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세계사 입문 (독서)/2.세계문화

도시는 왜 사라졌는가(2021) - 도시 멸망 탐사 르포르타주

동방박사님 2024. 3. 15.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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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한때 번성했던 네 도시는 왜 종말을 맞았을까?
도시 소멸의 미스터리를 추적한 탐사 르포르타주


사라진 도시들에 숨겨진 문화적 복합성을 치밀하게 파고든 생생한 탐사 르포르타주. 차탈회윅, 폼페이, 앙코르, 카호키아는 번성하는 문명의 중심지였다. 이 도시들은 왜, 어떻게 종말을 맞았을까? 우리는 그 극적인 소멸의 순간에만 집중하고 그 오랜 생존의 역사를 잊곤 한다. 도시를 유지하는 방법에 관해 수많은 결정을 내리면서 보낸 수백 년의 세월을. 사람들이 도시인으로서 살았던 특별한 방식을 이해해야만 그들이 왜 자기네 도시를 죽게 만드는 선택을 했는지 헤아려볼 수 있다.

이러한 접근은 보다 근본적인 질문으로 나아간다. 왜 우리 조상들은 탁 트인 대지의 자유를 버리고 냄새 나며 갑갑한, 인간의 배설물과 끝없는 정치적 드라마로 가득 찬 곳을 선택했을까? 그들은 어떤 직관과 판단에 이끌려 정착하고 농사짓게 됐을까? 어떻게 해서 수많은 사람이 가까이 모여 함께 사는 데 의견을 맞추어 공공의 장소와 자원을 건설했을까?

지은이는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버려진 도시들의 흔적을 수 년간 찾아다니고 최신 고고학 연구를 섭렵했으며 관련 연구자들을 취재했다. 사람들이 왜 떠나갔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그들이 왜 왔는지, 머무르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를 알아야 했다. 또한 그들이 스스로 건설한 고향을 버렸을 때 그들이 무엇을 잃었는지를 확인하려 했다. 그것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목차

프롤로그: 도시는 어떻게 사라졌나

1부 차탈회윅 - 출입구

1장 정주 생활의 충격
인디애나 존스의 맞수 | 인류의 순화(馴化) | 땅에 대한 권리 주장 | 추상성의 증대

2장 여신들에 관한 진실
때로 벗은 여성은 벗은 여성이 아니다 | 가내 기술

3장 역사 속 역사
8200년 전의 기상 사건 | 계층 문제 | 죽음의 구덩이

2부 폼페이 - 거리

4장 델라본단차 거리의 폭동
이시스 여신과 난쟁이 | 줄리아 펠리체의 사업 | 네로가 행한 몇 가지 선행 | 부엌의 사람들

5장 공개적으로 하는 것
타베르나 순례 | 배수로 데이터 | 리베르투스의 성장 | 거시기 빨기의 여왕 | 로마의 화장실 예법

6장 산이 불탄 뒤
“엄청난 악몽” |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파우스투스의 행운

3부 앙코르 - 저수지

7장 대체 농업사
밀림 속의 농업 | 레이저 이용하기 | 도시 이전의 도시

8장 물의 제국
채무노예와 그 후견자들 | 도시의 인구 폭발 | 화폐 없는 경제 | 돌의 취약성

9장 제국주의의 잔재
첫 번째 범람 | 천의 얼굴을 가진 왕 | 기후 재앙

4부 카호키아 - 광장

10장 아메리카의 고대 피라미드
운동 참여 | 미시시피의 공적 생활 | 북아메리카의 사라진 농작물들 | 집의 폐쇄

11장 대부흥
이스트세인트루이스의 ‘재활용’ | 카호키아의 민주화 | ‘붕괴’에 대한 대비

12장 의도적인 폐기
‘수도사 둔덕’ 거부 | 부흥과 그 이후의 멸망 | 서비번스

에필로그: 경고 ─ 진보를 위한 사회적 실험
 

저자 소개 

저 : 애널리 뉴위츠 (Annalee Newitz )
 
미국의 저널리스트, SF 소설가, 컨텐츠 기획?편집자. 온라인 매체 《기즈모도(Gizmodo)》의 편집장을 지냈으며 그에 속한 SF?미래주의 전문 매체 《아이오나인(io9)》을 창립했다. 휴고상을 받은 팟캐스트 ‘우리 의견은 옳다(Our Opinions Are Correct)’를 공동 진행하고 있다.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뉴사이언티스트》 등 많은 매체에 기고하고 있다. 논픽션 『분산, 적응, 기억(...
 
역 : 이재황
문자 등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재편집해 번역한 『태조·정종본기』, 『태종본기』(3권)를 펴냈으며,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 한자의 기원에 관한 글 『한자가 그렇게 만들어졌다고?』를 연재하고 『한자의 재발견』, 『가장 빨리 외워지는 한자책』, 『기발한 한자사전』, 『처음...

책 속으로

나는 모든 도시의 죽음은, 우리가 언제나 그 종말을 개별적으로 보기 때문에 미스터리로 느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극적인 소멸의 순간에만 집중하고, 그 오랜 생존의 역사를 잊는다. 사람들이 도시를 유지하는 방법에 관해 수많은 결정을 내리면서 보낸 수백 년의 세월을. 우리가 사람들이 도시인으로서 살았던 특별한 방식을 이해해야만 그들이 왜 자기네 도시를 죽게 만드는 선택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프롤로그: 도시는 어떻게 사라졌나」 중에서

사람들은 어느 곳에서 오래 살면 살수록 그곳이 더욱 자신의 존재 일부가 된다. 이것이 바로 ‘나는 뉴욕 사람’이라거나 ‘나는 대평원 출신’이라는 말을 하게 되는 감정을 고무하게 만드는 초기 단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말은 자아를 특정 지역과 연결시켜 생각한 이후라야 의미가 있다. 호더 같은 고고학자들은 이런 사고방식을 ‘물리적 연루’라고 부른다. 우리의 정체성이 우리 주변의 물리적 대상에 묶이게 되는 것이다. 그 대상은 의례용 무기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준 선물에서부터 우리가 태어난 산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이나 가능하다.
--- 「1장 정주 생활의 충격」 중에서

조이스는 우리가 성별에 대한 현대적 이해를 고대의 사람들에게 투사하기 십상이라고 지적한다. 언제나 남녀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지배하는 것으로 보고자 한다는 것이다. 멜라트가 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대신에 우리는 차탈회윅 사람들이 다른 범주를 사용해 그들의 교류 영역을 나누었을 가능성도 열어놓아야 한다. 젊은이와 노인, 농부와 연장 제작자, 야생의 것과 길들인 것, 인간과 다른 동물 같은 식으로 말이다.
--- 「2장 여신들에 관한 진실」 중에서

호더는 오늘날 고고학자들의 공통된 생각을 되풀이한다. ‘사라진 도시’나 ‘문명 붕괴’ 같은 용어는 이런 경우에 사용하기에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 도시가 변화를 겪었다고 말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사실 차탈회윅이 한 종류의 문화적 변용으로부터 다른 종류로 변화하는 과정에 있지 않은 적은 없었다. 그것이 도시들을 연구하는 데 어려운 부분이다. 도시들은 오랜 시간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다가 갑자기 사라져 아무것도 남지 않는 정적인 존재가 아니다. 도시는 어떤 시기에라도 여러 사회 집단의 복합체다. 그 집단들은 도시 생활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볼 것이다. 그리고 그 사회 집단들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하며, 그들의 세계관을 반영해 도시의 물리적·상징적 구조를 변화시킨다. 더 이상 함께 살기를 바라지 않는 순간까지 말이다.
--- 「3장 역사 속 역사」 중에서

차탈회윅에서는 거의 틀림없이 집이 생활의 중심이었지만, 폼페이에서는 모든 일이 거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은 가게에서, 대중목욕탕에서, 타베르나(매점)에서 생활하고 일하고 계획을 세우고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다. 로마인들은 거리에서 새로운 방식의 공적 생활을 만들어냈다. 법에 의해 문서화되고 사회규범을 통해 강제된 것이다. 온갖 계급과 배경의 사람들이 시멘트와 압축한 흙으로 만든 보도 위에서 어울렸다. 갑부들의 낡은 저택이 해방 노예들의 사업단체 부근까지 퍼져나갔다. 세 대륙에서 온 부유한 관광객들이 타베르나의 젊은 바텐더들과 시시덕거렸다. 돈 많은 안주인들은 장사하는 방에서 남자들을 향해 호객하는 성 노동자들을 슬쩍 곁눈질했다. 폼페이의 공개된 일상적 생활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도시의 거리 풍경 및 그와 연관된 환락들이었다.
--- 「4장 델라본단차 거리의 폭동」 중에서

19~20세기 사람들이 폼페이를 소중하게 여기고 추가 발굴을 위해 거듭 이곳을 찾았지만, 그 문화에는 그들이 잊고 싶은 부분이 있었다. 그들은 남근 조각품이나 음란한 낙서를 발견하자 이를 ‘비밀 수장고’에 넣고 잠가버렸다. 그들의 기독교적 가치관을 벗어던지고 로마인들의 눈으로 이 인공물들을 바라보기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2000년이 돼서야 나폴리 박물관의 ‘비밀 수장고’가 일반 대중에게 공개됐다. 로마의 성 문화는 현대 서방 세계 사람들의 감성에는 너무도 낯설어 그것을 이해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전 시기의 박물관 큐레이터들은 행운을 비는 남근 장식물을 음란물처럼 다루었고, 역사가들은 성 노동자를 연구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 「5장 공개적으로 하는 것」 중에서

그것은 지진으로 시작됐다. 나폴리만 부근의 도시에 살던 사람들은 지진에 익숙했다. 그러나 서기 79년 가을의 그날1 그들이 느낀 충격파에 크게 놀란 사람은 아마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사업체를 운영했고, 수확 작업을 했으며, ‘광장’에서 떠들어댔다. 그러나 이때 베수비오산이 연기를 뿜기 시작했다. 로마 세계에서는 이전에 아무도 화산 분출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나중에 라틴어로 베수비오에 관해 쓴 사람들은 산이 “시커멓고 지독한 구름”으로 뒤덮였으며, “빠르고 요동치는 섬광과 함께 터지고 그 뒤에 여러 가지 모양의 불덩어리를 뿜어냈다. 불덩어리들은 막전과 같았지만 훨씬 컸다”라고 묘사했다. 상상키 어려운 재앙처럼 보였을 것을 쉽게 묘사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연기는 적어도 하루(어쩌면 이틀) 동안 하늘에 가득했고, 그런 뒤에 산은 바위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일부는 폼페이의 보다 부유한 동네 거리에 깔린 돌들만큼 컸다.
--- 「6장 산이 불탄 뒤」 중에서

그 해답은 크메르인들이 어떤 식으로든 시대를 앞서갔거나 고대의 외계인들과 손을 잡았던 때문은 아니라고 고고학자들은 말한다(물론 앙코르가 외계인에 의해 건설됐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이유는 크메르의 도시인들이 우리가 지중해 동안이나 유럽 같은 보다 북쪽 지역에서 보는 것과는 전혀 달라 보이는 열대 지방의 도시 건설 전통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메르의 조상들은 거의 4만 5000년 동안 밀림에서의 건설 및 경작에 필요한 기술을 숙달해 땅과 물을 통제함으로써 제국을 만들었으며, 그 잔해는 종종 자연 속으로 녹아 들어가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 「7장 대체 농업사」 중에서

수리야바르만이 앙코르에서 기반시설 건설에 집중하자 도시 인구 폭발이 가능해졌을 것이다. 저수지들은 쿨렌산맥에서 흘러나오는 강들의 물길을 돌리는 수로 시설에서 그저 가장 과시적인 부분을 대표하는 것일 뿐이었지만, 주달관은 이로 인해 앙코르 사람들이 매년 서너 차례 수확을 하는 혜택을 누릴 수 있다고 보고했다. 수자원 기반시설은 근사한 모습을 하고 있었고, 농경지는 늘어나고 있었으며, 강으로 연결된 크메르 제국의 도시들도 늘어가고 있었다. 도시 성장에 관한 웨스트의 이론이 옳다면 앙코르의 인구는 도시 공간이 확대되는 것보다 더 빠르게 증가했다고 추정할 수밖에 없다.
--- 「8장 물의 제국」 중에서

무오가 그곳을 여행한 직후 프랑스는 캄보디아를 자기네 보호국으로 삼아버렸다. 한 용감한 프랑스 박물학자가 프랑스가 새로 획득한 식민지의 부를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고국에서 잘 먹혔고, 이는 특히 현대 캄보디아인들이 자기네 스스로의 보물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암시를 무오가 준 때문이었다. 실제로 무오는 현대 캄보디아인들이 그런 도시를 만들기에는 너무 미개해서 그것은 고대 이집트인이나 그리스인들이 건설했을 것이라고 암시했다. 캄보디아인들 자신은 그것이 밀림 속에서 썩어 나가게 놔두었으니 앙코르를 연구하는 것은 유럽 과학자들에게 맡겨야 했다. 그것은 백인의 책무의 일환으로서의 고고학이었다.
그것이 이후 수십 년 동안 서방에서 앙코르에 관한 대화를 주도한 정서였다. 이런 식의 생각은 사실 측면에서도 틀렸을 뿐만 아니라, 또한 앙코르가 거대한 수도에서 불교 승려들이 살고 있는 외진 순례 장소로 변한 복잡한 역사를 말살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 도시는 심지어 15세기 초 왕실이 이곳을 떠난 뒤에도 비어 있던 적이 없었음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 「9장 제국주의의 잔재」 중에서

도시 사람들은 여러 가지 사회적 행사들을 위해 이 모든 광장들을 계속해서 개방하고 청소했다. 광장은 도시 계획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 공동체는 특정한 종류의 공공 영역 형성을 기반으로 건설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생각이 땅의 모습을 바꿀 수 있고 또한 땅이 생각을 바꿀 수 있는 곳이었다. 모든 도시는 그 주민들에게 공적 정체성을 체험할 기회를 제공한다. 차탈회윅에는 역사관이 있었고, 폼페이에는 거리가 있었고, 앙코르에는 사원 단지가 있었다. 그러나 카호키아에는 시내 곳곳에 특별히 만들어진 구조물들이 있었다. 전적으로 대중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 「10장 아메리카의 고대 피라미드」 중에서

이 책에서 본 다른 모든 도시들도 그렇지만, 카호키아도 고정돼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유적은 수백 년에 걸쳐 몇 개의 시기를 거치며 역동적으로 변화한 문화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것이 오늘날 많은 고고학자들이 문명은 ‘붕괴’ 국면과 대비할 수 있는 ‘고전기’ 내지 ‘절정기’가 있다는 생각에 의문을 표시하는 이유다. 붕괴 관념은 사라진 도시가 유럽 고고학자들에 의해 기적적으로 ‘발견’됐다는 19세기에서 20세기 초의 식민지 시대 전통과 같은 발상이다. 이런 전통에 따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회가 유럽 문명들이 밟은 길을 그대로 따라 앞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더 커지고, 더 계층적이며, 더 공업화한다는 것이다. 시장경제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회는 ‘미개발’ 사회로 부르고, 확장을 멈춘 도시는 문화가 붕괴한 실패자로 낙인찍는다. 그러나 이런 시각은 증거와 부합하지않는다.
--- 「11장 대부흥」 중에서

카호키아의 공적 생활은 땅에 지울 수 없는 표시를 남겼다. 다른 부족들이 이 도시의 빈 안마당에 거주했고 유럽인 식민지 개척자들은 그 위에 농경지와 교외 마을을 건설했지만, 미시시피 문명의 기념물들은 여전히 버티고 있다. 카호키아 이야기는 현대 미국에서 더욱 생기에 넘치는 듯하다. 사람들은 단지 물질적 부를 찾으려고 이 둔덕 도시로 이주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광장들에서 새로운 종류의 영적·정치적 아이디어를 추구했다. 그러나 카호키아의 모든 사람들이 그 아이디어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에 대해 동의한 것은 아니다. 그 사람들은 미시시피 문화가 살아남도록 하기 위해 그들의 도시가 변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들이 도시를 버리고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 나선 것이 바로 그때였다.
--- 「12장 의도적인 폐기」 중에서

출판사 리뷰

한때 번성했던 도시는 왜 종말을 맞았을까?
위기를 맞은 도시의 시대, 과거에서 길을 찾다


오늘날 우리는 ‘도시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 인구의 상당수는 도시에서 살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인구 과밀화로 인한 장점(인프라와 문화 등)과 단점(환경, 주거, 빈부 문제 등)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하다. 하지만 코로나 상황과 급격한 기후변화 등으로 인류세(Anthropocene)에 대한 경각심이 커진 요즘, 그 집약체인 도시 문제가 새삼 부각되고 있다.
《도시는 왜 사라졌는가》는 그 반면교사로서 과거 크게 번성했으나 종말을 맞은 도시들의 미스테리를 추적하는 탐사 르포르타주다. 차탈회윅, 폼페이, 앙코르, 카호키아는 번성하는 문명의 중심지였다. 그들의 어두운 미래는 결코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었다. 이 도시들은 왜, 어떻게 종말을 맞았을까? 우리는 그 극적인 소멸의 순간에만 집중하고 그 오랜 생존의 역사를 잊곤 한다. 도시를 유지하는 방법에 관해 수많은 결정을 내리면서 보낸 수백 년의 세월을. 사람들이 도시인으로서 살았던 특별한 방식을 이해해야만 그들이 왜 자기네 도시를 죽게 만드는 선택을 했는지 헤아려볼 수 있다.

이러한 접근은 보다 근본적인 질문으로 나아간다. 왜 우리 조상들은 탁 트인 대지의 자유를 버리고 냄새 나며 갑갑한, 인간의 배설물과 끝없는 정치적 드라마로 가득 찬 곳을 선택했을까? 그들은 어떤 직관과 판단에 이끌려 정착하고 농사짓게 됐을까? 어떻게 해서 수많은 사람이 가까이 모여 함께 사는 데 의견을 맞추어 공공의 장소와 자원을 건설했을까?

이 책의 지은이 뉴위츠는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버려진 도시들의 흔적을 수 년간 찾아다니고 최신 고고학 연구를 섭렵했으며 관련 연구자들을 취재했다. 사람들이 왜 떠나갔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그들이 왜 왔는지, 머무르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를 알아야 했다. 또한 그들이 스스로 건설한 고향을 버렸을 때 그들이 무엇을 잃었는지를 확인하려 했다. 그것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도시 소멸의 미스터리를 풀어내려면
어떻게 번성하고 유지되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차탈회윅, 폼페이, 앙코르, 카호키아의 역사는 사뭇 다르다. 이 책에서 그 차이를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포인트다. 그러나 공통점도 있다. 이 도시들은 모두 수백 년에 걸쳐 끊임없는 변화를 거쳤다. 도시의 배치는 시민이 달라지면서 변했다. 가깝고 먼 여러 곳에서 이 도시들로 이주민이 몰려들었다. 맛있는 음식이나 전문화된 일거리에서부터 여흥과 정치권력을 얻을 기회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이 그들을 끌어당겼다.

이 이주민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노동계급이었다. 이들이 도시 주민의 3분의 2를 넘는 경우도 있었다. 지도자들은 둔덕과 저택에서 통치했다. 그러나 진정으로 도시를 유지한 것은 농사를 짓고 가게를 운영하고 도로를 건설한 보통의 노동자들이었다.

도시가 커지면서 상층 계급은 사람들을 계약 하인 같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노예화하거나 그들을 농노로 전환시킴으로써 노동력을 조직화했다. 도시를 만드는 것은 여러모로 노동력을 조직화하는 일이었다. 강제하기도 하고 유인하기도 했다. 보통은 두 가지를 병행했다. 그리고 도시가 정치적으로, 환경적으로 휘청거릴 때는 노동자들이 누구보다도 더 압박을 받았다. 그들은 남아서 뒤처리를 하든지 다른 어느 곳에 가서 새출발을 하든지 선택을 해야 했다.

도시의 인구 감소는, 그 원인과 결과는 다르지만, 모두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인간이 만든 거대한 기반시설을 관리하는 골치 아픈 문제로 인해 촉발된 것이었다. 인간 자체를 관리하는 일은 더욱 큰 문제였다. 도시는 인간 노동력을 실체로서 구현한 것이며, 담장과 저수지와 광장의 파괴에서 그 대중의 흩어짐을 읽어낼 수 있다.

터키 중부 신석기 유적지
차탈회윅


이 책에서 탐구할 첫 번째 도시 차탈회윅은 대략 9000년 전 신석기 시대에 건설됐다. 수십만 년 동안 유목 생활을 하던 인류는 이즈음 농경 생활에 들어갔다. 수수께끼에 싸인 그 유적은 지금 터키 중부 아나톨리아 지역의 낮은 두 구릉 아래 묻혀 있다. 터키 농민들은 구릉지 아래에 실제 도시가 묻혀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정교한 공예품들이 일상적으로 쟁기에 걸려 나왔고, 한 언덕 위에는 성벽 일부가 여전히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곳에 살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무도 자세히 알지 못했다.

대략 천 년 동안 그 인구는 5천 명에서 2만 명 사이로, 당시로서는 대도시였을 것이다. 당시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 대부분은 2백 명쯤이 사는 마을보다 더 큰 정착지를 본 적이 없었다. 차탈회윅은 흙과 이엉으로 건설됐는데,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길게 뻗쳐 있었다. 집 내부로 들어가려면 사다리를 타고 옥상 출입구를 통해야 했다. 주민들이 글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조각상과 그림, 상징적으로 장식된 두개골은 많이 남겼다.

서기전 제6천년기 중반의 어느 시기에 차탈회윅 사람들은 복잡하고 비좁은 보도를 버리고 떠났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지중해 동안 지역에 가뭄이 닥쳤고, 사회 구조상 문제가 생겼으며, 아마도 도시의 구획 자체에도 문제가 있었던 듯하다. 떠난 사람들 대부분은 새로운 형태의 도시를 찾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마을 생활 또는 유목 생활로 돌아갔다. 그들은 단순히 차탈회윅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도시 생활 자체를 거부한 듯하다.

이탈리아 남해안의 휴양 도시
폼페이


다음에 탐구할 도시는 잊힌 곳이 아니다. 그 정확한 위치가 한동안 오리무중이긴 했지만 말이다. 햇살 좋은 지중해 연안의 로마 시대 관광지 폼페이는 서기 79년 베수비오산 분출 뒤 화산재 속에 깊숙이 묻혔다. 목격자들과 역사가들이 이 도시의 끔찍한 파멸을 기록했지만, 18세기 이후에야 체계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했다.

폼페이가 버려진 이유는 아주 간단한 듯하다. 섭씨 250도의 화쇄암 폭풍이 마을을 덮쳐 모두를 쓸어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치는 않다. 폼페이는 과거에도 자연재해를 겪었다. 베수비오 분출 십여 년 전 지진이 발생해 엄청난 피해를 당했지만 딛고 일어섰다. 폼페이에 사는 사람들은 그곳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화산이 분출하던 날 아침에 주민의 절반 이상이 대피했다. 그들은 치명적인 폭발 몇 시간 전 산에서 연기가 나고 진동이 시작될 때 도망쳤다. 이 도시의 종말에 관한 흔한 기록은 로마인들이 미신과 두려움 때문에 파묻힌 도시를 꺼려, 한때 살던 곳에서 금세 발길을 끊었다고 주장한다. 사실과 너무도 동떨어진 이야기다.

고고학자들은 최근, 제국이 난민들을 나폴리 같은 인근 해안 마을들로 이주시키고 그들을 수용하기 위해 시역을 넓히고 도로를 늘렸다는 새로운 증거를 찾아냈다. 많은 귀족들이 폭발로 죽으면서 재산을 남겼기 때문에 정부는 해방 노예들이 주인의 재산을 물려받도록 허락했다. 이 해방 자유민들은 독자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누렸다. 폼페이는 사라졌지만 로마의 도시 생활은 여전히 번성했다.

중세 캄보디아의 거대 도시
앙코르


앙코르는 폼페이가 단 하루에 겪은 재난을 아주 천천히 당했다. 이 도시는 한 번의 화산 분출 대신 백 년 동안 이어진 기후 위기의 연타를 맞았다. 걸린 시간은 달랐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홍수 같은 환경 재난으로 인해 이 도시는 주민들 대다수가 살 수 없는 곳이 됐다. 하지만 최후의 일격은 자연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앙코르의 왕들은 더 이상 일꾼 부대를 동원해 도시의 생명선인 수로망을 재정비할 수 없었다. 아마도 앙코르의 도시 계획에서 가장 유지하기 어려웠던 것은 저수지 시설이 아니라 강제노동에 의존한 엄격한 사회적 위계였던 듯하다.
19세기에 앙리 무오라는 프랑스 탐험가가 ‘사라진 도시’ 앙코르를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이 시기의 다른 유럽인 여행자들이 앙코르와트 사원 구내에 아직도 승려들이 살고 있다고 확인해주었지만, 무오는 인기 있는 여행기를 써서 자신이 처음으로 이 사라진 문명을 ‘우연히’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수백 년 동안 이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고대 이집트 유적에 필적할 만한 멋진 유적들이 가득하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영원히 유지되기 십상인 신화였다. 모험담에 목말랐던 서유럽인들은 형편없이 무너진 도시의 사원과 불거진 나무뿌리로 인해 쪼개진 담장의 돌들 사진을 보고 무오의 말에 홀딱 빠졌다. 애당초 앙코르를 사라진 도시로 자리매김한 것은 미디어의 조작 때문이었다. 모든 증거는 그 반대였다.

미국 미시시피 강변의 대도시
카호키아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또 다른 거대 중세 도시가 확대됐다가 축소됐고, 운명의 역전은 그 풍광에 영원히 새겨졌다. 카호키아는 유럽인들이 오기 전에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미시시피 강변 저지의 작은 마을이 성장해 3만 명이 넘는 팽창하는 대도시가 됐다. 그 영역은 강 양쪽에 걸쳐 있었다. 카호키아인들은 흙으로 쌓은 높다란 피라미드와 다락 통로를 건설했다. 집과 농경지가 펼쳐진 사이사이에 제례 시설들이 있었고, 여기서 축제가 열려 남부 전역의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900년에서 1300년 사이에 카호키아는 위스콘신에서 루이지애나에 이르는 미시시피강 유역의 도시와 마을들을 묶어준 사회 운동이자 영적 운동이었던 ‘미시시피’ 문화의 중심지였다.

이스트세인트루이스를 발굴하던 고고학자들은 수십 개의 집 모형이 일시에 불탄 현장을 발견했다. 벽들은 불길에 휩싸이고 옥수수, 도예품, 아름답게 만들어진 화살촉 등 봉헌물들도 불에 탔다. 아마도 카호키아인들은 주변의 모든 건조물들에도 정해진 수명이 있다고 보고 언제나 전체 도시가 일시에 폐쇄되는 것으로 생각했던 듯하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카호키아는 종말을 염두에 두고 설계됐으며, 둔덕을 엄청난 높이로 쌓아 올릴 때에 이미 그 운명은 봉인됐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