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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러시아 출신의 한국사학자 박노자가 들려주는
혁명의 뜨거운 열기와 쇠퇴 그리고 이후의 이야기
소련의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자랐고 페레스트로이카를 거쳐 러시아연방에서 살다가 한국으로 귀화한 역사학자 박노자, 그는 과연 러시아 혁명을 어떻게 바라고보 있을까? 이론가로서의 시각에 경험적 관찰까지 더해진 독특한 러시아 혁명사를 선보인다.
이 책은 러시아 혁명의 한가운데 있었으며 혁명 이후 소비에트를 이끌었던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을 중심으로 혁명의 전후 맥락을 복원해낸다.인물을 중심으로 엮어냈기에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혁명의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다. 또 하나 다른 러시아 혁명사 책들에 비해 이 책이 주목하는 것은 이 혁명의 여파와 영향이다. 사회주의 실험의 중심에 있던 러시아는 유라시아를 비롯해 전 세계에 혁명의 기운을 전파시켰다. 대한제국을 거쳐 일제강점기를 경유한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사학자 박노자는 우리에게 머나먼 타국에서 벌어진 과거의 사건으로 여겨지는 러시아 혁명이 실제로 우리와 어떻게 결부되어 있는지를 다양한 사례들로 보여준다. 물론 100년 전과 비교해본다면, 세상은 변했다. 혁명을 상상하는 틀 또한 바뀌었다. 그러하기에 이 책은 오래된 과거 가운데서 현재까지 빛을 발하는 것들에 눈길을 돌린다. 혁명의 긍정성과 문제성을 동시에 조망하면서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제시하는 희망의 씨앗이다.
혁명의 뜨거운 열기와 쇠퇴 그리고 이후의 이야기
소련의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자랐고 페레스트로이카를 거쳐 러시아연방에서 살다가 한국으로 귀화한 역사학자 박노자, 그는 과연 러시아 혁명을 어떻게 바라고보 있을까? 이론가로서의 시각에 경험적 관찰까지 더해진 독특한 러시아 혁명사를 선보인다.
이 책은 러시아 혁명의 한가운데 있었으며 혁명 이후 소비에트를 이끌었던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을 중심으로 혁명의 전후 맥락을 복원해낸다.인물을 중심으로 엮어냈기에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혁명의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다. 또 하나 다른 러시아 혁명사 책들에 비해 이 책이 주목하는 것은 이 혁명의 여파와 영향이다. 사회주의 실험의 중심에 있던 러시아는 유라시아를 비롯해 전 세계에 혁명의 기운을 전파시켰다. 대한제국을 거쳐 일제강점기를 경유한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사학자 박노자는 우리에게 머나먼 타국에서 벌어진 과거의 사건으로 여겨지는 러시아 혁명이 실제로 우리와 어떻게 결부되어 있는지를 다양한 사례들로 보여준다. 물론 100년 전과 비교해본다면, 세상은 변했다. 혁명을 상상하는 틀 또한 바뀌었다. 그러하기에 이 책은 오래된 과거 가운데서 현재까지 빛을 발하는 것들에 눈길을 돌린다. 혁명의 긍정성과 문제성을 동시에 조망하면서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제시하는 희망의 씨앗이다.
목차
머리말 _러시아 혁명, 미완의 해방 프로젝트
1강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이상적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다
2강 레온 트로츠키, 영구적인 세계 혁명을 위하여
3강 폭력적인 고속 성장의 꿈을 좆은 스탈린 체제
4강 급진과 온건의 갈림길에 선 유럽의 좌파 정당들
5강 아시아에 밀어닥친 러시아 혁명의 물결
6강 사회주의 혁명을 뒤따라온 적색 개발주의
찾아보기
1강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이상적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다
2강 레온 트로츠키, 영구적인 세계 혁명을 위하여
3강 폭력적인 고속 성장의 꿈을 좆은 스탈린 체제
4강 급진과 온건의 갈림길에 선 유럽의 좌파 정당들
5강 아시아에 밀어닥친 러시아 혁명의 물결
6강 사회주의 혁명을 뒤따라온 적색 개발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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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러시아에서 노동자들은 잔업을 포함해 하루 10~11시간의 고강도 노동에 시달렸고, 비좁은 셋집에서 살았으며, 권위주의적인 공장 당국의 ‘갑질’에 끊임없이 시달렸고, 불경기라도 닥쳐오면 정리해고를 당하는 게 수순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러시아의 준주변부적 자본주의는 그야말로 지옥이었어요. 한번 노동자가 된 이상 그들에게는 신분 상승의 가능성이 거의 없었으며, 집안에 고등학교(김나지움)나 대학 입학에 필요한 사교육을 시킬 만한 돈이 없는 이상 아이들도 평생 세습 노동자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장시간의 고강도 노동, 하우스 푸어로서의 고달픈 삶, 회사의 ‘갑질’, 신분 불안, 가난과 중노동의 대물림……. 이 모든 게 오늘날 대한민국 상황에 대한 간추린 묘사처럼 들리지 않는지요?
레닌은 이 노동자들에게 더 이상 지옥과 같은 조건에서 노동을 팔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사회, 즉 사회주의의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트로츠키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상실돼가는 민주성에 대한 자각을 일깨우려 했습니다. 스탈린은 국가 주도 개발의 붐 속에서 신분 상승의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각각의 시기와 상황에 따라 노동자들 일부는 레닌을, 트로츠키를, 또 스탈린을 따르기도 했지요. 스탈린이 건설한 사회는 혁명이 내걸었던 애당초의 약속에 비해 훨씬 보수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 p.7
레닌은 근대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해 탁월한 분석을 한 급진적 혁명가이자 사상가입니다. 자본가와 전쟁의 관계, 평화운동의 모순, 전쟁과 식민지 문제에 있어서 온건 사민주의자의 위선 등에 대한 그의 분석은 지금도 참조할 만하지요. 하지만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그가 선택한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 건설’ 논리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많아요. 당시의 러시아는 충분히 혁명이 일어날 만한 나라였고, 레닌에게는 이를 조직해낼 지도력이 있었습니다. 그는 동물적이라고 할 법한 정치 감각으로 이런 선택을 했고, 이는 당대 러시아의 현실에 부합하는 측면이 있었어요. 하지만 혁명기를 거쳐 시작된 새로운 국가 건설 사업은, 분명 근대적 총동원 전쟁의 혁명적 연장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레닌의 ‘무장 혁명 후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 건설’ 등식을 대치할 만한 대안은 무엇일까요? 뚜렷한 답을 찾기는 어렵지만, 이상적인 대안이 있다면 그것은 세계적인 차원에서의 아주 격렬하지만 대중적이고 민주적인 반항 정도일 겁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총파업 노선처럼 민중들이 위계질서를 가진 폭력 조직을 만들 필요가 없는 경우겠지요. 하지만 동시다발적인 세계적 총파업은 쉽게 조직되는 게 아닙니다. 인터넷이 전 세계에 보급되면서 여러 나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반전 평화 시위를 하기도 하니, 민중들이 서로 보조를 맞추는 게 예전보다는 수월해졌지만요. 레닌이 꺼내든 잔혹한 수단이나 내재적으로 너무나 문제가 많은 메커니즘인 ‘국가’에 호소하지 않으면서 민주적이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같은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까. 이것이 앞으로 우리가 찾아나가야 할 과제일 겁니다. --- p.70~71
우리는 트로츠키를 역사적 패배자로 봐야 할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소련이 몰락한 뒤, 한국에서는 소련의 사회주의를 따르겠다는 명분이 사라지면서 그 틈새를 주사파가 파고듭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스탈린의 폭정이 널리 알려지면서 그렇잖아도 관료화되었던 공산당들의 활동이 위축되지요. 하지만 서유럽을 중심으로 민족과 국민이라는 개념에 아랑곳하지 않았던 트로츠키가 새로운 생명력을 얻어나갑니다. 군사 공격이 잦아지고 세계 체제가 크게 흔들리는 신자유주의의 광풍 앞에서 트로츠키가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온 거예요.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레닌이나 스탈린보다 생명력이 강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구미권 트로츠키주의 세력들의 분열 경향과 교조주의, 노동계급 사이에서의 대중성 부족 등은 문제였지만요. --- p.106
소련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사회주의는 정치 영역의 존재를 기본 전제로 삼습니다. 국민 모두가 정치의 주체가 되어 자유롭게 활동을 펼치며 민주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하지요. 물론 이는 선진화된 부르주아 사회에서도 어려운 일이지만요. 1927년까지의 소련에는 그나마 제한적인 정치 영역이 남아 있었지만, 이후로는 모두 사라져버렸습니다. 지하 서클 정도만 그나마 남아 있었지요. 지하에서 활동한 이들은 대부분 혁명이 배반당했으며 진정한 공산주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습니다. 정치 영역이 국가에 의해 잠식되고 그나마 남은 정치는 모두 지하화되었던 1980년대의 남한과도 유사한 상황이었지요. 소련의 지하에서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를 찾자는 공산주의의 붐이 일었던 것처럼 남한의 지하에서는 소련이라는 붐이 일었던 것이고요. ---p.152
스탈린 체제는 분명 억압적이었지만, 제정러시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대민 포섭 능력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체제에 포섭된 대중들은 억압을 느꼈지만, 그에 대한 불만을 정치적으로 표출할 수 없었어요. 결국 스탈린 치하의 소련 체제는 사회주의라기보다는 대민 포섭 능력이 뛰어나면서 고속 압축적 성장을 지향하는 국가 다누이의 비(非)시장적 개발주의로 규정하는 게 정확할 겁니다. ---p.161
공산주의 운동의 혁명적 동력이 20세기 아시아의 모습을 완전히 바꾼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잠재적 가능성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공산 혁명이 아시아에 뚜렷한 영향을 미친 것은 공산주의 운동의 국제적 성격과 연관될 거예요. 공산주의 운동은 세계적인 혁명 프로젝트를 추진하려 했고, 그만큼 민중을 동원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급진적인 구호와 정책을 함께 제시했던 겁니다. ---p.242
적색 개발주의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혁명을 경험한 주변부와 준주변부의 특수한 개발 형태입니다. 그런데 관료들이 개발을 주도하다 보면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자본가로 변모하기 때문에 이 형태가 지속되기는 어려워요. 집권 세력의 입장서는 사적 소유권이 확보되지 않는 사회를 오래 견딜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역사적으로 볼 때 적색 개발주의는 길어야 70-80년 정도 되는 제한된 시기에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비시장적인 적색 개발주의는 사회주이라는 간판을 내걸지만 실제로는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사회주의로 나가지 않습니다. 진정한 사회주의를 원하던 이들은 체제 밖으로 내쳐지면서 상당수는 도륙을 당하지요. 집권 관료들은 사회주의라는 간판은 보존하지만 실제로는 경제개발을 해나가고요. 이 과정에서 사회의 일부 계층, 특히 농민들은 상당한 착취를 당합니다. 하지만 국가가 기업 대신 개발의 주체로 나서면서 중앙집권적 통제가 이뤄질 때는 투자 효율성이 높고 개발 속도도 빠릅니다. 또한 과거의 공동체가 도시에 재현되면서 민중들은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민중들 역시 이런 체제를 열렬히 반기고요. 기본적으로는 다수의 동의 기반을 확보한 체제로 봐야 할 거예요.
레닌은 이 노동자들에게 더 이상 지옥과 같은 조건에서 노동을 팔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사회, 즉 사회주의의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트로츠키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상실돼가는 민주성에 대한 자각을 일깨우려 했습니다. 스탈린은 국가 주도 개발의 붐 속에서 신분 상승의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각각의 시기와 상황에 따라 노동자들 일부는 레닌을, 트로츠키를, 또 스탈린을 따르기도 했지요. 스탈린이 건설한 사회는 혁명이 내걸었던 애당초의 약속에 비해 훨씬 보수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 p.7
레닌은 근대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해 탁월한 분석을 한 급진적 혁명가이자 사상가입니다. 자본가와 전쟁의 관계, 평화운동의 모순, 전쟁과 식민지 문제에 있어서 온건 사민주의자의 위선 등에 대한 그의 분석은 지금도 참조할 만하지요. 하지만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그가 선택한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 건설’ 논리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많아요. 당시의 러시아는 충분히 혁명이 일어날 만한 나라였고, 레닌에게는 이를 조직해낼 지도력이 있었습니다. 그는 동물적이라고 할 법한 정치 감각으로 이런 선택을 했고, 이는 당대 러시아의 현실에 부합하는 측면이 있었어요. 하지만 혁명기를 거쳐 시작된 새로운 국가 건설 사업은, 분명 근대적 총동원 전쟁의 혁명적 연장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레닌의 ‘무장 혁명 후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 건설’ 등식을 대치할 만한 대안은 무엇일까요? 뚜렷한 답을 찾기는 어렵지만, 이상적인 대안이 있다면 그것은 세계적인 차원에서의 아주 격렬하지만 대중적이고 민주적인 반항 정도일 겁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총파업 노선처럼 민중들이 위계질서를 가진 폭력 조직을 만들 필요가 없는 경우겠지요. 하지만 동시다발적인 세계적 총파업은 쉽게 조직되는 게 아닙니다. 인터넷이 전 세계에 보급되면서 여러 나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반전 평화 시위를 하기도 하니, 민중들이 서로 보조를 맞추는 게 예전보다는 수월해졌지만요. 레닌이 꺼내든 잔혹한 수단이나 내재적으로 너무나 문제가 많은 메커니즘인 ‘국가’에 호소하지 않으면서 민주적이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같은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까. 이것이 앞으로 우리가 찾아나가야 할 과제일 겁니다. --- p.70~71
우리는 트로츠키를 역사적 패배자로 봐야 할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소련이 몰락한 뒤, 한국에서는 소련의 사회주의를 따르겠다는 명분이 사라지면서 그 틈새를 주사파가 파고듭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스탈린의 폭정이 널리 알려지면서 그렇잖아도 관료화되었던 공산당들의 활동이 위축되지요. 하지만 서유럽을 중심으로 민족과 국민이라는 개념에 아랑곳하지 않았던 트로츠키가 새로운 생명력을 얻어나갑니다. 군사 공격이 잦아지고 세계 체제가 크게 흔들리는 신자유주의의 광풍 앞에서 트로츠키가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온 거예요.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레닌이나 스탈린보다 생명력이 강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구미권 트로츠키주의 세력들의 분열 경향과 교조주의, 노동계급 사이에서의 대중성 부족 등은 문제였지만요. --- p.106
소련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사회주의는 정치 영역의 존재를 기본 전제로 삼습니다. 국민 모두가 정치의 주체가 되어 자유롭게 활동을 펼치며 민주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하지요. 물론 이는 선진화된 부르주아 사회에서도 어려운 일이지만요. 1927년까지의 소련에는 그나마 제한적인 정치 영역이 남아 있었지만, 이후로는 모두 사라져버렸습니다. 지하 서클 정도만 그나마 남아 있었지요. 지하에서 활동한 이들은 대부분 혁명이 배반당했으며 진정한 공산주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습니다. 정치 영역이 국가에 의해 잠식되고 그나마 남은 정치는 모두 지하화되었던 1980년대의 남한과도 유사한 상황이었지요. 소련의 지하에서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를 찾자는 공산주의의 붐이 일었던 것처럼 남한의 지하에서는 소련이라는 붐이 일었던 것이고요. ---p.152
스탈린 체제는 분명 억압적이었지만, 제정러시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대민 포섭 능력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체제에 포섭된 대중들은 억압을 느꼈지만, 그에 대한 불만을 정치적으로 표출할 수 없었어요. 결국 스탈린 치하의 소련 체제는 사회주의라기보다는 대민 포섭 능력이 뛰어나면서 고속 압축적 성장을 지향하는 국가 다누이의 비(非)시장적 개발주의로 규정하는 게 정확할 겁니다. ---p.161
공산주의 운동의 혁명적 동력이 20세기 아시아의 모습을 완전히 바꾼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잠재적 가능성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공산 혁명이 아시아에 뚜렷한 영향을 미친 것은 공산주의 운동의 국제적 성격과 연관될 거예요. 공산주의 운동은 세계적인 혁명 프로젝트를 추진하려 했고, 그만큼 민중을 동원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급진적인 구호와 정책을 함께 제시했던 겁니다. ---p.242
적색 개발주의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혁명을 경험한 주변부와 준주변부의 특수한 개발 형태입니다. 그런데 관료들이 개발을 주도하다 보면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자본가로 변모하기 때문에 이 형태가 지속되기는 어려워요. 집권 세력의 입장서는 사적 소유권이 확보되지 않는 사회를 오래 견딜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역사적으로 볼 때 적색 개발주의는 길어야 70-80년 정도 되는 제한된 시기에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비시장적인 적색 개발주의는 사회주이라는 간판을 내걸지만 실제로는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사회주의로 나가지 않습니다. 진정한 사회주의를 원하던 이들은 체제 밖으로 내쳐지면서 상당수는 도륙을 당하지요. 집권 관료들은 사회주의라는 간판은 보존하지만 실제로는 경제개발을 해나가고요. 이 과정에서 사회의 일부 계층, 특히 농민들은 상당한 착취를 당합니다. 하지만 국가가 기업 대신 개발의 주체로 나서면서 중앙집권적 통제가 이뤄질 때는 투자 효율성이 높고 개발 속도도 빠릅니다. 또한 과거의 공동체가 도시에 재현되면서 민중들은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민중들 역시 이런 체제를 열렬히 반기고요. 기본적으로는 다수의 동의 기반을 확보한 체제로 봐야 할 거예요.
---p.272~273
출판사 리뷰
100년 전 러시아에서 벌어진 뜨거운 혁명의 순간,
그 찰나들은 어떤 고뇌와 희망을 담고 있었나
‘러시아 혁명’이라고 하면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와는 동떨어진 역사적 사건으로만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박노자는 우선 그 오래전 혁명의 태동과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레닌과 트로츠키, 그리고 스탈린이라는 인물을 내세운다. 이들의 역동적인 삶을 통해 혁명의 전후 맥락이 묘사되고 있는지라 사건과 사상이 결부되면서 러시아 혁명은 입체적으로 그려진다.
물론 이러한 혁명가들 외에 이름 붙여지지 않은 혁명 주역들에 대한 묘사 역시 이어진다. 혁명에 가담한 이들 대다수는 귀족과 부호 등이 소유한 농장을 몰수해 이를 농민 공동체 구성원들과 평등하게 분배하려 했던 농민들이었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어떤 희망도 보지 못했던 러시아 도심의 대기업 숙련공들이었다. 가혹한 노동에 혹사당하고, 귀족이나 공장 당국의 ‘갑질’에 시달리던 이들.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아내더라도 가난과 중노동을 자식에게 대물림해야 했던 이들. 이들이 처해 있는 상황은, 어찌 보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열악한 처지에 있는 이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종족적 소수자들 역시 이 혁명에 가담한다. 민족적 억압과 경제적 초과 착취의 중첩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소수자들에게 혁명이란 자신의 해방을 꿈꿀 가능성을 담고 있는 희망이었다. 트로츠키가 유대인 출신이고 스탈린이 가난한 그루지아 출신이었던 것, 그리고 연해주 지역 고려 사람들이 볼셰비키 혁명에 열광했던 것은 이런 맥락에서 염두에 둘 사실이다. 사회 비판적 지식인들은 엄혹한 현실에 개입해 들어가며 혁명의 불꽃을 피워낸다. 러시아 혁명의 한가운데 있던 레닌은 이들에게 더 이상 지옥 같은 조건에서 노동을 팔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사회, 즉 사회주의의 비전을 제시했다. 트로츠키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상실돼가는 민주성에 대한 자각을 일깨우려 했다. 스탈린은 국가 주도 개발의 붐 속에서 새로운 신분 상승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즉, 이 일련의 과정은 가혹한 현실의 사슬을 끊고자 하는 하나의 대응으로서 진행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러시아 혁명이 이러한 긍정적 교훈만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혁명은 1920년을 전후해 사실상 퇴보의 길을 걸어간다. 혁명 지도자에서 국가 지도자로 변모한 이들은 일사분란하고 위계질서적인 ‘통제’를 내세웠고, 국가기관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감시는 잘 이뤄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스탈린 시대에 이르면 혁명이 내걸었던 애초의 약속에 비해 훨씬 보수적인 사회가 되었으며. 민주성보다는 개발주의적 담론이 주류를 차지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지금 우리가 들여다봐야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러시아 혁명은 좌초되었으며 소비에트의 시도는 실패했기에 패배의 과거로만 바라보아야 할까. 박노자가 혁명사를 들여다보면서 내려는 길은, 혁명의 빛만을 숭배하는 것도 혁명의 그림자만을 낙인찍는 것도 아니다. 혁명이 일어나게 된 가혹한 현실을 타파하면서 동시에 과거의 혁명이 저질렀던 오류를 어떻게 하면 넘어설 수 있을까. 박노자의 초점을 바로 거기에 맞춰 있다.
유럽과 아시아 등 전 세계로 이어진 혁명의 여파,
우리에게 러시아 혁명은 어떻게 파고들었을까
그렇다면 이 혁명의 여파는 어떻게 전파되었을까. 박노자는 우선 러시아와 가장 영향을 많이 주고받았던 유럽,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상황을 진단한다. 이는 곧 유럽 진보 정당의 간략한 역사를 살펴보는 작업이기도 하다. 세계대전이라는 큰 전쟁을 겪긴 하지만 비교적 경제적·사회적으로 안정된 체제가 유지되었던 유럽의 좌파 정당들이 급진과 온건 사이에서 망설이며 갈등하는 과정이 묘사된다.
러시아 혁명의 주역들은 유럽을 망명지로 자주 드나들었고 정당 차원에서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지만, 혁명의 여파는 유럽에만 머물지 않았다. 열강에 속했지만 서구에 비해 사회 모순이 컸고 외국에 대한 의존도가 컸던 러시아의 상황은 아시아와 꽤 유사했다. 그러했기에 아시아의 혁명적 지식인들은 서구 열강보다 러시아를 좀더 가까운 존재로 여기면서 이 혁명에 주목했다. 이외에 러시아가 이란, 중국, 조선 등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던 점도 혁명이 전파되는 데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박노자는 그간 많은 주목을 받지 못했던 아시아의 혁명들에 대해서도 러시아 혁명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의 줄기를 엮어낸다.
우리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일제강점기만 보더라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1925년부터 모스크바에 특파원을 파견할 정도로 조선은 사회적으로 러시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다. 특파원들이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사회주의에 관심이 많았고, 소련의 산업화에 대해서는 조선의 부르주아 미디어들 역시 호의적이었다. 이런 지면에서는 소련의 민중 교육 상황이나 소수민족 우대 정책, 성평등 정책, 그리고 근대적인 산업화에 대한 동경을 여실히 드러냈다. 물론 식민지 지식인들의 혁명에 대한 관심 또한 상당했다. 이는 직접적으로 분단으로 연결돼 남북한의 체제 경쟁으로까지 이어지는 맥락 속에서 파악해야 할 것이다.
이때 박노자가 주목하는 것은 스탈린 시대의 ‘적색 개발주의’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박정희가 주도한 ‘백색 개발주의’와 견주며 비교된다. 편견을 걷어내고 본다면, 소비에트는 유럽을 비롯한 열강과 비교하더라도 훨씬 빠른 시기에 기초적인 복지 제도를 완비하고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을 실시하면서 노동자와 농민의 신분 상승을 어느 정도 보장하는 시스템을 갖췄다. 이는 박정희의 백색 개발주의가 엄청난 경제성장을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만들어내지 못한, 어쩌면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가 이뤄내지 못한 성과다. 물론 적색 개발주의는 서서히 저물어갔고, 그 개발을 주도했던 소련 관료들은 자본주의로의 체제 전환을 이뤄냈지만 말이다. 러시아 혁명 당시 안고 있던 문제를 지금의 우리가 여전히 안고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혁명이 범한 우를 넘어서면서 지금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데 이러한 비교는 상당히 유용하지 않을까.
러시아에서의 경험에 한국사 연구자로서의 실증을 더한
지금 우리가 참조해야 할 바로 그 혁명사
한편 한국사 연구자로서 박노자의 면모는 러시아 혁명을 다룬 이 책에서도 빛을 발한다. 예를 들면, 그는 혁명 전 제정러시아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윤치호의 기록을 끄집어낸다. 윤치호가 조선사절단으로 재정러시아의 황제를 만나러 가서 섬세하고 예리하게 당시 러시아의 상황을 관찰하고 기록해둔 자료들은, 박노자라는 한국사학자를 만나면서 제정러시아의 입체적인 상황을 조망하는 데 이용되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여운형이 쓴 「모스크바의 인상」이란 여행기에 나오는, 트로츠키의 열변에 대한 목격담도 상당히 흥미롭다. 혁명기란 열변가의 시대이며, 트로츠키는 당대의 대표적인 열변가였다. 1922년 초반에 열린 극동노력자대회에 초청받은 여운형은 그 전해에 유라시아 대륙 횡단열차를 타고 모스크바에 가서 바로 이 트로츠키의 연설을 듣고서 생생하게 기록을 남겨두었다. 이처럼 러시아와 결부된 한국사의 다양한 사료들은 러시아 혁명사와 결부되어 소중한 꽃을 피워낸다.
물론 레닌 이름을 딴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나 혁명의 이후를 살아냈던 박노자의 생생한 목격담과 경험담 역시 이 독특한 혁명사에 흥미를 더해준다. 우크라이나의 극심한 아사 사태를 전해주는 조부모의 이야기를 비롯해 어린 시절 학교에서 배웠던 레닌에 대한 이야기까지, 실제로 그 현장을 살아냈던 이만이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가 더해져 살아 숨 쉬는 사건으로서 혁명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 찰나들은 어떤 고뇌와 희망을 담고 있었나
‘러시아 혁명’이라고 하면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와는 동떨어진 역사적 사건으로만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박노자는 우선 그 오래전 혁명의 태동과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레닌과 트로츠키, 그리고 스탈린이라는 인물을 내세운다. 이들의 역동적인 삶을 통해 혁명의 전후 맥락이 묘사되고 있는지라 사건과 사상이 결부되면서 러시아 혁명은 입체적으로 그려진다.
물론 이러한 혁명가들 외에 이름 붙여지지 않은 혁명 주역들에 대한 묘사 역시 이어진다. 혁명에 가담한 이들 대다수는 귀족과 부호 등이 소유한 농장을 몰수해 이를 농민 공동체 구성원들과 평등하게 분배하려 했던 농민들이었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어떤 희망도 보지 못했던 러시아 도심의 대기업 숙련공들이었다. 가혹한 노동에 혹사당하고, 귀족이나 공장 당국의 ‘갑질’에 시달리던 이들.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아내더라도 가난과 중노동을 자식에게 대물림해야 했던 이들. 이들이 처해 있는 상황은, 어찌 보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열악한 처지에 있는 이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종족적 소수자들 역시 이 혁명에 가담한다. 민족적 억압과 경제적 초과 착취의 중첩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소수자들에게 혁명이란 자신의 해방을 꿈꿀 가능성을 담고 있는 희망이었다. 트로츠키가 유대인 출신이고 스탈린이 가난한 그루지아 출신이었던 것, 그리고 연해주 지역 고려 사람들이 볼셰비키 혁명에 열광했던 것은 이런 맥락에서 염두에 둘 사실이다. 사회 비판적 지식인들은 엄혹한 현실에 개입해 들어가며 혁명의 불꽃을 피워낸다. 러시아 혁명의 한가운데 있던 레닌은 이들에게 더 이상 지옥 같은 조건에서 노동을 팔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사회, 즉 사회주의의 비전을 제시했다. 트로츠키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상실돼가는 민주성에 대한 자각을 일깨우려 했다. 스탈린은 국가 주도 개발의 붐 속에서 새로운 신분 상승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즉, 이 일련의 과정은 가혹한 현실의 사슬을 끊고자 하는 하나의 대응으로서 진행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러시아 혁명이 이러한 긍정적 교훈만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혁명은 1920년을 전후해 사실상 퇴보의 길을 걸어간다. 혁명 지도자에서 국가 지도자로 변모한 이들은 일사분란하고 위계질서적인 ‘통제’를 내세웠고, 국가기관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감시는 잘 이뤄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스탈린 시대에 이르면 혁명이 내걸었던 애초의 약속에 비해 훨씬 보수적인 사회가 되었으며. 민주성보다는 개발주의적 담론이 주류를 차지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지금 우리가 들여다봐야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러시아 혁명은 좌초되었으며 소비에트의 시도는 실패했기에 패배의 과거로만 바라보아야 할까. 박노자가 혁명사를 들여다보면서 내려는 길은, 혁명의 빛만을 숭배하는 것도 혁명의 그림자만을 낙인찍는 것도 아니다. 혁명이 일어나게 된 가혹한 현실을 타파하면서 동시에 과거의 혁명이 저질렀던 오류를 어떻게 하면 넘어설 수 있을까. 박노자의 초점을 바로 거기에 맞춰 있다.
유럽과 아시아 등 전 세계로 이어진 혁명의 여파,
우리에게 러시아 혁명은 어떻게 파고들었을까
그렇다면 이 혁명의 여파는 어떻게 전파되었을까. 박노자는 우선 러시아와 가장 영향을 많이 주고받았던 유럽,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상황을 진단한다. 이는 곧 유럽 진보 정당의 간략한 역사를 살펴보는 작업이기도 하다. 세계대전이라는 큰 전쟁을 겪긴 하지만 비교적 경제적·사회적으로 안정된 체제가 유지되었던 유럽의 좌파 정당들이 급진과 온건 사이에서 망설이며 갈등하는 과정이 묘사된다.
러시아 혁명의 주역들은 유럽을 망명지로 자주 드나들었고 정당 차원에서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지만, 혁명의 여파는 유럽에만 머물지 않았다. 열강에 속했지만 서구에 비해 사회 모순이 컸고 외국에 대한 의존도가 컸던 러시아의 상황은 아시아와 꽤 유사했다. 그러했기에 아시아의 혁명적 지식인들은 서구 열강보다 러시아를 좀더 가까운 존재로 여기면서 이 혁명에 주목했다. 이외에 러시아가 이란, 중국, 조선 등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던 점도 혁명이 전파되는 데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박노자는 그간 많은 주목을 받지 못했던 아시아의 혁명들에 대해서도 러시아 혁명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의 줄기를 엮어낸다.
우리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일제강점기만 보더라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1925년부터 모스크바에 특파원을 파견할 정도로 조선은 사회적으로 러시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다. 특파원들이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사회주의에 관심이 많았고, 소련의 산업화에 대해서는 조선의 부르주아 미디어들 역시 호의적이었다. 이런 지면에서는 소련의 민중 교육 상황이나 소수민족 우대 정책, 성평등 정책, 그리고 근대적인 산업화에 대한 동경을 여실히 드러냈다. 물론 식민지 지식인들의 혁명에 대한 관심 또한 상당했다. 이는 직접적으로 분단으로 연결돼 남북한의 체제 경쟁으로까지 이어지는 맥락 속에서 파악해야 할 것이다.
이때 박노자가 주목하는 것은 스탈린 시대의 ‘적색 개발주의’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박정희가 주도한 ‘백색 개발주의’와 견주며 비교된다. 편견을 걷어내고 본다면, 소비에트는 유럽을 비롯한 열강과 비교하더라도 훨씬 빠른 시기에 기초적인 복지 제도를 완비하고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을 실시하면서 노동자와 농민의 신분 상승을 어느 정도 보장하는 시스템을 갖췄다. 이는 박정희의 백색 개발주의가 엄청난 경제성장을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만들어내지 못한, 어쩌면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가 이뤄내지 못한 성과다. 물론 적색 개발주의는 서서히 저물어갔고, 그 개발을 주도했던 소련 관료들은 자본주의로의 체제 전환을 이뤄냈지만 말이다. 러시아 혁명 당시 안고 있던 문제를 지금의 우리가 여전히 안고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혁명이 범한 우를 넘어서면서 지금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데 이러한 비교는 상당히 유용하지 않을까.
러시아에서의 경험에 한국사 연구자로서의 실증을 더한
지금 우리가 참조해야 할 바로 그 혁명사
한편 한국사 연구자로서 박노자의 면모는 러시아 혁명을 다룬 이 책에서도 빛을 발한다. 예를 들면, 그는 혁명 전 제정러시아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윤치호의 기록을 끄집어낸다. 윤치호가 조선사절단으로 재정러시아의 황제를 만나러 가서 섬세하고 예리하게 당시 러시아의 상황을 관찰하고 기록해둔 자료들은, 박노자라는 한국사학자를 만나면서 제정러시아의 입체적인 상황을 조망하는 데 이용되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여운형이 쓴 「모스크바의 인상」이란 여행기에 나오는, 트로츠키의 열변에 대한 목격담도 상당히 흥미롭다. 혁명기란 열변가의 시대이며, 트로츠키는 당대의 대표적인 열변가였다. 1922년 초반에 열린 극동노력자대회에 초청받은 여운형은 그 전해에 유라시아 대륙 횡단열차를 타고 모스크바에 가서 바로 이 트로츠키의 연설을 듣고서 생생하게 기록을 남겨두었다. 이처럼 러시아와 결부된 한국사의 다양한 사료들은 러시아 혁명사와 결부되어 소중한 꽃을 피워낸다.
물론 레닌 이름을 딴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나 혁명의 이후를 살아냈던 박노자의 생생한 목격담과 경험담 역시 이 독특한 혁명사에 흥미를 더해준다. 우크라이나의 극심한 아사 사태를 전해주는 조부모의 이야기를 비롯해 어린 시절 학교에서 배웠던 레닌에 대한 이야기까지, 실제로 그 현장을 살아냈던 이만이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가 더해져 살아 숨 쉬는 사건으로서 혁명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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