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전쟁연구 (박사전공>책소개)/2.1.2차 세계대전사

쿠르스크 1943 : 동부전선의 일대 전환점이 된 제2차 세계대전 최대의 기갑전

동방박사님 2022. 1. 30.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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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1943년 여름 쿠르스크,
히틀러가 그토록 열망하던 ‘천년제국’의 꿈을 산산이 부서뜨린
지상 최대의 전차전이 벌어지다

밀리터리 마니아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세계 최고 군사전문 출판사 오스프리(OSPREY)의 [캠페인(Campaign)] 시리즈
1차분 6권 중 『쿠르스크 1943』 번역 출간

“쿠르스크 전투에 관한 한 최고의 책”

제2차 세계대전 동부전선의 주도권을 놓고 광활한 소련 땅에서
독일군과 소련군의 전차들이 벌이는 한판 승부!

이 책 『쿠르스크 1943』은 플래닛미디어가 세계 최고 군사전문 출판사 오스프리(OSPREY)의 [캠페인(Campaign)] 시리즈를 번역 출간한 1차분 6권 중 두 번째 책으로, 제2차 세계대전 동부전선의 주도권이 독일에서 소련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된 쿠르스크 전투를 담고 있다. 쿠르스크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의 일대 전환점이 된 전투로, 상당히 중요한 격전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독일은 이 전투에서 전쟁 수행을 위한 물적 토대가 제 구실을 못하고 지도부의 대전략이 혼선을 빚음으로써 일대 파국을 맞게 된다. 하지만 쿠르스크 전투는 그 결과가 갖는 중요성에 비해 그 과정을 상세히 담은 책이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플래닛미디어가 번역 출간한 『쿠르스크 1943』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동부전선 최대 기갑전인 쿠르스크 전투에 대해 그동안 목말라 있던 독자들의 갈증을 해소시켜줄 만큼 상세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제2차 세계대전 동부전선의 주도권을 놓고 광활한 소련 땅에서 독일군과 소련군의 전차들이 벌이는 한판 승부가 스펙터클하게 펼쳐진다. 이 책만큼 쿠르스크 전투를 제대로 담은 책은 아마 찾기 어려울 것이다. 쿠르스크 전투에 관한 한 최고의 책이라 평가할 만하다.

이 책은 전투의 기원에서부터 보로네슈 전구 사령관인 니콜라이 바투틴, 소련 중부전구 사령관인 로코소프스키, 스텝 군관구 사령관인 이반 스테파노비치 코네프 등을 비롯한 소련 지휘관과, 치타델레 작전에 참가한 남부집단군 육군원수 에리히 폰 만슈타인, 부하들에게 ‘호트 아빠’로 불리던 헤르만 호트 상급대장, 중부집단군 사령관 귄터 폰 클루게, 히틀러의 신임을 받은 발터 모델 등을 비롯한 독일군 지휘관의 이야기를 비롯해, 독일군의 전투서열과 독일군이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을 때 완전히 다른 조직으로 진화한 소련의 붉은 군대의 전투서열, 그리고 독일과 소련의 전차, 돌격포/구축전차, 대전차포, 전투기, 폭격기, 대지공격기와 급강하폭격기를 자세하게 비교 설명하고 있다. 또 치타델레 작전을 펴는 독일군의 작전계획과 이에 맞서 쿠르스크 돌출부에 미로처럼 복잡한 방어체계를 구축한 소련군의 작전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두 나라가 작전 준비를 위해 배치한 어마어마한 병력 규모는 이 전투의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목차

감수의 글

프랑스 전투의 배경
양측 지휘관
양측 부대
양측 작전계획
프랑스 전투
전투 결과
연표
참고 문헌

저자 소개

저 : 마크 힐리 (Mark Healy)
 
1953년생으로 영국 브리스톨 대학에서 정치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교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서머싯에 있는 학교에서 인문학부 학장을 맡고 있다. 그는 엘리트(Elite) 시리즈 40 『새로운 왕국, 이집트(New Kingdom Egypt)』를 포함해 오스프리(Osprey) 출판사의 많은 책들을 저술했다. 고대사와 현대사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역 : 이동훈
 
1978년생. 2003년 중앙대학교 철학과 졸업 후 <월간항공> 취재 기자, <이포넷> 한글화 사원, <파퓰러사이언스> 외신 기자를 거쳐 현재는 자유기고가 및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전쟁영화로 마스터하는 2차 세계대전>, 역서로 <아버지의 깃발>, <대공의 사무라이>, <노 이지 데이>, <전함 군함 백과사전> 등 다수가 있다. <세계의 전함> 외 다수의 서적을 감수하였다.
 
 

출판사 리뷰

1943년 왜 소련의 쿠르스크 돌출부가 동부전선을 장악하는 데 중요했나?
소련의 이 거대한 쿠르스크 돌출부는 소련군 전선으로부터 독일군 전선을 향해 마치 주먹처럼 돌출해 있었기 때문에, 소련이 이곳에서부터 하계공세를 시작하면 독일의 남부집단군을 붕괴시킬 수 있는 아주 좋은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한편 독일군은 1941년과 1942년 두 차례 하계공세에도 소련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독일군은 이와 같은 하계공세를 다시 수행하기에는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쿠르스크 돌출부를 소련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기회의 땅으로 보았고, 이를 위해 고전적인 양익포위 전술로 쿠르스크 돌출부를 제거하고 그 안에 있는 소련군을 몰살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이 치타델레 작전은 지연을 거듭하다가, 1943년 7월 5일에서 시작되었고, 이것이 유럽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전투로 돌변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쿠르스크 돌출부는 소련과 독일 모두에게 너무나 많은 군사적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대규모 격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의 도박에 맞서 조국애와 불굴의 의지로 맞선 소련 붉은 군대
1943년 여름, 독일군이 처한 상황은 두 해 전과 판이하게 달랐다. 독일군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상실해가고 있었고, 전선에서 병력과 장비의 부족은 심각한 수준이었으며, 특히 전승의 주역인 전차 전력의 보충 또한 미미한 상태였다. 동부전선에서 히틀러의 마지막 카드인 ‘치타델레’ 작전은 4월 15일 작전명령 6호로 배포되었으나, 여러 가지 상황으로 연기되다가 마침내 7월 5일에 시작되었다. 쿠르스크에서 펼쳐진 독일군의 작전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즐겨 사용한 ‘카일 운트 케셀(Keil und Kessel, 쐐기와 이중포위)’로서 쿠르스크 돌출부를 서ㆍ남ㆍ북 세 방향에서 포위하여 그 안에 갇힌 적군을 섬멸하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1943년 여름 소련군의 전투역량은 최고 수준에 달해 있었고, 무엇보다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승리로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이제 붉은 군대는 ‘군복만 걸친 농민군’이라는 두 해 전의 오명을 씻어내고, 오히려 독일군을 상대호 ‘카일 운트 케셀’을 역으로 운용할 수 있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소련군은 쿠르스크 돌출부의 전 지역에 지뢰지대, 대전차호, 대전차진지로 3중 방어선을 구축했고 이를 요새화했다.

7월 5일 새벽, 독일군 포병대가 적군 방어거점을 향해 집중 포격을 시작하자, 공중에는 슈투카 폭격기가 특유의 사이렌 소리를 내며 지상 목표물을 향해 급강하했다. 한 시간여에 걸친 집중폭격이 끝나자, 전투공병이 전차 진입에 앞서 지뢰밭을 비집고 들어가 통로를 개척했고, 독일군 전차가 적군 방어지대에 쐐기대형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독일군이 소련군 참호방어선을 향해 전진하자, 이제까지 독일군의 포격에 숨죽여 기다리던 참호 속의 소련군 박격포와 소형화기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이에 놀란 독일군이 몸을 숨기기 위해 높게 자란 밀밭으로 뛰어들면, 소련군이 묻어놓은 지뢰들이 연쇄폭발을 일으켰다. 1차 방어선을 돌파한 독일군 전차는 또 다른 지뢰밭과 포탄 세례에 멈춰 섰고, 적군의 엄폐된 대전차포가 이들을 향해 엄청난 화력을 퍼부었다. 지뢰밭과 포병 및 대전차포 지대를 통과한 많은 독일군 전차들은 용감한 소련 전투공병들이 투척한 화염병 공격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이렇게 어렵게 3중 방어선과 장애물을 돌파한 독일군 전차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소련군의 전차부대였다. 여기서 드디어 양측 전차부대가 정면대결을 벌이게 된다.

7월 12일 전투기들이 꼬리를 물며 공중전을 벌이고 대지공격기들이 적군의 전차와 보병에게 무자비한 기총공격을 가하는 가운데, 프로호로프카에서 벌어진 쿠르스크 최대의 전차전은 여기저기에 불타는 전차들이 널린 장면을 무려 12킬로미터에 걸쳐 연출했다. 프로호로프카에서 독일군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소련군은 우크라이나 평원, 쿠르스크 정장의 당당한 지배자가 되었다. 독일군은 프로호로프카 전차전에서 패한 지 하루 뒤인 7월 13일에 ‘치타델레’ 작전의 전면 중지를 결정하기에 이른다. 이후 소련군이 서부 국경선을 돌파하고 베를린에 입성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쿠르스크에서 얻은 소련군의 승리는 1941년 겨울 모스크바와 1942년 겨울 스탈린그라드에서 쟁취한 승리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이 두 승리는 소련이 믿고 기대한 동장군의 위력에 크게 의존한 것이었지만, 1943년 7월 쿠르스크 전투의 승리는 순전히 소련군의 전투경험, 조국애 그리고 불굴의 의지가 빚어낸 결과였다.

쿠르스크 전투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남기고 있는가
첫째, 배울 줄 알고 배운 것을 창조적으로 운용하라는 것이다. 1941년의 소련군은 독일군에게 수백만 명의 포로를 안겨다준 군대였지만, 1943년 여름의 그들은 독일군에게 철저하게 당하면서 배운 ‘카일 운트 케셀(Keil und Kessel, 쐐기와 이중포위)’을 역으로 운용함으로써 독일군 무적 전차군단에게 재기 불능의 패배를 안겨줄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자세로 평상시에 위기 상황을 준비하라는 것이다. 소련은 독일의 침공을 예견하고 1941년 4월에 독일의 동맹국인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극동의 정예 전력을 서부전선의 방어에 투입할 수 있었다. 또한 독일과의 전쟁을 장기전으로 기획하면서 주요 군수산업 공장을 우랄지역으로 이전함으로써 전쟁 물자를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었다. 이것은 소련 정치지도자들의 철저한 유비무환의 정신을 엿볼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