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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바로 그때, 장자를 만났다
다른 동양 고전과 달리 《장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로만 되어 있다. 그 속에 담긴 깊은 상징과 메시지 때문에 철학, 문학, 예술 등 분야를 막론하고 가장 다양하게 연구되는 대표적 동양사상이다. 요즘 말로 융복합 인문학의 표상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상징과 비유 때문에 원문만 읽어 뜻을 헤아리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일반 대중에게는 《장자》의 해설이 필요한데, 전문 학자들의 해설서들 사이에서 한 직장인이 자신이 만난 장자 이야기를 풀어놨다. 《그때 장자를 만났다》라는 책이다.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부제목에서 느껴지듯, 장자가 저자의 삶에 끼친 영향이 보통 아니었다. 저자는 《마흔에 읽는 손자병법》이라는 베스트셀러를 통해 이미 승자의 철학인 손자병법을 비겁의 철학으로 읽어내며, 직장인이 쓴 고전 해설이 왜 그토록 대중에게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는지 증명한 바 있다.
그런데 이번엔 왜 ‘장자’인가? 그것은 비주류의 텍스트가 아니었나?
동양철학의 양대 산맥으로 유가사상(공자)과 도가사상(노자·장자)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유독 공자와 《논어》만 편애하는 경향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도리와 이성과 지혜와 논리로 대변되는 유가에 비해 도가는 왠지 비현실적이거나 허무맹랑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정말로 그럴까?
다른 동양 고전과 달리 《장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로만 되어 있다. 그 속에 담긴 깊은 상징과 메시지 때문에 철학, 문학, 예술 등 분야를 막론하고 가장 다양하게 연구되는 대표적 동양사상이다. 요즘 말로 융복합 인문학의 표상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상징과 비유 때문에 원문만 읽어 뜻을 헤아리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일반 대중에게는 《장자》의 해설이 필요한데, 전문 학자들의 해설서들 사이에서 한 직장인이 자신이 만난 장자 이야기를 풀어놨다. 《그때 장자를 만났다》라는 책이다.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부제목에서 느껴지듯, 장자가 저자의 삶에 끼친 영향이 보통 아니었다. 저자는 《마흔에 읽는 손자병법》이라는 베스트셀러를 통해 이미 승자의 철학인 손자병법을 비겁의 철학으로 읽어내며, 직장인이 쓴 고전 해설이 왜 그토록 대중에게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는지 증명한 바 있다.
그런데 이번엔 왜 ‘장자’인가? 그것은 비주류의 텍스트가 아니었나?
동양철학의 양대 산맥으로 유가사상(공자)과 도가사상(노자·장자)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유독 공자와 《논어》만 편애하는 경향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도리와 이성과 지혜와 논리로 대변되는 유가에 비해 도가는 왠지 비현실적이거나 허무맹랑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정말로 그럴까?
목차
시작하며_ 헛똑똑이 인생, 장자를 만나다
1부 개인의 변화
1장_ 내 안의 나 찾기
헛똑똑이 인생
발자국은 발이 될 수 없다
화살 잡는 원숭이
2장_ 마음 비우기
‘나 아니면 안 돼’의 오만
신발이 맞으면 발을 잊는다
잃어버린 흑진주를 찾아라
욕심을 비우면 귀신도 항복한다
3장_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쓸모없음의 쓸모
사람은 보고 싶은 대로 본다
조각은 나무 안에 이미 있다
죽음을 직시하면 삶이 보인다
길은 다녀야 만들어진다
4장_ 파도 타기
내 왼팔이 새벽을 알리기를
물길을 따를 뿐이다
현명한 사람은 뛰어난 배우와 같다
순간의 최선이 운명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하지 않는 일이 없다
2부 관계의 변화
5장_ 차이 존중하기
틀리지 않고 다를 뿐이다
천리마가 쥐를 잡을 수 없다
신발장이는 신발을 넘지 마라
빈 배 이야기
6장_ 말 아닌 것으로 말하기
자기 인생으로 말하는 사람
말 안 되는 말
말이 사람 잡는다
말은 들어야 완성된다
책은 성인의 껍데기
7장_ 거울 되기
고장 난 시계들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
고요한 물이 거울이 된다
보물을 버리고 아기를 업고 뛴다
8장_ 마음 주기
사랑하는 방법
우정에 대하여
위로하는 방법
예의에 대하여
3부 사회의 변화
9장_ 인정하고 공존하기
정답 없는 세상
혼자 잘난 영웅은 없다
무지개는 경계선이 없다
꿈속 나비도 자기 생각이 있다
허물을 금할 줄만 알지, 왜 생기는지 모른다
10장_ 버림으로써 되찾기
브레이크 없는 벤츠는 불량품
중간에나 처해볼까
거백옥과 애태타
용두레를 쓰지 않는 까닭
나무와 땅이 모여 산을 이룬다
11장_ 세상에서 노닐기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완전한 자유란, 결국 의존을 깨닫는 것
마치며
1부 개인의 변화
1장_ 내 안의 나 찾기
헛똑똑이 인생
발자국은 발이 될 수 없다
화살 잡는 원숭이
2장_ 마음 비우기
‘나 아니면 안 돼’의 오만
신발이 맞으면 발을 잊는다
잃어버린 흑진주를 찾아라
욕심을 비우면 귀신도 항복한다
3장_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쓸모없음의 쓸모
사람은 보고 싶은 대로 본다
조각은 나무 안에 이미 있다
죽음을 직시하면 삶이 보인다
길은 다녀야 만들어진다
4장_ 파도 타기
내 왼팔이 새벽을 알리기를
물길을 따를 뿐이다
현명한 사람은 뛰어난 배우와 같다
순간의 최선이 운명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하지 않는 일이 없다
2부 관계의 변화
5장_ 차이 존중하기
틀리지 않고 다를 뿐이다
천리마가 쥐를 잡을 수 없다
신발장이는 신발을 넘지 마라
빈 배 이야기
6장_ 말 아닌 것으로 말하기
자기 인생으로 말하는 사람
말 안 되는 말
말이 사람 잡는다
말은 들어야 완성된다
책은 성인의 껍데기
7장_ 거울 되기
고장 난 시계들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
고요한 물이 거울이 된다
보물을 버리고 아기를 업고 뛴다
8장_ 마음 주기
사랑하는 방법
우정에 대하여
위로하는 방법
예의에 대하여
3부 사회의 변화
9장_ 인정하고 공존하기
정답 없는 세상
혼자 잘난 영웅은 없다
무지개는 경계선이 없다
꿈속 나비도 자기 생각이 있다
허물을 금할 줄만 알지, 왜 생기는지 모른다
10장_ 버림으로써 되찾기
브레이크 없는 벤츠는 불량품
중간에나 처해볼까
거백옥과 애태타
용두레를 쓰지 않는 까닭
나무와 땅이 모여 산을 이룬다
11장_ 세상에서 노닐기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완전한 자유란, 결국 의존을 깨닫는 것
마치며
출판사 리뷰
훌훌 털고 날아오르길 희망한 이가 있었다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옛날이야기 하나.
북쪽 바다에 ‘곤’이라는 물고기가 살고 있었다. 곤은 더 넓고 큰 세상을 보고 싶어 각고의 노력 끝에 ‘붕’이라는 새로 변신을 한다. 붕은 날개를 한번 펼치면 하늘이 까맣게 변할 정도로 크고, 한 번에 구만리나 날아갈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새다. 곤이 이런 붕새로 되는 변신은 성형수술 정도의 변화가 아니라, 물고기가 새라는 아예 다른 존재로 탈바꿈하는 대변신이다. 그 정도 변신이 거저 이뤄질 리 없다. “왜 저 혼자 유난이람?” 하는 다른 물고기들의 비아냥과 냉대를 감수해야 하고, 천년에 한 번꼴로 바다 기운이 크게 움직일 때를 기다려야 비로소 변신할 수 있다.
그렇게 변한 붕새가 가고자 한 곳은 ‘남쪽’이다. 곤으로 살던 시절의 북쪽 바다와 달리 남쪽은 밝고 따뜻하다. 자유가 충만한 곳이다. 하지만 붕새의 날개가 너무 커서 남쪽으로 가려면 ‘강한 바람’이 필요하다. 그 강한 바람을 뚫고 구만리 상공으로 수직상승하는 과정에서 거센 바람의 저항도 이겨내야 한다. 과연 붕새는 무사히 남쪽으로 날아갔을까?
《장자》의 가장 첫머리에 등장하는 이 붕새 이야기는, 아쉽게도 결말을 전하지 않는다. 결말은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자유로운 남쪽 바다는 하나의 지향점이었을 뿐, 그곳으로 날아가기 위한 붕새의 여정이 《장자》에서는 더 흥미진진하다.
바로 그때, 장자를 만났다
다른 동양 고전과 달리 《장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로만 되어 있다. 그 속에 담긴 깊은 상징과 메시지 때문에 철학, 문학, 예술 등 분야를 막론하고 가장 다양하게 연구되는 대표적 동양사상이다. 요즘 말로 융복합 인문학의 표상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상징과 비유 때문에 원문만 읽어 뜻을 헤아리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일반 대중에게는 《장자》의 해설이 필요한데, 전문 학자들의 해설서들 사이에서 한 직장인이 자신이 만난 장자 이야기를 풀어놨다. 《그때 장자를 만났다》라는 책이다.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부제목에서 느껴지듯, 장자가 저자의 삶에 끼친 영향이 보통 아니었다. 저자는 《마흔에 읽는 손자병법》이라는 베스트셀러를 통해 이미 승자의 철학인 손자병법을 비겁의 철학으로 읽어내며, 직장인이 쓴 고전 해설이 왜 그토록 대중에게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는지 증명한 바 있다.
그런데 이번엔 왜 ‘장자’인가? 그것은 비주류의 텍스트가 아니었나?
동양철학의 양대 산맥으로 유가사상(공자)과 도가사상(노자?장자)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유독 공자와 《논어》만 편애하는 경향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도리와 이성과 지혜와 논리로 대변되는 유가에 비해 도가는 왠지 비현실적이거나 허무맹랑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정말로 그럴까?
답답한 세상, 규범에 날 가두는 공자보단 자유로운 장자를 만나라
사는 법이 다를 뿐, 틀린 인생은 없다!
흥미롭게도 《장자》는 집요하리만치 ‘공자 바보 만들기’를 시도한다. ‘인(仁)’과 ‘예(禮)’로 다스려지는 나라를 꿈꾸는 공자를 두고 ‘되지도 않을 짓을 하느라 평생을 낭비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공자에게는 ‘님’ 자 붙이는 게 자연스러운 우리에게 불편한 주장이다. 그렇다고 장자를 공자 비판한 사람이라고만 기억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장자가 그토록 싫어한 편견과 오해일 뿐이다. 《장자》는 ‘공자의 생각이 틀렸다’고 주장한 게 아니었다. 공자의 생각은 옳다. 다만, 공자의 생각‘만’ 옳다고 고집을 부리는 순간 오류가 발생한다.
예의는 인간 세상에서 중요한 덕목이다. 그러나 그 예의가 ‘배웠다, 못 배웠다’, ‘잘났다, 못났다’, ‘옳다, 그르다’의 잣대가 돼 사람을 차별하는 수단이 되는 순간, 예의는 덕목이 아니라 폭력이 된다. 《논어》에 등장하는 공자는 세상 사람을 군자와 소인으로 나눈다. 그렇게 나누고 가르는 습관이 ‘같음’보다는 ‘다름’에 주목하게 하고, 어느 사이엔가 ‘다름’은 ‘틀림’이 되고 만다.
장자는 공자의 이분법을 거부한다! “이것이 있어야 저것이 있다(彼出於是)(제물론 편).” 애당초 ‘나’라는 개념이 있어야 ‘너’라는 개념이 있고, ‘선’이 없으면 ‘악’도 없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다른’ 것을 ‘틀리다’고 말하곤 한다. 학은 오리 다리가 짧다며 늘리겠다고 덤비고, 오리는 학의 다리가 길다며 자르겠다고 덤비는 꼴이다. 학은 다리가 길어서 좋고, 오리는 다리가 짧아서 좋다. 다른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다르다. 그것을 틀렸다고 덤비기 시작하면 세상사 꼬인다. 꼬인 세상에서 살자니 지치고 숨이 막힌다. 기지개를 한번 쫙 펴고 싶다. 답답한 세상에선 인위적인 틀에 날 가두는 《논어》보다는 자유로운 《장자》가 제격이다.
‘어떻게 살아야 한다’가 아닌, ‘나는 내 삶을 살고 있다’는 메시지
《장자》를 ‘신선 되는 책’ 정도로 오해하는 데에는 ‘장자 = 노자 = 무위사상 = 자연’이라는 편견이 깔려 있다. 하지만 노자가 말한 ‘무위’는 무지몽매한 백성을 다스리는 지배의 기술이다. 반면, 장자가 말한 ‘무위’는 험한 세상 살아가는 삶의 기술이다. 지배는커녕 차라리 피지배의 기술에 가깝다.
* 순간의 최선이 운명이다!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보자. ‘무위’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글자 그대로 ‘아무것도 안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무위는 ‘억지로 하지 않는다’는 뜻일 뿐이다. 어차피 “사람으로 하늘을 이길 수 없다(추수편).” 상황을 받아들이고, 주변인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게 무위다. 바로 장자가 ‘인시(因是)’라고 이름 붙인 개념이다. 해석하면,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쯤 된다. 컵에 물이 반이 있을 때 어떤 이는 반이나 차 있다고 하고, 어떤 이는 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나 호들갑 떨 필요도, 지레 겁먹을 필요도 없다. 컵에 물이 반 있을 뿐이다. 그게 시작이다. 상황을 인정하고 주변을 인정하면, 그 다음엔 이용할 수가 있다.
* 세상살이의 피로를 떨쳐내려면...?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
전국시대 사람인 장자는 전쟁이 일상이던 세상을 살았다. ‘죽음’을 현실로 살면서 ‘행복’을 꿈꿨다. 그런 장자가 말한 “무위”와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메시지가 단순히 산속에 들어가 도 닦고 신선 되라는 뜻은 아니었다. 그것은, 자연이 그러하듯, 나 자신의 본성을 되찾고, 동시에 상대의 본성을 존중하자는 말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해석이다. 즉,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 속으로 뛰어 들어가 함께 공존하는 법을 터득하라는 메시지다.
그 중요한 방법의 하나로 장자가 제시한 것이 바로 ‘얽혀 살기(영녕)’이다. ‘영녕(?寧)’은 “세상에서 노닐되 치우치지 않고, 남들을 따르되 자신을 잃지 않는” 길이다. 장자와 만나게 되면, ‘몸은 치열한 세상 속에 두되, 마음은 유유히 천하를 날아다니는’ 지혜를 얻게 될 것만 같은 구절이다.
쉽고 재밌는 구성, 동서양 철학의 크로스오버
이 책의 빼놓을 수 없는 장점 가운데 하나는, 특이하게도 《장자》의 메시지와 시사점을 설명하는 도구로써 그리스 로마 고전들을 활용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이래 그리스 철학의 전통과 스토아학파를 비롯한 로마 철학은 《장자》와 놀라울 만큼 비슷한 면이 많다. 이 책은 경계를 넘나드는 ‘장자’를 소개하는 만큼, 책 한 권에서 동서양 철학을 한 번에 만나보는 즐거움과 교양도 함께 선사한다.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옛날이야기 하나.
북쪽 바다에 ‘곤’이라는 물고기가 살고 있었다. 곤은 더 넓고 큰 세상을 보고 싶어 각고의 노력 끝에 ‘붕’이라는 새로 변신을 한다. 붕은 날개를 한번 펼치면 하늘이 까맣게 변할 정도로 크고, 한 번에 구만리나 날아갈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새다. 곤이 이런 붕새로 되는 변신은 성형수술 정도의 변화가 아니라, 물고기가 새라는 아예 다른 존재로 탈바꿈하는 대변신이다. 그 정도 변신이 거저 이뤄질 리 없다. “왜 저 혼자 유난이람?” 하는 다른 물고기들의 비아냥과 냉대를 감수해야 하고, 천년에 한 번꼴로 바다 기운이 크게 움직일 때를 기다려야 비로소 변신할 수 있다.
그렇게 변한 붕새가 가고자 한 곳은 ‘남쪽’이다. 곤으로 살던 시절의 북쪽 바다와 달리 남쪽은 밝고 따뜻하다. 자유가 충만한 곳이다. 하지만 붕새의 날개가 너무 커서 남쪽으로 가려면 ‘강한 바람’이 필요하다. 그 강한 바람을 뚫고 구만리 상공으로 수직상승하는 과정에서 거센 바람의 저항도 이겨내야 한다. 과연 붕새는 무사히 남쪽으로 날아갔을까?
《장자》의 가장 첫머리에 등장하는 이 붕새 이야기는, 아쉽게도 결말을 전하지 않는다. 결말은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자유로운 남쪽 바다는 하나의 지향점이었을 뿐, 그곳으로 날아가기 위한 붕새의 여정이 《장자》에서는 더 흥미진진하다.
바로 그때, 장자를 만났다
다른 동양 고전과 달리 《장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로만 되어 있다. 그 속에 담긴 깊은 상징과 메시지 때문에 철학, 문학, 예술 등 분야를 막론하고 가장 다양하게 연구되는 대표적 동양사상이다. 요즘 말로 융복합 인문학의 표상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상징과 비유 때문에 원문만 읽어 뜻을 헤아리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일반 대중에게는 《장자》의 해설이 필요한데, 전문 학자들의 해설서들 사이에서 한 직장인이 자신이 만난 장자 이야기를 풀어놨다. 《그때 장자를 만났다》라는 책이다.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부제목에서 느껴지듯, 장자가 저자의 삶에 끼친 영향이 보통 아니었다. 저자는 《마흔에 읽는 손자병법》이라는 베스트셀러를 통해 이미 승자의 철학인 손자병법을 비겁의 철학으로 읽어내며, 직장인이 쓴 고전 해설이 왜 그토록 대중에게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는지 증명한 바 있다.
그런데 이번엔 왜 ‘장자’인가? 그것은 비주류의 텍스트가 아니었나?
동양철학의 양대 산맥으로 유가사상(공자)과 도가사상(노자?장자)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유독 공자와 《논어》만 편애하는 경향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도리와 이성과 지혜와 논리로 대변되는 유가에 비해 도가는 왠지 비현실적이거나 허무맹랑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정말로 그럴까?
답답한 세상, 규범에 날 가두는 공자보단 자유로운 장자를 만나라
사는 법이 다를 뿐, 틀린 인생은 없다!
흥미롭게도 《장자》는 집요하리만치 ‘공자 바보 만들기’를 시도한다. ‘인(仁)’과 ‘예(禮)’로 다스려지는 나라를 꿈꾸는 공자를 두고 ‘되지도 않을 짓을 하느라 평생을 낭비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공자에게는 ‘님’ 자 붙이는 게 자연스러운 우리에게 불편한 주장이다. 그렇다고 장자를 공자 비판한 사람이라고만 기억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장자가 그토록 싫어한 편견과 오해일 뿐이다. 《장자》는 ‘공자의 생각이 틀렸다’고 주장한 게 아니었다. 공자의 생각은 옳다. 다만, 공자의 생각‘만’ 옳다고 고집을 부리는 순간 오류가 발생한다.
예의는 인간 세상에서 중요한 덕목이다. 그러나 그 예의가 ‘배웠다, 못 배웠다’, ‘잘났다, 못났다’, ‘옳다, 그르다’의 잣대가 돼 사람을 차별하는 수단이 되는 순간, 예의는 덕목이 아니라 폭력이 된다. 《논어》에 등장하는 공자는 세상 사람을 군자와 소인으로 나눈다. 그렇게 나누고 가르는 습관이 ‘같음’보다는 ‘다름’에 주목하게 하고, 어느 사이엔가 ‘다름’은 ‘틀림’이 되고 만다.
장자는 공자의 이분법을 거부한다! “이것이 있어야 저것이 있다(彼出於是)(제물론 편).” 애당초 ‘나’라는 개념이 있어야 ‘너’라는 개념이 있고, ‘선’이 없으면 ‘악’도 없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다른’ 것을 ‘틀리다’고 말하곤 한다. 학은 오리 다리가 짧다며 늘리겠다고 덤비고, 오리는 학의 다리가 길다며 자르겠다고 덤비는 꼴이다. 학은 다리가 길어서 좋고, 오리는 다리가 짧아서 좋다. 다른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다르다. 그것을 틀렸다고 덤비기 시작하면 세상사 꼬인다. 꼬인 세상에서 살자니 지치고 숨이 막힌다. 기지개를 한번 쫙 펴고 싶다. 답답한 세상에선 인위적인 틀에 날 가두는 《논어》보다는 자유로운 《장자》가 제격이다.
‘어떻게 살아야 한다’가 아닌, ‘나는 내 삶을 살고 있다’는 메시지
《장자》를 ‘신선 되는 책’ 정도로 오해하는 데에는 ‘장자 = 노자 = 무위사상 = 자연’이라는 편견이 깔려 있다. 하지만 노자가 말한 ‘무위’는 무지몽매한 백성을 다스리는 지배의 기술이다. 반면, 장자가 말한 ‘무위’는 험한 세상 살아가는 삶의 기술이다. 지배는커녕 차라리 피지배의 기술에 가깝다.
* 순간의 최선이 운명이다!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보자. ‘무위’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글자 그대로 ‘아무것도 안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무위는 ‘억지로 하지 않는다’는 뜻일 뿐이다. 어차피 “사람으로 하늘을 이길 수 없다(추수편).” 상황을 받아들이고, 주변인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게 무위다. 바로 장자가 ‘인시(因是)’라고 이름 붙인 개념이다. 해석하면,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쯤 된다. 컵에 물이 반이 있을 때 어떤 이는 반이나 차 있다고 하고, 어떤 이는 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나 호들갑 떨 필요도, 지레 겁먹을 필요도 없다. 컵에 물이 반 있을 뿐이다. 그게 시작이다. 상황을 인정하고 주변을 인정하면, 그 다음엔 이용할 수가 있다.
* 세상살이의 피로를 떨쳐내려면...?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
전국시대 사람인 장자는 전쟁이 일상이던 세상을 살았다. ‘죽음’을 현실로 살면서 ‘행복’을 꿈꿨다. 그런 장자가 말한 “무위”와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메시지가 단순히 산속에 들어가 도 닦고 신선 되라는 뜻은 아니었다. 그것은, 자연이 그러하듯, 나 자신의 본성을 되찾고, 동시에 상대의 본성을 존중하자는 말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해석이다. 즉,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 속으로 뛰어 들어가 함께 공존하는 법을 터득하라는 메시지다.
그 중요한 방법의 하나로 장자가 제시한 것이 바로 ‘얽혀 살기(영녕)’이다. ‘영녕(?寧)’은 “세상에서 노닐되 치우치지 않고, 남들을 따르되 자신을 잃지 않는” 길이다. 장자와 만나게 되면, ‘몸은 치열한 세상 속에 두되, 마음은 유유히 천하를 날아다니는’ 지혜를 얻게 될 것만 같은 구절이다.
쉽고 재밌는 구성, 동서양 철학의 크로스오버
이 책의 빼놓을 수 없는 장점 가운데 하나는, 특이하게도 《장자》의 메시지와 시사점을 설명하는 도구로써 그리스 로마 고전들을 활용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이래 그리스 철학의 전통과 스토아학파를 비롯한 로마 철학은 《장자》와 놀라울 만큼 비슷한 면이 많다. 이 책은 경계를 넘나드는 ‘장자’를 소개하는 만큼, 책 한 권에서 동서양 철학을 한 번에 만나보는 즐거움과 교양도 함께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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