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준경 전도사 순교지
한국 개신교 최초의 여성 순교자인 "섬 선교의 어머니" 문준경 (1891년~1950년) 전도사가 순교한 곳이다.
1891년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에서 태어난 그녀는 증도의 정씨 가문으로 출가 했다.
이후 목포 북교동교회를 다녔고 경성성서 학원 (현 서울신학대에 입학하여 성직자의 길로 들어섰다.
1933년 임자 진리교회를 시작으로 증도, 임자도, 임태도, 자은도 등 신안군내 100여 곳에 증동리교회, 대초리교회,방축리교회 등의 교회를 세웠다. 암담했던 일제 강점기, 섬지역에 복음을 전하여 섬사람들의 벗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한국전쟁기인 1950년 10월5일 퇴각하면서 공산군과 좌익들로 부터 성도들을 지키기 이곳 우전리 백사장에서 순교했다.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사랑을 전하고 실천한 그녀의 신앙과 숭고한 순교정신은 오늘날까지 목회자를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다.
문준경 전도사
1891년 2월 전남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 작은 섬에서 출생한 문준경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부지런해 어려서부터 총며아고 부지런해 주위의 칭찬과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서당에서 글공부를 하고싶어 했으나 부친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1908년 17세의 나이에 신랑의 얼굴도 제대로 못본체 중매결혼을 해야 했다. 그러나 서로 마음이 합하지 않은 결혼은 두사람 모두에게 고통이었다. 외지를 도는 남편은 아내를 돌보지 않은 채 목포에 소실을 두고 자녀까지 낳아 살고 있었고 문준경은 이 때부터 자신은 “남편있는 생과부”라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지내야 했다. 그러나 며느리로서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고 형제간의 우의를 돈독히 하는 데는 한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그리고 남은 시간을 시부모님의 허락을 얻어 국문을 깨우치고 한문을 공부하는데 할애를 했다.
자신을 아껴 주던 시아번지가 돌아가시고 시어머니도 큰 시숙과 생활하게 돼 갈 곳이 없어진 그녀는 목포로 건너와 단칸방에서 삯바느질을 하며 외롭고 고달픈 삶을 살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찿아간 교회가 유명한 성결교부흥사인 이성봉 목사 (당시전도사)가 초가집 한 칸을 얻어 미래에 대한 희망도 낙도 없었던 그녀에게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게 했다.1년만에 학습과 세례를 받고 개인전도와 축호전도에 가장 열성을 보이는 성도가 되었다.
집사 직분을 받은 그녀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인생을 헌신할 것을 서원하고 죽을 때 가지 복음을 전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경성성서학원 (서울신대전신)에서 공부할 수 잇게 되길 간절히 기도한 결과 청강생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당시 결혼한 여자는 입학할 수 없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공부를 열심히 해도 정규학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장학금도 받지 못하는 등 어려움을 격던 그녀는 이성봉목사의 보증과 요청으로 결국 정규학생이 되어 기숙사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문전도사의 전도열정은 남달아방학마다 고향으로 내려가 33년 진리교회를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35년 증동리교회. 36년 대초리교회를 차례로 건립했다. 방축리에는 기도소를 지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태에서 오직 믿음 만으로 세운 교회를 세운 그녀에게 수많은 어려움과 고초가 쉬지않고 따랐으니 기도는 언제나 승리를 안겨 주었다. 졸업 후에도 대도시를 마다하고 증도로 돌아 온 문 전도사는 나룻배를 타고 l섬 저섬 무교회 지역을 돌며 교회를 개척하고 복음을 전했다. 그녀는 주민들의 부탁으로 짐꾼노릇, 우체부 노릇을 마다하지 않았고 섬주위를 돌짝 밭길을 얼마나 걸었는지 1년에 고무신을 아홉컬레나 바꿔신었다고 전해진다. 문전도사의 열정적인 기도는 신유의 은사까지 더해 정신병자 중풍병자를 고쳐내 ‘섬 여의사“란 말까지 들을 정도 였다.
1943년 일제의 탄압으로 성결교단이 강제 해산됨과 동시에 문 전도사가 개척한 증도교회에 까지 여파가 미쳣다. 그녀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며 목포 경찰서로 불러내 고문을 일삼았다. 이 때마다 문전도사는 찬송가 “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를 부르며 에스더서 4장 16절 죽으면 죽으리라“를 수없이 되풀이 했다. 아무리 회유와 협박이 이어져도 굴욕적인 신사참배는 허락지 않았다.
해방후 공산당을 따르는 좌익들의 활동은 이 작은 섬까지 영향을 니쳤다. 특히 6.25 후 지역 전체가 인민군의 손길에 넘어가자 평소 교회를 못 마땅하게 여겼던 이들이 문전도사의 성도들을 못살게 굴었다.
1950년 10월4일, 국군이 중동리 섬까지 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악의에 찬 공산당원들은 교인과 양민들을 바닷가 모래사장으로 이끌어 냈다. 그리고 한사람씩 단도로 내려쳐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문전도사에게 와서는 “ 새끼를 많이 깐 씨암닭이구만”이라며 몽둥이를 내려 쳤고 그녀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 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이어진 총탄에 순교했다. 당시 59세. 이사실은 옆에 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수양딸 백정희 전도사에 의해 알려졌다. 문전도사의 헌신과 사역은 한톨의 밀알이 되어 30배, 60배, 1백배의 열매를 거두었다. 그녀가 흘린 피는 영원히 시들지 않은 Rc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현재 문준경 유적지가 조성되어 있는데, 신안군 증도면 사무소 옆 중동리교회에 무 문전도사의 추모비가 있다. 원래 그의 무덤도 이 중동리교회에 문 전도사의 추모비가 있다. 원래 그의 무덤도 이 증동리교회 뒤 편 산에 있었지만, 2005년 증동리교회 앞바다 즉 문 전도사의 순교현장으로 이전했다. 2013년 문준경의 순교자 기념관이 신안군 증도면에서 개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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