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서원
오리 이원익선생 (1547~1634)은 조선시대의 대표적 청백리요, 민생과 구국에 힘쓴 실천적 정치가 였습니다
오리서원은 오리 이원익 선생의 정신을 계승하고 헌양하기 위한 교육, 문화공간 입니다.
청령정신을 계승한 오리서원
오리 이원익은 65년 공직생활 중 44년을 재상으로 지냈고 뛰어난 능력을 지녔던 행정가 였지만 평생 재산은 두어칸짜리 오두막이 전부였으며, 직접 돗자리를 짜서 끼니를 잇기도 하였다. 청렴하지 않으면 신뢰를 쌓을수 없고, 신뢰가 없으면 어려움을 해결할 수 없다는 그의 청백리정신은 임금과 조정은 몰론이고 일반 백성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그의 등장만으로 백성들이 안심하였고, 당파성을 초월하여 그의 존재는 신뢰와 덕망의 상징 이었다. 다산 정약용은 다산 정약용은 목민관 이원익의 행적을 기리며 찬탄하길 " 이 한사람으로 왜적의 진격과 퇴격이 달라졌고, 이 한사람으로 백성의 여유로움과 굶주림이 달라졌고, 이 한 사람으로 왜적의 진격과 퇴각이 달라졌고, 이 한사람으로 윤리도덕의 퇴보와 융성이 달라졌다 고 하였다. 그러나 이원익은 지나칠 정도로 자신의 공을 드러내려 하지 않은 성품이었고, 사후에 자신을 기리는 그 어떤 형식도 추구하지 말라는 유훈을 남겼기에 후대에 널리 알려지기 어려웠다. 오리서원은 우리의 소중한 역사적 자산인 이원익의 생애와 사상을 널리 선양하고 그의 청렴정신을 오늘날에 더욱 계승발전시켜, 깨끗하고 투명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일에 기여하고자 설립 운영되고 있다.
오리梧里 이원익 李元翼 ( 1547~1634) - 탁월한 전문행정가, 국난극복의 지도자
오리 이원익은 왕실의 종친이었던 태종의 아들 익령군 치의 4대손으로 태어났다. 이원익은 선조. 광해군, 인조 감대에 걸쳐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공직생활을 수행하였다. 영의정을 여섯번, 비상상황의 총책 임자였던 도제찰사를 네 번 역임하였으며, 세번의 전쟁, 네 번의 반란, 일곱번의 전염병, 다섯번의 가뭄을 극복해낸 철저한 현장 중심의 실천적 행정가이자 경세가 였다. 특히 조선시대 최대의 위기였던 임진왜란 당시 도 제찰사로서 명나라와 전시외교를 성공리에 수행하였고, 이순신과 곽재우등 뛰어난 장수들을 발굴 지원하는등 전란 극복에 큰 공을 세웠다. 전후 피페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한 조세개혁인 대동법을 주창하였다. 오리 이원익은 국가의 안위를 보존하고 백성의 안민을 추구하는 행정가로서 탁월한 전문성을 발휘하였으며, 국나의 한 가운데서 혼신의 힘을 바친 열정적인 지도자였다.
이원익은 태종의 12번째 아들 익령군의 4대손은로 한양 유동 천달방에서 태어나 명종20년 영일정씨 와 혼인해 3남 6녀를 두었다. 선생은 선조2년 23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한 후 승문원 권지에서 부정자로 관직을 시작하였고,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내며 "오리정승"으로 널리 알려졌다.
안주목사시정 이원익은 조곡을 옮겨 기민을 구제하고, 누에치는 사업을 장려해 이공상이라 불렸으며, 군졸의 입번제도를 6번제의 전국적인 병제로 개설했다. 임진왜한당시 충무공 이순신, 우복, 정경세등과 더불어 영남지방을 수호하고 평안도도순찰사로 평양탈환에 공을 세웠고, 전쟁복구와 민생안정을 위해 대동법을 시행하기도 했다. 그 공으로 호성공신에 녹훈되고, 완평부원군에 봉해졌다. 특히 이원익은 이괄의남과 정묘호란 등의 국난이 닥칠때마다 공주를 비롯해 전주와 강화로 호종을 다니는 등 출절한 재상으로서의 면모를 보였고,
여섯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음에도 불국하고 청빈하게 살아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77세가 넘은 나이까지 관직에서 떠나지 못하고 정무를 담당해 인조로부터 궤장을 하사받았으며, 사후에는 종묘에 있는 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효종2년에 시호 문충을 하사 받았다. 이원익은 자손들에게 형제간의 화목 목민관으로서의 자세와 검덕을 강조하였다.
오리梧里 이원익 李元翼 정승( 1547~1634)
이원익의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본관은 (全州),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태종의 왕자 익녕군(益寧君)치의 4대손이며, 함천부수 억재(億載)의 아들이다. 1608년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을 건의하여 불합리한 조세제도를 고침으로써 백성들의 조세부담을 줄이도, 상공업의 발달을 촉진시켜 국가경제를 윤택하게 하였다. 선조때 청백리 (淸白吏)에 녹선(綠腺) 되었고 문장이 뛰어났다.
그의 청렴한 성품이 잘 들어나는 일화가 있다.
"경기는 근본이 되는 곳으로 도리가 남을 돌보아야 할 것인데. 이런 때에 신을 위하여 집을 지으니 이것도 백성의 원망을 받는 한 가지입니다.."
인조 대왕이 집을 하사하려 할때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정승이 사양하여 이른 말
오리 이원익 종택 및 관감당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 90호
소재지 : 경기도 광명시 소하2동 1084
관감당 (觀感堂)은 조선 선조, 광해군.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내고 청백리로 이름이 높던 오리 이원익 (梧里 李元翼)이 살던 가옥으로 현재의 건물은 20세기 총 새로 지어진 것이다. 인조 8년 (1630년)에 2칸 초가인 이원익의 집에 비가 새므로 왕이 새집을 하사하였다. 효종 9년(1658년)에는 그 집터에 사당이 건립되어 충현서원으로 사액 되었는데 후에 서원이 훼철되었다. 1916년에는 엣 집텅 관감당이 다시 지어졌도, 이듬해 (1917년)
에는 종택의 안채가 건립되었으며 1940년경에는 문간채가 건립되었다. 소하동 오리로변 주택가에 있는 충현서원 내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이집은 ㄱ 자형 안채와 ㄴ자형 사랑채인 관감당이 그옆에 따로 떨어져 위치하고 있다. 안채는 13칸 반 규모의 소로수장빕 인데 건너방, 대청, 안방이 일렬로 배열되고 안방 앞쪽에서 꺽이어 부엌과 온돌방이 있다. 지붕가구와 기둥 이음, 부엌의 봉창과 다락의 완자창 등은 세련된 목수의 솜씨를 보이고 있다. 문간채는 13칸 규모인데 대문간 좌우에 온돌방과 부엌 광이 있다. 이 집은 20세기에 건립 된 경기지역 살림집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관감당 觀感堂
조선 선조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내고 청백리로 이름이 높던 오리 이원익에게 인조가 하사한 집이다 (1630년 인조8년) 이원익이 벼슬에서 은퇴하고 이곳 초가에 살대 인조가 승지를 보내어 그의 생활을 알아본즉 비바람이 새는 퇴락한 집에서 곤궁한 생활을 이어가므로, 경기감사로 하여금 정당(正當)을 짓게하고 하사 하였다 한다. 관감 觀感 이란 옥호가 그가 국가에 끼친 큰 공훈과 청백리로 임관한 자세는 모든 사람들에게 귀감이 된다 하여 "모든신민들이 보고 느껴야 할 것"이라는 뜻이라 전한다.
관감당은 병자호란때에 크게 훼손되었으나 후손들이 중건하고 관감당 觀感堂이란 편액을 달았다고 한다. 현재 이 건물 은 목조기와집으로 팔작지붕에 회벽을 했으며 , 내부는 족마루이고 기단부는 장대석과 시멘트로 포장하였다. 그리고 건물 앞에는 이원익 생존시에 각자 刻字 했다는 탄금암 彈琴岩이라 새겨진 바위가 있다.
1916년에 옛 집터에 중건되고 이듬해에는 종택안채가 건립 되었으며 1940년경에는 문간채가 건립되었다고 한다 동쪽의 종택과 같이 경기도 문화재자료 90호로 지정되었다.
청렴한 삶이 빛나다, 오리 이원익 종택과 관감당 (충현박물관)
국내 유일의 조선시대 동가박물관인 충현박물관인 충현박물관은 조선중기를 대표하는명신, 오리 이원익(1547~1634)에게 왕이 하사한 관감당과 이원익의 종택, 전시관인 충현과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원익이 관직에서 물러나 살던 두 칸 초가에 비가 새자 1630년 왕이 경기감사에게 명해 관감당을 짓도록 하였다.
오리 이원익 영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61호
소재지 :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 1084
영우 (影宇)란 영정을 모신 건물을 말한다.이 곳은 조선중기의 유명한 재상인 오리 이원익 (梧里 李元翼 1547~1634)의 여정을 모신 곳 으로, 선조 13년 (1580)이전의 이원익 의 영정이 남아 있는 곳이다. 이 곳은 비가 새는 2칸 초가 대신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이원익의 집터 위에 숙종19년 (1693)에 건립된 사당이다.이원익은 당시 백성들이 "오리정승" 이라 부를 전도로 소탈하고 청렵한 생활을 한 서민적인 정승로 소문이 난 사람이다.
임진왜란 때는 평안도 도순찰사로 평양성을 다시 탈환하는 데 큰 공을 세웠고 , 선조, 광해군, 인조 등 3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냈으며, 청백리로 뽑히기도 하였다.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사당은 정면 1칸 측면 2칸으로 기단과 초석은 17세기의 것으로 추정되지만 건물의 전체적인 수법으로 보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만든 건물로 보인다. 또한 다른 사당과 달리 영정을 모시는 감실 (龕室)을 만든것이 특징이다.
이원익 선생의 영정
경기도 유형문화재80호
소재지: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 1086
오리 이원익 (梧里 李元翼 1547~1634)은 전주 이씨로 조선시대에 호조판서와 이조판서를 거처 영의정 까지 오른 문신이다.가로 0.7m 세로 1.50m의 이 초상화는 관리들이 평상시에 쓰는 오사모 (烏紗帽)를 쓰고 관복을 입고서 호피(虎皮)가 깔린 의자에 얼굴과 몸을 왼쪽 방향을 살짝 돌려 앉아 있는 모습이다. 전체적인 형식은 공신도 형식을 취하고 있어서 호성공신상으로 추정되기도 하지만, 가슴에 부착된 한 마리의 학이 그려진 흉배는 이 초상화가 공신책록을 받은선조 13년이전, 당하관 (堂下官)에 재직할 때에 그려졌음을 말해준다. 그림 속의 이원익은 몸을 왼쪽으로 살작 돌아 앉아서 오른손엔 부채를,왼손은 허리띠를 잡고 있는데, 손의 형태가 미숙하게 표현되어 있다.얼굴의 처리는 음영효과가 들어가 있으며, 수염 눈썹, 뺨 등은 엷은 묵(墨)으로 처리한 뒤에 묵선(墨線)으로 다시 덧칠하고 있다. 눈은 금니 (金泥)를 칠하지 않았나 생각 될 만큼 눈동자위에 금니가 남아있다. 이 그림은 조선시대 초상화의 대부분이 왼쪽 얼굴을 보이는 데 비하여, 오른쪽 얼굴을 보이고 있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이원익 선생 묘 및 신도비 (李元翼先生 墓 神道碑 )
경기도 기념물 제58호
소재지 :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 산 137-1
이 곳은 서민적인 인품과 오리 정승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일화가 남긴 조선시대의 문신 오리 이원익 (梧里 李元翼 1547~1634)의 묘이다. 이원익은 조선 태종의 아들 익녕군 이치의 4세손으로 선조2년 (1569년) 문과에 급제한 후 예조정랑을 거쳐 우부승지에 올랐으나 도승지 박근원의 죄로 연루되어 파직 되었다. 그뒤 선조20년 안주목사에 다시 기용되었으며 대사헌, 이조판서를 지냈다.임진왜란 때에는 도순찰사로서 선조26년 이여송의 군대와 합세하여 평양을 탈환하는데 공을 세웠다. 선조31년에 영의정에 임명되었고 선조 37년에 호성공신에 올라완평부원군에 봉해졌다. 광해군 즉위후에는 전쟁복구와 민생안정을 위해 대종법을 경기도 지방에 실시하여 공납을 헌불대신 쌀로 납부하게 하는 등의 조세개혁을 하였다. 다섯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지만 오막살이 초가에서 청빈하게 살아 청백리에 선정되었다.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의 일반적인 묘역구조는 봉분앞에 묘지 혼유석, 상석, 향로석을 두었다. 상석앞에는 장명등이 있고 그 좌우에 동자석, 망주석, 문인석이 각1쌍이 있다. 신도비는 종2품 이상의 공신이나 휼륭한 학자에게 허용되었던 것으로 묘의 남쪽 가까이 세웠다.이원익의 묘는 부인의 묘와 쌍분이다. 묘앞에 신도비는 묘소 아래의 길가에 위치하고 있느데 비의 재료는 대리석이다. 비좌은 인상문과 당초문, 이수는 상룡을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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