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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공부는 해서 무엇하나, 자기를 망가뜨릴 뿐인데
사람마다 ‘공부’ 하면 떠올리는 것들이 다르다. 누구에게는 대학 진학을 위한 시험공부이고, 누구에게는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이며, 또 누구에게는 살벌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기계발이다. 그런데 이런 공부의 결과는 참담하다. 그 공부 경쟁에서 꼭대기를 차지하지 못하면 출세는커녕 생존조차 보장받지 못한다는 불안감에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심지어 이미 안정된 직장을 가진 이들조차 쉴 새 없이 공부와 자기계발에 내몰리고 있다. 그러나 이런 공부와 자기계발은 자기 착취에 다름 아니다.
이 생존주의 시대의 자기계발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압력과 ‘너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라’는 명령이 동시에 작동한다. 이 이중의 압력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지 못하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했는데도 성과를 내지 못한 이를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지 못한 이로 만든다. 자기 자신에게 충실했다는 증명서는 ‘성공’을 통해 받을 수 있다. 그러니 성공할 때까지 ‘노오력’할 수밖에 없다. 노오력으로 안 되면 노오오력하며 자기를 소진하거나, 패배자가 되는 것이 두려워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그러면, 그 경쟁에서 꼭대기를 차지한 이들은 과연 원하는 결과에 만족하고 있을까? 공부에서 늘 성과를 내는 ‘공부 잘하는 학생’은 실패와 좌절을 겪지 않은 것이 오히려 발목을 잡는다. 실패를 경험한 적이 없기에 좌절을 다루는 법을 모르는 것이다. 공부를 잘해 입학한 대학에서 상대평가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해도 C학점을 받을 때,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 않을 때, 이들은 어쩔 줄 몰라한다. 한편, 소위 사회 지도층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국정 논단 사태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시피, 이 사회의 엘리트들은 공직자로서의 윤리도, 전문가로서의 자존심도 없다. 공부에서 남들보다 뛰어난 성과를 낸 이들이 절제와 겸손은 배우지 못한 것이다. 저자는 이처럼 성공 이데올로기에 포박된 공부,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으로 자기를 파괴하는 공부가 아니라 자기를 배려하고 돌보는 공부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람마다 ‘공부’ 하면 떠올리는 것들이 다르다. 누구에게는 대학 진학을 위한 시험공부이고, 누구에게는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이며, 또 누구에게는 살벌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기계발이다. 그런데 이런 공부의 결과는 참담하다. 그 공부 경쟁에서 꼭대기를 차지하지 못하면 출세는커녕 생존조차 보장받지 못한다는 불안감에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심지어 이미 안정된 직장을 가진 이들조차 쉴 새 없이 공부와 자기계발에 내몰리고 있다. 그러나 이런 공부와 자기계발은 자기 착취에 다름 아니다.
이 생존주의 시대의 자기계발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압력과 ‘너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라’는 명령이 동시에 작동한다. 이 이중의 압력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지 못하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했는데도 성과를 내지 못한 이를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지 못한 이로 만든다. 자기 자신에게 충실했다는 증명서는 ‘성공’을 통해 받을 수 있다. 그러니 성공할 때까지 ‘노오력’할 수밖에 없다. 노오력으로 안 되면 노오오력하며 자기를 소진하거나, 패배자가 되는 것이 두려워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그러면, 그 경쟁에서 꼭대기를 차지한 이들은 과연 원하는 결과에 만족하고 있을까? 공부에서 늘 성과를 내는 ‘공부 잘하는 학생’은 실패와 좌절을 겪지 않은 것이 오히려 발목을 잡는다. 실패를 경험한 적이 없기에 좌절을 다루는 법을 모르는 것이다. 공부를 잘해 입학한 대학에서 상대평가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해도 C학점을 받을 때,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 않을 때, 이들은 어쩔 줄 몰라한다. 한편, 소위 사회 지도층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국정 논단 사태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시피, 이 사회의 엘리트들은 공직자로서의 윤리도, 전문가로서의 자존심도 없다. 공부에서 남들보다 뛰어난 성과를 낸 이들이 절제와 겸손은 배우지 못한 것이다. 저자는 이처럼 성공 이데올로기에 포박된 공부,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으로 자기를 파괴하는 공부가 아니라 자기를 배려하고 돌보는 공부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목차
책을 내며 4
들어가며 설령 천하를 얻었다 하더라도 10
01 공부할 이유가 사라지다
1 신분 상승과 반학교 문화 28
신분 상승, 공부의 목적/ 예측 가능성, 사회의 약속/ 공부하는 몸이 만들어지다/ 두 가지의 공부와 몸의 문제/ 변별력, 신분 상승 시대의 공부/ 신분 상승과 반학교 문화
2 자아실현과 탈학교 문화 58
책임에서 욕망으로/ 소비자본주의와 청소년의 등장/ 학교 바깥이 세계인 탈학교 문화/ 교실 붕괴와 학교 폭력/ 꿈이 억압이 되다
3 교육 불가능과 즐거운 학교 82
중산층과 기획의 대상이 된 교육/ 성과사회의 주체가 된 ‘공부하는 학생’들/ 또래집단의 식민화/ 성과를 내지 못하는 ‘불안한 학생’들/ 무기력한, 하지만 행복한 학생들 그리고
02 자기계발의 공부에서 자기 배려의 공부로
4 폐기나 보완이 아니라 전환이 필요한 이유 112
공부와 시간 주권/ 성공, 자아실현의 실체/ 노오력과 무한한 잠재력/ 자아실현에서 자기 배려로의 전환
5 자신의 한계를 안다는 것 136
한계, 극복에서 다룸으로/ 전문가, 자기 한계를 아는 자/ 충분한 시간, 한계에 도달해보는 유일한 길/ 자기 배려를 위한 관점의 전환
6 자기를 배려하는 법 164
내가 배려해야 하는 나는 ‘무엇’인가/ 이름, 나와 나에게 속한 것의 경계/ 이름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 배려의 대상인 나, 모른다!/ 자기 배려, 자기와의 만남/ 오직 물을 뿐, 자기를 안다는 것/ 공부, 자기를 다스리며 배려하는 과정
03 공부, 재미에서 기쁨으로
7 공부, 성장의 기쁨 196
성장의 기쁨, 연속성/ 지적 쾌감, 관계를 파악하고 연결하는 힘/ 과자와 성과, 쾌락의 뇌물/ 성장이 불가능한 시대, 재미가 기쁨을 대체하다/ 재미에서 기쁨으로의 전환
8 공부, 자유와 창조의 기쁨 218
앎, 선용의 출발/ 주어질 수 없는 것과 주어질 수 있는 것/ 능수능란함, 자유의 다른 이름/ 변용, 창조의 기쁨/ 다룸, 익힘을 통한 기예/ 익힘, 배움의 기술에 관한 배움
9 공부, 지적 쾌감과 향유의 기쁨 247
경탄, 배움의 출발점/ 지식의 쾌감: 분별의 힘/ 앎과 향유/ 공부를 끔찍한 것으로 경험하다/ 향유에서 소비로, 공부 구경/ 공부, 향유의 기예로의 전환
나가며 설령 자기를 얻는다 하더라도: 사회를 만드는 기예를 향하여 278
출처 289
들어가며 설령 천하를 얻었다 하더라도 10
01 공부할 이유가 사라지다
1 신분 상승과 반학교 문화 28
신분 상승, 공부의 목적/ 예측 가능성, 사회의 약속/ 공부하는 몸이 만들어지다/ 두 가지의 공부와 몸의 문제/ 변별력, 신분 상승 시대의 공부/ 신분 상승과 반학교 문화
2 자아실현과 탈학교 문화 58
책임에서 욕망으로/ 소비자본주의와 청소년의 등장/ 학교 바깥이 세계인 탈학교 문화/ 교실 붕괴와 학교 폭력/ 꿈이 억압이 되다
3 교육 불가능과 즐거운 학교 82
중산층과 기획의 대상이 된 교육/ 성과사회의 주체가 된 ‘공부하는 학생’들/ 또래집단의 식민화/ 성과를 내지 못하는 ‘불안한 학생’들/ 무기력한, 하지만 행복한 학생들 그리고
02 자기계발의 공부에서 자기 배려의 공부로
4 폐기나 보완이 아니라 전환이 필요한 이유 112
공부와 시간 주권/ 성공, 자아실현의 실체/ 노오력과 무한한 잠재력/ 자아실현에서 자기 배려로의 전환
5 자신의 한계를 안다는 것 136
한계, 극복에서 다룸으로/ 전문가, 자기 한계를 아는 자/ 충분한 시간, 한계에 도달해보는 유일한 길/ 자기 배려를 위한 관점의 전환
6 자기를 배려하는 법 164
내가 배려해야 하는 나는 ‘무엇’인가/ 이름, 나와 나에게 속한 것의 경계/ 이름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 배려의 대상인 나, 모른다!/ 자기 배려, 자기와의 만남/ 오직 물을 뿐, 자기를 안다는 것/ 공부, 자기를 다스리며 배려하는 과정
03 공부, 재미에서 기쁨으로
7 공부, 성장의 기쁨 196
성장의 기쁨, 연속성/ 지적 쾌감, 관계를 파악하고 연결하는 힘/ 과자와 성과, 쾌락의 뇌물/ 성장이 불가능한 시대, 재미가 기쁨을 대체하다/ 재미에서 기쁨으로의 전환
8 공부, 자유와 창조의 기쁨 218
앎, 선용의 출발/ 주어질 수 없는 것과 주어질 수 있는 것/ 능수능란함, 자유의 다른 이름/ 변용, 창조의 기쁨/ 다룸, 익힘을 통한 기예/ 익힘, 배움의 기술에 관한 배움
9 공부, 지적 쾌감과 향유의 기쁨 247
경탄, 배움의 출발점/ 지식의 쾌감: 분별의 힘/ 앎과 향유/ 공부를 끔찍한 것으로 경험하다/ 향유에서 소비로, 공부 구경/ 공부, 향유의 기예로의 전환
나가며 설령 자기를 얻는다 하더라도: 사회를 만드는 기예를 향하여 278
출처 289
책 속으로
그 결과, 탈학교 시대의 후반기로 갈수록 어린이/청소년을 해방하고자 한 언어인 ‘꿈’은 본의 아니게 억압의 언어가 되었다. 꿈을 가지지 못하면 ‘지질한’ 사람이 되고, 꿈을 가지면 그 모든 준비를 열여덞 살 이전에 완수해야 하는 ‘강압의 언어’가 된 것이다. 오히려 입시에 의한 압박보다 꿈에 의한 압박이 사람을 더 궁지로 몰아넣고 비참하게 만든다. 부모와 교사가 자기 꿈을 위해 저렇게 적극적으로 도와주는데도 아직 꿈을 발견하지 못한 자신은 구제불능에 형편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p.79
지금의 성공 이데올로기는 이전 시대의 신분 상승이나 자아실현보다 더 악독한 형태로 사람이 자기 자신을 착취하게, 사회를 황폐하게 만든다. 신분 상승은 제도교육을 통해 추구했다. 엉덩이에 진물이 날 때까지 책상에 붙어 앉아 학교가 가르치는 것을 달달 외우면 됐다. 반면, 성공은 제도교육으로는 부족하다. 성공 신화는 제도교육을 넘어서는 것까지의 용기와 도전을 요구한다. 제도교육에 ‘안주’해서는 절대 이 시대가 칭송하는 ‘성공’에 도달할 수 없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기에 제도를 넘어서는 창의성과 자발성을 발휘해야 한다.--- p.128~129
반면, “숨의 길이를 안다.”라는 말은 비교와 극복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 내가 ‘모르던 나’를 ‘알았다’는 데 초점을 맞춘다. 숨의 길이를 모른 채 물속에 뛰어들었다면, 내가 자신을 잘 몰라서 스스로를 죽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숨의 길이를 알면 나를 돌볼 수 있게 된다. 남과의 비교가 중요하지 않다. 내 안에서, 자신에 관한 모름에서 앎으로 이동한 데 초점이 맞춰진다. 아는 것이 나를 살리고 돌보게 한다. 여기서는 앎이 곧 실천이다. 알아야만 비로소 나를 보호할 수 있다. 한계를 아는 것은 자기를 살리는 실천이기 때문에 기쁜 일이다.--- p.139~140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긴다. 자기 재능의 한계가 어디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조금 허탈하겠지만, 답은 ‘충분히 해보았을 때’다. 내 한계까지 왔다는 것은 스스로 느낄 때까지 해보았을 경우에만 알 수 있다. 여기에 ‘충분히’라는 말을 붙인 이유는 그게 충분한지 아닌지를 자기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만이 그것이 충분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p.157
이런 경우를 이야기하면, 역시 학생을 사랑하고 학생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는 교사가 많다. 그러나 사랑이니 관계니 하는 말은 여전히 학생을 수동적인 존재로 바라보게 만든다. 교사가 주는 사랑을 ‘받는’ 존재로 여긴다는 말이다. 이런 관점을 넘어, 그 학생이 이름으로 불림으로써 어떤 ‘주체’가 되었는지를 보아야 한다.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부터 그는 자기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법, 즉 자기부터 자기 자신을 존엄한 존재로 여기는 태도를 갖게 된다. 이름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p.172
그러나 자기를 만나는 이 결정적인 순간에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을 옆으로 제쳐놓고 자식이 공부를 못한다는 것과 공부를 잘하게 만들고 싶다는 욕망에 넋을 놓는다. 자기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남에게 넋을 놓는 것이다.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지나쳐 자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식에게 넋을 놓는다. 그러나 이런 ‘사랑’은 자기도 배려하지 못하고 자식과의 관계도 망친다. 자기 자신이 성장해야 하는 문제를 자식의 공부 문제로 돌려버린다.--- p.191
배움에 관한 흥미와 지적 쾌감은 개인의 성향 문제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미래가 예측되지 않거나, 미래를 안다 해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은 결코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열심히 배워도, 그렇게 배운 지식과 기량으로 현실에 손톱만 한 변화도 이끌어내지 못할 때, 사람은 절대 배우지 않는다. 사회가 배운 것과는 무관하게 돌아갈 때, 무기력이 배움을 대체하고 사람은 배움에 냉소하게 된다. 배움이 영향력을 잃은 사회에서는 배움에 관한 흥미가 사라진다. 학생들이 흔히 말하다시피 “배워서 뭐해요?”가 되는 것이다.--- p.214
창조는 앎의 문제에서 다룸의 문제로 공부의 초점을 이동시킨다. 아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룰 수 있을 때, 그것도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을 때 새로운 양식을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다룸이 바로 그 사람의 탁월함의 척도가 된다. 탁월함의 척도가 전환되는 것이다. 5장에서 말한 것처럼, 탁월함은 내가 물속에서 숨을 얼마나 오래 참을 수 있느냐가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숨의 길이를 얼마나 잘 활용하고 다룰 수 있느냐의 문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국의 교육이 가진 문제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배우는 것은 많은데 다룰 수 있는 것이 없다. 배우기만 할 뿐 익히는 과정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익히는 것이라고는 문제 풀이밖에 없다. 주어진 문제만 풀 줄 알지 그 문제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수업 시간에 상투적으로 하는 말도 “여러분 아시겠지요?”다. 묻는 것처럼 보이지만 질문이 아니다. 학생들 역시 상투적으로 “예.”라고 대답하고 다음으로 넘어간다. 익힘이 없이, 배움에서 그다음 배움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p.240
나는 학교가 해야 하는 일이 두 가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 전체를 통해 강조한 것처럼, 배우는 이를 잘 관찰하고 그가 가진 향유의 기예를 발견해 같이 언어화하는 일이다. 그가 좋아하는 것, 혹은 흔히 취향이라고 부르는 것을 아름다움의 향유라는 관점에서 보고 그 아름다움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같이 찾아보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배우는 이 스스로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다른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위에서 축구를 좋아하는 학생의 말을 통해 수학의 아름다움, 협력하는 기예의 아름다움, 윤리적 아름다움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언어로 자기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이 가르치는 일 아니겠는가.
지금의 성공 이데올로기는 이전 시대의 신분 상승이나 자아실현보다 더 악독한 형태로 사람이 자기 자신을 착취하게, 사회를 황폐하게 만든다. 신분 상승은 제도교육을 통해 추구했다. 엉덩이에 진물이 날 때까지 책상에 붙어 앉아 학교가 가르치는 것을 달달 외우면 됐다. 반면, 성공은 제도교육으로는 부족하다. 성공 신화는 제도교육을 넘어서는 것까지의 용기와 도전을 요구한다. 제도교육에 ‘안주’해서는 절대 이 시대가 칭송하는 ‘성공’에 도달할 수 없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기에 제도를 넘어서는 창의성과 자발성을 발휘해야 한다.--- p.128~129
반면, “숨의 길이를 안다.”라는 말은 비교와 극복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 내가 ‘모르던 나’를 ‘알았다’는 데 초점을 맞춘다. 숨의 길이를 모른 채 물속에 뛰어들었다면, 내가 자신을 잘 몰라서 스스로를 죽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숨의 길이를 알면 나를 돌볼 수 있게 된다. 남과의 비교가 중요하지 않다. 내 안에서, 자신에 관한 모름에서 앎으로 이동한 데 초점이 맞춰진다. 아는 것이 나를 살리고 돌보게 한다. 여기서는 앎이 곧 실천이다. 알아야만 비로소 나를 보호할 수 있다. 한계를 아는 것은 자기를 살리는 실천이기 때문에 기쁜 일이다.--- p.139~140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긴다. 자기 재능의 한계가 어디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조금 허탈하겠지만, 답은 ‘충분히 해보았을 때’다. 내 한계까지 왔다는 것은 스스로 느낄 때까지 해보았을 경우에만 알 수 있다. 여기에 ‘충분히’라는 말을 붙인 이유는 그게 충분한지 아닌지를 자기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만이 그것이 충분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p.157
이런 경우를 이야기하면, 역시 학생을 사랑하고 학생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는 교사가 많다. 그러나 사랑이니 관계니 하는 말은 여전히 학생을 수동적인 존재로 바라보게 만든다. 교사가 주는 사랑을 ‘받는’ 존재로 여긴다는 말이다. 이런 관점을 넘어, 그 학생이 이름으로 불림으로써 어떤 ‘주체’가 되었는지를 보아야 한다.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부터 그는 자기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법, 즉 자기부터 자기 자신을 존엄한 존재로 여기는 태도를 갖게 된다. 이름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p.172
그러나 자기를 만나는 이 결정적인 순간에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을 옆으로 제쳐놓고 자식이 공부를 못한다는 것과 공부를 잘하게 만들고 싶다는 욕망에 넋을 놓는다. 자기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남에게 넋을 놓는 것이다.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지나쳐 자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식에게 넋을 놓는다. 그러나 이런 ‘사랑’은 자기도 배려하지 못하고 자식과의 관계도 망친다. 자기 자신이 성장해야 하는 문제를 자식의 공부 문제로 돌려버린다.--- p.191
배움에 관한 흥미와 지적 쾌감은 개인의 성향 문제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미래가 예측되지 않거나, 미래를 안다 해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은 결코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열심히 배워도, 그렇게 배운 지식과 기량으로 현실에 손톱만 한 변화도 이끌어내지 못할 때, 사람은 절대 배우지 않는다. 사회가 배운 것과는 무관하게 돌아갈 때, 무기력이 배움을 대체하고 사람은 배움에 냉소하게 된다. 배움이 영향력을 잃은 사회에서는 배움에 관한 흥미가 사라진다. 학생들이 흔히 말하다시피 “배워서 뭐해요?”가 되는 것이다.--- p.214
창조는 앎의 문제에서 다룸의 문제로 공부의 초점을 이동시킨다. 아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룰 수 있을 때, 그것도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을 때 새로운 양식을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다룸이 바로 그 사람의 탁월함의 척도가 된다. 탁월함의 척도가 전환되는 것이다. 5장에서 말한 것처럼, 탁월함은 내가 물속에서 숨을 얼마나 오래 참을 수 있느냐가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숨의 길이를 얼마나 잘 활용하고 다룰 수 있느냐의 문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국의 교육이 가진 문제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배우는 것은 많은데 다룰 수 있는 것이 없다. 배우기만 할 뿐 익히는 과정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익히는 것이라고는 문제 풀이밖에 없다. 주어진 문제만 풀 줄 알지 그 문제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수업 시간에 상투적으로 하는 말도 “여러분 아시겠지요?”다. 묻는 것처럼 보이지만 질문이 아니다. 학생들 역시 상투적으로 “예.”라고 대답하고 다음으로 넘어간다. 익힘이 없이, 배움에서 그다음 배움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p.240
나는 학교가 해야 하는 일이 두 가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 전체를 통해 강조한 것처럼, 배우는 이를 잘 관찰하고 그가 가진 향유의 기예를 발견해 같이 언어화하는 일이다. 그가 좋아하는 것, 혹은 흔히 취향이라고 부르는 것을 아름다움의 향유라는 관점에서 보고 그 아름다움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같이 찾아보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배우는 이 스스로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다른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위에서 축구를 좋아하는 학생의 말을 통해 수학의 아름다움, 협력하는 기예의 아름다움, 윤리적 아름다움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언어로 자기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이 가르치는 일 아니겠는가.
--- p.274
출판사 리뷰
“공부하느라 바빠서 공부할 틈이 없어요.” 한 학생이 저자에게 털어놓은 푸념이다. 어떤 공부를 하느라 바쁘고, 어떤 공부를 하고 싶은데 시간이 없는 것일까?
도서출판 따비의 신간 『공부 공부 - 자기를 돌보는 방법을 어떻게 배울 것인가』에서 저자 엄기호는 ‘공부의 전환’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지금까지와 같은 공부의 목적은 효용을 다했기 때문에, 공부를 해야 한다면 그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새로운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공부는 해서 무엇하나, 자기를 망가뜨릴 뿐인데
사람마다 ‘공부’ 하면 떠올리는 것들이 다르다. 누구에게는 대학 진학을 위한 시험공부이고, 누구에게는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이며, 또 누구에게는 살벌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기계발이다. 그런데 이런 공부의 결과는 참담하다. 그 공부 경쟁에서 꼭대기를 차지하지 못하면 출세는커녕 생존조차 보장받지 못한다는 불안감에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심지어 이미 안정된 직장을 가진 이들조차 쉴 새 없이 공부와 자기계발에 내몰리고 있다. 그러나 이런 공부와 자기계발은 자기 착취에 다름 아니다.
이 생존주의 시대의 자기계발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압력과 ‘너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라’는 명령이 동시에 작동한다. 이 이중의 압력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지 못하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했는데도 성과를 내지 못한 이를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지 못한 이로 만든다. 자기 자신에게 충실했다는 증명서는 ‘성공’을 통해 받을 수 있다. 그러니 성공할 때까지 ‘노오력’할 수밖에 없다. 노오력으로 안 되면 노오오력하며 자기를 소진하거나, 패배자가 되는 것이 두려워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그러면, 그 경쟁에서 꼭대기를 차지한 이들은 과연 원하는 결과에 만족하고 있을까? 공부에서 늘 성과를 내는 ‘공부 잘하는 학생’은 실패와 좌절을 겪지 않은 것이 오히려 발목을 잡는다. 실패를 경험한 적이 없기에 좌절을 다루는 법을 모르는 것이다. 공부를 잘해 입학한 대학에서 상대평가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해도 C학점을 받을 때,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 않을 때, 이들은 어쩔 줄 몰라한다. 한편, 소위 사회 지도층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국정 논단 사태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시피, 이 사회의 엘리트들은 공직자로서의 윤리도, 전문가로서의 자존심도 없다. 공부에서 남들보다 뛰어난 성과를 낸 이들이 절제와 겸손은 배우지 못한 것이다. 저자는 이처럼 성공 이데올로기에 포박된 공부,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으로 자기를 파괴하는 공부가 아니라 자기를 배려하고 돌보는 공부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기를 돌보기 위한 공부로의 전환
저자는 ‘자기를 돌보는 공부’를 위해 두 가지 키워드를 제시한다. 첫째, 자기 한계를 아는 것이다. 그동안 교육에서 한계는 극복의 대상이었다. 재능과 조건의 한계를 노력으로 극복하고 돌파하는 것이 성취였다. 그러나 재능의 유무나 크기 자체로 탁월함을 가를 때, 남들보다 못한 재능을 가진 이는 일등을 바라보며 노오력해야만 한다. 그러나 한계가 극복이 아니라 ‘다룸’의 대상이 되면, 누구나 자기 한계에 맞추어 자기를 보전하며 다룸의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또한 자기 한계를 안다는 것은 자신이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하지 못하는 분야에서는 물러나서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한다는 의미에서도 중요하다. 그래야 자기를 보호할 수 있다.
이처럼 자기를 배려하고 자기 한계를 알려면 ‘자기에 집중’해야 한다. 자기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렇게 자기가 알지 못하는 자기가 곧‘타자’이며, 타자를 대하는 방법은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저자는 주장하는 ‘전환의 공부’는 어떤 것일까? 저자는 ‘연속성’이라는 개념으로 인간의 성장과 공부를 연결한다. 사람은 살아가기 위해 늘 환경에 적응하며 스스로를 갱신해나간다. 자신만 바꾸는 것이 아니다. 배움이 깊어지면 아는 것을 활용해 보다 적극적으로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 이 과정이 바로 ‘성장’이다. 성장의 핵심이 연속성이다. 경험의 갱신을 통해 삶이 연속적으로 진행될 때, 그것은 성장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리가 삶에서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 바로 삶의 연속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공부는 사람의 삶이 연속성/서사성을 가질 수 있게 만든다. 각각의 사물과 현상, 행동과 결과를 연관 지을 수 있는 지적 활동이 바로 공부이기 때문이다. 그 연관성을 파악하고, 파악한 바에 따라 행동해 상황을 통제할 수 있을 때 공부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또한 공부의 힘이 주는 쾌감을 느껴본 사람은 공부를 계속할 힘을 얻는다.
창조와 향유, 공부가 기쁘기 위해서
저자는 그런 공부를 통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기쁨은 창조와 향유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재능처럼 개인에게 주어진 것뿐 아니라 자연법칙처럼 존재 전체에 주어진 것을 한계로 갖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한계에 갇혀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룸’으로써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저자는 이런 창조를 위한 앎과 익힘을 강조한다. 앎이란 인간이 다루어야 하는 것, 즉 주어진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알기 위해 필요하다. 지식 교육은 시험을 잘 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또한 익힘을 통해 얻는 능수능란함은 러처드 세넷이 ‘생각하는 손’이라는 말로 설명한 것처럼, 단순히 기술이 아니라 아름답다는 감탄을 일으키는 ‘기예技藝’다. 외과의사가 수술하는 손, 요리사가 불과 칼을 다루는 손이 보여주는 능수능란함은 그것을 보는 사람들을 그 앎과 익힘으로 초대한다. 이런 앎과 능수능란함이 결합할 때 인간은 새로운 ‘양식’을 창조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한편, 앎을 통해 이전까지는 모르던 질서를 파악하고 거기서 아름다움을 느끼면 ‘향유’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저자는 공부에서 ‘아름다움’의 가치를 역설한다. 이전까지 만나지 못했던 아름다운 것을 만났을 때 인간은 경탄한다. 그리고 그 경탄을 일으킨 대상에 관해 더 알고 싶어진다. 경탄은 사람을 공부로 이끄는 계기이며, 공부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줘 경탄을 일으키는 매개다. 향유와 공부는 여기서 동의어이자 연속적인 과정인 것이다. 조선 시대의 문장가 유한준이 말한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는 말은 바로 이 향유의 연속성을 잘 보여준다.
저자는 향유하는 삶을 위해 두 가지를 경계하도록 지적한다. 하나는 향유와 소비의 구분이다. 소비는 자신의 성장에 신경 쓰지 않는 공부 구경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공부 구경을 통해, 사람들은 공부를 하되 성장은 하지 못하는 아이러니에 빠져 있다. 또 다른 하나는 향유가 가진 자들의 독점물이 되게 만드는 것에 대한 경계다. 공부를 못하거나 문화자본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향유를 새롭게 바라보는 한편, 경제적/사회적 차이와 상관없이 여러 가지 문화적인 것을 즐기고 향유의 기예를 키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지식의 쓸모는 먹고사는 것을 넘어 세상의 아름다움, 우주와 역사의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데 있다. 이렇게 향유하는 삶이 멋진 삶이다. 딱 한 번 주어진 삶, 멋지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276쪽)
도서출판 따비의 신간 『공부 공부 - 자기를 돌보는 방법을 어떻게 배울 것인가』에서 저자 엄기호는 ‘공부의 전환’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지금까지와 같은 공부의 목적은 효용을 다했기 때문에, 공부를 해야 한다면 그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새로운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공부는 해서 무엇하나, 자기를 망가뜨릴 뿐인데
사람마다 ‘공부’ 하면 떠올리는 것들이 다르다. 누구에게는 대학 진학을 위한 시험공부이고, 누구에게는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이며, 또 누구에게는 살벌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기계발이다. 그런데 이런 공부의 결과는 참담하다. 그 공부 경쟁에서 꼭대기를 차지하지 못하면 출세는커녕 생존조차 보장받지 못한다는 불안감에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심지어 이미 안정된 직장을 가진 이들조차 쉴 새 없이 공부와 자기계발에 내몰리고 있다. 그러나 이런 공부와 자기계발은 자기 착취에 다름 아니다.
이 생존주의 시대의 자기계발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압력과 ‘너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라’는 명령이 동시에 작동한다. 이 이중의 압력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지 못하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했는데도 성과를 내지 못한 이를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지 못한 이로 만든다. 자기 자신에게 충실했다는 증명서는 ‘성공’을 통해 받을 수 있다. 그러니 성공할 때까지 ‘노오력’할 수밖에 없다. 노오력으로 안 되면 노오오력하며 자기를 소진하거나, 패배자가 되는 것이 두려워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그러면, 그 경쟁에서 꼭대기를 차지한 이들은 과연 원하는 결과에 만족하고 있을까? 공부에서 늘 성과를 내는 ‘공부 잘하는 학생’은 실패와 좌절을 겪지 않은 것이 오히려 발목을 잡는다. 실패를 경험한 적이 없기에 좌절을 다루는 법을 모르는 것이다. 공부를 잘해 입학한 대학에서 상대평가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해도 C학점을 받을 때,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 않을 때, 이들은 어쩔 줄 몰라한다. 한편, 소위 사회 지도층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국정 논단 사태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시피, 이 사회의 엘리트들은 공직자로서의 윤리도, 전문가로서의 자존심도 없다. 공부에서 남들보다 뛰어난 성과를 낸 이들이 절제와 겸손은 배우지 못한 것이다. 저자는 이처럼 성공 이데올로기에 포박된 공부,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으로 자기를 파괴하는 공부가 아니라 자기를 배려하고 돌보는 공부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기를 돌보기 위한 공부로의 전환
저자는 ‘자기를 돌보는 공부’를 위해 두 가지 키워드를 제시한다. 첫째, 자기 한계를 아는 것이다. 그동안 교육에서 한계는 극복의 대상이었다. 재능과 조건의 한계를 노력으로 극복하고 돌파하는 것이 성취였다. 그러나 재능의 유무나 크기 자체로 탁월함을 가를 때, 남들보다 못한 재능을 가진 이는 일등을 바라보며 노오력해야만 한다. 그러나 한계가 극복이 아니라 ‘다룸’의 대상이 되면, 누구나 자기 한계에 맞추어 자기를 보전하며 다룸의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또한 자기 한계를 안다는 것은 자신이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하지 못하는 분야에서는 물러나서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한다는 의미에서도 중요하다. 그래야 자기를 보호할 수 있다.
이처럼 자기를 배려하고 자기 한계를 알려면 ‘자기에 집중’해야 한다. 자기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렇게 자기가 알지 못하는 자기가 곧‘타자’이며, 타자를 대하는 방법은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저자는 주장하는 ‘전환의 공부’는 어떤 것일까? 저자는 ‘연속성’이라는 개념으로 인간의 성장과 공부를 연결한다. 사람은 살아가기 위해 늘 환경에 적응하며 스스로를 갱신해나간다. 자신만 바꾸는 것이 아니다. 배움이 깊어지면 아는 것을 활용해 보다 적극적으로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 이 과정이 바로 ‘성장’이다. 성장의 핵심이 연속성이다. 경험의 갱신을 통해 삶이 연속적으로 진행될 때, 그것은 성장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리가 삶에서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 바로 삶의 연속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공부는 사람의 삶이 연속성/서사성을 가질 수 있게 만든다. 각각의 사물과 현상, 행동과 결과를 연관 지을 수 있는 지적 활동이 바로 공부이기 때문이다. 그 연관성을 파악하고, 파악한 바에 따라 행동해 상황을 통제할 수 있을 때 공부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또한 공부의 힘이 주는 쾌감을 느껴본 사람은 공부를 계속할 힘을 얻는다.
창조와 향유, 공부가 기쁘기 위해서
저자는 그런 공부를 통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기쁨은 창조와 향유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재능처럼 개인에게 주어진 것뿐 아니라 자연법칙처럼 존재 전체에 주어진 것을 한계로 갖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한계에 갇혀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룸’으로써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저자는 이런 창조를 위한 앎과 익힘을 강조한다. 앎이란 인간이 다루어야 하는 것, 즉 주어진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알기 위해 필요하다. 지식 교육은 시험을 잘 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또한 익힘을 통해 얻는 능수능란함은 러처드 세넷이 ‘생각하는 손’이라는 말로 설명한 것처럼, 단순히 기술이 아니라 아름답다는 감탄을 일으키는 ‘기예技藝’다. 외과의사가 수술하는 손, 요리사가 불과 칼을 다루는 손이 보여주는 능수능란함은 그것을 보는 사람들을 그 앎과 익힘으로 초대한다. 이런 앎과 능수능란함이 결합할 때 인간은 새로운 ‘양식’을 창조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한편, 앎을 통해 이전까지는 모르던 질서를 파악하고 거기서 아름다움을 느끼면 ‘향유’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저자는 공부에서 ‘아름다움’의 가치를 역설한다. 이전까지 만나지 못했던 아름다운 것을 만났을 때 인간은 경탄한다. 그리고 그 경탄을 일으킨 대상에 관해 더 알고 싶어진다. 경탄은 사람을 공부로 이끄는 계기이며, 공부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줘 경탄을 일으키는 매개다. 향유와 공부는 여기서 동의어이자 연속적인 과정인 것이다. 조선 시대의 문장가 유한준이 말한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는 말은 바로 이 향유의 연속성을 잘 보여준다.
저자는 향유하는 삶을 위해 두 가지를 경계하도록 지적한다. 하나는 향유와 소비의 구분이다. 소비는 자신의 성장에 신경 쓰지 않는 공부 구경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공부 구경을 통해, 사람들은 공부를 하되 성장은 하지 못하는 아이러니에 빠져 있다. 또 다른 하나는 향유가 가진 자들의 독점물이 되게 만드는 것에 대한 경계다. 공부를 못하거나 문화자본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향유를 새롭게 바라보는 한편, 경제적/사회적 차이와 상관없이 여러 가지 문화적인 것을 즐기고 향유의 기예를 키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지식의 쓸모는 먹고사는 것을 넘어 세상의 아름다움, 우주와 역사의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데 있다. 이렇게 향유하는 삶이 멋진 삶이다. 딱 한 번 주어진 삶, 멋지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2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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