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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일본을 대표하는 논픽션 작가 호사카 마사야스
치밀한 연구로 파헤친 도조 히데키의 실체
이 책의 저자 호사카 마사야스는 다치바나 다카시, 사노 신이치 등과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논픽션 저널리스트로 손꼽힌다. 일본 근대사, 특히 쇼와사의 실증적 연구에 주력해 다양한 자료 조사와 관계자 인터뷰를 통해 150여 권의 저작물을 출간한 독보적인 작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수뇌부의 실상을 파헤친 저서 『쇼와 육군』은 한국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도조 히데키와 제2차 세계대전』(원제: 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은 그가 33세에 편집자 생활을 접고, 6년에 걸쳐 도조 히데키 시대의 자료와 관련자 수백 명을 취재해 도조 히데키의 실체를 드러낸 역작이다.
치밀한 연구로 파헤친 도조 히데키의 실체
이 책의 저자 호사카 마사야스는 다치바나 다카시, 사노 신이치 등과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논픽션 저널리스트로 손꼽힌다. 일본 근대사, 특히 쇼와사의 실증적 연구에 주력해 다양한 자료 조사와 관계자 인터뷰를 통해 150여 권의 저작물을 출간한 독보적인 작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수뇌부의 실상을 파헤친 저서 『쇼와 육군』은 한국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도조 히데키와 제2차 세계대전』(원제: 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은 그가 33세에 편집자 생활을 접고, 6년에 걸쳐 도조 히데키 시대의 자료와 관련자 수백 명을 취재해 도조 히데키의 실체를 드러낸 역작이다.
목차
저자 서문_005
옮긴이의 말_012
제1장 충실한 신봉자
아버지의 유산
서리 내린 밤의 그림자_25 | 아버지 히데노리의 경력_30 | 조슈벌에 대한 저항_37
러일전쟁 출정_46 |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의도_54 | 육군대학교 합격_63
군인으로 자립하다
「성규유집」, 그 아버지에 그 아들_69 | 야마시타 도모유키와 교우하다_75
바덴바덴의 밀약_82 | 우가키 군축에 저항하다_88 | ‘잇세키카이’의 탄생_96
힘을 얻는 고급장교
제1연대장 시절_103 | 취업알선위원회_110 | 3월 사건 이후_118
만주사변의 수습_124 | 황도파와 대립하다_133 | 제24여단장으로_140
나가타 군무국장의 참살_149
역풍에 맞서서
도조를 매장하라_157 | 2·26 사건, 그 후_165 | 제출하지 못한 사직원_171
도조병단의 이면에서_176 | 과감한 관동군 참모장_183 | 굴욕으로부터 탈출하다_193
제2장 낙백落魄 그리고 승룡承龍
실천하는 사람의 저주
참모차장과 육군차관의 충돌_201 | 부재증명의 나날들_207
‘물장사’는 딱 질색이다_214 | 육군상 도조와 외무상 마쓰오카 요스케의 밀월_219
육군성과 참모본부의 졸렬한 미국관_228 | 이시와라 간지와 충돌하다_234
투시력이 없는 집단
일미교섭, 오해의 시작_241 | 마쓰오카 구상의 붕괴_249
독일군의 소련 침공_259 | 자원부족론의 대두_267
그대는 더 이상 말하지 마라
환상 속의 일미 정상회담_276 | 성려에 떠는 어전회의_283
무너진 고노에의 기대_288 | ‘중국 철병’이 열쇠로……_294 | 도조 내각의 탄생_304
통곡하는 수상
격렬한 연락회의_318 | ‘을안’을 둘러싼 논쟁_327 | 독재로 기울다_334
들끓는 대미 강경 여론_339 | 일미 개전에 대한 공포_346
제3장 패배의 궤적
싸움의 시작
홍수를 이루는 도조 찬가_363 | 거만해지는 지도자_373 | 지식인과 대동아공영권_378
둘리틀 폭격의 파문_386
쾌속 진격에서 정체 상태로
도조 시대의 제국 의회_400 | 과달카날 공방의 이면_409
비방과 중상의 소용돌이_419 | 옥쇄의 길_426 | 억지스런 의원 설득_432
야마모토 고주로쿠의 죽음_442 | 찬드라 보스와 만나다_448
나에 대한 반역은 폐하에 대한 반역이다
승리란 밸런스의 문제_458 | 절대국방권 구상_466 | 나카노 세이고의 자결_473
허망한 정신론으로 기울다_480 | 사술詐術을 이용한 참모총장 겸임_486
피로에 지친 국민_496 | 포위되는 도조 인맥_502
무대에서 사라지는 날
‘아호’ 작전의 실패_513 | 임박한 독일의 패전_521 | 중신들의 도각 공작_533
육군성과 참모본부에서 사라진 도조 색채_543
제4장 세뇌된 복역자
승조필근
4월 25일까지, 인내의 시간_555 | 도조를 배척하는 움직임_564
패전의 날_573 | 도조의 자살 미수_585
전쟁에 대해 모든 책임을 질 것
민주주의에 감탄하다_596 | 도조 조서의 내막_605
피고로서의 도조_615 | 진술서의 모두冒頭_626
상징으로서의 죽음
키난 검사의 초조감_636 | 도조의 개인 반증_643 | 교수형Death By Hanging _651
종교적 경지에 도달하다_660 | ‘나’에게 침잠하다_668
도조 히데키의 두 번째 죽음_680
참고문헌 _687
저자 후기 _697
문고판 저자 후기 _700
옮긴이의 말_012
제1장 충실한 신봉자
아버지의 유산
서리 내린 밤의 그림자_25 | 아버지 히데노리의 경력_30 | 조슈벌에 대한 저항_37
러일전쟁 출정_46 |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의도_54 | 육군대학교 합격_63
군인으로 자립하다
「성규유집」, 그 아버지에 그 아들_69 | 야마시타 도모유키와 교우하다_75
바덴바덴의 밀약_82 | 우가키 군축에 저항하다_88 | ‘잇세키카이’의 탄생_96
힘을 얻는 고급장교
제1연대장 시절_103 | 취업알선위원회_110 | 3월 사건 이후_118
만주사변의 수습_124 | 황도파와 대립하다_133 | 제24여단장으로_140
나가타 군무국장의 참살_149
역풍에 맞서서
도조를 매장하라_157 | 2·26 사건, 그 후_165 | 제출하지 못한 사직원_171
도조병단의 이면에서_176 | 과감한 관동군 참모장_183 | 굴욕으로부터 탈출하다_193
제2장 낙백落魄 그리고 승룡承龍
실천하는 사람의 저주
참모차장과 육군차관의 충돌_201 | 부재증명의 나날들_207
‘물장사’는 딱 질색이다_214 | 육군상 도조와 외무상 마쓰오카 요스케의 밀월_219
육군성과 참모본부의 졸렬한 미국관_228 | 이시와라 간지와 충돌하다_234
투시력이 없는 집단
일미교섭, 오해의 시작_241 | 마쓰오카 구상의 붕괴_249
독일군의 소련 침공_259 | 자원부족론의 대두_267
그대는 더 이상 말하지 마라
환상 속의 일미 정상회담_276 | 성려에 떠는 어전회의_283
무너진 고노에의 기대_288 | ‘중국 철병’이 열쇠로……_294 | 도조 내각의 탄생_304
통곡하는 수상
격렬한 연락회의_318 | ‘을안’을 둘러싼 논쟁_327 | 독재로 기울다_334
들끓는 대미 강경 여론_339 | 일미 개전에 대한 공포_346
제3장 패배의 궤적
싸움의 시작
홍수를 이루는 도조 찬가_363 | 거만해지는 지도자_373 | 지식인과 대동아공영권_378
둘리틀 폭격의 파문_386
쾌속 진격에서 정체 상태로
도조 시대의 제국 의회_400 | 과달카날 공방의 이면_409
비방과 중상의 소용돌이_419 | 옥쇄의 길_426 | 억지스런 의원 설득_432
야마모토 고주로쿠의 죽음_442 | 찬드라 보스와 만나다_448
나에 대한 반역은 폐하에 대한 반역이다
승리란 밸런스의 문제_458 | 절대국방권 구상_466 | 나카노 세이고의 자결_473
허망한 정신론으로 기울다_480 | 사술詐術을 이용한 참모총장 겸임_486
피로에 지친 국민_496 | 포위되는 도조 인맥_502
무대에서 사라지는 날
‘아호’ 작전의 실패_513 | 임박한 독일의 패전_521 | 중신들의 도각 공작_533
육군성과 참모본부에서 사라진 도조 색채_543
제4장 세뇌된 복역자
승조필근
4월 25일까지, 인내의 시간_555 | 도조를 배척하는 움직임_564
패전의 날_573 | 도조의 자살 미수_585
전쟁에 대해 모든 책임을 질 것
민주주의에 감탄하다_596 | 도조 조서의 내막_605
피고로서의 도조_615 | 진술서의 모두冒頭_626
상징으로서의 죽음
키난 검사의 초조감_636 | 도조의 개인 반증_643 | 교수형Death By Hanging _651
종교적 경지에 도달하다_660 | ‘나’에게 침잠하다_668
도조 히데키의 두 번째 죽음_680
참고문헌 _687
저자 후기 _697
문고판 저자 후기 _700
저자 소개
책 속으로
일본 우익의 비이성적인 행태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여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 비난을 넘어 냉철하게 비판하는 수준으로 나아가는 게 당연하다. 이와 함께 우리의 (무)의식 속에 일본 우익의 논리가 깃들어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금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자기에 대한 비판을 추동해내지 못하는 타자에 대한 비판은 자기합리화나 자기정당화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도조 히데키라는 ‘유령’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하려는 일본 사회를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보되 동시에 그 눈을 돌려 우리 사회는 어떤지 냉정하게 응시해야 할 것이다.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시 ‘도조 히데키들’의 광기에 휘둘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옮긴이의 말」중에서
지방유년학교라고 말은 하지만 군대 내부의 조직이다. (…) 일단 일이 발생하면 군인은 모든 것을 내던지고 사지死地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가르침을 깊이 새긴다. 너희들의 목숨은 대일본제국 천황 폐하께 바친 것이라고 철저하게 교육받는다. 「군인칙유軍人勅諭」 복창이 집요하게 요구된다. (…) 도조 집안에서는 할아버지 히데토시가 유년학교 제복을 입은 손자를 기다렸고, 다섯 명의 동생들도 자랑스러운 형의 모습을 보려고 바짝 다가앉았다. 그리고 히데노리가 경례 방법과 동작을 점검하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식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봤다. 저녁 식사 후에는 자신의 방으로 히데키를 불러들여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청일전쟁 후의 정세를 설명했다. 유럽은 일본보다 훨씬 앞서가고 있다, 이 나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각오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히데키의 의욕을 자극했다. 시야가 넓은 군인으로 키우려는 아버지의 영재교육이었다.
--- p.43~44
도조는 임시방편적인 상주는 하지 않았다. 그때까지의 보필자들이 결과만을 그것도 때로는 억지스럽다고 생각할 만한 내용을 상주한 것과 달리, 도조는 결과에 이르는 과정까지 보고했다. 물론 천황은 과정을 알아도 참견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도조는 자신의 상주 방법을 “폐하를 안심시켜드리는 것”이라고 부하에게 설명했다. 하지만 이것은 천황의 신뢰감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천황은 육군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처럼 신뢰할 수 없는 집단 안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보필자를 찾아냈던 것이다. 그것이 도조 히데키였다.
--- p.309
통수권이라는 추상적이고 무책임한 기구가 초래한 잔재를 청산할 숙명을 가진 수상의 눈물, 누군가 언젠가는 이 방에서 흘리지 않으면 안 될 눈물이었다. 그리고 이 숙명을 담당한 사람이 대일본제국 헌법 발포 이래 스물일곱 번째 수상인 도조 히데키였다. 더구나 아이러니하게도 모순을 청산할 사람으로 등장할 것을 재촉한 것은 육군상이었던 그 자신의 궤적 속에 있었다. 충실한 신봉자는 무작위無作爲의 모반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도조의 통곡은 한층 격해졌다. 정말이지 울부짖음이라고 할 만했다. 통곡은 자기성찰이 아니라 더욱 격렬한 전투심을 낳는다. 그리고 그 전투심이 그를 이해하는 벗으로서 당분간 함께 걸어가게 된다. 이제 시대는 슬픈 지도자의 손바닥 안에서 춤추기 시작했다.
--- p.360
도조와 해군상 시마다가 모습을 보였을 뿐인데도 출석자들의 환성이 일었다. 그들에게 도조는 구국의 영웅으로 비쳤던 것이다. 수상 관저에는 국민으로부터 전보와 전화가 쇄도했다. 중신 오카다 게이스케를 비롯하여 요인들도 잇달아 찾아와 함께 기뻐했다. 그것만이 아니다. 도조의 사저에도 사람들의 환호성이 밀려들었다.
--- p.368
일본 해군은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다. 어쩌다 이런 사태에 이르렀을까. 일본 해군의 무전을 모두 엿들은 미국은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선제공격을 가해왔던 것이다. 작전의 성공을 믿었던 군령부는 축하연을 준비하고 보고를 기다렸다. 그런데 현지에서는 좀처럼 낭보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해외 방송은 미국이 미드웨이에서 승리를 거둔 것처럼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일본 기동부대 섬멸.’ 믿기 어려운 보도를 접한 군령부는 충격에 휩싸였다.
--- p.407~408
그는 점점 더 정신론으로 기울게 되었고, 아케노明野 비행학교를 시찰할 때에는 열대여섯 살 먹은 소년들에게 “적의 비행기를 어떻게 격추시킬 것이냐”고 물었다. 이 물음에 소년들은 기관총으로, 고사포로 격추시키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도조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소년이 “저의 기백氣魄으로 격추시키겠습니다”라고 대답했을 때야 도조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것이 정답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비행학교 교관이나 하사관이 그런 대답에 만족스러워한다면 미담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전쟁을 지도하고 있는 최고책임자가 소년들과 이런 시기에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은 확실히 국민을 모욕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전쟁을 냉철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사태 수습에 힘을 쏟아야만 하는 때, 그는 오로지 자신의 충족감을 얻기 위해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 p.509
15일 아침 라디오 방송은 전 국민에게 정오에 중대한 발표가 있을 예정이니 라디오를 들으라고 호소했다. (…) 이윽고 천황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는 몇 분 만에 사라졌고, 아나운서가 ‘패전’에 이르기까지 경과를 담담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 ‘종전까지 일사봉공一死奉公했고 이제부터는 폐하의 명령대로 꿋꿋이 재건에 봉공할 것이다. 봉공의 방향이 다를 뿐 의의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 (…) 만약 이것을 도조의 본심이라고 한다면 무책임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어쩔 수가 없다. 정치 지도자로서 자신의 책임은 어떤 것이었을까.
--- p.581~582
도조는 일반 변론에 나서는 것은 단념했지만 그 대신 진술서 집필에 더욱 공을 들였다. (…) “황공하옵게도 늘 평화를 애호하시는 폐하의 책임도 아니며, 나의 지도 아래 애국의 열성에 불타 온 나라가 하나가 되어 희생을 견디며 활동한 국민의 죄도 아니고, 나의 지도 아래 일한 동료 여러분의 책임도 아니다. 전적으로 개전 당시 최고책임자였던 나의 책임이다” (…) 진술서 전체에 가득 찬 자학적 표현에는 오히려 전시 하 절정에 있을 때와 상통하는 뉘앙스가 포함되어 있는 듯했다.
---「옮긴이의 말」중에서
지방유년학교라고 말은 하지만 군대 내부의 조직이다. (…) 일단 일이 발생하면 군인은 모든 것을 내던지고 사지死地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가르침을 깊이 새긴다. 너희들의 목숨은 대일본제국 천황 폐하께 바친 것이라고 철저하게 교육받는다. 「군인칙유軍人勅諭」 복창이 집요하게 요구된다. (…) 도조 집안에서는 할아버지 히데토시가 유년학교 제복을 입은 손자를 기다렸고, 다섯 명의 동생들도 자랑스러운 형의 모습을 보려고 바짝 다가앉았다. 그리고 히데노리가 경례 방법과 동작을 점검하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식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봤다. 저녁 식사 후에는 자신의 방으로 히데키를 불러들여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청일전쟁 후의 정세를 설명했다. 유럽은 일본보다 훨씬 앞서가고 있다, 이 나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각오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히데키의 의욕을 자극했다. 시야가 넓은 군인으로 키우려는 아버지의 영재교육이었다.
--- p.43~44
도조는 임시방편적인 상주는 하지 않았다. 그때까지의 보필자들이 결과만을 그것도 때로는 억지스럽다고 생각할 만한 내용을 상주한 것과 달리, 도조는 결과에 이르는 과정까지 보고했다. 물론 천황은 과정을 알아도 참견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도조는 자신의 상주 방법을 “폐하를 안심시켜드리는 것”이라고 부하에게 설명했다. 하지만 이것은 천황의 신뢰감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천황은 육군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처럼 신뢰할 수 없는 집단 안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보필자를 찾아냈던 것이다. 그것이 도조 히데키였다.
--- p.309
통수권이라는 추상적이고 무책임한 기구가 초래한 잔재를 청산할 숙명을 가진 수상의 눈물, 누군가 언젠가는 이 방에서 흘리지 않으면 안 될 눈물이었다. 그리고 이 숙명을 담당한 사람이 대일본제국 헌법 발포 이래 스물일곱 번째 수상인 도조 히데키였다. 더구나 아이러니하게도 모순을 청산할 사람으로 등장할 것을 재촉한 것은 육군상이었던 그 자신의 궤적 속에 있었다. 충실한 신봉자는 무작위無作爲의 모반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도조의 통곡은 한층 격해졌다. 정말이지 울부짖음이라고 할 만했다. 통곡은 자기성찰이 아니라 더욱 격렬한 전투심을 낳는다. 그리고 그 전투심이 그를 이해하는 벗으로서 당분간 함께 걸어가게 된다. 이제 시대는 슬픈 지도자의 손바닥 안에서 춤추기 시작했다.
--- p.360
도조와 해군상 시마다가 모습을 보였을 뿐인데도 출석자들의 환성이 일었다. 그들에게 도조는 구국의 영웅으로 비쳤던 것이다. 수상 관저에는 국민으로부터 전보와 전화가 쇄도했다. 중신 오카다 게이스케를 비롯하여 요인들도 잇달아 찾아와 함께 기뻐했다. 그것만이 아니다. 도조의 사저에도 사람들의 환호성이 밀려들었다.
--- p.368
일본 해군은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다. 어쩌다 이런 사태에 이르렀을까. 일본 해군의 무전을 모두 엿들은 미국은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선제공격을 가해왔던 것이다. 작전의 성공을 믿었던 군령부는 축하연을 준비하고 보고를 기다렸다. 그런데 현지에서는 좀처럼 낭보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해외 방송은 미국이 미드웨이에서 승리를 거둔 것처럼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일본 기동부대 섬멸.’ 믿기 어려운 보도를 접한 군령부는 충격에 휩싸였다.
--- p.407~408
그는 점점 더 정신론으로 기울게 되었고, 아케노明野 비행학교를 시찰할 때에는 열대여섯 살 먹은 소년들에게 “적의 비행기를 어떻게 격추시킬 것이냐”고 물었다. 이 물음에 소년들은 기관총으로, 고사포로 격추시키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도조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소년이 “저의 기백氣魄으로 격추시키겠습니다”라고 대답했을 때야 도조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것이 정답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비행학교 교관이나 하사관이 그런 대답에 만족스러워한다면 미담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전쟁을 지도하고 있는 최고책임자가 소년들과 이런 시기에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은 확실히 국민을 모욕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전쟁을 냉철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사태 수습에 힘을 쏟아야만 하는 때, 그는 오로지 자신의 충족감을 얻기 위해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 p.509
15일 아침 라디오 방송은 전 국민에게 정오에 중대한 발표가 있을 예정이니 라디오를 들으라고 호소했다. (…) 이윽고 천황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는 몇 분 만에 사라졌고, 아나운서가 ‘패전’에 이르기까지 경과를 담담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 ‘종전까지 일사봉공一死奉公했고 이제부터는 폐하의 명령대로 꿋꿋이 재건에 봉공할 것이다. 봉공의 방향이 다를 뿐 의의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 (…) 만약 이것을 도조의 본심이라고 한다면 무책임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어쩔 수가 없다. 정치 지도자로서 자신의 책임은 어떤 것이었을까.
--- p.581~582
도조는 일반 변론에 나서는 것은 단념했지만 그 대신 진술서 집필에 더욱 공을 들였다. (…) “황공하옵게도 늘 평화를 애호하시는 폐하의 책임도 아니며, 나의 지도 아래 애국의 열성에 불타 온 나라가 하나가 되어 희생을 견디며 활동한 국민의 죄도 아니고, 나의 지도 아래 일한 동료 여러분의 책임도 아니다. 전적으로 개전 당시 최고책임자였던 나의 책임이다” (…) 진술서 전체에 가득 찬 자학적 표현에는 오히려 전시 하 절정에 있을 때와 상통하는 뉘앙스가 포함되어 있는 듯했다.
--- p.631
출판사 리뷰
도조 히데키를 통해
그의 시대를 들여다보다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1884~1948)는 전형적인 군인 출신 정치가로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주범으로 꼽힌다. 한때 도조는 대일본제국의 광영을 만천하에 떨칠 영웅이라며 일본인의 추앙을 받았지만, 연합군에 패전한 후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으로 몰락했다. 일본의 전후 세대에게 그는 ‘역겨운 멸시의 대상’으로 평가되어 왔고, 그의 행적은 일본 근대사의 치부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 호사카 마사야스는 바로 이 지점에서 ‘도조 히데키를 불편하고 역겨운 대상으로만 남겨두어도 괜찮은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도조 개인에 대한 매도는 역사적 지식에 근거하지 않고 행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과 일본은 물론 아시아 민중을 전쟁과 죽음으로 몰아넣은 근대 일본 정치의 한계를 도조 히데키나 몇몇 전범들에게만 뒤집어씌우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저자는 바로 이런 점에 문제의식을 느껴『도조 히데키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도조 히데키를 ‘보통명사’에서 ‘고유명사’로 되돌려놓고자 했다.
“이 군사 지도자는 정치과 군사의 관계에 대해 무지했고 국제법규에도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군인이야말로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생각한 그는 국가를 병영으로 바꾸고 국민을 군인화하는 것을 자신의 신념으로 여겼다. 그런 그는 적어도 20세기 전반의 각국 지도자들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인물이었다. 왜 이러한 지도자가 시대와 역사를 움직였던 것일까. 그것이 바로 이 나라가 가장 심각하게 반성해야 할 문제다.” -저자 서문 중에서
도조 히데키는 육군중앙유년학교,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의 요직을 두루 거쳐 수상에까지 오른 전형적인 ‘정치군인’이었다. 그의 화려한 이력은 1942년 수상, 육군상, 육군참모총장을 겸직하면서 절정에 이른다. 1937년 관동군 참모장으로 근무하면서 중일전쟁(지나사변)을 직접 경험한 그는 1941년 12월 진주만 폭격 이후 확대된 전쟁을 실질적으로 주도하면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전쟁의 폭풍우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리고 패전 후 열린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서 교수형 판결을 받고 1948년 12월 처형된다.
도조 히데키의 삶은 근대 일본의 전개 과정과 대체로 일치한다. 메이지 유신(1868년) 이후 서구를 모방해 근대화에 박차를 가한 일본을 아시아의 강국을 넘어 일약 세계의 열강으로 키운 힘은 전쟁이었다. 메이지 유신을 전후한 시기의 크고 작은 전쟁에서 시작하여 청일전쟁·러일전쟁·제1차 세계대전·만주사변·중일전쟁·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전쟁들은 근대 일본을 형성한 동력이 무엇이었는지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전쟁을 에너지원으로 삼는 국가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집단은 군인일 수밖에 없다.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교를 졸업한 후 군부의 지도자가 되는 길은 곧 일본의 지도자가 되는 길이기도 했다. 패전 이전에 수상을 지낸 사람 중 군인 출신이 적지 않다는 것도 이를 반증한다. 이러한 역사적 토양이 키운 도조 히데키는 근대 일본의 군사적·정치적 성격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저자 호사카 마사야스는 도조 히데키를 통해 근대 일본의 실상에 다가가고 싶었다고 말하거니와, 사실 총력전 시대를 주도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도조를 문제 삼는 것은 근대 일본의 정신사를 직시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도조 히데키와 제2차 세계대전』은 근대 일본의 역사뿐만 아니라 ‘대일본제국’의 제국주의적 폭력에 고통을 겪어야 했던 동아시아의 역사를 조명하는 데에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다.
도조 히데키 사후 74년
일본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패전 후 일본 국민들은 도조 히데키를 비난하면 면죄부라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말했다. 일본 정부는 연합국 최고사령부 총사령부(GHQ)의 요구를 반영해 ‘국제 평화를 위해 무력행사를 영구히 포기한다’는 평화 헌법을 공포했다. 일본은 그렇게 영원히 전쟁을 포기한 듯했다. 그러나 주권 국가로서 자위권이 있다는 명분으로 자위대라는 무장 조직이 설치되었고, 이 조직이 사실상 일본군 역할을 해오고 있었다. 수십 년 동안 자위대의 전력을 꾸준히 키워온 결과, 일본은 공식 군대 없이도 세계 5위 안에 드는 군사 대국이 되었다. 게다가 2010년대 이후로는 법안 개정 등을 통해 자위대의 운용 범위를 넓히려는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다. 자위대의 존재 자체만으로 일본이 다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화근이 남게 된 셈이다.
‘잃어버린 30년’으로 불리는 장기 경제 침체가 계속되면서 일본에서는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기보다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일게 되었다. 우파 민족주의가 90년대 이후 30여 년 동안 세력을 확대하면서 일본 사회는 우경화되어 가고 있다. 도조 히데키의 전쟁 범죄 행위가 ‘서양의 침탈 아래 신음하는 아시아 민족들을 해방하고 궁극적으로 아시아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대동아공영권’을 실현하기 위한 전쟁’이었다고 옹호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집권 여당인 자민당에서는 헌법에서 전쟁 금지 조항을 지우고 자위대를 국가 군대로 공식화하는 개헌을 추진하려고 애쓰고 있다. 개헌을 실행하기까지는 아직 많은 산이 남아 있지만,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이후 일본도 평화 헌법에서 벗어나 군대를 가지자는 여론이 늘고 있다. 일본이 다시 침략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토대가 완성된다면, 아시아 전체의 평화는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호사카 마사야스는 독재자를 낳은 역사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도조 히데키와 같은 지도자가 어떻게 일본 국민들의 정신과 육체를 길들이고 동원했는지를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상세하게 살펴야 한다. 그래야 ‘대일본제국’의 지배 논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조선’뿐만 아니라 아시아 여러 민족들을 전쟁과 죽음의 시간으로 내몬 폭력의 정체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더 나아가 그 폭력이 다시 우리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체, 세계를 다시 위험에 빠뜨리지 못하도록 경계하고 대비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도조 히데키와 제2차 세계대전』이 보여주는 그 시대의 역사는 우리에게 좋은 거울이 되어줄 것이다.
그의 시대를 들여다보다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1884~1948)는 전형적인 군인 출신 정치가로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주범으로 꼽힌다. 한때 도조는 대일본제국의 광영을 만천하에 떨칠 영웅이라며 일본인의 추앙을 받았지만, 연합군에 패전한 후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으로 몰락했다. 일본의 전후 세대에게 그는 ‘역겨운 멸시의 대상’으로 평가되어 왔고, 그의 행적은 일본 근대사의 치부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 호사카 마사야스는 바로 이 지점에서 ‘도조 히데키를 불편하고 역겨운 대상으로만 남겨두어도 괜찮은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도조 개인에 대한 매도는 역사적 지식에 근거하지 않고 행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과 일본은 물론 아시아 민중을 전쟁과 죽음으로 몰아넣은 근대 일본 정치의 한계를 도조 히데키나 몇몇 전범들에게만 뒤집어씌우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저자는 바로 이런 점에 문제의식을 느껴『도조 히데키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도조 히데키를 ‘보통명사’에서 ‘고유명사’로 되돌려놓고자 했다.
“이 군사 지도자는 정치과 군사의 관계에 대해 무지했고 국제법규에도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군인이야말로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생각한 그는 국가를 병영으로 바꾸고 국민을 군인화하는 것을 자신의 신념으로 여겼다. 그런 그는 적어도 20세기 전반의 각국 지도자들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인물이었다. 왜 이러한 지도자가 시대와 역사를 움직였던 것일까. 그것이 바로 이 나라가 가장 심각하게 반성해야 할 문제다.” -저자 서문 중에서
도조 히데키는 육군중앙유년학교,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의 요직을 두루 거쳐 수상에까지 오른 전형적인 ‘정치군인’이었다. 그의 화려한 이력은 1942년 수상, 육군상, 육군참모총장을 겸직하면서 절정에 이른다. 1937년 관동군 참모장으로 근무하면서 중일전쟁(지나사변)을 직접 경험한 그는 1941년 12월 진주만 폭격 이후 확대된 전쟁을 실질적으로 주도하면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전쟁의 폭풍우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리고 패전 후 열린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서 교수형 판결을 받고 1948년 12월 처형된다.
도조 히데키의 삶은 근대 일본의 전개 과정과 대체로 일치한다. 메이지 유신(1868년) 이후 서구를 모방해 근대화에 박차를 가한 일본을 아시아의 강국을 넘어 일약 세계의 열강으로 키운 힘은 전쟁이었다. 메이지 유신을 전후한 시기의 크고 작은 전쟁에서 시작하여 청일전쟁·러일전쟁·제1차 세계대전·만주사변·중일전쟁·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전쟁들은 근대 일본을 형성한 동력이 무엇이었는지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전쟁을 에너지원으로 삼는 국가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집단은 군인일 수밖에 없다.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교를 졸업한 후 군부의 지도자가 되는 길은 곧 일본의 지도자가 되는 길이기도 했다. 패전 이전에 수상을 지낸 사람 중 군인 출신이 적지 않다는 것도 이를 반증한다. 이러한 역사적 토양이 키운 도조 히데키는 근대 일본의 군사적·정치적 성격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저자 호사카 마사야스는 도조 히데키를 통해 근대 일본의 실상에 다가가고 싶었다고 말하거니와, 사실 총력전 시대를 주도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도조를 문제 삼는 것은 근대 일본의 정신사를 직시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도조 히데키와 제2차 세계대전』은 근대 일본의 역사뿐만 아니라 ‘대일본제국’의 제국주의적 폭력에 고통을 겪어야 했던 동아시아의 역사를 조명하는 데에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다.
도조 히데키 사후 74년
일본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패전 후 일본 국민들은 도조 히데키를 비난하면 면죄부라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말했다. 일본 정부는 연합국 최고사령부 총사령부(GHQ)의 요구를 반영해 ‘국제 평화를 위해 무력행사를 영구히 포기한다’는 평화 헌법을 공포했다. 일본은 그렇게 영원히 전쟁을 포기한 듯했다. 그러나 주권 국가로서 자위권이 있다는 명분으로 자위대라는 무장 조직이 설치되었고, 이 조직이 사실상 일본군 역할을 해오고 있었다. 수십 년 동안 자위대의 전력을 꾸준히 키워온 결과, 일본은 공식 군대 없이도 세계 5위 안에 드는 군사 대국이 되었다. 게다가 2010년대 이후로는 법안 개정 등을 통해 자위대의 운용 범위를 넓히려는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다. 자위대의 존재 자체만으로 일본이 다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화근이 남게 된 셈이다.
‘잃어버린 30년’으로 불리는 장기 경제 침체가 계속되면서 일본에서는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기보다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일게 되었다. 우파 민족주의가 90년대 이후 30여 년 동안 세력을 확대하면서 일본 사회는 우경화되어 가고 있다. 도조 히데키의 전쟁 범죄 행위가 ‘서양의 침탈 아래 신음하는 아시아 민족들을 해방하고 궁극적으로 아시아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대동아공영권’을 실현하기 위한 전쟁’이었다고 옹호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집권 여당인 자민당에서는 헌법에서 전쟁 금지 조항을 지우고 자위대를 국가 군대로 공식화하는 개헌을 추진하려고 애쓰고 있다. 개헌을 실행하기까지는 아직 많은 산이 남아 있지만,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이후 일본도 평화 헌법에서 벗어나 군대를 가지자는 여론이 늘고 있다. 일본이 다시 침략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토대가 완성된다면, 아시아 전체의 평화는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호사카 마사야스는 독재자를 낳은 역사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도조 히데키와 같은 지도자가 어떻게 일본 국민들의 정신과 육체를 길들이고 동원했는지를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상세하게 살펴야 한다. 그래야 ‘대일본제국’의 지배 논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조선’뿐만 아니라 아시아 여러 민족들을 전쟁과 죽음의 시간으로 내몬 폭력의 정체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더 나아가 그 폭력이 다시 우리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체, 세계를 다시 위험에 빠뜨리지 못하도록 경계하고 대비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도조 히데키와 제2차 세계대전』이 보여주는 그 시대의 역사는 우리에게 좋은 거울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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