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자유테마여행 (2006~) <여행지>/9.미술관투어

강서구 겸재 정선미술관

동방박사님 2019. 9. 23.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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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소개

겸재 정선은 1740년부터 1745년까지 양천현령 (現  강서구청장)으로 있으면서 <경교명승첩><양천팔경첩> 등 기념비적인 불멸의 걸작을 남겼다. 이같은 역사적 배경에 따라 2009년 4월, 강서구에서 정선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고 진경문화를 게승 발전시키고자 조선시대 양천현아지 인근에 겸재정선미술관을 개관하였다.

 

 

 

 

 

 

 

 

 

 

~ 30대 중엽 출생과 초년시절

정선은 북악산 아래 유란동 (종로구 청운동)에서 태어났다. 사족출신으로 문인의 교양을 딱았으나 타고난 그림 재능과 이웃에 살던 진경시의 대가 김창흡등의 영향으로 서화에 매진 하게 되었다. 정산이 태어나 생애의 대부분을 살게되는 북악산, 인왕산 일대는 서울 문인 문화의 중심지 이면서 풍광이 뒤어나, 정선은 일찍부터 우리 자연의 아름다움에 눈뜨게 되었다.

 

겸재정선은 1676년 (숙종2)  음력 1월3일 한성부 북부 순화방 창의리 유란동에서 부친 정시익과 어머니 밀양박씨 사이의 2남1녀 맏아들로 태어났다.정선은 전라도 광주가 본관으로 5대조 정응규는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정3품) 고조부 정연은 동지충추부사 (종2품)를 지내는 명문이었으나 증조부이후 벼슬을 하지 못해 점차 집안이 쇠락하였다. 그러다가 1689년 (숙종15) 14세때 부친이 52세로 세상을 떠나자 더욱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사족 출신인 정선이 그림에  뜻을 두게 된 것은 타고난 그림 재능과 어려운 집안살림, 그리고 숙종 15년의 기사환궁으로 과거 공부에 뜻을 두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렇ㄴ 어려운 사정에도 불구하고 정선은 청풍계 부근에 있는 외가의 도움으로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선의 외가에는 벼슬은 하지 않았으나 경제적인 여유가 있던 외조브 박자진 (1625~1694) 그리고 나중에 현감 벼슬을 하는 큰 외삼촌 박견성(1642~1728) 등이 있어 정선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정선은 20대에 연안 송씨와 결혼하여 1704년 (29세)에는 장남 만교를 1710년835세)에는 차남 만수를 낳았다.

 

초년시절 학문과 예술의 성장 

초년시절 정선의 학문적, 예술적 성장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은 같은 동네에 대를 이어 살고 있었던 안동김씨 집안이었다.안동김씨 집안은 조선후기의 정치와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영의정 김수항 (1629~1689)의 여섯 아들들은 정치. 학문, 예술 면에서 뛰어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장남 김창집(1648~1722)은 학문과 문학으로, 넷째 김창업 (1658~1721)은 문학과 그림에 조예가 깊었다.이들 중 정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시인으로 조선후기 문예에 큰 족적을 남김 삼연 김창흡으로 보인다. 김창흡은 금강산, 설악산을 자주 드나들며, 아름다운 우리강산을 시로 읊어 정선의 진경산수화에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정선은 김창흡 문화생들과 교유하면서 사상적 에술적으로 성장했으며, 그중에서도 진경시의 대가인 사천 이병언 (1671~1751)과는 펴앵에 걸친 지기가되어 시화를 서로 교환하였다.

 

 

 

 

30대 중엽~40대중업  화가로 이름을 떨치다

정선이 그림을 배울 무렵은 17~18세기 교체기로서, 조선시대 회화사상  중기의 절파가 쇠퇴하고 새로이 명말 명초의 남종 문이화풍이 유행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또 윤두서와 조영석 등에 의한 한국적 풍속화가 점차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정선은 새로 들어오는 문이화풍을 공부하는 한편, 문사로서의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아 [주역]에 능통하기도 하였다. 정선의 그림실력은 37세 때인 1712년 금강산여행에서 그린9해약전신첩)이 문사들 사이에 유명해지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운와집 芸窩集

1784년, 운각인서체자본, 6권3책, 겸재정선미술관.

홍중성(1668~1735)으로 시문집으로, 손자 홍양호가 편집하여 홍명호가 1784년(정조8)에 간행했다. 홍중성의 본관은 풍산. 자는 군칙, 호는 운와이다. 김창흡의 문인으로 역사에 정통했고 시와 문장이 뛰어 났으며 특히 시를 잘했다.[운와집]에는 하양현감으로 떠나는 정선을 보내는 전별시 (권2)와 단양군수로 떠나는 홍중성을 위해 정선이 옥순봉을 그려 주었다. 내용(권4), 특히 권5에는 이병연이 <해악전신첩>을 보고 쓴 것으로 판단 되는 기록 등이 있어 자료적 가치가 크다.

 

40대중엽~60세  진경산수 화풍의 완성

정선은 40대 후반 하양현감, 50대후반 청하현감을 지내면서 서울, 경기, 금강산지역 이외에 경상도,충청도 지역까지 널리 여행하면서 우리나라 자연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화폭에 옮겼다. 그래서 이때를 정선의 진경산수화풍이 확립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송하한담 松下閑談 - 정선 (1676~1789) / 원본 ; 국립박물관소장

송하한담 (松下閑談)은 소나무 아래에서 한가롭게 담소를 나눈다는 뜻읋, 한 여름 폭포의 물줄기가 흐르는 소나무 아래에 앉아 두명의 인물이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그려 놓았다.

<송하한담도>는 정선 이후의 이인문과 김홍도 또한 즐겨 그렸던 소재로 정선의 그림처럼 자연을 배경으로 한 인물들이 정감있게 묘사되어있다.

 

 

 

 

 

 

 

 

겸재정선 산수화의 현장을 가다~  금강산 金剛山

겸재 정선이 그림 진경산수화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곳이 금강산이다. 금강산은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서쪽 내금강과 동쪽 외금강, 그리고 해금강지녁으로 나누어진다. 정선의 금강전도는 내금강을 전체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당시 한양에서 탐방할때 먼저 볼수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외금강 外金剛 해금강 海金剛

 

 

백천교 (百川橋)ㅣ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시중대 (時中臺) ㅣ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불정대 (佛頂臺)ㅣ 겸재 정선미술관 소장

 

 

칠성암 (七星巖) ㅣ 간송미술관 소장

 

 

해산정 (海山亭)

 

 

구룡연 (九龍淵)ㅣ 왜관수도원 소장

 

 

 

 

사선정 (四仙亭 ㅣ 국립중앙박물관소장

 

 

 

 

통천문암

 

 

 

 

총석정

 

 

옹천

 

 

해금강

 

 

문암관 일출

 

 

 

 

금강전도 ㅣ 국보217호, 삼성미술관 리움소장

 

 

금강전도 金剛全圖

정선은 평생 여러차례 금강산 일대를 유람하였고, 100여 폭에 이르는 금강산 그림을 그렸다. 정선의 금강산 그림 중에서도 삼성미술관 리움소장의 이 금강전도는 단연 대표작이라 할수 있다.

금강산은 수많은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오도록 부감법을 써서 구도를 잡고, 뾰족한 암봉을 강하고 화달한 수직준법으로 좌측 토산은 부드러운 미접준으로 표현하였다. 이를 통해 둥글고 부드러운 토산들과 뾰족하고 날카로운 암봉들이 강한 대조를 이루며 어우러지고 있다.

 

 

정선이 그림을 그린 장소

 

내금강 (內金剛)

 

 

금강대 金剛臺

 

 

비로봉 毘盧峯

 

 

장안사 長安寺

 

 

 

 

 단발령망금강산 斷髮嶺 望金剛山

 

혈망봉 穴望峰

 

 

보덕굴 普德窟

 

 

만폭동 萬瀑洞

 

 

 

 

60~70세 원숙기

회갑을 넘긴 노년기 정선의 작품은 더욱 무르인근 경지를 보여준다. 60대 후반에는 서울 한강변에 위치한 양천현령으로  재임하면서 부드럽고 서정적인 강변의 경치를 많이 그리게 된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이제 종래의 험준하고 힘찬 산악미에 부드럽고 서정적인 아름다움까지 겸비하게 되었다.그래서 이 시기는 그의 진경산수화가 더욱 원숙해진 시기라고 할수 있다.

 

 

<계상 정거>  1746년 71세, 보물 585호

 

 

<무봉산중>  1746년, 71세 보물 585호.

 

 

 

 

<풍계유택> 1746년 71세 보물 585호

 

 

한양전경

 

인곡유거 ㅣ 간송미술관

 

 

청풍계 ㅣ 간송미술관 소장

 

인왕곡시절 2

 60~65세  1735년~1740년

60세 되던 1735년 5월 모친 밀양 박씨가 92세로 세상을 떠나자 정선은 청하현감을 2년 만에 그만두고 인왕곡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정선은 모친상을 치른 후 62세때인 1737년에 한가을 거슬러올라 절경이 있는 남한강 상류의 청풍, 단양, 영춘, 영월 등 충청도 사군지역을 여행하고 , 사군첩을 제작하여 이변연에게 증정한 것으로 보인다. 또 같은해 가을 제작된 대표적인 작품은 간송미술관 소장 <관동명승첩>이다. 이들 그림에는 골산을 묘사한 수직준, 토산을 묘사한 미점준, 그리고 일렁이는 파도, 번잡하지않고 정돈된 구도 등 겸재 특유의 진경산수화법을 거침없고 장쾌하게 그려내어 정선 진경산수화의 전형적 면모들이 완성되어 나타난다. 서울 인왕산 주변을 소재로한 < 청풍계> (1739년 간송미술관) <한양전경> (1740년)등에서도 원숙한 면모가 잘 나타나 있다.

 

 

 

 

 

 

 

 

 

 

 

 

 

 

70세~84세  노대가의 만년

70대 이후 만년기의 정선은 붓을 들면 의식하지 않아도 그림이 되는 경지에 이르렀다. 자유스러운 필묵법은 마음대로 해도 법도에 멋어나지 않는 경지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작품은 언뜻보면 미완성인 것 같은 파격적인 구도와 생략적 묘사가 종종 등장한다. 정선은 82세 때에 종2품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로 승차하는등 명예로운 만년을 보내다가 1759년 84세나이로 천수를 다하고 양주 해등촌면 게성리에 안장되었다.

 

자유자재의 경지

정선은 화가로서 드물게 84세까지 장수하였다. 그래서 보통 화가들이 도달하기 어려운 자신만의 화풍의 완성과, 완성을 너머선 대자유의 경지에까지 이르었다. 정선은 만70세에 양천현령을 퇴임한 후 십여 년 동안 인왕곡에서 여유로운 만년기를 보냈다.

이 시기에 다시그린 <해악전신첩> (72세)에는 실제 경치를 회화적으로 자유롭게 응용하는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이런 자유로운 경지는 만년에 갈수록 더 심화되어 형상을 극도로 단순화 시키거나 추상화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80세 때의 진경 소품들과 고사인물화들에서도 이런 경향이 나타난다.<사공도시품첩>(74세)에는 노대가의 오랜경험으로 해석한 문학적, 예술적경지들이 회화로 표현되어있다.

<인왕제색>(76세)은 정선이 평생 수련한 필묵법의 정수가 유감없이 드러난 명작이다. 또 <청송당>(82세)은 북악산과 창의문 능선 너머로 멀리 삼각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강하고 부드러운 필려과 진하고 연한 묵법의 농담이 혼연일체 어우러진 경지를 보여준다.

 

박연폭포

 

 

 

인곡정사<퇴우 이선생진적첩> 1746년 71세 보물 585호 개인소장

겸재 만년의 인왕곡 집의 모습 

 

경건<사공도시화첩>,1749년 74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송당 ㅣ 1757년, 82세 . 국립박물관소장

 

인왕재색 ㅣ 국보236호. 1759년 74세 . 삼성미술관 리움소장

 

 

칠성암 七星巖, <해악전신첩>

 

계상정거 계상정거 <퇴우이선생진적첩> 1746년 71세

 

 

양주 송추

정선의 손자 정황이 그린 양주에 있던 겸재의 묘소부근 전경

 

인왕곡 시절3 (仁王谷 時節 3)

만 70세가 되어 양천현령에서 물러난 정선은 인왕곡 집으로 돌아가 84세까지 여유있는 만년을 보냈다. 비록 이 시기동안 1747년 동생 정유 (66세)를 1751년에는 평생을 교유한 이병연 981세)를 너저 보내는 슬픔도 있었지만, 정선 자신은 명에로운 말년을 맞았다. 즉 1747년 (72세) 에 (인원대비: 숙종계비김씨) 회갑 수뎡으로 종4품으로, 1755년 (80세)에는 영조의 고갑(61세)으로 첨지중추부사(정3품) 가 되었다. 또 1756년(81세)에는 인원대비 칠순수경으로 종2품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올랐으며, 2품이상 3대 추증 법전에 따라 부친과 조부, 증조부까지 각기 호조참판, 좌승지. 시보시정을 추증 받게 되었다.

주역의 겸괘에서 호 겸재를 다서 평생 겸손하고 온화하게 처신하며 에술에만 정진해온 대화가에게 적합한 말년의 명예였다. 그러다가 정선은 1759년 3월24일 84세의 나이로 천수를 다하고 양주 해등촌면 계성리 (현 도봉구 쌍문동)에 안장되었다.

 

겸재 진경산수화의 현장   한강과 서울

서울과 한강은 정선의 진경산수화 둥 금강산과 함께 가장 많이 그려진 곳이다. 정선은 서울 중에서도 출생지인 북악산과 인왕산 부근을 가장 많이 그렸다. 또 예부터 유명한 한강변의 풍광도 즐겨 그렸는데 측히 60대 후반인 1740년 에서 1745년까지 양천현령을 지내며 한강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본격적으로 그리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그의 굳세고 힘찬 진경산수화에 부드럽고 서정적인 아름다움이 가미되었다.

  

 

 

 

 

 

 

 

겸재 정선의 업적

정선 이전과 이후의 진경산수화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고려시대부터 실경산수화의 오랜 전통이 있었다. 정선은 이런 전통의 바탕위에 18세기 전반에 진경산수화를 확립시켰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그이전에 비해 대상 소재가 엄청나게 넓고 다양해 졌으며, 양식상 한국적, 예술적 특징을 완비 하였다.그래서 그 이전을 실경산수화, 이후를 진경산수화라 부르기도 한다. 정선 이후에는 김홍도와 같은 뛰어난 화가가 등장하여 진경산수호를 새로운 차원으로 계승 발전 시켰으나 19세기 이후 점차 쇠퇴하였다.

 

 

 

 

 

 

서과 부서 ㅣ 간송미술관

수박을 갉아 먹고 있는 쥐의 모습을 서정적으로 상세히 그렸다.

 

 

다람쥐

고씨화보에 나오는 그림을 방작한 것이다.

 

 

초강청효 ㅣ 선문대학교 소장

유종원의 유명한 시 "어옹"의 한구절 " 늙은어부는 밤이되면 서쪽바위 곁에서 자고 새벽에는 맑은 상강 물을 길어 대나무 태워 아침밥을 짓는다' 를 그림으로 표현 하였다.

 

정선의 기타회화

정선은 진경산수화만 잘 그린것이 아니라, 종래의 관념적이고 이상적인 관념산수화도 잘 그렸다. 이런 관념산수화는 특정한 실재 경치를 소재로 한 것이 아니라 화가의 마음속에 형성된 경치를 표현하는 것이다. 관념산수화의 대표적인 예로 소상경팔도 소상경팔경도 가 있다. 소상경팔도는 본래 중국의 특정지역의 실경산수도에서 시작되었지만, 정선은 진경산수화법으로 소화하여 우리화 해냈다.

관념산수화 이외에도 정선은 각종 고사도, 화조화 동물화.초중화등도 잘 그렸다.이런 다양한 회화 세계는 정선이 폭넓은 에술세계와 함께 이면의 균형잡힌 정서와 철학을 지닌 대가였음을 보여준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현대적으로 계승되어 새롭게 밠전시켜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우리 자연의 아름다움을  우리화풍으로 담아낸 화성畵聖 정선

겸재 정선은 화성畵聖의 칭호를 받을 만큼 우리 문화를 빛낸 우리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로 "진경산수화의 완성자"라 할수 있다. 정선은 우리 자연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고 고유의 화풍으로 표현하는데 성공하였다. 정선의 그림은 당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켜 산수유람의 풍조를 확산시키는데도 일조하였다.

또한 그의 진경산수화풍은 후대에 큰 영향을 마쳐 "겸재파'라고 부를수 있는 많은화가들을 배출하였다.정선을다른 화가들로는 김희성, 김유성, 정충엽, 정황, 장시흥, 변박, 김석신 등이 있다. 이러한 전선의 진경 산수화는 현대적으로 계승되어 새롭게 발전시켜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