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근대사여행 (2024~) [해설서]/5.서울근대문화유산

[웹북] 경성신사

동방박사님 2024. 10. 12.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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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신사

경성신사

경성신사

제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 조선국혼대신 / 오나무지노미코토 / 스쿠나히코나노미코토

사격 국폐소사

창건 1898(메이지 31)

제례 1018

주소 경기도 경성부 왜성대정

경성신사(京城神社)는 일제강점기에 경성부의 남산에 세워졌던 신토의 신사이다. 사격은 국폐소사(国幣小社)이다. 경성부민의 씨족신으로 여겨졌다. 남산에는 그 밖에 조선신궁과 경성호국신사가 있었다. 제신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 조선국혼대신(朝鮮国魂大神), 오나무지노미코토(大已貴命), 스쿠나히코나노미코토(少彦名命)이었다.

역사

1898103일 서울의 일본거류민단이 일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모셔진 신체(神體) 일부를 가지고 와서 남산 왜성대(倭城臺)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으로 창건하였다. 1916년 5월 22일에 정식의 신사가 되어 경성신사로 개칭하였다. 19299월 서쪽 50m 지점에 신사를 다시 짓고 천좌식(遷座式)을 열었다. 예전 건물은 절사(節社)인 하치만구(八幡宮)의 사전(社殿)이 되었다. 193681일 조선총독부가 관리비용 일체를 부담하는 국폐소사로 격상되었다. 절사로 하치만구(八幡宮이나리샤(稻荷社)가 있었다.1945년 해체되었다. 경성 신사가 철거된 자리에는 일시적으로 단군성조묘(檀君聖祖廟)가 세워졌다가 현재는 숭의여자대학교가 들어섰다.

(일본어) 京城神社, 玄松子の記憶.

일제 강점기의 신토 단체

한일병합 이전

신궁봉경회신궁경의회

신궁

조선신궁부여신궁

신사

경성신사 / 대구신사 / 광주신사 / 강원신사 / 평양신사(용두산신사)(용미산신사)

교육기관

조선황전강습소

황도사상

황도학회황도문화관황도선양회

 

황도학회

황도학회(皇道學會)는 일제강점기 말기에 경성부에서 조직된 신토 학습 단체이다.

목적

194012월에 부민관에서 결성식을 갖고 창립되었다. 황도사상 보급이 목적이라, 비슷한 시기에 창립된 문명기 중심의 황도선양회와 유사한 면이 있다. 황도선양회가 일반 가정에 대한 가미다나 보급과 국방헌금 헌납에 주력한데 반하여, 황도학회는 좀 더 학술적인 차원의 활동을 벌였다.

목표는 '내선일체의 완성'을 내걸었고, 황도사상을 교육, 선전하는 역할을 했다. 발기인 대표는 이광수가 맡고, 여러 명사들이 참여하였다. 설립취지서에서는 "본시의 조선 사람 그대로는 황국신민이 될 수가 없다"고 분석하면서, "내선일체의 실천을 위해 일본정신을 깨닫고 황도정신을 받들"기 위해 설립한 것으로 취지를 밝혔다.

조직과 활동

회장은 교육인 신봉조, 이사로는 일본인 외에 기독교 지도자 구자옥, 문인 박영희와 정인섭, 친일 이론가 손홍원, 현영섭, 김택용 등이 참여했다.

활동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도사상의 학습

황도정신의 일반에 대한 보급

신사참배의 실천과 장려

주요 활동은 대화숙에서 황도강습회를 개최하여 황도사상을 학습하고 선전한 것이다. 학습 교재로 일본 역사책인 고지키니혼쇼키, 그리고 칙어집등을 사용하였다. 부여신궁 건립에는 근로봉사대를 조직하여 파견하였다.

 

황도선양회

황도선양회(皇道宣揚會)는 일제강점기 말기에 가미다나 보급 운동을 펼친 신토 단체이다.

1940년 10월에 일본인들이 주도하여 창립했고, 1943년에 경상북도 지역의 갑부이며 일본군에게 비행기를 헌납하여 '애국옹'으로 널리 알려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문명기가 회장에 취임했다.

단체의 목적은 전시 체제 속에서 황도사상을 보급하는 것으로, "신국 일본이 발전하는데는 유신지도를 철저해야 하는 점에 비추어 선양회를 조직"했다고 밝혔다. 발회식에는 미나미 지로 총독이 직접 참석하여 황도선양회의 위상을 보여주었다. 식이 끝난 뒤에 비행기 두 대로 모의 폭탄 투하를 시연해 보이기도 했다.

황도선양회의 주요 활동으로는 일본군 위문 활동이 있었다. 1942년에 중국 북부와 중부의 일본군을 위문하고 돌아온데 이어, 이듬해에는 회장 문명기를 포함한 황도선양회 간부 4명이 인삼과 인쇄물을 휴대하고 약 1개월 동안 북중국 전선 위문을 다녀왔다.

문명기는 이 단체를 중심으로 애국기 헌납 운동을 벌이면서 '11대 헌납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국방헌금 납부를 종용했고, 가미다나를 집집마다 비치하고 아침저녁 배례를 올리자는 운동도 전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