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역사문화기행 (2006~) <여행지>/5.서울역사박물관

신촌의 역사2

동방박사님 2018. 10. 20.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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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신촌

일제강점기는 신촌이 현재의 모습을 형성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경의선 개통과 신촌역 영업의 시작, 연희전문학교와 이화여자 전문학교의 이전, 토지구혁정리 사업과 일단의 주택지 경영사업을 포함한 도시계획사업을 통해 신촌은 큰 변화를 맞았다. 특히 1936년 조선총독부의 경성부 행정구역 확대는 신촌을 경성부에 편입시키며, 일제 강점기 도시계획인 경성시가지계획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1937년 토지구획정리사업에서 '대현지구'를 사업예정지로 발표했고, 신촌 일대를 새로운 '전원주택" 지역으로 선전하며 경성 중심부에 거주하던 조선인의 이주를 유도했다. 이러한 일련의 경성개발 정책은 신촌 일대가 경성의 주변부에 중심지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근대적 도시계획과 신촌

일제강점기의 경성도시계획사업은 한적한 농촌마을이던 신촌에 커다란 변화를 주었으며 현재의 가로망과 토지구역 형태의 기반이 되었다. 일제는 1936년 도성 내부와 용산에만 국한되었던 경성의 행정구역을 북동부와 남서부로 확장하고 이 지역에 주택지 건설을 위한 토지구획정리사업을 추진했다. 신촌지역은 1937년 발표된 1차계획 중 하나인 47만 8천평의 대현지구사업에 포함되었다. 경성부는 1938년 11월16일 조선총독부 인가를 받아 대현지구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지만,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따른 에산부족으로 택지조성은 제외되고 도로망 설정, 배수시설공사, 공원과 녹지사업, 학교와 시장부지 확보 등 공공기반시설 공사만 일부 진행 되었다. 이후 일단의 주택지 경영사업에 의해 신촌부유지에 주택건설게획이 세워지기도 하였지만 완료되지 못하였다. 


1914년에는 도성 내외를 포괄하는 5부, 면제의 행정구역을 도성과 일본군기지가 위치한 용산으로 축소하고 동洞 정町 통通 으로 개편 하였다. 1936년 은평면, 시흥군 영등포읍. 동면, 북면, 김포군 양동면 일부를 경성부에 편입하여 부역을 3.5배 가까이 확장하였다. 새롭게 편입한 지역중 동북부지역은 주로 주택지대 및 경공업지대로 개발하였으며, 서남부의 영등포 지역은 대공업지대로 개발하였다. 이어서 1943년 넓어진 부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구제를 실시하여 종로구, 중구, 용산구,서대문구, 동대문구, 성동구, 영등포구 등 7개 구를 설치하였다. 1944년 10월에는 서대문구 인근 연희면의 일부를 다시 편입하여 마포구를 신설하였다.


대현 토지지구획정리

"본 지구는 경성부의 도십부에서 서쪽 약3km 떨어진 곳으로 이현정 에서 양화진에 이르는 3등 도로 양측의 완곡지대에  있다.  소화11년 (1936) 4월1일 경성부의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경성부에 편입됨과 동시에 경성시가지 게획구역에 편입된 토지이다. 본 지역은 서대문으로 부터 아현, 신촌, 서교, 양화진을 거쳐 김포 또는 영등포로 통하는 주요한 위치이다.  구획정리를 행함으로써 미연에 정연한 시가지를 형성하여 이상적인 상업, 주택지로서 장래의 발전에 자산이 되기위해 소화 12년 (1937)  1월6일 경성부윤이 이의 시행을 명하였다 [경성부도시계획요람] 1938년 25쪽



광복이후의 신촌

6.25전쟁이후 1950~`60년대의 서울인구는 폭팔적으로 증가하였다. 신촌에도 피난민과 지방민들의 유입이 증가하여 많은 수의 불량주택이 생겨났다. 이에 주거환경개선을 위한 공공정책이 펼쳐져 사회문제를 하나둘 해결되기 시작했다. 1970~80년대 신촌은 교통망 확충, 핵심 도시게획 추진, 신촌로와 성산대로 개통등 지속적으로 "중심부:화 된다. 선구적 근대 고등교육기관의 밀집된'대학촌'으로서의 명성은 꾸준히 인구를 끌어들이는 요인으로 작용했고 신촌이 새로운 문화의 발생과 유입, 확산과 전파의 중심지로 거듭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동시에 해방 후부터 1990년대까지 이어진 서울의 인구팽창 분위기 속에서 신촌은 학생과 시민의 주거지로 성장했고, 1984년 지하철 2호선 개통을 계기로 신촌역 인근은 유동인구가 집중되는 교통중심지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런 요인들로 신촌은 1990년대까지 청량리, 영등포,잠실, 강남과 함께 서울의 5대 부도심으로 발전하였다.




피난민과 상경민의 보금자리 신촌

신촌은 6.25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농촌 풍경을 벗어나지 못한 지역이었다. 하지만 1960년대를 전후로 신촌의 거주 인구가 본격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6.25전쟁




시세일람 市勢一覽

서울의 토지, 기후, 인구,교육, 종교등 정보 전반을 정리하여 담고 있다. 신촌 일대에 신축된 전재민 후생주택의 규모와 내용을 알수 있다.  1955년


주택건설예정지조사서

ㅅ시신신ㅊ초촌촌 ㅈ주줕주태택택지의 위치, 지표, 총면적, 소유자, 지목, 지세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평면도가 함께 붙어 있어 현재 신촌지역의 주택이 이 사업에 의해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광복이후  


신촌 상도 택지 조성 잔여지 매각 처분에 관한 건

1940년부터 진행된 신촌 택지조성사업을 마무리하기 위한 잔여지 매각 처분 계획이다.. 이미 불법건축물이 들어선 곳 중 정상수준의 주택은 실 거주자에게 우선 매수 신청권을 부여하는 등 실정을 수용하는 시행계획을 세우고 있다. 1961년 서울시 기록관



신촌 마포지구 도시설계

서울의 부도심을 개발하는 다핵구상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지하철 2호선 역세권과 서강대로 신설 및 신촌로 확장에 따른 도시개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신촌과 마포의 토지이용, 도로,경관, 녹지공간 등으로 나우어 도시게획이 세부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1984년 


대학촌의 태동과 성장

일제강범기 신촌이 서울의 대표적인 대학지역으로 발전하는 데에는 연희전문학교 와 이화여자전문학교의 이전이 큰 영향을 미쳤다.연희 전문학교는 1917년에 현재의 연세대학교 위치에 토지를 매입하면서 설립하였다. 이어서 1935년에는 정동에 있었던 이화여자전문학교가 신촌에 새로운 교사校舍를 건설하여 이전하였다. 이러한 대학들의 이전 설립을 신촌은 '대학촌"으로서의 명성을 얻게되었고, 서구식 근대교육이 시작되는 중심지이자 새로운 문화에 개방적인 신촌문화를 구성하는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 두 대학의 이전과 더불어 1921년 경의선 신촌여기 개통되면서 이 지역은 교통의 요지로 거듭나 산업과 물류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고 교외거주지로도 각광 받기 시작하였기 때문이었다.





신촌캠퍼스 마스터 플랜

1917년 당시 신촌캠퍼스 설계도이다. 국유지였던 경기도 고양군 연화면 창전리 일대의 약19만평을 동양척식 주식회사로 부터 구입하면서 " 언더우드의꿈'이라 불리는 신촌캠퍼스 최초의 마스터 플랜이 마련되었다.

1917년 연세대학교 박물관


1922년 연희전문학교 졸업앨범

신촌으로 이주한 초기모습이 담겨있다. 앨범속 교지 전경 사진에는 1920년 완공된 스팀스관 (사적제275호)만

보인다. 아직 언더우드관 (사적 제276호, 1924년 완공), 아펜젤러관 9사적 제277호, 1924년완공)  들어서시 전 풍경을 보여준다.  

1922년 연세대학교 박물관 


사진엽서 -연희전문학교 전경

연희전문학교 전경이 담겨 있는 사진엽서이다.기숙사와 치원관 致遠館의 사진이 실려있다. 일제강점기 

taisho hato brand라는 회사에서 발행하여 판매한 것으로 보인다.




근대문화의 창구

신촌은 일제강점기부터 근대문화를 받아들이는 창구 역할을 하였다. 일제는 법률, 공업, 의학 등 실용적인 지식을 가르치는학교들만을 양성하였으나 신촌에 위치한 두 사학은 미국식 종합대학 모델을 지향하였기 때문에 실용분야가 아닌 학문분야의 발전을 이끌 수 있었다 또한 신촌에서는 근대 학문 뿐 아니라 음악, 미술과 같은 서울의 에술이나 테니스, 야구 등 다양한 근대 스포츠의 중심지가 되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연희전문학교 9연세대) 보성전문학교(고려대)늬 대항경기인 "연보전(연고전)"은 정구, 축구, 농구, 하키 등의 근대스포츠 문화 확산에 기여 하였다.







보리스 건축설계사무소 신촌교사 설계도

건축선교사 윌리암 모렐 보리스가 설계한 이화여자전문학교 설계도이다. 보리스는 현재 본관으로 쓰이는 파이퍼홀, 대학원관으로 쓰이느네이스홀 등 초기 캠퍼스 5개 동을 설계했다. 고딕 양식를 바탕으로 1932년~35년 설계한 기초 교사들은 한국적 미와 함께 여성스러움과 섬세함을 살렸다는 평을 듣고 있다.

1932~35년 이화역사관


1935년 신촌캠퍼스봉헌식 브로슈어 (국한문)

1935년은 이화발전의 게기가 된 해였다 이화는 1935년 신촌으로 캠퍼스를 이전하여 6만 5천평의 대지에 본관, 음악관 중강당, 체육관을 니었다. 이건물들은 최신 구미식의 내무시설에 고딕건축양식을 현대화한 화강암 건물이었다.  1935년 이화역사관


청년문화의 중심지

신촌은 '새로운 땅"이라는 뜻이다. 경의선이 개통되고 대학들이 이전한 시점부터 신촌은 "새로운 문물의 통로"로 새로운 것이 유입되고 확산되는 땅이었다. 해방이후에도 오랫동안 신촌은 최첨단의 유행이 가장 먼저 유입되는 곳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원두커피, 언더그라운드 음악, 사회문화운동에 이르기까지 새롭고 대안적인 문화가 수없이 시도되었고, 이후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그 과정에서 신촌의 음악다방과 록 카폐, 라이브 카폐, 소극장, 서점 그리고 음반가게 등 수많은 장소들이 문화 아지트로 기능했다. 이모든 활동의 주체는 신촌의 대학생들 뿐만 아니었다. 매순간 최첨단의 유행을 쫓는 젊은이들, 상업무대 밖의 예술가들, 신촌에 모여든 젊은이들에게서 새로운 가능성을 찿는 운동가 들에게 이르기까지 모두가 신촌 문화의 중심지 였다


"고향의 봄"노래하는 시계탑"

신촌로터리에 서울시가 지난 3월22일 착공한 전자시계탑이 16일 삼오 모습을 드러냈는데, 이 시계는 매시간 고향의 봄 노랫소리를 차임벨로 울려 오가는 시민들에게 시간과 함께 멋진 멜로디를 서비스 하게 될 것이다

높이 10m에 기둥너비가 90cm조각의 이시계탑은 68년 4월 제일교포 박득록 시가 서울시민을 위해 성공을 빈 것으로 세워졌는데 ..  <경향신문> 1969년 5월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