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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우물 안 개구리? 고루한 유학은 잊어라!
근대 유학자 18인, 시대를 고민하다
이 책은 조선 유학의 재인식을 목표로 하는 한국 근대 유학 안내서이다. ‘서양 근대와 전통 유학’이라는 낡은 프레임을 넘어서고자 ‘근대 유학’의 문제적 현장들을 찾았다. 유교 지식인 열여덟 사람의 인상적인 글을 선별하여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고 다시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그에 대한 감상문을 썼다. 문선文選과 평설을 겸한 이 책의 부제가 ‘한국 근대 유학 탐史’인 까닭이다.
근대 유학자 18인, 시대를 고민하다
이 책은 조선 유학의 재인식을 목표로 하는 한국 근대 유학 안내서이다. ‘서양 근대와 전통 유학’이라는 낡은 프레임을 넘어서고자 ‘근대 유학’의 문제적 현장들을 찾았다. 유교 지식인 열여덟 사람의 인상적인 글을 선별하여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고 다시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그에 대한 감상문을 썼다. 문선文選과 평설을 겸한 이 책의 부제가 ‘한국 근대 유학 탐史’인 까닭이다.
목차
지은이의 말
1부 세상
1장 개화 세상의 허실
1. 껍데기 개화는 가라(정일우, 《율헌집》 〈개화〉)
2. 나는 수구, 세상에 저항한다(유영선, 《현곡집》 〈야사문답〉)
2장 사회 변화의 열망
3. 동학농민운동을 향해 묻는다(이관후, 《우재문집》 〈갑오문답〉)
4. 농부는 선비의 미래이다(공학원, 《도봉유집》 〈사민론〉)
3장 문물제도의 신설
5. 대한제국의 비원 (안종덕, 《석하집》 〈창덕궁비원중수미액영련탑본발〉)
6. 개성박물관을 소개한다 (손봉상, 《소산집》 〈박물관기〉)
2부 역사
4장 조선 말기의 기억
1. 조선의 말년사를 성찰한다(양재경, 《희암유고》 〈국조기사〉)
2. 광복의 역사를 만든 하늘의 뜻(김종가, 《입헌집》 〈서동감강목후〉)
5장 중국 혁명의 여파
3. 왕정인가, 공화정인가 (임한주, 《성헌집》 〈속산중문답〉)
4. 신해혁명, 다이쇼 정변, 고종의 밀지(임병찬, 《둔헌유고》 〈관견〉)
6장 한국 독립운동의 현장
5. 서간도와 홍콩, 광복군 임경업(박은식, 〈한교제임장군기〉)
6. 고종독살설과 유림의 독립운동(송주헌, 《삼호재집》 〈무기사변시효섭〉,〈조선유림독립운동사략〉)
3부 학문
7장 한문 서학서의 인식
1. 세계사를 성찰한다 (권상규, 《인암집》 〈서태서신사후〉)
2. 신학을 넓혀 구학을 돕는다(이병헌, 《이병헌전집》 〈제미국진사이가백씨신구학설후〉)
8장 해외 학문의 자각
3. 바다에서 비추어 유학이 밝아진다(송기식, 《해창문집》 〈해창설〉)
4. 일본 유학이란 무엇인가(장화식, 《복암집》 〈퇴도시변의〉)
9장 유학 전통과 현대
5. 유학의 도는 정덕인가 대덕인가(김윤식, 《운양집》 〈돈화론〉)
6. 가짜 신학문을 비판한다(이건방, 《난곡존고》 〈원론 하〉)
참고문헌
도판 출처
찾아보기
1부 세상
1장 개화 세상의 허실
1. 껍데기 개화는 가라(정일우, 《율헌집》 〈개화〉)
2. 나는 수구, 세상에 저항한다(유영선, 《현곡집》 〈야사문답〉)
2장 사회 변화의 열망
3. 동학농민운동을 향해 묻는다(이관후, 《우재문집》 〈갑오문답〉)
4. 농부는 선비의 미래이다(공학원, 《도봉유집》 〈사민론〉)
3장 문물제도의 신설
5. 대한제국의 비원 (안종덕, 《석하집》 〈창덕궁비원중수미액영련탑본발〉)
6. 개성박물관을 소개한다 (손봉상, 《소산집》 〈박물관기〉)
2부 역사
4장 조선 말기의 기억
1. 조선의 말년사를 성찰한다(양재경, 《희암유고》 〈국조기사〉)
2. 광복의 역사를 만든 하늘의 뜻(김종가, 《입헌집》 〈서동감강목후〉)
5장 중국 혁명의 여파
3. 왕정인가, 공화정인가 (임한주, 《성헌집》 〈속산중문답〉)
4. 신해혁명, 다이쇼 정변, 고종의 밀지(임병찬, 《둔헌유고》 〈관견〉)
6장 한국 독립운동의 현장
5. 서간도와 홍콩, 광복군 임경업(박은식, 〈한교제임장군기〉)
6. 고종독살설과 유림의 독립운동(송주헌, 《삼호재집》 〈무기사변시효섭〉,〈조선유림독립운동사략〉)
3부 학문
7장 한문 서학서의 인식
1. 세계사를 성찰한다 (권상규, 《인암집》 〈서태서신사후〉)
2. 신학을 넓혀 구학을 돕는다(이병헌, 《이병헌전집》 〈제미국진사이가백씨신구학설후〉)
8장 해외 학문의 자각
3. 바다에서 비추어 유학이 밝아진다(송기식, 《해창문집》 〈해창설〉)
4. 일본 유학이란 무엇인가(장화식, 《복암집》 〈퇴도시변의〉)
9장 유학 전통과 현대
5. 유학의 도는 정덕인가 대덕인가(김윤식, 《운양집》 〈돈화론〉)
6. 가짜 신학문을 비판한다(이건방, 《난곡존고》 〈원론 하〉)
참고문헌
도판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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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개화란 ‘개물성무開物成務’와 ‘화민성속化民成俗’을 이르는 말이다. 정교와 명령에 확고하게 힘써서 번쇄하고 진부한 정치를 없애 한결같이 편리하고 간단한 일을 따르며 고금을 참작하고 장단을 취사하여 지식의 발달에 힘써서 날로 문명에 나아간다면 이것이 진정 개화를 잘하는 것이다
--- p.18
어떻게 살 것인가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이다. 이적의 세상, 지금의 세상이 되었다고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사람다운 도리가 폐기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자연自然’보다 중요한 것은 천리의 ‘당연當然’이다
--- p.32
비타협과 저항으로서의 ‘수구’는 근대에 출현하였다. 일본에서는 1877년 서남전쟁을 일으켜 메이지 정부에 저항한 구식 사무라이 집단을 ‘수구’라 일컬었고, 조선에서는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정부의 ‘개화’에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선비를 ‘수구’라 일컬었다. …… ‘수구’는 달라진 세상에 대한 다양한 저항 방식의 하나였다
--- p.33
안으로 이익을 독점하려는 마음을 주로 해서 다시는 동포를 사랑할 줄 몰라 위세를 끼고는 그물질해 빼앗아가 못하는 일이 없습니다. 미약한 사람이 손발을 놀릴 곳도 없고 호소할 데도 없어 속에 품은 원망이 오랜 세월 축적되다가 한 사람이 크게 부르짖어 천 리에서 호응하자 만사萬死의 계책을 내서 마음에 가득했던 원통함을 풀었습니다. 그래서 기약하지 않아도 모이고 도모하지 않아도 함께해서 난이 이렇게 극도에 이른 것입니다. 이로써 보건대 지금 세상의 난리가 일어난 까닭이 부귀한 사람 때문이 아닙니까?
--- p.38
이 세상에는 세 가지 백성이 있다. 하나는 항민恒民, 다른 하나는 원민怨民,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호민豪民. 사람들은 대체로 국가의 지배 질서에 순응하며 항민처럼 살아가지만 가혹한 수탈이 계속되면 원민처럼 국가를 원망하게 되고 나라에 변고라도 발생하면 호민처럼 국가에 저항하기도 한다. 호민이 저항의 깃발을 올리면 원민은 언제든지 함께 결집하게 되어 있고 항민도 살아갈 길을 찾느라 합류하지 않을 수 없다
--- p.41
형벌과 명예는 국정의 대도大盜이니 형법으로 사람을 제어함이 안 될 것은 아니지만 이것을 준칙으로 삼으면 운 사납게 걸려드는 사람이 더욱 많아진다. 명예로 사람을 뽑는 것이 안 될 것은 아니지만 항상 이렇게 하면 총애를 구함이 더욱 심해진다
--- p.47
창덕궁 후원은 대한제국기 고종 황제 때에 이르러 외국인이 관광하는 장소가 되었다. 경운궁에 거처하는 고종은 주한 각국 외교 공관 관원 및 그가 보증하는 외국인에게 경복궁과 창덕궁의 관람을 허가했다. 각국 외교 공관이 공문을 보내면 대한제국 예식원에서 빙표를 발행했는데, 관람객이 이를 지참해 궁궐 파수 순검에게 주면 관람이 가능했다. 1903년에는 창덕궁 후원을 대대적으로 보수하여 새롭게 정비하고 궁내부 관제 안에 이 구역을 관리하는 비원秘苑을 신설했다
--- p.63
지금 세계는 바깥이 없고 만국이 승부를 겨루어 서로 부강·문명에 종사함에 반드시 박물과 도서로 안을 채우고 전차?전함?총포로 바깥에 위엄을 보이는데 전차?전함?총포는 어느 때이든 만들 수 있으나 고물古物?진보珍寶는 연구와 수집에 세월을 바치지 않으면 모을 수 없다. 하물며 한 나라에 없어서 만국에서 수집하여 갖고 오는 것이겠는가? 이는 비단 보물의 기특함을 중시해서일 뿐만 아니라 그 풍속, 정치, 기용器用, 예의를 이로부터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67
이제 선왕의 전장을 뜯어고치고 성현의 말씀을 저버리고 전통 있는 복식을 망가뜨리고는 ‘자유’라 ‘독립’이라 이름했으나 실상은 야만을 써서 문명을 변개시키고 인간을 강등시켜 금수로 만든 것이었다. 정령政令 하나 내는 일도 거조擧措 하나 내는 일도 반드시 왜적에게 자문해야 했으니 말은 ‘대경장大更張’이라 하고 ‘대개화大開化’라 했으나 국가를 멸망시키는 구실이었다
--- p.84
오호라. ‘독립’이 변하여 ‘개화’가 되었고 ‘개화’가 변하여 ‘보호’가 되었고 ‘보호’가 변하여 ‘합병’이 되었다. 밖으로 외국 공관과 담판하지도 못했고 안으로 최후의 결전도 치러보지 못했고 종이 한 조각에 삼천리 강토와 오백 년 종사를 하루아침에 남에게 주었으니 천하 만고에 듣지 못한 일이었다
--- p.85
역사에는 다양한 광복이 있다. 인현왕후가 갑술환국으로 복위한 사건을 광복이라 했다. 영조가 임오화변 이후 친정을 회복한 사건도 광복이라 했다. 본래는 후한 광무제가 왕망의 신나라를 멸하고 전한을 계승한 사건이 광복이었다. 비슷하게는 조선 선조가 임진왜란으로 나라를 잃을 뻔했으나 다시 나라를 회복한 사건도 광복이었다. 20세기 들어와 광복은 동아시아 민족운동과 결합되어 광복회, 월남광복회, 대한광복회가 등장하였다
--- p.92
민국의 경우 민권民權과 정당政黨이 공의公議로 정치를 행하오. 민당民黨이 원하지 않는 것을 정부가 감히 함부로 하지 못하니 백성과 더불어 좋아하고 싫어함을 함께한다는 뜻에서는 합당한 듯하오. 그러나 민당이 반드시 모두 군자는 아니고 정부가 반드시 모두 소인은 아닌데 민당의 말을 어찌 다 믿고 정부의 말을 어찌 다 버리겠소? …… 또 정부라고 하는 것이 봉록이 무거운 높은 벼슬아치라서 민당에 비할 바가 아니니 반드시 백성의 말을 기다려 정치를 행한다면 이 정부를 어디에 쓰겠소?
--- p.105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당시 국내에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융희제가 생존해 있었다. 황제가 있음에도 해외에서 공화국을 출범시켰다는 것. 1920년 신년 축하회에서 안창호는 말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황제가 있다. 과거의 대한에 황제는 한 사람이지만 지금은 2천만 국민이 모두 황제이다.”
--- p.111
조긍섭曺兢燮(1873~1933)이 지적했듯이 공화정의 정치 참여층의 기본적인 덕성이 마련되지 못한 상황에서라면 공자 후보, 맹자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은 적고 대통령 자리를 둘러싼 치열한 대립 속에 정치적 혼란이 가속화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병헌李炳憲(1870~1940)은 공화제 하의 중국인이 격심한 당쟁을 벌이며 국가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으니 이러한 상황에서 공화를 말하고 자유를 말하는 것은 성인이 아니면 바보라고 비평하였다
--- p.113
조선의 유림은 3?1 독립 선언에 민족 대표 33인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시기 다양한 항일운동에 대표로 활동하고 있었다. 3월 5일 고종의 반우제를 마치고 청량리를 지나는 순종의 어가를 기다린 송주헌은 순종의 복위를 청하는 상소를 기습적으로 전했다. 유준근을 소수로 하는 유림 대표 15인이 이 상소에 서명했다. 같은 날 어대선도 군중 앞에서 유림 대표 명의의 연설을 시도했다. 이날 청량리 어가 앞은 상소 읽는 소리, 호곡하는 소리, 만세 외치는 소리로 천지가 진동했다
--- p.152
일본은 영친왕과 마사코의 결혼 날짜를 1919년 1월 25일로 정하고 다름 아닌 프랑스 파리에 신혼여행을 보내 강화회의를 열고 있는 세계열강의 눈앞에서 한일 왕가의 돈독한 관계를 선전하고자 했다. 1월 21일 고종의 급사로 일본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 p.155
조선의 지하신문 《조선독립신문》 3월 2일 자 기사는 이완용?윤덕영 등 일곱 역적이 파리강화회의에 조선이 합방을 자원했다는 내용의 문서를 보내고자 스스로 도장을 찍고 고종에게도 도장을 찍을 것을 강박했으나 고종은 이를 윤허하지 않아 그날 밤 독살되었다고 적었다
--- p.155
본래 D-day는 고종의 국장이 예정된 3월 3일이었다. 경향 곳곳에서 동시에 일어나되 서울의 경우 독립을 선언하고 시위를 하다가 일본이 잔학하게 탄압한다면 고종의 혼전魂殿이 있는 덕수궁 궁궐에 들어가 대한문에 태극기를 세우고 만세를 부르며 최후의 결사항쟁을 벌일 계획이었다. 고종을 애도하는 시간과 공간에 최적화된 형태의 투쟁이었다. 박은식이 지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이러한 사실을 전하면서 〈태황이 독립운동을 위해 희생했다〉(하편 제4장 제목)라고 기록했다
--- p.156
1898년 대한제국 학부는 논술 시험 11문제를 만들어 평안남도 공립 소학교에 훈령을 발송했다. 학생들이 《태서신사남요泰西新史攬要》를 읽고 작성한 논술 답안을 학교별로 3개월 이내에 학부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 첫 번째 문제. ‘법국法國이 무슨 까닭에 대란大亂이며 나파륜 제1세는 어떠한 영웅인가?’ 두 번째 문제. ‘영국은 어떻게 해서 흥성하여 세계 일등국이 되었으며 정치의 잘잘못이 우리나라에 비하면 어떠한가?’
--- p.165
신학을 넓혀 구학을 돕는다. 길버트 리드의 이 글은 요지가 간명했다. 중국은 진시황과 한무제 때문에 고래의 ‘실학’이 사라졌는데 태서는 중국에서 실종된 ‘실학’, 곧 격치기예학格致技藝學이 발전했으니 이를 만국 공통의 보편 학문으로 수용하자는 것. 서학이 곧 ‘실학’이라는 것이다
--- p.179
나라를 잠그고 살면 바다는 담장이다. 나라를 열어놓으면 바다는 창이다. 바다가 담장일 때에는 글 읽는 선비가 자기가 본 것을 높이고 자기가 들은 것을 익힌다. 이 때문에 자기 생각 이외에는 비출 수 있는 다른 생각이 없다. 그런데도 다른 학설이 침입할까 근심해서 외부의 배척을 대의로 삼는다. 바다가 창일 때에는 글 읽는 선비가 고금을 절충하고 동서를 종합한다. 이 때문에 자기 단점을 버리고 남의 장점을 따라 이를 기꺼이 취해 선을 행한다. 그러고도 자기의 학설이 치우칠까 근심해서 겸허한 수용을 주의로 삼는다
--- p.182
신학新學으로 저명해 유지有志로 이름난 사람들의 말을 보면 ‘우리나라 훈몽서訓蒙書 중에 맹자의 말을 인용해 교훈으로 삼는데, 맹자는 지나支那 사람이라 이것으로 아이를 가르치면 아이의 감각이 지나 사람의 숭배에 있게 되어 노예 성질을 기르고 조국 정신을 잃을 것이다’라고 한다. 대저 도는 천하에 있으니 동서로 나뉘지 않고 중외에 간격을 두지 않는다. 그 사람을 존경하는 것은 그 도를 존경하는 것이다. 도가 서양에 있으면 나는 참으로 이를 숭배할 것이다. 하물며 중국은 신성한 구역이고 우리와 가깝지 않은가
--- p.212
조선 말기 이상수李象秀(1820~1882)도 성현을 함부로 인용하여 사욕을 수식하는 조선의 세태를 비판하였다. 여색을 좋아하는 자가 《대학》에 있는 ‘여호호색如好好色’을 핑계 대고 화복에 빠져 있는 자가 소옹이 ‘술수를 좋아했다好術數’를 구실 삼는 풍조가 만연한 상황에서 유학의 본래적인 아어雅語가 비루한 속어로 타락하는 유교의 세속화 현상을 비판하였다
--- p.218
가짜 신학의 문제점은 학문의 중심을 서양에 두고 이를 보편으로 맹신하며 중국과 조선의 학문에 대해서는 이를 차별하는 학문적 식민주의였다. 이를테면 맹자는 차이나China 사람이니까 학생 교육에 《맹자》를 사용하면 노예 성질을 기르고 조국 정신을 잃는다는 가짜 신학의 주장이 잘못인 이유는 원론적으로 보더라도 천하의 도는 동서양의 차이가 없기 때문에 《맹자》 역시 보편 학문에 도달하는 고전이 될 수 있음을 부정할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 p.18
어떻게 살 것인가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이다. 이적의 세상, 지금의 세상이 되었다고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사람다운 도리가 폐기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자연自然’보다 중요한 것은 천리의 ‘당연當然’이다
--- p.32
비타협과 저항으로서의 ‘수구’는 근대에 출현하였다. 일본에서는 1877년 서남전쟁을 일으켜 메이지 정부에 저항한 구식 사무라이 집단을 ‘수구’라 일컬었고, 조선에서는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정부의 ‘개화’에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선비를 ‘수구’라 일컬었다. …… ‘수구’는 달라진 세상에 대한 다양한 저항 방식의 하나였다
--- p.33
안으로 이익을 독점하려는 마음을 주로 해서 다시는 동포를 사랑할 줄 몰라 위세를 끼고는 그물질해 빼앗아가 못하는 일이 없습니다. 미약한 사람이 손발을 놀릴 곳도 없고 호소할 데도 없어 속에 품은 원망이 오랜 세월 축적되다가 한 사람이 크게 부르짖어 천 리에서 호응하자 만사萬死의 계책을 내서 마음에 가득했던 원통함을 풀었습니다. 그래서 기약하지 않아도 모이고 도모하지 않아도 함께해서 난이 이렇게 극도에 이른 것입니다. 이로써 보건대 지금 세상의 난리가 일어난 까닭이 부귀한 사람 때문이 아닙니까?
--- p.38
이 세상에는 세 가지 백성이 있다. 하나는 항민恒民, 다른 하나는 원민怨民,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호민豪民. 사람들은 대체로 국가의 지배 질서에 순응하며 항민처럼 살아가지만 가혹한 수탈이 계속되면 원민처럼 국가를 원망하게 되고 나라에 변고라도 발생하면 호민처럼 국가에 저항하기도 한다. 호민이 저항의 깃발을 올리면 원민은 언제든지 함께 결집하게 되어 있고 항민도 살아갈 길을 찾느라 합류하지 않을 수 없다
--- p.41
형벌과 명예는 국정의 대도大盜이니 형법으로 사람을 제어함이 안 될 것은 아니지만 이것을 준칙으로 삼으면 운 사납게 걸려드는 사람이 더욱 많아진다. 명예로 사람을 뽑는 것이 안 될 것은 아니지만 항상 이렇게 하면 총애를 구함이 더욱 심해진다
--- p.47
창덕궁 후원은 대한제국기 고종 황제 때에 이르러 외국인이 관광하는 장소가 되었다. 경운궁에 거처하는 고종은 주한 각국 외교 공관 관원 및 그가 보증하는 외국인에게 경복궁과 창덕궁의 관람을 허가했다. 각국 외교 공관이 공문을 보내면 대한제국 예식원에서 빙표를 발행했는데, 관람객이 이를 지참해 궁궐 파수 순검에게 주면 관람이 가능했다. 1903년에는 창덕궁 후원을 대대적으로 보수하여 새롭게 정비하고 궁내부 관제 안에 이 구역을 관리하는 비원秘苑을 신설했다
--- p.63
지금 세계는 바깥이 없고 만국이 승부를 겨루어 서로 부강·문명에 종사함에 반드시 박물과 도서로 안을 채우고 전차?전함?총포로 바깥에 위엄을 보이는데 전차?전함?총포는 어느 때이든 만들 수 있으나 고물古物?진보珍寶는 연구와 수집에 세월을 바치지 않으면 모을 수 없다. 하물며 한 나라에 없어서 만국에서 수집하여 갖고 오는 것이겠는가? 이는 비단 보물의 기특함을 중시해서일 뿐만 아니라 그 풍속, 정치, 기용器用, 예의를 이로부터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67
이제 선왕의 전장을 뜯어고치고 성현의 말씀을 저버리고 전통 있는 복식을 망가뜨리고는 ‘자유’라 ‘독립’이라 이름했으나 실상은 야만을 써서 문명을 변개시키고 인간을 강등시켜 금수로 만든 것이었다. 정령政令 하나 내는 일도 거조擧措 하나 내는 일도 반드시 왜적에게 자문해야 했으니 말은 ‘대경장大更張’이라 하고 ‘대개화大開化’라 했으나 국가를 멸망시키는 구실이었다
--- p.84
오호라. ‘독립’이 변하여 ‘개화’가 되었고 ‘개화’가 변하여 ‘보호’가 되었고 ‘보호’가 변하여 ‘합병’이 되었다. 밖으로 외국 공관과 담판하지도 못했고 안으로 최후의 결전도 치러보지 못했고 종이 한 조각에 삼천리 강토와 오백 년 종사를 하루아침에 남에게 주었으니 천하 만고에 듣지 못한 일이었다
--- p.85
역사에는 다양한 광복이 있다. 인현왕후가 갑술환국으로 복위한 사건을 광복이라 했다. 영조가 임오화변 이후 친정을 회복한 사건도 광복이라 했다. 본래는 후한 광무제가 왕망의 신나라를 멸하고 전한을 계승한 사건이 광복이었다. 비슷하게는 조선 선조가 임진왜란으로 나라를 잃을 뻔했으나 다시 나라를 회복한 사건도 광복이었다. 20세기 들어와 광복은 동아시아 민족운동과 결합되어 광복회, 월남광복회, 대한광복회가 등장하였다
--- p.92
민국의 경우 민권民權과 정당政黨이 공의公議로 정치를 행하오. 민당民黨이 원하지 않는 것을 정부가 감히 함부로 하지 못하니 백성과 더불어 좋아하고 싫어함을 함께한다는 뜻에서는 합당한 듯하오. 그러나 민당이 반드시 모두 군자는 아니고 정부가 반드시 모두 소인은 아닌데 민당의 말을 어찌 다 믿고 정부의 말을 어찌 다 버리겠소? …… 또 정부라고 하는 것이 봉록이 무거운 높은 벼슬아치라서 민당에 비할 바가 아니니 반드시 백성의 말을 기다려 정치를 행한다면 이 정부를 어디에 쓰겠소?
--- p.105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당시 국내에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융희제가 생존해 있었다. 황제가 있음에도 해외에서 공화국을 출범시켰다는 것. 1920년 신년 축하회에서 안창호는 말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황제가 있다. 과거의 대한에 황제는 한 사람이지만 지금은 2천만 국민이 모두 황제이다.”
--- p.111
조긍섭曺兢燮(1873~1933)이 지적했듯이 공화정의 정치 참여층의 기본적인 덕성이 마련되지 못한 상황에서라면 공자 후보, 맹자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은 적고 대통령 자리를 둘러싼 치열한 대립 속에 정치적 혼란이 가속화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병헌李炳憲(1870~1940)은 공화제 하의 중국인이 격심한 당쟁을 벌이며 국가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으니 이러한 상황에서 공화를 말하고 자유를 말하는 것은 성인이 아니면 바보라고 비평하였다
--- p.113
조선의 유림은 3?1 독립 선언에 민족 대표 33인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시기 다양한 항일운동에 대표로 활동하고 있었다. 3월 5일 고종의 반우제를 마치고 청량리를 지나는 순종의 어가를 기다린 송주헌은 순종의 복위를 청하는 상소를 기습적으로 전했다. 유준근을 소수로 하는 유림 대표 15인이 이 상소에 서명했다. 같은 날 어대선도 군중 앞에서 유림 대표 명의의 연설을 시도했다. 이날 청량리 어가 앞은 상소 읽는 소리, 호곡하는 소리, 만세 외치는 소리로 천지가 진동했다
--- p.152
일본은 영친왕과 마사코의 결혼 날짜를 1919년 1월 25일로 정하고 다름 아닌 프랑스 파리에 신혼여행을 보내 강화회의를 열고 있는 세계열강의 눈앞에서 한일 왕가의 돈독한 관계를 선전하고자 했다. 1월 21일 고종의 급사로 일본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 p.155
조선의 지하신문 《조선독립신문》 3월 2일 자 기사는 이완용?윤덕영 등 일곱 역적이 파리강화회의에 조선이 합방을 자원했다는 내용의 문서를 보내고자 스스로 도장을 찍고 고종에게도 도장을 찍을 것을 강박했으나 고종은 이를 윤허하지 않아 그날 밤 독살되었다고 적었다
--- p.155
본래 D-day는 고종의 국장이 예정된 3월 3일이었다. 경향 곳곳에서 동시에 일어나되 서울의 경우 독립을 선언하고 시위를 하다가 일본이 잔학하게 탄압한다면 고종의 혼전魂殿이 있는 덕수궁 궁궐에 들어가 대한문에 태극기를 세우고 만세를 부르며 최후의 결사항쟁을 벌일 계획이었다. 고종을 애도하는 시간과 공간에 최적화된 형태의 투쟁이었다. 박은식이 지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이러한 사실을 전하면서 〈태황이 독립운동을 위해 희생했다〉(하편 제4장 제목)라고 기록했다
--- p.156
1898년 대한제국 학부는 논술 시험 11문제를 만들어 평안남도 공립 소학교에 훈령을 발송했다. 학생들이 《태서신사남요泰西新史攬要》를 읽고 작성한 논술 답안을 학교별로 3개월 이내에 학부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 첫 번째 문제. ‘법국法國이 무슨 까닭에 대란大亂이며 나파륜 제1세는 어떠한 영웅인가?’ 두 번째 문제. ‘영국은 어떻게 해서 흥성하여 세계 일등국이 되었으며 정치의 잘잘못이 우리나라에 비하면 어떠한가?’
--- p.165
신학을 넓혀 구학을 돕는다. 길버트 리드의 이 글은 요지가 간명했다. 중국은 진시황과 한무제 때문에 고래의 ‘실학’이 사라졌는데 태서는 중국에서 실종된 ‘실학’, 곧 격치기예학格致技藝學이 발전했으니 이를 만국 공통의 보편 학문으로 수용하자는 것. 서학이 곧 ‘실학’이라는 것이다
--- p.179
나라를 잠그고 살면 바다는 담장이다. 나라를 열어놓으면 바다는 창이다. 바다가 담장일 때에는 글 읽는 선비가 자기가 본 것을 높이고 자기가 들은 것을 익힌다. 이 때문에 자기 생각 이외에는 비출 수 있는 다른 생각이 없다. 그런데도 다른 학설이 침입할까 근심해서 외부의 배척을 대의로 삼는다. 바다가 창일 때에는 글 읽는 선비가 고금을 절충하고 동서를 종합한다. 이 때문에 자기 단점을 버리고 남의 장점을 따라 이를 기꺼이 취해 선을 행한다. 그러고도 자기의 학설이 치우칠까 근심해서 겸허한 수용을 주의로 삼는다
--- p.182
신학新學으로 저명해 유지有志로 이름난 사람들의 말을 보면 ‘우리나라 훈몽서訓蒙書 중에 맹자의 말을 인용해 교훈으로 삼는데, 맹자는 지나支那 사람이라 이것으로 아이를 가르치면 아이의 감각이 지나 사람의 숭배에 있게 되어 노예 성질을 기르고 조국 정신을 잃을 것이다’라고 한다. 대저 도는 천하에 있으니 동서로 나뉘지 않고 중외에 간격을 두지 않는다. 그 사람을 존경하는 것은 그 도를 존경하는 것이다. 도가 서양에 있으면 나는 참으로 이를 숭배할 것이다. 하물며 중국은 신성한 구역이고 우리와 가깝지 않은가
--- p.212
조선 말기 이상수李象秀(1820~1882)도 성현을 함부로 인용하여 사욕을 수식하는 조선의 세태를 비판하였다. 여색을 좋아하는 자가 《대학》에 있는 ‘여호호색如好好色’을 핑계 대고 화복에 빠져 있는 자가 소옹이 ‘술수를 좋아했다好術數’를 구실 삼는 풍조가 만연한 상황에서 유학의 본래적인 아어雅語가 비루한 속어로 타락하는 유교의 세속화 현상을 비판하였다
--- p.218
가짜 신학의 문제점은 학문의 중심을 서양에 두고 이를 보편으로 맹신하며 중국과 조선의 학문에 대해서는 이를 차별하는 학문적 식민주의였다. 이를테면 맹자는 차이나China 사람이니까 학생 교육에 《맹자》를 사용하면 노예 성질을 기르고 조국 정신을 잃는다는 가짜 신학의 주장이 잘못인 이유는 원론적으로 보더라도 천하의 도는 동서양의 차이가 없기 때문에 《맹자》 역시 보편 학문에 도달하는 고전이 될 수 있음을 부정할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 p.220
출판사 리뷰
꼼꼼히 짚어본 조선 근대 유학의 육성
현재 한국 사회에 친숙한 조선 유학의 이미지는 근대의 문턱을 넘지 못한 전근대의 정지된 시간이다. 뿐인가.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한 채 조선 망국의 한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알기 어렵지 않다. 개화냐 수구냐, 신학문이냐 구학문이냐, 서양 근대냐 전통 유학이냐 하는 이분법적 인식 틀이 오랜 기간 한국 사회에서 맹위를 떨쳤던 탓이다.
실상은 다르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누구보다 치열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시대를 고민하고, 충심 어린 제언을 했다. 진정한 문명개화란 무엇인지, 서구 열강은 어떻게 부강하게 되었는지, 공화정의 의미 등 다양한 주제를 논했다. 그리하여 독자들이 조선 유학의 실상을 만날 수 있도록 돕는다. 1906년 7월 6일 자 『황성신문』의 논설 〈껍데기 개화의 커다란 폐해〉와 신동엽 시인의 유명한 시 〈껍데기는 가라〉에서 빌려온 책 제목은 지은이의 의도를 함축하고 있다.
진정한 개화, 부국의 길을 궁리하다
책에 실린 글은 크게 세상, 역사, 학문 3부로 갈래지어 있다. 제1부 세상은 개화의 대도大道를 모르면서 엉터리 개화를 만들고 있는 세태의 비판과 제언을 담은 글 6편을 실었다. 근대 한국에서 지식인의 자기반성은 언제부터 시작하는가, 근대 한국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관념은 언제부터 시작하는가, 이른바 ‘수구守舊’란 어떤 의미이고 진정한 개화는 무엇인가 등 에 대한 질문을 생각하게 만드는 글들이다. 그러기에 “갑오개혁 이후 한국 사회는 개화! 개화! 하며 제도를 개혁하고 학교를 설립하며 개화에 노력했지만 어째서 나라가 쇠망에 빠졌는가? 대충 보고 들은 설익은 지식으로 개화를 치장하고 개화를 행세한 구이口耳의 개화, 그 껍데기 개화 때문이었다”(23쪽)이란 자탄이 그런 예이다. 그런가 하면 유교 국가 조선의 멸망을 두고 “양반은 넘쳐나도 선비는 드물었다. …… 그것은 직분을 다하지 않은 사의 책임을 묻는 사건이었다. …… 이제 사농공상은 가고 상공농사가 왔다”(55쪽)는 자성을 엿볼 수 있다.
역사를 돌아보며 구국의 길을 모색하다
제2부 역사는 근대 유학자들의 역사 인식을 보여주는 글 6편을 묶었다. 1911년 호남 유학자 양재경이 쓴 『조선말년사』의 한 대목은 “화란은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니 서리를 밟게 되어 단단한 얼음이 생기듯 반드시 그 시초가 있는 법”이라면 “우리나라 임금과 신하가 만약 임오년에 잘못을 뉘우쳤으면 갑신년(1884) 난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갑신년에 잘못을 뉘우쳤으면 갑오년(1894)과 을미년(1895)의 변란, 을사년(1905)과 병오년(1906)의 화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경술년(1910)의 망국도 없었을 것이다”(81쪽)이라 짚는다. 뿐만 아니라 지은이의 평설을 통해 일본의 다이쇼정변 직후인 1913년 고종의 밀지에 따라 의병을 모의했다든가, 일본이 영친왕 부부를 강화회의가 열리는 프랑스 파리에 신혼여행을 보내 한일 왕가의 친분을 과시하려다 고종의 급사로 무산되었던 사실 등 역사적 사실이 소개된다.
유학 전통과 서학의 조화를 추구하다
제3부 학문은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으려는 유학자들의 안간힘을 담은 글 6편이 실렸다. 19세기 서양사를 다룬 『태서신사』를 읽고 “이용후생은 서양을 배우고 교화는 동화東華를 주로 한 뒤에야 부강을 꾀할 수 있고 영속을 말할 수 있겠다”한 권상규의 ‘독후감’이나 안동 유학자 송기식이 루소의 민약설, 다윈의 진화설, 프랭클린의 전기설은 물론 마르크스의 과학설을 언급했던 사실은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글들이다. 근대 한국 유학자의 세계사 비평, 근대 한국에서 세계 학문의 총론을 쓰고자 했던 지적 기획, 근대 한국 유학자의 세계 학문 총론 쓰기 구상 등 학문에 관한 유학자들의 진지한 모색을 만날 수 있다. “적합한지 적합하지 않은지를 묻지도 않고 동양을 배척하고 서구를 숭상한다면 근본을 등지고 성인을 속이는 일이니 다시 조국에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214쪽)라는 이건방의 질문은 지금도 여전한 울림을 지녔다.
지은이 노관범 교수(서울대 규장각)는 전작 『고전통변』에서 18~20세기 한국 한문 소품을 대상으로 고전 읽기와 역사 평설 작업을 수행한 바 있다. 이 책은 전작의 방법을 계승하면서도 한국 근대 유학에 집중했다는 특징이 있다. 지은이는 이 책이 조선 유학이 근대의 문턱에서 좌절된 과거가 아니라 근대의 문제와 씨름하는 현재로서 새롭게 인식되는 작은 밀알이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현재 한국 사회에 친숙한 조선 유학의 이미지는 근대의 문턱을 넘지 못한 전근대의 정지된 시간이다. 뿐인가.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한 채 조선 망국의 한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알기 어렵지 않다. 개화냐 수구냐, 신학문이냐 구학문이냐, 서양 근대냐 전통 유학이냐 하는 이분법적 인식 틀이 오랜 기간 한국 사회에서 맹위를 떨쳤던 탓이다.
실상은 다르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누구보다 치열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시대를 고민하고, 충심 어린 제언을 했다. 진정한 문명개화란 무엇인지, 서구 열강은 어떻게 부강하게 되었는지, 공화정의 의미 등 다양한 주제를 논했다. 그리하여 독자들이 조선 유학의 실상을 만날 수 있도록 돕는다. 1906년 7월 6일 자 『황성신문』의 논설 〈껍데기 개화의 커다란 폐해〉와 신동엽 시인의 유명한 시 〈껍데기는 가라〉에서 빌려온 책 제목은 지은이의 의도를 함축하고 있다.
진정한 개화, 부국의 길을 궁리하다
책에 실린 글은 크게 세상, 역사, 학문 3부로 갈래지어 있다. 제1부 세상은 개화의 대도大道를 모르면서 엉터리 개화를 만들고 있는 세태의 비판과 제언을 담은 글 6편을 실었다. 근대 한국에서 지식인의 자기반성은 언제부터 시작하는가, 근대 한국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관념은 언제부터 시작하는가, 이른바 ‘수구守舊’란 어떤 의미이고 진정한 개화는 무엇인가 등 에 대한 질문을 생각하게 만드는 글들이다. 그러기에 “갑오개혁 이후 한국 사회는 개화! 개화! 하며 제도를 개혁하고 학교를 설립하며 개화에 노력했지만 어째서 나라가 쇠망에 빠졌는가? 대충 보고 들은 설익은 지식으로 개화를 치장하고 개화를 행세한 구이口耳의 개화, 그 껍데기 개화 때문이었다”(23쪽)이란 자탄이 그런 예이다. 그런가 하면 유교 국가 조선의 멸망을 두고 “양반은 넘쳐나도 선비는 드물었다. …… 그것은 직분을 다하지 않은 사의 책임을 묻는 사건이었다. …… 이제 사농공상은 가고 상공농사가 왔다”(55쪽)는 자성을 엿볼 수 있다.
역사를 돌아보며 구국의 길을 모색하다
제2부 역사는 근대 유학자들의 역사 인식을 보여주는 글 6편을 묶었다. 1911년 호남 유학자 양재경이 쓴 『조선말년사』의 한 대목은 “화란은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니 서리를 밟게 되어 단단한 얼음이 생기듯 반드시 그 시초가 있는 법”이라면 “우리나라 임금과 신하가 만약 임오년에 잘못을 뉘우쳤으면 갑신년(1884) 난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갑신년에 잘못을 뉘우쳤으면 갑오년(1894)과 을미년(1895)의 변란, 을사년(1905)과 병오년(1906)의 화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경술년(1910)의 망국도 없었을 것이다”(81쪽)이라 짚는다. 뿐만 아니라 지은이의 평설을 통해 일본의 다이쇼정변 직후인 1913년 고종의 밀지에 따라 의병을 모의했다든가, 일본이 영친왕 부부를 강화회의가 열리는 프랑스 파리에 신혼여행을 보내 한일 왕가의 친분을 과시하려다 고종의 급사로 무산되었던 사실 등 역사적 사실이 소개된다.
유학 전통과 서학의 조화를 추구하다
제3부 학문은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으려는 유학자들의 안간힘을 담은 글 6편이 실렸다. 19세기 서양사를 다룬 『태서신사』를 읽고 “이용후생은 서양을 배우고 교화는 동화東華를 주로 한 뒤에야 부강을 꾀할 수 있고 영속을 말할 수 있겠다”한 권상규의 ‘독후감’이나 안동 유학자 송기식이 루소의 민약설, 다윈의 진화설, 프랭클린의 전기설은 물론 마르크스의 과학설을 언급했던 사실은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글들이다. 근대 한국 유학자의 세계사 비평, 근대 한국에서 세계 학문의 총론을 쓰고자 했던 지적 기획, 근대 한국 유학자의 세계 학문 총론 쓰기 구상 등 학문에 관한 유학자들의 진지한 모색을 만날 수 있다. “적합한지 적합하지 않은지를 묻지도 않고 동양을 배척하고 서구를 숭상한다면 근본을 등지고 성인을 속이는 일이니 다시 조국에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214쪽)라는 이건방의 질문은 지금도 여전한 울림을 지녔다.
지은이 노관범 교수(서울대 규장각)는 전작 『고전통변』에서 18~20세기 한국 한문 소품을 대상으로 고전 읽기와 역사 평설 작업을 수행한 바 있다. 이 책은 전작의 방법을 계승하면서도 한국 근대 유학에 집중했다는 특징이 있다. 지은이는 이 책이 조선 유학이 근대의 문턱에서 좌절된 과거가 아니라 근대의 문제와 씨름하는 현재로서 새롭게 인식되는 작은 밀알이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36.한국근대사 연구 (독서>책소개) > 1.한국근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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