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쟁
유럽 종교 전쟁의 일부
전쟁의 엄청난 비극, 프랑스 화가 자크 칼로(Jacques Callot)의 그림. 1632년 작.
날짜 1618년 5월 23일 ~ 1648년 10월 24일
장소
유럽, 주로 독일
결과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인한 평화.
프로테스탄트의 종교 인정
네덜란드 공화국과 스위스 서약동맹의 독립 인정
스웨덴 제국, 프랑스 왕국 및 잉글랜드 왕국의 성장
봉건 제도의 쇠퇴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방 분권화
프랑스-스페인 전쟁이 1659년까지 지속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 및 세력 쇠퇴
독일 인구의 3분의 1에서 3분의 2 사망
독일 연방 제후국 파괴
30년 전쟁
30년 전쟁(독일어: Dreißigjähriger Krieg)은 유럽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과 프로테스탄트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종교 전쟁이다. 유럽 뿐만 아니라 인류의 전쟁사에서 가장 잔혹하고 사망자가 많은 전쟁 중 하나였으며, 사망자수는 800만 명이었다. 30년 전쟁이라는 표현을 처음 쓴 이는 17세기의 사무엘 폰 푸펜도르프라고 한다.
30년 전쟁은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프로테스탄트교회(개신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대립으로,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전제군주정과 봉건 제도의 대립으로 볼 수 있다. 신성 로마 제국과 이 국가의 종교 정책을 지지하는 제후국 및 반대하는 제후국 간의 다툼이었으나 거의 대부분의 강대국이 개입하면서 규모가 커지고 각국의 이해 관계가 교차하는 근대적인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이 국가들은 수많은 용병을 고용했으며 전쟁이 지속될수록 종교적 색채는 옅어지고 유럽의 정치적 구도에서 합스부르크 가문과 프랑스의 대결 구도로 바뀌었다. 17세기에 종교적 믿음과 실천은 오늘날 평균적인 유럽인보다 더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시기에 대부분의 유럽인은 논란의 편에 서게 되었고, 종교적 계파는 사람들의 윤리와 충성과 관련이 깊었는데 이는 그들이 충성하는 제후나 왕의 종교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녔다.
전쟁은 새로 선출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그의 영토에서 반종교개혁을 시행하려고 함으로써 발발했다. 그는 로마 가톨릭을 그의 국민들에게 강요했다. 북부의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보장받은 종교 선택의 권리가 위반되자 분노하여 개신교 제후동맹을 결성하여 이에 반대했다. 페르디난트 2세는 그의 이전 황제였던 루돌프 2세에 비해 독실한 로마가톨릭 신자였고, 친로마가톨릭 성향이 강한 정책을 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북유럽과 중앙유럽에 공포를 퍼뜨렸고, 오스트리아 지역에 있던 개신교 국가 보헤미아 왕국이 반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에 반대해 프리드리히 5세 폰 팔츠 선제후를 그들의 황제로 선출했다. 프리드리히 5세는 왕위를 제후동맹의 승인 없이 받아들였다. 로마가톨릭이 대부분이었던 남부의 제후국이 이에 반대했다. 이들은 바이에른 선제후를 중심으로 황제를 지지하기 위해 가톨릭 제후연맹을 결성했다. 1620년 백산 전투에서 황제군은 반란을 제압했으나 유럽의 개신교 국가들은 이를 비판했다.
보헤미아에서 로마 가톨릭군의 잔학 행위가 이어지자 작센 선제후국이 마침내 개신교 제후동맹에 지지를 표하며 이들과 함께 싸웠다. 같은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던 스페인이 신성 로마 제국을 지지하며 전쟁에 참여하자, 이에 대항해 여러 목적을 가진 개신교 국가들이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항해 전쟁에 참여했다. 당시 팔츠 선제후와 인척 관계였던 잉글랜드 왕국이 1625년 전쟁에 개입했고, 홀슈타인에 영지를 보유하고 있던 덴마크-노르웨이가 같은 해 자신의 영지를 지키기 위해 전쟁에 참여했다. 당시 스페인에 맞서 독립 전쟁을 치르고 있던 네덜란드 공화국도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 내 개신교 국가였던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등도 이들과 동맹을 맺고 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이후 덴마크의 패배 이후 이를 대신해 스웨덴 제국의 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도 1630년부터 전쟁에 개입했다. 스페인과 신성 로마 제국 사이에서 계속 포위당하고 있던 로마가톨릭 국가인 프랑스 왕국도 스웨덴 제국 및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고 1635년부터 개신교 편으로 참전했다.
30년 전쟁은 독일 전역을 기근과 질병으로 파괴했다. 특히 보헤미아 왕국과 남부 네덜란드 및 독일과 이탈리아에 위치한 국가들의 인구가 급감했다. 용병과 병사들 모두 기여금을 받기 위해 공헌을 위장하거나 마을을 약탈했으며 점령당한 영토 거주민들의 생활고는 심해졌다. 참전국 대부분은 파산 위기에 몰렸지만, 유럽 내부에서는 신흥 강대국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네덜란드 공화국은 독립을 공인받은 이후 급격히 성장했다. 잉글랜드 왕국, 프랑스, 스웨덴 제국도 전쟁 이후 상당한 영토를 보유하게 되었고, 신성 로마 제국을 대신해 새로운 유럽의 강대국이 되었다. 이후 17세기 후반 신성 로마 제국의 권위는 추락하게 되었다.
배경
네덜란드 독립 전쟁
1610년대 초에 유럽의 정세는 크게 바뀌고 있었다. 가장 큰 역사적 변화는 스페인 제국의 몰락이 가속화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오스만 제국을 레판토 해전에서 격파하고, 라틴아메리카 대부분을 자신의 식민지로 복속한 스페인은 16세기 중반까지 유럽의 최강대국 중 하나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펠리페 2세의 지나친 중심집권화 및 개신교에 대한 종교 탄압은 네덜란드 개신교도의 반발을 부추겼다. 1568년부터 스페인의 지배 하에 있던 저지대 국가의 북부 지역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스페인은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자국의 경제력을 네덜란드 반란군에 쏟아부었다.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네덜란드 연합군에 의해 격파당한 이후, 스페인의 위신은 바닥으로 추락했다. 네덜란드 연방은 스페인에 대한 반격을 감행해 1609년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뼈아픈 타격을 입혔다. 이에 스페인령 네덜란드는 스페인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후 네덜란드는 마우리츠 공을 중심으로 스페인에 대항한다.
신흥 강대국의 등장
이 부분의 본문은 앙리 4세, 엘리자베스 1세, 스웨덴 제국 및 크리스티안 4세입니다.
스페인 제국이 쇠퇴를 거듭할 무렵, 유럽에서는 새로운 세력이 등장해 스페인 제국 패권에 도전할 수 있게 되었다. 가장 큰 성장 세력은 프랑스 왕국이었다. 백년 전쟁 이래로 봉건제가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한 프랑스 왕국은 앙리 4세 통치 하에 중앙 집권 기틀을 마련하는데 성공한다. 당시 앙리 4세는 프랑스 내에서 지속하던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교 사이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낭트 칙령을 발표했고, 이는 프랑스 국민이 통합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그는 오랜 적수였던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 고립을 피하기 위해 실리적인 외교 정책을 구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는 한편, 반합스부르크 세력인 스위스 독립을 인정했고, 신성 로마 제국과 같은 가문이 다스리는 스페인의 확장을 막기 위해 이들과 대항하는 포르투갈 및 네덜란드 독립군을 지원했다. 외적으로도 큰 치적을 이룬 프랑스는 유럽 각국에 포도주와 곡물을 수출해 부를 축적하였다.
한편 유럽 북쪽 지대에서도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이룩한 국가들이 등장했다. 스웨덴 제국, 엘리자베스 1세의 잉글랜드 왕국, 덴마크-노르웨이가 이 세 국가다. 잉글랜드 왕국은 엘리자베스 1세 즉위 이후 개신교도 국가로 확실히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1588년 네덜란드와 연합해 무적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잉글랜드 왕국의 해상 통제권은 스페인을 앞지르게 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령 동인도 회사를 창립하여 아시아에서 무역을 증대시키는 한편, 자국 내에서 증가하던 종교 분쟁도 슬기롭게 해결하였다. 구빈법 등 백성을 위한 애민정책도 적극적으로 편 그녀는 1603년 세상을 떠났다. 이후 즉위한 제임스 1세는 북아메리카에 제임스타운을 건설하는 등 해외 확장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지만, 자국에서는 의회와 국왕의 충돌이 끊임없이 이어졌기 때문에 유럽 내부 정세에 깊숙이 관여할 수 없었다.
이와 달리 스웨덴 제국과 덴마크 왕국은 같은 개신교 국가임에도 서로 반목하는 사이였다. 먼저 스웨덴 제국은 당시 스웨덴 왕이었던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부왕의 뜻을 기려 적극적인 발트해 공략 작전을 개시했다. 그는 잉그리안 전쟁에서 러시아 제국 군대를 격파했으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자주 침공하기도 했다. 이 무렵 스웨덴은 해상 무역이 발달하여 한자 동맹을 위협할 수준에 이르렀으며, 발트해 세력권을 확보하여 강대국으로 성장할 발판을 마련했다. 이와 반대로 덴마크-노르웨이의 크리스티안 4세는 발트해와 북해를 이어주는 카테카트 해협 및 스카게라크 해협을 장악하여 이 두 해협을 지나는 선박에 통행료를 얻었다. 이는 덴마크 왕실 권위 증가에 크게 이바지했다. 덴마크는 신성 로마 제국 내에 영지를 보유한 국가이기도 했다. 덴마크 크리스티안 4세는 홀슈타인 영주로써 신성 로마 제국 북부 지역 요충지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에서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이 두 국가는 네덜란드, 한자 동맹, 폴란드와도 경쟁하는 사이였다.
발트해 동남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역시 신성 로마 제국 패권에 도전할 정도로 그 세력이 강성해졌다. 1618년 당시 폴란드는 스몰렌스크를 점령하여 루스 차르국을 위협했고, 북쪽으로는 스웨덴, 서쪽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 동쪽으로는 루스 차르국, 남쪽으로는 오스만 제국, 남서쪽으로는 헝가리 왕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북방 세력이 분열한 상황에서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왕인 지그문트 3세 바사는 자국이 로마 가톨릭 국가 및 신교 국가들과 두루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 내에서의 사태를 주시하기로 결정했다. 이 무렵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 모두 동맹 세력을 넓히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 외교 공작
유럽 내부에서 종교적 갈등이 심화됨에 따라 서로 앙숙이었던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가의 신성 로마 제국은 서로를 고립시키기 위해 더욱 더 강력한 동맹 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프랑스의 경우에는 교황, 베네치아 공화국 등과 동맹을 맺었다. 당시의 교황인 바오로 5세는 이탈리아의 지배권이 신성 로마 제국 측에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프랑스의 외교 정책에 더 힘을 싣게 된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경우에도 합스부르크 왕조에게 중요한 발텔리나와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합스부르크에게 중요했지만, 오스트리아와 에스파냐 왕가는 이곳을 점령하려 들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프랑스의 동맹국으로 자리매김했다.
신성 로마 제국 내부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독일에서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교황을 정면으로 공격한 이후, 1522년 마르틴 루터의 주장을 따르는 라인강 하류 지역의 기사들이 "형제단"을 세우고 신성 로마 제국에 반기를 들었으며, 이들이 진압당한 뒤에도 독일 곳곳에서는 로마 가톨릭 교회를 버리고 루터의 주장을 따르는 루터교회로 개종하는 도시들이 늘어났다. 특히 뮌스터에서는 재세례파 위원회가 결성되어 지역 주교의 군대에 저항했다. 비록 뮌스터는 주교가 이끄는 군대에 함락당했지만, 로마 가톨릭 교회를 버리면 기존의 로마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재산들을 압수할 수 있었기 때문에 루터교회나 장 칼뱅의 개혁교회로 개종하는 영주들은 늘어만 갔으며, 이어 기사들과 도시민들도 루터교회나 개혁교회로 개종하기 시작했다. 결국 1526년에 열린 슈파이어 제국 의회에서, 오스만 제국 등과의 전쟁을 위해 영주들의 힘을 필요로 했던 신성 로마 제국은 영주들의 루터교회의 신앙을 인정했지만, 1529년 빈 공방전에서 신성 로마 제국이 승리한 이후 황제 카를 5세는 기존의 《보름스 칙령》을 다시 발표해 루터교회를 탄압하려 했다. 개신교도 영주들은 1531년 2월 27일 튀링겐에 모여 슈말칼덴 동맹을 결성하고 카를 5세와 로마 가톨릭 교회에 저항했다. 슈말칼덴 동맹과 신성 로마 제국 사이의 전쟁은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재공격과 작센 공국의 동맹 이탈 등으로 혼선을 빚다, 작센 공국이 다시 반합스부르크 동맹을 결성하고 프랑스 왕 앙리 2세와 《샹보르 조약》을 체결해 프랑스의 지원을 받았다. 대신 반합스부르크 동맹은 프랑스에 캉브레, 메츠, 툴, 베르됭 등을 넘겨주기로 했다.
보헤미아 반란
1618-1621
30년 전쟁의 촉매제가 된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
마티아스 황제가 아들 없이 그의 생애 동안 그의 왕조를 가짐으로써 그의 정연한 변화를 확실시 하려고 했다. 그는 열렬한 로마 가톨릭 지지자인 이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2세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페르디난트를 보헤미아 및 헝가리의 왕좌로 선출하려고 했다. 몇몇 보헤미아의 개신교 지도자들은 루돌프 2세 때 루돌프 칙령 (또는 폐하의 서신)이라 불리는 종교 칙서로 당연히 인정받은 종교 권리를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했다. 그들은 개신교 제후동맹을 설립한 프리드리히 4세와 그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5세를 지지했다. 그는 팔츠 선제후이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개신교도들은 로마 가톨릭이 주도하는 입장을 지지하기도 했다. 1617년 페르디난트가 보헤미아 왕국의 실질적인 주인으로 선출되었고 마티아스가 죽자 자연스레 보헤미아의 왕이 되었다.
왕의 선출 이후 2명의 로마 가톨릭 의원들이 1618년 5월 프라하 성의 대표로 보내졌다. 페르디난트는 그의 결석 동안 정부의 행정을 담당하기를 원했다. 1618년 5월 23일 개신교 의회는 그들을 포위하고 창문 밖으로 던졌다. 그들은 추락했으나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 제2차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이라 알려진 이 사건으로 보헤미아 반란이 시작되었다. 곧 보헤미아 분쟁은 보헤미아 왕국, 실레시아, 루사티아까지 번졌다. 모라비아는 이미 가톨릭과 개신교도들의 싸움으로 얼룩진 상태였다. 모라비아 지역의 분쟁은 다시 프랑스 왕국, 스웨덴 제국, 네덜란드, 덴마크-노르웨이, 스페인 제국, 포르투갈 왕국, 잉글랜드 왕국 등 다른 유럽 강대국들이 이 사태에 개입하거나 아니면 예의주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백산 전투의 재현
보헤미아 분쟁은 여전히 지역적인 분란으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마티아스 황제의 죽음 이후 개신교 반란 지도자들은 대담해졌다. 마티아스 황제의 죽음으로 인해 공식적인 황제가 된 페르디난트 2세와 보헤미아 반란군이 두려워하는 것은 분쟁이 서부 독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페르디난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같은 합스부르크 가문인 그의 조카 펠리페 4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황제에 맞선 동맹에 대해 결사적이었던 보헤미아 인들은 칼뱅파였던 팔츠 선제후였던 칼뱅교도 프리드리히 5세를 보헤미아 왕의 후보로 내세우고 있었고 프리드리히 5세는 개신교 제후동맹을 이끌고 있었다. 보헤미아는 제후동맹에 자국을 가입시켜준다면 프리드리히 5세에게 보헤미아 왕위를 줄 것이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사보이 공작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 작센 선제후국의 요한 게오르크 1세, 헝가리 왕 베틀렌 가보르에게도 같은 약속이 주어졌다. 프라하를 떠나는 모든 서신들을 가로챌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오스트리아 인은 이러한 이중적 태도를 공연히 알렸다. 이는 보헤미아인들에 대한 지지가 추락하는 원인이 되었고, 작센은 아예 이들에게 신임을 주지 않았다.
이러한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반란은 보헤미아인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귀족들 대부분이 루터파와 칼뱅파였던 오버외스터라이히가 반란에 동참했고, 곧 니더외스터라이히가 반란을 일으켰다. 1619년에는 진트리히 마타야스 트런이 비엔나 성벽을 향해 공격을 가했다. 더욱이 영국 제도에서는 프리드리히 5세의 반란이 유럽의 조엘리라 묘사되는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의 문제로 비춰지게 되었다. 이는 30년 전쟁 전반에 걸쳐 수천 명의 지지자들이 엘리자베스 스튜어트가 전쟁의 원인이라는 흐름을 내놓기도 했다. 호레이스 베레가 이끄는 영국-네덜란드 연합군이 전쟁 초기에 팔츠 선제후 지역으로 이동했고 존 세톤이 이끄는 스코틀랜드-네덜란드 연합군이 보헤미아로 이동했다. 그리고 후에 이들은 혼성 부대인 브르타뉴 여단에 참여하게 된다. 세톤의 여단은 1622년까지 트레본 마을을 사수한 여단으로, 보헤미아에서는 최후의 개신교 동맹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지원
프리드리히 5세의 초상화.
트란실바니아의 공작이자, 헝가리 개신교도의 왕이었던 베틀렌 가보르는 합스부르크 헝가리로 진격했다. 이 때 그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 오스만 2세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페르디난트 2세의 로마 가톨릭 공포 정치로 베틀렌은 오스만 2세에게 보호를 해달라 부탁했고, 오스만 제국은 이에 따라 합스부르크의 통치에 반기를 일으키고 개신교도의 왕으로 프리드리히 5세를 선출한 이후 보헤미아 내 여러 국가들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 수 있는 보헤미아의 유일한 동맹국이 되었다.[23] 하인리히 비터가 이스탄불을 1620년 1월 방문했고, 메메트 아가가 1620년 7월 프라하를 방문했다. 오스만 제국 기병은 프리드리히에게 6만 명의 기병을 주었고, 40만 명의 군대가 폴란드를 침공할 계획을 세웠다. 이는 술탄에게 바치는 연간 조공에 대한 답례이기도 했다.[24] 이 협상은 1620년부터 1621년까지 발발한 폴란드-오스만 전쟁을 촉발시켰다. 오스만 제국군은 1620년 9월부터 10월까지 30년 전쟁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을 지원하고 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체초라 전투에서 패배시켰다.[26] 그러나 1620년 11월 백산 전투에서 보헤미아군이 패배할 때는 오스만 제국은 개입할 수 없었다.[27] 1621년 폴란드군이 재정비해 초틴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패배시켰고 양국의 전쟁은 원상복귀되었다.
우스코크 전쟁에서 우위를 점하던 황제는 보헤미아와 그들의 동맹국을 그의 압도하는 수로 누르려고 했다. 황제군의 사령관 부코이 백작은 에른스트 만슈펠트가 지휘하는 개신교도 제후동맹을 1619년 6월 10일 사브레 전투에서 격퇴시켰고, 이것은 트런 백작이 프라하와 연계하지 못함으로써 비엔나 포위를 푸는 계기가 되었다. 합스부르크의 확대에 있어서 오랜 적이었던 사보이 공국 또한 이 전투로 피해를 입었다. 개신교도들의 중요한 동맹이었던 사보이 공국은 개신교도들에 자금을 지원해주고 라인란트 지역에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도록 허용했다. 만슈펠트의 패배가 사보이의 개입을 알림으로써, 이들은 전쟁에서 잠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은 1630년 스웨덴 제국이 참전한 이후 다시 30년 전쟁에 개입한다.
덴마크 시대 (1625년 ~ 1629년)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 개신교 측에 서서 황제군과 싸웠다.
황제는 프리드리히에 대한 처벌로 영방의 라인팔츠와 오버팔츠에 있던 선제후위를 빼앗고, 새로이 전공을 세운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가 선제후가 되었다. 황제권력 앞에 정세는 긴박하게 움직여 황제 대 선제후라는 정치적 대립관계가 종교상의 대립과 미묘하게 교체하게 되었다.
또한 이 라인팔츠의 영유를 둘러싼 문제는 국제적 이해관계까지 얽히게 만들었다.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3세는 이미 1617년 페르디난트 2세에게 오스트리아 계승권을 인정해주는 대가로 선대 황제 마티아스로부터 알자스 지방의 영토를 할양받는다는 밀약을 맺고 있었다. 이 지역은 북 이탈리아에서 프랑슈콩테를 거쳐 개신교 국가 네덜란드로 군대를 보낼 수 있는 중요한 전략적 루트였다.
이 지역 문제는 그대로 프랑스의 이해 관계와 맞아 떨어진다. 이 당시 프랑스는 로마 가톨릭 국가였기 때문에 직접 행동에 나서지는 못했다. 1624년 합스부크르 왕가의 세력 강화를 두려워한 프랑스의 리슐리외 추기경은 프랑스 및 네덜란드, 영국, 스웨덴, 덴마크를 포함한 [대(對) 합스부르크 동맹]을 결성하고 합스부르크 왕가와 가톨릭 제후 연맹을 견제했다. 또한 프랑스, 사보이, 베네치아가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의 지원 루트를 막았다.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 황제군과 바이에른군의 실질적인 야전 사령관으로 30년 전쟁 중기까지 대활약한다.
1625년 5월 덴마크의 왕 크리스티안 4세가 개신교 측에 참가하여 전쟁에 뛰어들었다. 크리스티안 4세는 개신교도였고, 바이센베르크 전투(흰산 전투)의 승리에 자신감을 가진 로마가톨릭 진영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 표면상의 참전 이유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신성로마제국 니더작센의 구역장으로서 오랫동안 빈 자리로 남아있는 2개의 제국내 사교직(司教職)에 자신의 아들을 취임시켜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이를 거절하고 틸리 백작의 군대를 니더작센에 진군시켜 머무르게 한 것이 진정한 이유였다.
이렇게 되자, 북 독일에서의 세력 확대와 함께 발트해, 북해에 대한 패권확립을 노리던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는 아들의 사교직 취임 문제에 대한 페르디난트 2세의 노골적인 반대를 명분으로, 프랑스, 영국, 스웨덴의 동맹국들로부터 지원을 받아 1625년 5월에 전쟁에 참전했다. 처음엔 스웨덴과 함께 개입하려 했으나, 양쪽의 주도권 다툼이 벌어져 결과적으로 스웨덴은 폴란드 문제에 주력하고 덴마크가 단독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덴마크의 참전에 대해 영국은 군사비를 제공하고, 만스펠트, 브라운슈바이크란 2명의 용병대장의 군대를 지원군으로 파견하였다.
황제군 측의 유명한 용병대장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
덴마크의 참전 때문에 페르디난트 2세는 군사비 부족으로 궁지에 빠지게 되었다. 상비군으로 응전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황제는 보헤미아의 용병대장 발렌슈타인을 등용하고 그의 군대에게 개신교군과 싸울 것을 의뢰했다. 한편 덴마크군과 용병부대 사이에서는 전략에 대한 주도권 다툼이 일어나 결국 3사람 모두 각자 행동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발렌슈타인의 각개격파 전술의 좋은 먹잇감이 되어버려 만스펠트는 데사우 전투에서 패배하고, 브라운슈바이크도 1626년 1월 13일에 전사하고 말았다. 그리고 1626년 8월 크리스티안 4세는 믿고 있던 프랑스의 지원을 얻지 못해 루터 전투에서 로마가톨릭 동맹군 사령관 틸리 백작에게 완패하였다.
크리스티안 4세가 전력을 잃어버리자, 발렌슈타인과 틸리 백작의 군대는 덴마크에 침입해 덴마크가 신성로마제국 영내에 가지고 있던 포메른, 메클렌부르크 공작령 뿐만 아니라 유틀란트반도도 유린했다. 크리스티안 4세는 스웨덴에게 지원을 요구했고 곧 동맹이 성립되어 얼마 안 가 발렌슈타인을 덴마크에서 물러나게 할 수 있었다. 결국 1629년 뤼베크 조약이 체결되면서 덴마크는 독일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또한 같은 해 황제가 발령한 복구령은 광대한 사교령과 수도원 령의 로마 가톨릭으로의 복귀를 성사시켰다.
스웨덴 참전 시기
브라이텐펠트 전투 (1631년)에서의 스웨덴 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
1630년 7월 스웨덴 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황제군의 발트 해 진출에 대해 위협을 느끼는 한편, 이를 대륙진출의 찬스라고 생각했다. 그는 곧 개신교 옹호를 표방하고 프랑스 재상 리슐리외의 군사비 원조를 얻어 28척의 전함과 수송선에 기병 16개 부대, 강력한 포병이 배속된 보병 92개 중대, 합계 13,000명의 대군을 승선시키고 북부 독일의 우제돔에 상륙했다.
한편 그해 8월 24일 레겐스부르크의 선제후 회의에서 황제는 로마 가톨릭 제후의 지원을 얻지 못해, 발렌슈타인과 그의 용병부대를 대량으로 해고하고 틸리 백작의 로마가톨릭 동맹군으로의 편입을 추진시키고 있었다. 구스타브는 곧 대륙 진출의 교두보로서 포메른 지역의 요새화를 꾀하고, 보급 병참기지를 설정하려 했으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및 개신교 제후들이 협력을 거부하여 그의 전략은 차질을 빚고 있었다.
당시 유일하게 마그데부르크 시(市)가 황제의 지배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자, 틸리의 군대가 도시를 포위하였다. 이 마그데부르크 시 구원을 위해 구스타브는 프랑크푸르트 공격을 미끼로 양동작전 등을 구사해 틸리군을 유인해 내려고 했으나, 이에 대해 틸리도 노련한 수완을 보여줘, 일진일퇴의 기동(起動)을 되풀이 하였다. 결과적으로 프랑크푸르트와 마그데부르크 양측 도시가 각자의 군대에게 약탈을 당하는 결과를 빚게 되어, 구스타브의 마그데부르크 구원 작전은 실패했다.
스웨덴군은 그 후 곧바로 방어자세로 일관했다. 1631년 7월~8월에 걸쳐 보급의 차질로 인해 위험한 상태에 빠지자 베를린에서 수비에 들어갔다. 틸리는 이곳을 2번에 걸쳐 공격했으나, 공격은 모두 실패했다. 이것을 보고, 관망하던 북부 독일의 2대 개신교파 브란덴부르크와 작센의 양 선제후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9월 11일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1세는 자신의 군대를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지휘 하에 두었다. 한편 틸리군은 9월 15일 라이프치히 시에 입성했다. 군대는 약 36,000명으로 증가한 상태였다. 그에 반해 스웨덴군 26,000명과 작센군 16,000명의 각 군은 북쪽 약 25마일(약40km)의 뒤펜에서 합류했다.
1631년 9월 17일 황제군의 명장 하인리히 파펜하임 기병장군(1594~1632)은 교묘한 기동으로 스웨덴군을 유인하여 라이프치히 북쪽 약 4마일(약6.4km)의 브라이텐펠트 평원에 포진한 틸리군과의 결전으로 구스타브 왕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구스타브는 자신의 군을 새로운 군제(軍制), 장비, 전술로 탈바꿈시키고, 신 전술의 전투대형으로 배치했다. 결과적으로 신 전술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구체제의 테르시오로 조직된 틸리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다. 이 전투로 인해 세력관계는 단숨에 역전되어, 황제측이 수세로 몰리게 된 것과 더불어, 이 브라이텐펠트 전투는 구스타브가 네덜란드의 마우리츠 모델의 전술을 계승 발전시켜 횡대, 기병, 포병의 3병전술의 우수성을 실증하여 보여준 전투라고 할 수 있다.
브라이텐펠트 전투 승리 후 구스타브 왕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마인 강을 건너 라인란트와 제국 여러 도시를 제압해 12월 22일 마인츠를 점령하고 남은 동절기를 이곳에서 보냈다. 다음해 봄 남부 독일을 침공한 구스타브는 자신이 구상하는 스웨덴 주도의 독일 개신교도 제후의 대동맹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뮌헨으로 남하했다. 그래서 1632년 4월 15~16일에 걸쳐 레흐 강 전투에서 틸리의 야영진지를 기습해 틸리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히고 남부 독일을 점령했다. 틸리는 이 때 받은 부상으로 인해 얼마 안 가 죽고 말았다.
이 시기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크게 당황하였다. 틸리의 전사 이후 그를 대신할 만한 유능한 지휘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스웨덴군의 위협에 대항해 황제는 당시 보헤미아의 영지에서 재기를 노리던 발렌슈타인을 재기용하기로 결심한다. 황제는 1630년 8월 전횡이 극에 달했다는 이유로 면책되었던 발렌슈타인으로부터, 군대의 전권, 화평교섭권, 조약체결권의 전면 위임과 합스부르크 제국령과 선제후령의 할양"이라는 어마어마한 조건을 받아들여 그를 황제군의 지휘관으로 재소환하였다.
발렌슈타인은 빠른 시간에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여 1632년 7월 11일 발렌슈타인군은 스히바츠에서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의 군대와 합류했다. 구스타브는 2만 병력에 2배 이상 되는 45,000의 병력을 이끌고 아르테 페스에서 야영에 들어갔다. 한편 구스타브는 8월 31일부터 9월 4일에 걸쳐 야영 중인 발렌슈타인 군에 대한 기습에 나섰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발렌슈타인은 보헤미아로, 구스타브는 북서쪽으로 각자 후퇴했다.
그 후 9월부터 10월에 걸쳐 발렌슈타인은 3만의 병력을 이끌고 작센에 침공했다. 후방연락선이 차단될 위협을 느낀 구스타브는 곧바로 북상을 개시했다. 그리고 나움부르크에서 11월 9일부터 15일까지 야영을 했으나, 발렌슈타인이 파펜하임에게 대증원부대를 요청했다는 정보를 얻은 구스타브는 급히 공격을 위해 출격했다.
그래서 11월 16일 라이프치히 남서쪽 뤼첸에서 기어코 결전의 서막이 열렸다. 격렬한 전투 끝에 가까스로 스웨덴군이 승리를 거두었으나, 구스타브 자신은 흉탄에 쓰러져 전사하고 말았다(뤼첸 전투). 전투 후 국왕의 전사소식을 들은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는 크리스티나가 여왕으로 즉위했다. 재상 악셀 옥센셰르나는 독일의 개신교 제후들과 하이브론 동맹을 체결하고 방어전쟁이란 형식으로 전쟁을 이끌어 나갔다. 이 소식을 알게 된 프랑스의 리슐리외는 개신교 제후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스웨덴과 손잡고, 로마가톨릭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도 이 동맹에 참가했다. 30년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구스타브의 죽음은 개신교 제후들을 동요시켰다. 거기에 스웨덴군과 개신교 제후들 간의 분열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것은 황제군의 사기를 높여주었고, 이에 자신감을 갖게 된 황제는 자신의 야심을 드러낸 발렌슈타인을 1634년 1월 24일에 암살했다. 하지만 발렌슈타인 제거는 군사적으로는 마이너스였고, 아직도 자신에게 반감을 품고 있는 제국 제후들의 의향을 무시할 수 없었다. 황제는 자신의 아들 페르디난트의 세습을 위해 제후에게 양보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개신교 측은 구스타브가 죽은 후 작센-바이마르 후작 베른하르트와 구스타브 호른이 지휘를 물려받았다. 1634년 9월 6일 스웨덴-개신교 제후군(하이브론 동맹)은 보병 16,000명, 기병 9,000명을 이끌고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황제 페르디난트 3세와 스페인 추기경 황태자 페르디난트의 군대 35,000명에게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스페인군은 스웨덴군의 약점이었던 일제사격 후 재장전의 빈 틈을 노린 돌격으로, 개신교군에게 전사자 17,000명, 부상자 4,000명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안겨준 대승리를 얻게 되었다. 이 승리로 주도권을 되찾은 황제는 아들 페르디난트를 로마 왕으로 선출시키는데 성공했다. 또한 이 전투에서 스웨덴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어 이후 30년 전쟁의 주도권을 잃게 되었다.
황제는 바이에른 공작과 작센 공작과도 화해하고 스페인의 참전에 용기백배하여 여러 지역에서 전투를 계속하였고, 그 결과 다음해 5월 30일 황제 측이 유리한 상황 하에서 프라하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황제의 위광을 높여주었지만 결국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다. 스웨덴이 세력을 잃고, 하이브론 동맹이 붕괴의 위기를 맞게 되자 재상 옥센셰르나는 수완을 발휘해 흑막 뒤에 있던 프랑스를 직접 전쟁에 개입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제 30년 전쟁은 제4기를 맞이하게 된다.
프랑스-스웨덴 시대(1635년 ~ 1648년)
스웨덴의 구스타브 왕이 전사한 후 재상 옥센셰르나가 이끄는 스웨덴군이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이로인해 서부와 남부지역의 독일 개신교 제후들로 구성된 하이브론 동맹이 와해되면서 스웨덴이 고립되어갔다. 그러자 물밑에서 스웨덴과 독일 개신교 제후둘을 돕던 프랑스가 결국 전쟁의 직접 뛰어들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1635년 5월 21일 스페인에게 선전포고를 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직접 대결을 펼쳤다. 이 전쟁에서는 프랑스의 재상 리슐리외, 스웨덴의 재상 옥센셰르나,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3세가 서로 맞붙게 되었다. 프랑스군은 주로 스페인군과, 스웨덴군은 황제군과 전투를 벌였다.
전황은 처음 수 년간 프랑스에게 유리한 상황이 아니었지만, 프랑스는 훗날 명장이라 칭송받게 되는 최고의 장군인 튀렌(1611~75년)과 콩데 공(公)(1621~86년)을 전쟁에 참가시키면서 이들의 활약으로 조금씩 전황을 역전시켜 나갔다. 이때 공세에 나선 황제군이 비토슈토크 전투에서 스웨덴군에게 패배하고, 승리한 스웨덴군은 다시 독일을 침공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반-합스부르크 세력의 전세가 호전되었고, 1640년부터는 합스부르크 세력이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네덜란드에서는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이 스페인을 격파해 요충지 브레다요새를 함락시켰다. 이 승리는 네덜란드의 독립을 확실하게 만들었고, 거꾸로 스페인의 패권이 무너졌음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런 정세 속에서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사망했다.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명성을 얻은 아들 페르디난트가 페르디난트 3세로서 새로이 황제가 되어 즉위했다.
프랑스군의 용병대장이 된 작센-바이마르 공작 베른하르트도 공세에 나서 1638년 라인팔츠, 브라이베르크, 브라이자크를 함락시켰다. 다만 베른하르트는 프랑스와 마찰을 일으켜, 후에 작센 군과 프랑스군이 서로 전투를 벌이게 된다.
그 해 스웨덴군은 하이브론 동맹을 배반한 작센 군을 켐니츠에서 격파하고 보헤미아에 침공했다. 이때 스웨덴군 베넬 장군의 야심으로 인해 통솔이 어지럽혀져 격퇴되었다. 다음 해 1639년 에르푸르트에서 프랑스군, 스웨덴군, 프로이센군이 접촉하였다. 무엇보다 프로이센군은 후에 대 선제후로 불리게 되는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다음해 1640년 프로이센 공(公)이 되면서 방위전쟁에서 물러나 사실상 중립을 지키게 되었다.
1640년 경부터 황제는 화평을 향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으나 그 고압적인 태도에 응하려는 세력이 없었다. 그리고 스페인군은 이 시기부터 프랑스, 네덜란드 앞에서 패퇴를 거듭해 몰락의 징후가 보이고 있었다. 그 해 스페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포르투갈 왕국이 독립하였다.
1642년 황제군은 브라이텐펠트에서 다시 스웨덴군과 맞붙었으나 패배했다. 이곳은 예전에 황제군과 스웨덴군이 맞붙었던 유명한 브라이텐펠트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였다. 황제는 이 패배에 굴복해 화평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제국 전체에서 전투를 기피하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었다. 1642년 후반쯤 라인 강의 양쪽 강변에서 화평회의가 설치되었으나 1644년이 되어서야 교섭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교섭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것과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투가 뒤섞이면서 매우 격렬해지는 모순된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제국 법에 의해 국제회의는 설치되었으나 전쟁의 주도권을 빼앗은 스웨덴이 화평회의를 귀담아듣지 않았다. 이때 프랑스에서는 1642년 재상 리슐리외, 1643년 프랑스왕 루이 13세가 차례로 죽고, 리슐리외의 정책은 새로운 재상이 된 마자랭이 물려받았으나, 새로이 국왕이 된 루이 14세는 아직 어렸기에 프랑스 국내는 불안정해졌다. 그 때문에 마자랭은 물려받은 정책 중에 국왕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만들라는 야심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643년 5월 19일 프랑스 왕족 콩데공이 로크루아 전투에서 스페인군을 섬멸하는 대승을 거두어 여기서 스페인의 군사력은 붕괴되었다. 그리고 1644년 프라이부르크 전투에서 로마가톨릭 동맹군의 중심이었던 바이에른 군을 격파하면서 프랑스는 30년 전쟁에서 승리를 확신하게 되었다.
한편 스웨덴은 독일에서 전투를 벌이는 스웨덴군의 배후를 위협하던 덴마크와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 전쟁은 지휘관의 이름을 따서 토르스텐손 전쟁이라 불리었다. 스웨덴군은 네덜란드 해군을 우방으로 만들어 덴마크를 굴복시키고 30년 전쟁으로 인해 중단된 발트 해의 패권을 기어코 거머쥐게 되었다. 또한 이 전쟁에서 구스타브 호른 장군이 복귀하였다. 황제군은 덴마크를 지원하기 위해 달려왔으나 참패했다.
스웨덴은 30년 전쟁의 승리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다시 보헤미아에 침공하였다. 1645년 프라하 근교의 얀카우 전투에서 또다시 황제군은 대패했고, 이때 프라하에 있던 황제 페르디난트 3세는 빈으로 도망쳤으나, 이것은 예전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보헤미아 왕)의 도망과 비슷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의 도망이라고 조소받았다.
이 사건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패배는 결정적이 되었다. 같은 해 바이에른군도 스웨덴군에게 패배해 바이에른 공작은 프랑스와 화해를 맺고, 고립된 작센 공작도 스웨덴군과 휴전조약을 체결했다.
일련의 상황으로 인해 화평회의는 순식간에 진전되었다. 국제회의에서는 영국, 네덜란드, 러시아 제국, 오스만 제국을 제외한 모든 유럽 여러 나라가 참가했다. 그러나 1646년 황제군이 얀카우 전투의 패전에서 경이적인 부활을 이루어냈다. 황제군이 바이에른과 다시 합류하는 것을 두려워한 스웨덴은 바이에른에 다시 침공하였다. 프랑스는 이것을 월권행위로 보고, 스웨덴의 견제를 위해 명장 튀렌을 파견하였다. 양군에게 포위된 바이에른은 굴복했으나, 이후 바이에른군의 장군이 반란을 일으켜 황제군에 합류했다.
1618년 보헤미아-팔츠 전쟁이 발발했던 그곳에서 최후의 전투가 벌어졌다. 1648년 스웨덴-프랑스 연합군은 황제-바이에른 연합군을 격파하고 대세를 굳혔다. 스웨덴군은 프라하를 포위하고 이곳을 점령한 후 제국의 수도 빈을 공격하려는 태세를 준비했다. 황제는 기어코 10월 24일 화평조약에 서명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스웨덴은 보헤미아의 정복과 개신교화를 위해 1648년 7월 26일 이후 프라하에서 전투를 계속하였다. 로마가톨릭 진영의 최후의 요새였던 프라하는 격렬하게 저항하였고, 결코 항복에 응하지 않았다. 후에 스웨덴의 왕이 된 당시 스웨덴군 총사령관 칼 10세도 원군으로 달려와 포위전은 3개월이나 지속되었다.
11월 2일 프라하에 베스트팔렌 조약의 체결소식이 전해지자 이로써 30년 전쟁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스웨덴에서는 친정을 개시한 크리스티나 여왕의 정책으로 인해 화평교섭에 새로운 전개가 일어나게 되었다. 출처 위키피디아
책소개
'30년 전쟁'의 모든 것
유럽 세계를 말할 때 가장 중요한 다릿돌을 꼽으라면 17세기의 '30년 전쟁'을 들 수 있다. 이 전쟁은 수천 년의 유럽 역사 전체를 결론짓는 마지막 단계의 출발점이었고, 오늘날의 유럽 세계를 직접적으로 형성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17세기 초는 종교개혁의 후유증이 남아 있던 시절이었으므로 30년 전쟁은 종교 전쟁으로 시작해서 영토 전쟁으로 끝난다. 그런 점에서 이 전쟁은 중세 전쟁에서 근대 전쟁으로의 연결고리가 된다. 이후 20세기까지의 전쟁들은 국민국가들의 영토와 부를 놓고 벌인 전쟁이다.
30년 전쟁의 전개 과정을 대단히 깊이 있고 상세하게 서술한 이 책은 영국을 제외한 유럽전역이 관련된 30년 전쟁의 복마전 같은 사건들을 풀어내고, 무수한 등장인물들의 얽히고 설킨 관계, 각 개인의 성격과 심리를 보여주고 때로는 숨은 의도까지 대담하게 추측한다. 유럽판 '삼국지'라고 할 만큼 웅장한 활극이자 대하사극이다. 저자 웨지우드는 이십대 후반의 여성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노련한 솜씨로 복잡하고 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주제로 삼아 현대의 고전을 엮어냈다.
목차
1656년 판 서문2
옮긴이의 글 :유럽 근대를 형성한 30년 전쟁
추천의 글 : 웨지우드 서사의 최고봉
1장 독일과 유럽: 1618년
2장 보헤미아의 왕위: 1617~19년
3장 에스파냐의 경보, 독일의 경종: 1619~21년
4장 페르디난트 황제와 막시밀리안 선제후: 1621~25년
5장 발트 해를 향해: 1625~28년
6장 교착: 1628~30년
7장 스웨덴의 왕: 1630~32년
8장 뤼첸에서 뇌르틀링겐까지, 그리고 그 이후: 1632~35년
9장 라인 쟁탈전: 1635~39년
10장 에스파냐의 몰락: 1639~43년
11장 평화를 향해: 1643~48년
12장 평화 이후
본문의 주
참고문헌
합스부르크 왕조의 혼맥도
대표적인 신교 왕조들의 가계도
찾아보기
출판사 리뷰
《30년 전쟁》은 영국의 역사학자 C. V. 웨지우드의《The Thirty Years War》를 우리말로 옮긴 책이다. 유럽 근대사를 전공한 저자는 치밀한 연구와 조사를 바탕에 두고 역사적 · 작가적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하여 이 책을 탄생시켰다. 《30년 전쟁》은 1938년에 초판이 출간됐는데,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증쇄를 거듭할 만큼 ‘30년 전쟁’을 다룬 최고의 책이자 전쟁을 주제로 한 수많은 역사서 중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 받는 책이다. ‘30년 전쟁’은 1618년부터 1648년까지 신성로마제국(지금의 독일)을 무대로 신교와 구교가 치열하게 부딪힌 종교 전쟁이다. 전쟁은 종교 간 갈등으로 시작됐지만, 자국의 이득을 노린 열강들이 개입하면서 종교 문제는 희석되고 국제전으로 변질했다. 거의 전 유럽이 얽혀들었던 전쟁이 끝났을 때, 유럽의 지형도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다. 전후 조약을 통해 현재와 같은 국경선이 확립됐기 때문인데, 그런 만큼 이 전쟁을 오늘날 유럽을 형성한 뿌리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유럽 세계에 관한 한 전쟁이라는 징검다리에서 가장 중요한 다릿돌을 꼽으라면 17세기의 ‘30년 전쟁’을 들 수 있다. 이 전쟁은 수천 년의 유럽 역사 전체를 결론짓는 마지막 단계의 출발점이었고, 오늘날의 유럽 세계를 직접적으로 형성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17세기 초는 종교개혁의 후유증이 남아 있던 시절이었으므로 30년 전쟁은 종교 전쟁으로 시작해서 영토 전쟁으로 끝난다. 그런 점에서 이 전쟁은 중세 전쟁에서 근대 전쟁으로의 연결고리가 된다.
- ‘옮긴이의 글’ 中
종교 전쟁에서 영토 전쟁으로, 30년에 걸친 처절한 싸움
- 30년 전쟁은 어떤 전쟁인가?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신교와 구교로 나뉜 유럽의 기독교는 100년 흐른 뒤에도 분열과 대립을 계속하고 있었다. 종교개혁의 결말 단계인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도 신앙의 자유를 제한적으로 허용했을 뿐이다. 불안을 느낀 신교의 칼뱅파는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중심으로 신교연합을 결성했고, 이에 맞서 구교 집단은 가톨릭동맹을 결성한다. 이렇게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며 대립하던 차에 1617년, 보헤미아 왕 페르디난트 2세가 구교로의 통일을 위해 신교도들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보헤미아 귀족들이 여기에 집단적으로 저항하면서 전쟁의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30년 전쟁(1618~1648)의 시작이었다.
전쟁은 신 · 구교의 갈등으로 시작됐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종교 문제는 뒷전으로 밀리고, 영토나 통상 같은 이익에 눈이 먼 열강들이 개입하면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커져 나갔다.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등 신교 국가는 신교도를 지원하며 전쟁에 뛰어들었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신성로마제국은 구교도 편을 들었다. 여기에 구교 국가이면서도 에스파냐와 신성로마제국을 경계한 프랑스가 신교를 뒷받침하면서 전쟁은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가 얽혀드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참전국들의 명분은 동일 종교 세력을 보호한다는 것이었지만, 속내는 혼란을 틈타 영토를 확장하려는 야심이었다.
전쟁은 1648년에 역사상 첫 다국간 조약인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하면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30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친 다툼이 남긴 영향과 파장은 시간만큼이나 만만치 않았다. 전후 최대 수혜국 프랑스는 알자스 로렌 지역까지 국경선을 넓혔고, 스웨덴은 발트 해를 차지했으며, 네덜란드는 에스파냐에서 독립했다. 이에 반해 신성로마제국은 인구의 1/3을 잃은 데다가 제후국들이 실질적으로 독립해나가면서 껍데기만 남게 됐으며, 유럽을 틀어쥔 채 호령하고 있던 에스파냐는 점차 이빨 빠진 호랑이로 전락해간다.
30년 전쟁을 보는 관점은 여러 가지다. ‘유럽의 국경선을 확정한 전쟁’, ‘유럽의 지형도를 바꾼 전쟁’이라고 평가하기도 하고 ‘최후의 종교 전쟁, 최초의 영토 전쟁’이라고 전쟁의 성격에 집중하기도 한다. 의심의 여지 없이 분명한 것은 ‘종교’라는 중세적 갈등에서 비롯되어 ‘국가 간 이익 다툼’이라는 근대적 갈등으로 진화해나간 이 전쟁이 유럽의 근현대사를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라는 점이다.
‘전쟁의 역사’를 넘어 ‘이야기’가 된 전쟁사의 고전
- 이 책의 특징
그녀는 섬세한 안목으로 과거의 인물과 장면을 살아 숨 쉬게 만들며, 인간의 악행과 어리석음, 파괴 본능이 빚어낸 황폐하고 비참한 이야기를 역동적으로 전한다. 젊은 저자는 바로크풍의 화려함과 비참함이 공존하는 17세기 독일 세계를 깊이 통찰하면서 당대의 두드러진 사건들을 인상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녀가 무엇보다도 강조하는 것은 인물이다. (중략) 그녀의 저작이 보여주는 엄정한 완결성과 명징성은 그녀가 영웅으로 삼았던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의 저작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그녀는 로마제국의 역사를 저술한 그 냉철한 역사가조차 평정심을 잃었음 직한 과거와 현재의 끔찍한 공포를 놀랄 만큼 선명하게 통찰하고 그려냈다. 《30년 전쟁》은 그녀가 남긴 서사의 최고봉이다.
- ‘추천의 글’ 中
C. V. 웨지우드(1910~1997)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서머빌 칼리지에서 강의를 맡을 정도로 촉망받는 역사학도였지만 학자가 아닌, 대중에게 역사를 알리고 나누기 위한 저술의 길을 선택했다. 《30년 전쟁》은 그런 웨지우드가 29세 때 저술하여 1938년에 첫 선을 보인 책이다. 올해로 초판이 나온 지 73년이 됐지만, 아직도 증쇄를 거듭하며 읽히고 있다. ‘30년 전쟁’을 다룬 책이 다수인데도 웨지우드의 《30년 전쟁》이 짧지 않은 시간을 넘어 여전히 그 힘을 잃지 않는 이유는 뚜렷하다. 웨지우드는 ‘연대기’가 아니라 ‘이야기’에 주목한 역사학자였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점은 마치 소설을 읽는 듯한 유려한 문장과 드라마 같은 구조다. ‘클래식하고도 빼어난 문장’을 쓴다고 정평이 난 역사학자답게 웨지우드의 글은 읽는 이들로 하여금 400년 전 유럽, 그 전쟁의 현장에 가 있는 것같이 생생하게 되살아난 역사를 만나게 해준다. 하지만 이 책이 단순히 저자의 상상력만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웨지우드는 대여섯 개 국어의 원본 문헌을 꼼꼼하게 뒤져가며 광산에서 석탄을 캐듯 사실을 직접 수집했다. 그렇게 발견한 사실들을 단순히 나열하는 수준에서 멈추지 않고, 치밀하게 탐구하고 연구했다. 즉, 《30년 전쟁》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나는 웨지우드의 빼어난 문장력은 철저한 사료 분석을 바탕으로 하는 그의 역사 재구성 능력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료 분석에서 웨지우드는 학계가 강조하는 ‘왜’의 역사보다는 ‘어떻게’의 역사에 주력했다. ‘30년 전쟁’을 두고 그녀가 펼치는 서사 또한 이 사건이 지니는 구조적 · 사회적 · 경제적 설명에 치우쳐 있지 않다. 철저히 등장하는 인물을 중심으로 상세하고 선명한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어떻게 펼쳐갔는지를 풀어낸다.
웨지우드는 서문을 통해 역사가가 편파적인 건 불가피한 일이라고 자인했다. 자신의 관점과 시대의 특성에 따라 불가피하게 특정한 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는 것이다. 웨지우드가 이 책을 집필하던 1930년대에는 대공황, 히틀러 정부, 에스파냐 내전 등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스스로 밝힌 바와 같이, 이 고통들과 한 시대를 살아간 웨지우드의 《30년 전쟁》이 ‘인간의 고통’에 집중하고 있음은 당연한 귀결로 보인다.
지은이가 보는 30년 전쟁은 한마디로 불필요한 비극이다. 이 책은 이런 말로 끝난다. “전쟁은 아무런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전쟁의 결과는 부정적이고 처참했다. 도덕이 무너지고, 경제가 붕괴하고, 사회가 타락하고, 대의가 흔들리고, 결과가 훼손된 그 전쟁은 유럽 역사의 무의미한 분쟁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 전쟁은 또 다른 전쟁을 부를 뿐이라는 사실을 당시 그들은 깨닫지 못했고, 그 뒤로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은이가 이 책은 쓴 시기(1930년대)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였고, 아직 그 ‘무의미한 분쟁’의 최고봉이 한 차례 더 남아 있던 때였다.
- ‘옮긴이의 글’ 中
1517년 마틴 루터가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판매에 항의해 비텐베르크성(城) 교회 정문에「95개조 항의문」을 붙였을 때부터 이미 구교와 신교의 갈등은 예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갈등은 1618년 보헤미아 프라하에서 일어난 한 사건을 계기로 거대한 전쟁으로 발전했다. 훗날 ‘30년 전쟁’이라 이름 붙여진 그 전쟁은 오스트리아 내전으로 시작되어 독일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나중에는 주변 국가들이 개입하면서 국제적 성격의 전쟁으로까지 비화했다. 그러나 끈질기게 지속된 그 전쟁에도 끝은 있었는데, 과연 유럽을 뒤흔든 마지막 종교 전쟁의 결말은 어떻게 될 것인가?
목차
02. 종교개혁과 신성로마제국 독일
03.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
04. 다시 시작된 구교와 신교의 대립
05. 프라하 투척 사건과 보헤미아의 반란
06. 보헤미아-팔츠 전쟁
07. 덴마크의 참전
08. 페르디난트 2세의 회복 칙령
09. 스웨덴의 참전
10. 프랑스의 참전
11. 평화협상의 시작과 끝
12. 30년 전쟁을 끝맺은 베스트팔렌 조약
13. 신성로마제국의 붕괴
14. 오랜 전쟁이 낳은 참상
15. 용병 체제에서 상비군 체제로
16. 30년 전쟁, 그 후
출판사 리뷰
역사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역사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아주 오래된 사건부터 바로 어제 일어난 일까지 우리가 살고 있는 매순간이 바로 역사니까.
역사 속에는 많은 사건들이 존재한다. 전쟁, 발명과 발견, 혁명과 개혁, 탐험과 무역 그리고 그밖의 사건들.
나비효과처럼 작은 사건이라도 현재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주권을 가진 권력자가 바뀌기도 했고, 새로운 나라가 세워지기도 했으며, 우리의 생활 방식을 변화시키기도 했다.
「역사를 바꾼 터닝포인트」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변화를 이끌었던 역사 속 터닝포인트들을 소개한다.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몰랐고, 모르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는 역사, 그 터닝포인트 속으로 떠나보자.
"『역사를 바꾼 터닝포인트』 시리즈를 읽으면 좋은 점 "
- 사건에 대해서는 물론 전후 상황까지, 사건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
- 내가 알고 싶었던 바로 그 사건을 골라 읽을 수 있다.
- 짧은 글로 구성되어 이동 시간 중에 읽기에 적격이다.
- 암기가 아닌 흐름으로 이해하여, 역사 상식에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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