와 알렌은 이곳에 진찰실 수술실 대기실 등을 갖추었다.

제중원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 오늘날의 외교부)소속으로 되었으며,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독판 (오늘날의 장관) 또는 협판 (오늘날 차관)이 제중원 당상 (濟衆院 堂上)이 되어 정부 파견관리로서의 직무를 수행 했고 알렌등 선교부의사들이 병원의 전반적인 운영을 맡았다. 이후 1886년 10, 11월경 제중원은 구리개 (지금의 을지로 입구 외환은행 본점 자리에서 명동성당 방향일대)로 자리를 옮겼다.


인력.진료

알렌 (한국명 안렌)이 제중원 초대의사로 부임했으며 그후 스크랜턴,헤론,빈턴,에이비슨.등의 선교사들이 차례로 부임하여 제중원을 찿아오느 환자들을 진료했다. 또한 제중원에는  정부에서 파견된 제중원당상 (堂上)

이란 직제가 존재했으며 독판 (督辦 :장관)이나 협판 (協辦:차관)이 겸직했다. 제중원 초창기의 주사로서는 관립영어기관인 동문학 (同文學) 출신 인인사들이 배치되었다.1886년 알렌과 헤론이 미국 북장로교회 해외선교본부에 제출하기위해 작성한 <조선정무병원 1차년도 보고서>에 따르면, 제중원은 개원이래 첫 1년동안 10,460명의 환자를 진료했다. 양반층은 주로 왕진을 요청했으며, 지방에서 진료을 받으러 오는 환자들도 적지 않았다. 치료받은 환자들의 주요질환을 살펴보면, 말라리아가 가장 많았다. 소화불량, 각종 피부병, 성병(매독)도 많은 편 이었다. 그 밖에도 결핵, 나병, 기생충병, 각기병 등이 있었다.


의학교육

병원이 어느정도 궤도에 오르게 되자 병원과는 별도로 의하기관 설립에 관한 논의가 1885년 12월에 시작 되었다.그 결과 1886년 2월8일 외아문이 8도 감영에 관문을 내려, 각 도에서 3,4명씩 14세에서 18세의 총명한 청년을 발탁하고자 했고 이듬해인 1886년3월26일에는 제중원의학당을 세워 선발된 학생 16명을 교육을 시작했다. 그러나 1890년경 조선정부의 재정난으로 말미암은 예산 부족과 알렌의 외교관 전직에 따른 학생들의 이탈로 제중원 의학당의 의학교육은 중단되었고, 에비슨이 부임한 후에야 비로서 재개된다. 정확한 재개시점은 알수 없으나 연세대학교 학적부에 의하면 박서양이 1900년 8월30일에 입학한 것으로 되어 있어 박서양이 2학년일 때 5학년이었던 전병세의 경우 대입해 보면 최소한 1897년 부터는 제중원에서 의학교육이 재개되었다고 주측된다. 이후1899년 안식년을 맞은 에비슨이 미국의 대부호 L.H세브란스로 부터 교육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여 1900년9월 제중원 의학교를 정식으로 설립하고 보다 본격적으로 의학교육을 시작 하였다.임삭학과 의학서적릉 번역하고 각 과목을 강의 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내과외과의 진찰부터 수술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훈련을 받도록 하였다. 그결과 박서양등 7명의 학생들은 8년 이상의 의학교육을 마치고 1908년 6월3일, 중도에 세부란시 (세브란스)병원의학교호 명칭이 변경된 제중원 의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였다. 이후 1911년에 6명의 2회 졸업생, 1913년에 5명의 3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미국북장로회 선교부로의 제중원 운영권 이관

1894년 동학농민전쟁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 대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했다. 특히 1894년 7월23일 새벽,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해버린 사건은 고종에게 치명타였다. 고종은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조선정부는 일본인 수중에 들어갔다.이런 상황에서 고종과 조선정부는 의료선교사 에비슨의 요청을 수용하여  미국북장로회에 제중원을 이관했다 이관후 진료공간의 확장을 느낀 에비슨은 1899년 미국사업가인  세브란스오 부터 걱액의 기금을 기증 받아 숭례문 밖 복숭아골 (지금의 서울역 앞연제재단빌딩 자리)에 세브란스병원을 신축 1904년에 완성했고 이에 약 1년 후인 1905년 4월 북장로회 선교부는 대한제국 정부와 "제중원 반환에 관한 약정서"를 체결래 사용하던 기존건물 및 대지를 완젆히 반환했다. 의료진과 의료기구 및 의료기록은 모두 남문 (남대문) 밖에 새로 짓는"제중원 " (즉 세브란스병원) 으로 옮겨져 별다른 공백 없이 진료가 지속 되었으며 조선정부가 돌려받은 기존의 제중원터와 건물은 이후 개조되어 친일파 인사와 일본인간의 사교모임인 대동구락부가 사용되었다. 세브란스병원 완공후 제중원 명칭은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게 되었으나 대한제국 정부에서도 여전히 세브란스병원을 제중원이라 칭하였으며 1920년대 신문 등에서도 여전히 세브란스병원을 제중원으로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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