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서양식 공원, 자유공원
응봉산 (鷹峯山) 남쪽에 자리잡은 이 공원은 미국, 영국, 독일 등 각국 사람들이 설정한 각국조계 안에 있었기 때문에 각국공원으로 불리다가 점차 "여러나라" 라는 뜻의 만국(만국)공원으로 통칭되었다. 188년 러시아 측량기사 사바틴 (Sabatin) 이 설계하여 만든 우리나라 최고의 서양식공원으로 서울의 탑골(파고다)공원 보다 9년이 앞선다. 이 공원에는 한국 최초의 양관 (洋館) 으로 알려진 독일 세창양행의 숙사와 개항초기 인천해관장을 역임했전 영국인 존스톤의 별장, 당시 각국인들의 사교장이 되었던 제물포구락부 등 근대건축물이 있어 유명하였다. 1914년 각국조계가 폐지되면서 일제는 지금의 인천여자 상업 고등학교자리에 신사(神社) 를세우고 그곳을 동공원 (東公園) 만국공원은 서공원 (西公園) 으로 불렀다. 광복 후 다시 만국공원으로 불렀다가, 한국전쟁을 겪고 난 1957년 개천절에 이곳에 맥아더 동상 제막식을 가지면서 자유공원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6.내리교회
미 감리회 아펜젤러 선교사가 1885년 4월5일 인천에 38일간 머물면서 선교 준비한 것을 교회 설립으로 본다.
7.인천 감리사터 (백범 김구선생이 수감 되었던 장소)
1896년 명성황후 살해범 쓰지타를 죽이고 체포되어 해주감옥에서 옮겨져 사형선고를 받고 옥살이 한 장소.
인천감리사 터 (仁川監理署 地)- 위치 : 인천광역시 중구내동 83 / 건립 : 1883년 / 멸실 :1927년
현재 한진아파트 일대의 부지는 1883년 8월19일 인천 개항장의 통상사무를 취급하기 위해 인천 감리서를 설치하였던 곳이다. 1895년 3월부터는 이 곳에 개항장재판소가 설치되어 개항장의 재판권을 행사하였다. 인천개항장 재판소는 22살의 청년 김구가 "치하포사건"으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고 복역하던 중 탈출한 일화로 널리 알려진 곳이기도하다.
인천감리서 연혁 - 위치 : 인천광역시 중구내동 83
개항 후 조선정부는 외국인 거주지 설정, 외국상인들의 출입, 선박의 입출항 및 국제교역 등 새로운 업무를 전문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1883년 인천 개항장에 인천감리서를 설치하였다. 또한 1895년 3월부터는 인천감리서 내에 개항장재판소가 설치되어 개항장의 재판권을 행사하였다.
인천감리서는 갑오개혁에 따른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고종32년 (1895) 5월26일에 일시 폐지되기도 하였으나, 개항장에서 처리해야 할 업무가 증가하고 그 중요성이 부각되어 1896년 8월7일 감리서가 다시 설치되었다.
그러나 일제 국권침탈로 1906년 9월24일 인천감리서도 폐지되기에 이르렀고 그 담당 사무는 그해 10월1일부터 통감부 이사청에서 관할하게 되었다.
대한성공회 인천 내동교회
영국국교인 성공회가 한국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1890년 9월이다. 조선 개척선교사로 1899년 11월1일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선출된 코프(고요한)주교는 내과의사인 랜디스(납득시)와 함께 1890년 9월29일 제물포항에 도착해서 한국의 최초의 성공회교회인 성미카엘교회를 설립하고 선교활동을 시작 하였다.
이것이 내동성공회성당이다. 랜디스는 성 누가병원을 세워 의료구호사업에 전심을 다하여 교세를 확장 하였다. 당초 교회 건축물은 1891년 9월30일에 준공 하였다. 1902년에는 한때 러시아 영사관으로, 1904년부터 1956년 까지 성공회 신학원으로 사용되었다. 6.25전쟁때에 소실 되었다.현재의 건축물은 성 누가병원이 있던자리에 1955년 8월28일 정초를 놓고 H- beam을 기초로 하여 1956년 6월23일에 완공하였다.
외벽과 주요부재는 화강암으로 견고하게 쌓아올린 로마네스크 양식의 석조건물이다. 적벽돌 영롱쌓기로 쌓아올린 로마네스크양식의 석조건물이다. 적벽돌 영롱쌓기로 쌓아올린 외벽의 입체감과 빈 부분이 그대로 내부에 투영되도록 하였다. 이는 교회건축에 여기는 빛에 의한 효과를 연출하기 위한 것이다.
8.내동성공회 성당 (성누가 병원 터)
1890년 영국해군 종군 신부 고프와 의사 랜디스가 함께 세운 성 누가병원과, 1956년 완공한 성공회교회.
홍예문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9호 / 인천광역시 중구송학동 2가20
자유공원이 있는 응봉산을 지나 인천항과 전동을 연결하는 무지개 모양의 돌문이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일본조계의 인국가 늘어남에 따라 거주공간의 확대가 요망되었고 또 당시 제물포 항구에서 경인철도 축현역 (동인천 옛이름)과 만석동 방향 등지로 편하고 빠르게 물건을 실어 나르기 위해서 이곳을 관통해야만 했다.
홍예문은 인천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공병대에 의해 착공되어 1908년 완공되었으며 처음에는 혈문 (穴門)
이라고 불렀다. 화강암을 쪼아서 약10m 높이로 쌓았는데 설계와 감독은 일본이 맡고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들이 공사에 참여했다. 일본은 이 문의 축조를 통해 당시 포화상태였던 일본인 거주지를 조선인 마을까지 확장하고 물자수송의 편리함도 도모하였다. 문 위로는 각국조계와 기상대로 갈 수 있었으며 인천 앞바다와 팔미도, 영흥도, 등 여러 섬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공원, 자유공원
응봉산 (鷹峯山) 남쪽에 자리잡은 이 공원은 미국, 영국, 독일 등 각국 사람들이 설정한 각국조계 안에 있었기 때문에 각국공원으로 불리다가 점차 "여러나라" 라는 뜻의 만국(만국)공원으로 통칭되었다. 188년 러시아 측량기사 사바틴 (Sabatin) 이 설계하여 만든 우리나라 최고의 서양식공원으로 서울의 탑골(파고다)공원 보다 9년이 앞선다. 이 공원에는 한국 최초의 양관 (洋館) 으로 알려진 독일 세창양행의 숙사와 개항초기 인천해관장을 역임했전 영국인 존스톤의 별장, 당시 각국인들의 사교장이 되었던 제물포구락부 등 근대건축물이 있어 유명하였다. 1914년 각국조계가 폐지되면서 일제는 지금의 인천여자 상업 고등학교자리에 신사(神社) 를세우고 그곳을 동공원 (東公園) 만국공원은 서공원 (西公園) 으로 불렀다. 광복 후 다시 만국공원으로 불렀다가, 한국전쟁을 겪고 난 1957년 개천절에 이곳에 맥아더 동상 제막식을 가지면서 자유공원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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