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1902~1920)
유관순은 일제강점기였던 1919년에 일어난 3.1독립만세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16세의 가녀린 여학생으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제의 압박에 저항했던 그녀를 생각하면 누구라도 추모의 염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여기에 작은 의문이 따른다. 박은식의 [대한독립지혈사]에 따르면 3.1운동만세독립 당시 무려 7천여명의 생령이 일제 총칼에 희생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 수많은 애국지사들 가운데 유관순 한 사람만을 떠올리게 되었을까? 유관순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46년경 이화여고 교장 신봉조와 이화학당 출신의 박인덕이 유관순 기념사업회를 설립하면서 부터였다. 신봉조는 일제 말기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로서 임전대책협의회와 조선임전보국단에 참여했고, 황도사상을 보급하던 황도학회회장으로 황동한 경력 대문에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돤 친일 인사였다. 박인덕은 3,1독립만세운동 당시 주동자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고 옥중에 유관순에 대한 일제의 악질적인 고문을 목격했던 인물이다.
그녀는 출소한 후 독립운동에 헌신했지만 일제 말기 변절하여 조선임전보국단에 참가했고, 임전대책협력회 상무위원으로서 친일논설과 강연에 나셨다. 아울러 전비 조달을 위한 채권가두유격대로 활동하면서 징병을 독려하기도 하였다. 이런 인사들이 해방 이후 독립지사 유관순을 정치적 종교적 방패막이로 적극 활용함으로써 자신들의 부끄러운 친일 흔적을 감추려 했던 것이다. 또한 2.8 독립선언에 참여 했으며, 일제 말기 총독부에서 천황에 대한 충성의 글로 강요하자 단호하게 거부하고 붓을 꺽었던 늘봄 전영택 작가가 쓴 ' 유관순 전기'가 유관순 선양에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 유관순은 짧은 생애에 묻어있는 껄끄러운 티끌을 털어 버리면 우리는 훨씬 개운한 시선으로 그녀의 실체를 바라볼 수 있다. 그녀가 온몸으로 이끌었던 3.1독립만세운동의 대의와 결국 온몸으로 일제의 폭거를 감당해야 했던 그녀의 비장한 최후의 말이다.
유관순열사의 생애
유관순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의 5남매중 둘째딸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이소제이다. 이화학당에서 공부하던 중 1919년 3월1일 기미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여 하였다. 조선총독부의 휴교령으로 학교가 폐쇄되자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온 열사는 인근지역 주민들과 연락하여 4월1일 아우내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열사는 시위현장에서 부모를 잃고 체포되어 공주지방법원을 거쳐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 받았다. 1920년 3월1일 기미독립만세운동 1주년을 맞아 서대문감옥에서 만세운동을 주도 하였다. 1920년 9월28일 열사는 일제의 가혹한 폭행과 고문에 못이겨 순국하였다. 열사의 시신은 이화학당 주선으로 이태원공동묘지에 안장 하였으나 후에 망실 되었다.
정부는 1962년 3월1일 대한민숫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 하였다
학창시절의 유관순
이화학당 도등과에 재학중인 유관순은 1919년 3월1일 기미독립 만세운동이 전개되자 국현숙, 김희자, 김복순, 서명학 등의 학생들과 결사대를 조직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참여하였다. 3월5일 유관순은 학생단 만세시위운동에도 참여하였다. 3월10일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에 대한 임시휴교렬리 내려지자 3월13일 고향으로 내려와 서울의 독립운동 소식을 전하고 고향에서 게속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였다.
샤프여사
유관순을 이화학당에 진학시켜 주었다.
수업 받는 학생들
유관순 우물
유관순을 비롯한 기숙사생들은 우물가에서 빨래를 했다.
유관순 열사의 이름
유관순 열사의 '관"자 표시에 대해 살펴보면 유관순 열사의 '관"자가 호적에는 갓 관(冠)으로, 수형자 기록표, 경성복심법원 재판기록문, 족보에는 너그러울 관(寬)으로 되어 있다. 이에 호적은 (冠)자로 올려 있으나 유관순열사의 본인이 진술하여 작성한 기록에는 "寬"이 쓰여 있으므로 寬 으로 표기하고 있다.
유관순열사
건국훈장 독립장
이화학당 명예졸업장
1900년대 성경책
유관순열사 재판 기록문
김교선, 한동규 재판기록문
서대문감옥에서도 3.1운동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수감중에 일본헌병들의 헤아릴 수 없는 폭행과 고문에 못 이겨 1920년 9월28일에 순국하였다. 열사의 시신은 이화학당 주선으로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 하였으나 후에 망실 되었다. 이에 열사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1989년 10월 12일에 초혼묘를 봉안 하였다. 매년 9월28일에 열사의 순국을 기념하는 추모제 행사를 거행하고 있으며 열사의 애국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2003년 4월1일 유관순열사기념관을 신축 개관 하였다.
옥중 투쟁과 순국
유관순은 군중들과 함께 병천 헌병주제소로 돌진하여, "나라를 되찿으려고 정당한 일을 하였는데 어째서 총기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 하면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였다. 이에 헌병들은 재차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군중들을 해산시킨뒤, 유관순을 비롯한 시위주동자를 체포하여 펀안헌병대로 압송하였다.
남상락 태극기
충청남도 당신군 대호지면에서 3.1운동을 주도한 남상락이 만세시위때 사용한 태극기
김세영 시위태극기
경상북도 영덕군 일대에서 일어난 3.1운동 독립 만세운동때 김세영이 사용한 태극기
미주지역 한국독립의회 시위태극기
1919.4.14~16에 미주 지역에서 만세 시위때 사용한 태극기
대한독립선언서 1918년
1918년 만주. 노령지역 한인 독립운동의 중심인물 39명이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글이다. 작성자는 조소앙이다.서명자는 김교헌, 깁좌진.신채호. 안창호 등 당시 해외 독립 운동을 이끌었던 이들이 거의 모두 망라되어 있다. 일명 무오독립선언서 라고 한다. 전문의 내용은 "대한은 완전 자유독립국" 임과 자유의 자주독립국임을 선포하고, 2천만 동포들에게 국민된 본령이 독립인 것을 명심 할 것과 육탄 혈전으로써 독립을 완성할 것을 요구했다.
임시정부 3.1절 기념선언 1930년
1930년 3월 1일에 임시정부에서 발표한 3.1선언문, 우리 역사와 문화가 일본의 저급한 문화에 유린 되었지만, 우리민족은 민족적 자존심을 잃지 않고 개인이든 단체이든 모두 일제에 대항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또한 1919년 3.1운동을 통해 우리의 저항의지를 세계에 알려 독립운동을 확고히 하였고, 우리는 독립을 위해 일제가 만들 시설들을 파괴하여 조국밖으로 몰아내자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이화여고 백년사
유관순 노래 악보
뜨게모자
1917년. 면사둘레 53.5cm
유관순 열사가 사촌인 유경석과 노마리아의 아들 유제경의 돌 선물로 뜬 뜨게모자
2007년 2월28일 봉안된 유관순 열사 표준 영정 제작 과정에서 영정을 그리기 전 유족과 친구의 증언 그리고 각계전문가의 고증을 참고하여 제작한 치마저고리와 갖신이다.
치마저고리
단국대학교 전통의상과 박성실 作
2005년 10월5일 15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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