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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조선왕조의 정신적 기둥, 종묘를 만나다!
‘궁궐로 떠나는 힐링여행’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을 통해 우리 궁궐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넓혀온 저자가 조선왕조의 정신적 기둥이었던 종묘에 대해 알기 쉽게 안내하는 책을 출간하였다.
현재 서울시 종로3가와 4가 사이에 위치해 있는 종묘는 누구나 한 번쯤 지나치는 곳이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한 후 새로운 수도 한양을 건설할 때에도 국왕의 생활 공간인 궁궐보다 종묘와 사직이 먼저 만들어졌지만, 종묘는 궁궐만큼 관심을 받지 못했으며 정작 종묘가 어떤 곳인지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2016년 3월 종묘 광장이 복원 공사를 마치고 국가 사당으로서의 위엄을 갖추면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태조를 비롯하여 역대 왕(19위)과 왕후(30위)의 49위 신위를 봉안하고 있는 정전과 태조의 4대조와 정전에서 조천된 왕과 왕후, 추존 왕과 왕후의 34위 신위를 모신 영녕전은 종묘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제례를 위한 공간으로서의 종묘는 조선시대 건축물 중 가장 정제되고 장엄하며 신성한 공간으로 평가받고 있다. 다른 건물과는 그 기능적 목적이 확연히 구분되는 독특하고 고유한 묘(廟) 건축의 대표작이다.
현재 세계에서 유일하게 유교적 제향 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유지하고 있는 종묘는 199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으며, 유교 문화의 국가적 제향인 종묘대제는 200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선정되었다. 책에서는 종묘 건축과 함께 600년 가까이 이어온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유교문화 유산으로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에 대해서 일반인의 관점에서 알기 쉽게 소개하고 있다.
‘궁궐로 떠나는 힐링여행’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을 통해 우리 궁궐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넓혀온 저자가 조선왕조의 정신적 기둥이었던 종묘에 대해 알기 쉽게 안내하는 책을 출간하였다.
현재 서울시 종로3가와 4가 사이에 위치해 있는 종묘는 누구나 한 번쯤 지나치는 곳이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한 후 새로운 수도 한양을 건설할 때에도 국왕의 생활 공간인 궁궐보다 종묘와 사직이 먼저 만들어졌지만, 종묘는 궁궐만큼 관심을 받지 못했으며 정작 종묘가 어떤 곳인지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2016년 3월 종묘 광장이 복원 공사를 마치고 국가 사당으로서의 위엄을 갖추면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태조를 비롯하여 역대 왕(19위)과 왕후(30위)의 49위 신위를 봉안하고 있는 정전과 태조의 4대조와 정전에서 조천된 왕과 왕후, 추존 왕과 왕후의 34위 신위를 모신 영녕전은 종묘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제례를 위한 공간으로서의 종묘는 조선시대 건축물 중 가장 정제되고 장엄하며 신성한 공간으로 평가받고 있다. 다른 건물과는 그 기능적 목적이 확연히 구분되는 독특하고 고유한 묘(廟) 건축의 대표작이다.
현재 세계에서 유일하게 유교적 제향 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유지하고 있는 종묘는 199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으며, 유교 문화의 국가적 제향인 종묘대제는 200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선정되었다. 책에서는 종묘 건축과 함께 600년 가까이 이어온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유교문화 유산으로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에 대해서 일반인의 관점에서 알기 쉽게 소개하고 있다.
목차
추천의 말 : ‘영원한 안녕’을 꿈꾸는 종묘
저자의 말 : 신들의 향연이 펼쳐지는 종묘
1. 외대문으로 들어가다
2. 망묘루와 향대청, 예를 갖추다
3. 재궁, 몸과 마음을 살피다
4. 전사청, 신을 위한 음식을 준비하다
5. 정전, 조상의 신위를 모시다
6. 영녕전, 종묘의 별묘가 되다
7. 종묘제례, 유교문화의 걸작이 되다
8. 종묘제례악, 음악과 춤으로 받들다
9. 순라길을 따라서 걷다
부록 : 종묘 십경 / 조선왕조 가계도 / 종묘 연표
저자의 말 : 신들의 향연이 펼쳐지는 종묘
1. 외대문으로 들어가다
2. 망묘루와 향대청, 예를 갖추다
3. 재궁, 몸과 마음을 살피다
4. 전사청, 신을 위한 음식을 준비하다
5. 정전, 조상의 신위를 모시다
6. 영녕전, 종묘의 별묘가 되다
7. 종묘제례, 유교문화의 걸작이 되다
8. 종묘제례악, 음악과 춤으로 받들다
9. 순라길을 따라서 걷다
부록 : 종묘 십경 / 조선왕조 가계도 / 종묘 연표
책 속으로
조선왕조의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 죽은 사람의 위패)를 모신 국가 사당으로, 그 제례적 신성성과 함께 종묘 건축이 갖는 단아하면서도 장엄한 분위기를 보여주는 세계에서 유일한 건축물입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가 광해군 원년(1608)에 이전의 규모로 중건되었고, 그 후 다시 몇 번의 증축 및 보수(補修)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종묘는 처음 지어졌던 구조에서 점점 더 길어졌고, 사당으로서의 기능을 위한 공간으로 특별한 위계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 p.45
조선의 왕이 가장 중요하게 떠받든 것은 바로 종묘사직입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조정이 모든 것을 버리고 황급히 피난길에 올랐으나, 그 황망 중에도 종묘와 사직의 신주만은 안전하게 피신시켰습니다. 이는 종묘사직이 보존되어야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믿음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종묘사직은 국가의 존립 그 자체였습니다. --- p.49
유교의 사생관에서 사람의 죽음을 ‘돌아가셨다’고 표현합니다. 혼(魂)은 하늘로 가고 백(魄)은 땅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부모가 돌아가신 후 사람들은 제례를 통해 효(孝)를 표현했습니다. 《국조오례의》에 의하면 삼년상을 지나 종묘에 부묘되기까지를 흉례로 보고, 그 이후 제사의식은 조상을 다시 만난다는 의미의 길례(吉禮)로 여겼습니다. --- pp.153-154
《국조오례의》에 규정하기를 조선시대 예제(禮制)의 대상에는 오례(五禮 : 길례, 흉례, 군례, 빈례, 가례)가 있었고, 제사 의례인 길례(吉禮)는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로 나뉩니다. 종묘대제는 사직대제와 함께 대사(大祀)에 속하여 임금이 친히 받들었던 가장 격식이 높은 의례였습니다. 종묘제례는 종묘에서 왕실의 조상들에게 지내는 제사로, 종묘대제(宗廟大祭) 또는 대향(大享)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조선왕실의 후손으로서 왕이 친히 제향을 봉행하여 조상에 대한 효를 행하고 국가의 평안과 번영을 기원하는 조선왕조의 가장 큰 국가 의례로 임금을 비롯한 왕세자, 제관(祭官), 문무백관, 악공, 일무원 등 700여 명이 참가하였습니다. 조선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나라에 공이 있는 공신의 신위가 봉안되어 있는 종묘에서 제향을 올리는 종묘제례는 예(禮)를 소중히 여긴 조상들이 유교 사회의 도덕적 가치를 의례 형식으로 보여준 귀중한 의식으로 웅장함과 엄숙함이 돋보입니다. --- pp.239-240
종묘제례를 진행하는 동안 제사를 장엄하게 꾸미기 위해 기악과 노래 그리고 춤이 펼쳐지는데, 이를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이라 합니다. 종묘제례악은 세종 때 완성되었으며, 그 후 약간의 추가가 이루어졌을 뿐 큰 변화가 없습니다. 거의 500년 전의 기악과 노래와 춤이 전해져 오는 것입니다. 이렇듯 오래된 제례와 음악이 함께 전해오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일로, 종묘제례악은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선정되었습니다.
조선의 왕이 가장 중요하게 떠받든 것은 바로 종묘사직입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조정이 모든 것을 버리고 황급히 피난길에 올랐으나, 그 황망 중에도 종묘와 사직의 신주만은 안전하게 피신시켰습니다. 이는 종묘사직이 보존되어야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믿음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종묘사직은 국가의 존립 그 자체였습니다. --- p.49
유교의 사생관에서 사람의 죽음을 ‘돌아가셨다’고 표현합니다. 혼(魂)은 하늘로 가고 백(魄)은 땅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부모가 돌아가신 후 사람들은 제례를 통해 효(孝)를 표현했습니다. 《국조오례의》에 의하면 삼년상을 지나 종묘에 부묘되기까지를 흉례로 보고, 그 이후 제사의식은 조상을 다시 만난다는 의미의 길례(吉禮)로 여겼습니다. --- pp.153-154
《국조오례의》에 규정하기를 조선시대 예제(禮制)의 대상에는 오례(五禮 : 길례, 흉례, 군례, 빈례, 가례)가 있었고, 제사 의례인 길례(吉禮)는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로 나뉩니다. 종묘대제는 사직대제와 함께 대사(大祀)에 속하여 임금이 친히 받들었던 가장 격식이 높은 의례였습니다. 종묘제례는 종묘에서 왕실의 조상들에게 지내는 제사로, 종묘대제(宗廟大祭) 또는 대향(大享)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조선왕실의 후손으로서 왕이 친히 제향을 봉행하여 조상에 대한 효를 행하고 국가의 평안과 번영을 기원하는 조선왕조의 가장 큰 국가 의례로 임금을 비롯한 왕세자, 제관(祭官), 문무백관, 악공, 일무원 등 700여 명이 참가하였습니다. 조선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나라에 공이 있는 공신의 신위가 봉안되어 있는 종묘에서 제향을 올리는 종묘제례는 예(禮)를 소중히 여긴 조상들이 유교 사회의 도덕적 가치를 의례 형식으로 보여준 귀중한 의식으로 웅장함과 엄숙함이 돋보입니다. --- pp.239-240
종묘제례를 진행하는 동안 제사를 장엄하게 꾸미기 위해 기악과 노래 그리고 춤이 펼쳐지는데, 이를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이라 합니다. 종묘제례악은 세종 때 완성되었으며, 그 후 약간의 추가가 이루어졌을 뿐 큰 변화가 없습니다. 거의 500년 전의 기악과 노래와 춤이 전해져 오는 것입니다. 이렇듯 오래된 제례와 음악이 함께 전해오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일로, 종묘제례악은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선정되었습니다.
--- p.279
출판사 리뷰
1. 조상의 신주를 모신 국가 사당, 종묘
옛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혼(魂)은 하늘로 가고, 몸을 지탱하던 백(魄)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후관으로 혼을 위한 구조물로 묘(廟: 사당)를 짓고, 백을 위해서는 무덤(墓)을 만들었다. 종묘는 국가의 조상신을 모시는 조선왕조의 사당이다.
조선의 왕이 가장 중요하게 떠받든 것은 종묘사직이었다. 사극에서 자주 나오는 대사 “전하, 종묘와 사직을 생각하소서”라는 말은 나라의 근본을 지키라는 말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조정이 모든 것을 버리고 황급히 피난길에 오르는 그 황망 중에도 종묘와 사직의 신주만은 안전하게 피신시켰다. 조상의 신주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여 ‘신주단지 모시듯한다’는 말이 여기에서 유래하기도 했다. 조상들은 종묘사직이 보존되어야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으며, 그런 의미에서 종묘사직은 국가의 존립 그 자체였다.
2. 죽은 후 평가되는 사람들의 이야기
종묘의 대문인 외대문을 들어서면 툭 트인 궁궐과는 다르게 키 큰 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아늑한 정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그리고 거친 박석을 깔아 만든 삼도가 아스라이 멀리까지 이어진다. 궁궐의 삼도가 왕이 다니는 어도(御道)라면, 종묘의 삼도는 신이 다니는 신로(神路)라고 소개한다. 이렇듯 종묘로의 출발은 궁궐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세계적인 건축물로 인정받고 있는 종묘 건축의 압권은 그 길이가 105미터에 이르는 정전이다. 종묘의 정전은 처음에는 7칸의 단출한 규모로 지어졌다. 그러다가 정종이 승하하니 태조의 4대조와 태조까지 5위의 신위를 모시고 있던 정전 신실 5칸으로는 부족하게 되었다. 이에 세종 때 영녕전을 정전의 별묘로 창건하고 4대조의 신위를 옮겼다. 이후 역대 왕의 신위는 정전에 부묘되었다가 영녕전으로 옮겼는데, 그중 공덕이 있는 왕은 영녕전으로 옮기지 않고 정전에 모셨다. 하진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전과 영녕전 모두 선왕들의 신위로 꽉 차버렸고, 이에 따라 일정한 봉안 원칙이 세워지게 되었다. 즉, “5대가 지난 왕은 원칙적으로 정전에서 영녕전으로 신위를 옮겨 봉안한다. 그러나 태종이나 세종과 같이 공덕이 뛰어난 선왕의 신주는 옮기지 않고 영구히 정전에 봉안한다. 또 덕종이나 장조와 같이 실제 보위에는 오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세자들도 추존하여 왕으로 봉안한다. 그리고 정전 내 가장 서쪽에서부터 선왕의 순으로 신위를 모신다”는 것이다. 이처럼 까다로운 법식을 따라가면 종묘의 건물들은 몇 차례 증축을 거치게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정전과 영녕전이 전소되었고, 선조는 종묘의 신주를 수습하여 몽진함으로써 조선 왕실의 신주를 보존하였다. 광해군 때 재건 공사로 종묘가 완공된 후 현종, 영조, 헌종 때 다시 종묘를 증축하여 현재 좌우로 긴 종묘 정전의 모습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불탄 종묘를 자신의 손으로 짓고도 그 신위가 종묘에 입향되지 못했다. 또한 폐위된 연산군도 종묘에 합사되지 못했다.
이 외에도 책에는 260년 만에 복위되어 종묘에 모셔진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단종을 낳고 하루 만에 사망한 현덕왕후, 중종반정으로 왕후가 되었으나 바로 폐위된 단경왕후,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와 광해군의 생모인 공빈 김씨, 그리고 숙종의 후궁이었던 장희빈과 숙빈 최씨 이야기 등은 종묘가 왕과 관련된 남성 전유물의 공간이 아님을 환기시켜준다. 궁궐이 살아 행동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종묘는 죽은 후 평가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역사의 또 다른 이면을 보여준다. 역사를 두려워해야 하는 이유다.
추천의 말
이 책 속에는 어떤 숙연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종묘에서 봉행되는 종묘대제를 지켜볼 때 그 엄숙함과 정성에 언제나 마음이 숙연해지는 경험과 같은 느낌입니다. 우리 문화재에 대한 오랜 애정, 집필을 위해 오랜 기간 자문을 구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스케치를 하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면서 이러한 분들이 계셨기에 오늘날 종묘의 위상이 이렇게까지 높아질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 조인제(종묘관리소장)
옛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혼(魂)은 하늘로 가고, 몸을 지탱하던 백(魄)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후관으로 혼을 위한 구조물로 묘(廟: 사당)를 짓고, 백을 위해서는 무덤(墓)을 만들었다. 종묘는 국가의 조상신을 모시는 조선왕조의 사당이다.
조선의 왕이 가장 중요하게 떠받든 것은 종묘사직이었다. 사극에서 자주 나오는 대사 “전하, 종묘와 사직을 생각하소서”라는 말은 나라의 근본을 지키라는 말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조정이 모든 것을 버리고 황급히 피난길에 오르는 그 황망 중에도 종묘와 사직의 신주만은 안전하게 피신시켰다. 조상의 신주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여 ‘신주단지 모시듯한다’는 말이 여기에서 유래하기도 했다. 조상들은 종묘사직이 보존되어야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으며, 그런 의미에서 종묘사직은 국가의 존립 그 자체였다.
2. 죽은 후 평가되는 사람들의 이야기
종묘의 대문인 외대문을 들어서면 툭 트인 궁궐과는 다르게 키 큰 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아늑한 정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그리고 거친 박석을 깔아 만든 삼도가 아스라이 멀리까지 이어진다. 궁궐의 삼도가 왕이 다니는 어도(御道)라면, 종묘의 삼도는 신이 다니는 신로(神路)라고 소개한다. 이렇듯 종묘로의 출발은 궁궐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세계적인 건축물로 인정받고 있는 종묘 건축의 압권은 그 길이가 105미터에 이르는 정전이다. 종묘의 정전은 처음에는 7칸의 단출한 규모로 지어졌다. 그러다가 정종이 승하하니 태조의 4대조와 태조까지 5위의 신위를 모시고 있던 정전 신실 5칸으로는 부족하게 되었다. 이에 세종 때 영녕전을 정전의 별묘로 창건하고 4대조의 신위를 옮겼다. 이후 역대 왕의 신위는 정전에 부묘되었다가 영녕전으로 옮겼는데, 그중 공덕이 있는 왕은 영녕전으로 옮기지 않고 정전에 모셨다. 하진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전과 영녕전 모두 선왕들의 신위로 꽉 차버렸고, 이에 따라 일정한 봉안 원칙이 세워지게 되었다. 즉, “5대가 지난 왕은 원칙적으로 정전에서 영녕전으로 신위를 옮겨 봉안한다. 그러나 태종이나 세종과 같이 공덕이 뛰어난 선왕의 신주는 옮기지 않고 영구히 정전에 봉안한다. 또 덕종이나 장조와 같이 실제 보위에는 오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세자들도 추존하여 왕으로 봉안한다. 그리고 정전 내 가장 서쪽에서부터 선왕의 순으로 신위를 모신다”는 것이다. 이처럼 까다로운 법식을 따라가면 종묘의 건물들은 몇 차례 증축을 거치게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정전과 영녕전이 전소되었고, 선조는 종묘의 신주를 수습하여 몽진함으로써 조선 왕실의 신주를 보존하였다. 광해군 때 재건 공사로 종묘가 완공된 후 현종, 영조, 헌종 때 다시 종묘를 증축하여 현재 좌우로 긴 종묘 정전의 모습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불탄 종묘를 자신의 손으로 짓고도 그 신위가 종묘에 입향되지 못했다. 또한 폐위된 연산군도 종묘에 합사되지 못했다.
이 외에도 책에는 260년 만에 복위되어 종묘에 모셔진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단종을 낳고 하루 만에 사망한 현덕왕후, 중종반정으로 왕후가 되었으나 바로 폐위된 단경왕후,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와 광해군의 생모인 공빈 김씨, 그리고 숙종의 후궁이었던 장희빈과 숙빈 최씨 이야기 등은 종묘가 왕과 관련된 남성 전유물의 공간이 아님을 환기시켜준다. 궁궐이 살아 행동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종묘는 죽은 후 평가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역사의 또 다른 이면을 보여준다. 역사를 두려워해야 하는 이유다.
추천의 말
이 책 속에는 어떤 숙연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종묘에서 봉행되는 종묘대제를 지켜볼 때 그 엄숙함과 정성에 언제나 마음이 숙연해지는 경험과 같은 느낌입니다. 우리 문화재에 대한 오랜 애정, 집필을 위해 오랜 기간 자문을 구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스케치를 하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면서 이러한 분들이 계셨기에 오늘날 종묘의 위상이 이렇게까지 높아질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 조인제(종묘관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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