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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광기: 왜 예루살렘이 문제인가

동방박사님 2022. 2. 22.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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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한때 가톨릭 사제였던 제임스 캐럴이 예루살렘의 허상을 비판적인 목소리로 고발하다

최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이 10대 유대인 소년 3명을 보복성 납치, 살해한 사건을 두고 가자지구를 무참히 공격했다. 현재 가자지구 사망자는 1400명을 넘어섰으며 이 광기 어린 살육은 전 세계에 끔찍한 충격을 주고 있다. 지금의 상황을 정확한 시각으로 보기 위해선 먼저 예루살렘에 얽힌 수많은 요소를 파악해야 한다. 왜 성스러운 순례지가 존재하는 예루살렘이 폭력으로 점철되었는지,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모순에 대한 문제제기가 먼저 필요하다. 이 책은 예루살렘의 시작부터 오늘날 중동 지역의 분쟁까지, 예루살렘에서 파생된 모든 역사적 논쟁을 캐럴의 비판적인 시각으로 낱낱이 실었다.

캐럴은 오늘날 우리가 맹목적으로 믿고 헌신하는 종교에 대한 비판적 시각으로 진정한 종교가 무엇인지, ‘지금, 여기’에서 종교라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자리매김 해야 하는지 고찰한다. 그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전 세계에 만연한 ‘나쁜’ 종교를 지양하고 성서에서 진정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 즉 시대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좋은’ 종교가 갖춰야 할 덕목을 제시한다. 다음으로 좋은 종교는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종교 역시 양심의 일종으로 나타나는 행위이며, 양심은 강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시대에 좋은 종교는 역설적이게도 세속적 성격을 띨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종교가 현재의 삶을 반영하기 때문에 존재의 형태로서 어느 정도의 종교적 개혁은 불가피함을 의미한다.

 

목차

1장 두 예루살렘
열병
오늘날의 예루살렘
모든 논쟁의 근원
개인적 기록

2장 폭력의 심연
과거의 시계
표지를 남기는 자들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다
희생제의

3장 성서의 저항
전시 문학
일어나지 않은 전쟁
신의 양가성
예루살렘에서 잉태되고 예루살렘에서 태어나다
텅 빈 성전
아브라함의 살해
묵시종말론의 등장

4장 스스로를 등진 십자가
예수에서 예루살렘까지
로마의 전쟁
새로운 성전
희생양 기제
기독교인들의 폭력
파멸할 세계
5장 이슬람의 바위
하느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
알 쿠드스
위대한 유물
예루살렘의 투사들
1099년
템플기사단
예수를 따랐던 자, 콜럼버스

6장 언덕 위의 도시
종교개혁 전쟁
분리주의자들
평화의 하느님
예루살렘으로의 귀환
성전의 뿌리
예루살렘으로 진군한 자들
7장 메시아 국가
예루살렘과 유랑
인쇄기와 오스만 예루살렘
평화의 십자군
회복주의
아브라함의 제단
하느님의 오른팔
사도전승

8장 예루살렘이 여기에 세워졌나니
마지막 십자군
디아스포라의 끝
세례를 베풀려 기다리고 있노라
그랜드 무프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나크바
비누
쌍둥이의 트라우마

9장 밀레니엄
성전 무기들
희생제의 요원들
십자군

10장 좋은 종교
성스럽지도 세속적이지도 않은
신의 길이 아닌 인간의 길
역사에서 교훈을 얻다


참고문헌
성서대조표
감사의 말
저자 인터뷰
찾아보기
 

저자 소개

저자 : 제임스캐럴(James Carroll)
자신의 탄생과 함께 미국 패권의 비극이 시작됐다는 운명론을 펼치는 작가. 루스벨트가 독일과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할 것을 요구하고, 독일 본토를 폭격하는 포인트블랭크 작전이 개시되었으며, 펜타곤 건물이 준공되고, 로스앨러모스에서 본격적으로 원자폭탄 제조 연구가 시작된 1943년 1월의 마지막 주, 제임스 캐럴은 시카고에서 공군 장성의 아들로 태어났다. 캐럴의 아버지는 연방수사국FBI에서 특수 요원으로 일하다 196...
 
역자 : 박경선
서울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와 이화여자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한영번역학과를 졸업했다. 옮긴 책으로는 《슬픔 뒤에 오는 것들》, 《전쟁 유전자》, 《동물원》이 있다.
 
 

책 속으로

이 책은 예루살렘이라는 실제 도시와 그 도시가 던져주는 묵시종말론적 환상 간의 치명적 순환고리에 관한 책이다. 다시 말해, 두 예루살렘에 관한 책이다. 땅의 예루살렘과 하늘의 예루살렘, 그리고 현세의 예루살렘과 상상 속 예루살렘. 그러한 이중성은 기독교의 예루살렘과 유대교의 예루살렘, 유럽의 예루살렘과 이슬람의 예루살렘, 이스라엘의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 그리고 언덕 위 도시라는 실제 지리상의 예루살렘과 메시아 국가라는 이상으로서의 예루살렘 간 긴장을 통해 한층 두드러진다. 최근 벌어지는 모든 분쟁의 근원은 과거 속에깊숙이 묻혀 있으며, 이 책에서 그 뿌리를 파헤쳐 보고자 한다. 결국 현실 속 장소로 귀결되는 이 이야기는 바로 사해와 지중해 사이 3분의 1 지점쯤의 능선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순례자들의 과열된 꿈에 얼마나 끝없이 시달려 왔는가에 관한 것이다. 가슴에는 열정을 품고 머릿속으로는 세상의 종말을 그리며 양손에는 무기를 든 그 순례자들은 수 세대에 걸쳐 전설 속 관문들을 두드려 왔다. - p.11

지상의 예루살렘이라는 화면 위에 천년왕국에 대한 강렬한 환상을 투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역사가 완성되리라는 신념이 바로 예루살렘 열병이다. 이러한 역사의 결말은 메시아가 이 땅에 오거나 재림하거나 혹은 아마겟돈에서 벌어지는 전쟁에서 천사들이 사탄의 무리(그리스도교인들이 대개 유대인, 무슬림, 그 밖의 ‘이교도’를 지칭하는 표현)를 무찌르는 등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종교적 색채는 털어냈지만, 예루살렘은 신세계 순례자들이나 유럽 코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사회적 이상향을 통해 천년왕국의 이미지를 투사하는 암시적인 배경으로 머무르게 된다. 결국 20세기와 21세기 동안 계속된 악О??전쟁 중심에 놀랍게도 예루살렘이 있었던 것이다. 냉전 및 테러와의 전쟁 모두의 구심점이었던 바로 그 예루살렘 말이다. - p.12~13

본래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고대 도시였던 예루살렘은 서구 역사의 자극 ?Q이 되어, 오늘날의 세계를 조성하는 데 그 어떤 도시보다도 큰 역할을 했다.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그렇게 초월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도시는 아테네나 로마, 파리도 아니고, 모스크바나 런던도 아니며, 이스탄불이나 다마스쿠스, 카이로도 아니고, 엘도라도나 이민자들이 꿈에 그리는 뉴욕도 아닌, 오직 예루살렘뿐이다. 예루살렘은 그야말로 땅 위에 재현된 천국인 것이다. 그러나 보다시피 그 천국에 지금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 p.13

중세 지도상에서 예루살렘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가 만나는 교차점이었다. 세 대륙에서 쏟아져 나온 군대들이 이곳에서 만났고, 21세기가 된 지금은 제4대륙의 군대도 이곳으로 온다. 예루살렘의 지정학적 관계는 본래 종교 때문에 촉발되었지만, 세속적 세력들을 변형시키는 힘으로도 끊임없이 작용해 왔다. 굳이 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서도 전쟁은 이미 그 자체로 신성할 수 있다. 이 역시 우리가 다루려는 주제다. 중요한 것은, 유럽 그리고 미국 내 유럽 문화유산 즉, 그 예루살렘 열병 바이러스가 고대 로마군의 공격, 중세의 십자군, 종교개혁 전쟁, 유럽의 식민주의 정책, 신세계 개척, 근대의 전면전 등에서 연이어 숙주 [ 를 찾았다는 사실이다. 예루살렘이라는 장소와 그에 대한 관념이 마치 가연성 화학물질들처럼 뒤섞여 예루살렘은 부담스러우리만치 성스러운 땅이 되어 버렸다. 광기와 신성함, 폭력과 평화, 신의 뜻과 권력욕이 뒤엉킨 일촉즉발의 혼합물은 오늘날까지도 갈등의 불씨에 들이붓는 기름으로 작용하고 있다.- p.17

기독교 지구에는 에티오피아 수도원, 그리스정교회 총대주교구, 라틴 총대주교구가 있고, 아르메니아 지구에는 성 제임스 성당, 예수가 최후의 만찬을 가졌다고 전해지는 만찬실, 다윗 왕의 무덤이 있다. 각 지구가 그토록 엄격히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겠지만, 예루살렘은 종교 집단 간 갈등뿐 아니라 종교집단 내 갈등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예루살렘에는 7가지 상이한 문자를 사용하는 15개 언어사용 집단과 30개의 종파가 한데 모여있다. 지난 100년간, 수많은 국내외 단체에서 예루살렘을 둘러싼 갈등에 대해 내놓은 정치적 해법이 60가지가 넘지만, 갈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 p.22

잃어버린 도시로 인해 상상 속 도시에 대한 열병이 생겨났고, 4세기가 지난 뒤 교회는 폭력을 처음으로 전면 승인하게 된다. 빼앗긴 시온을 구해 내기 위해서였다.33 그리고 신의 허락으로 악마들이 풀려났다. 그러나 유럽 기독교는 추억과 그리움만을 남긴 채 예루살렘으로부터 쫓겨나는 굴욕을 겪었고, 그러한 추억과 그리움은 결국 미국으로까지 건너가 미국 역시 끊임없이 바다 너머 그 잃어버린 도시를 돌아보게 되었다. 예루살렘이라는 개념은 위안이 되었고 이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 - p.36

그들은 체계적으로 식량을 찾기 시작했고, 발견자에서 채집자로 변모했다. 혼자 한꺼번에 먹지 않고 멜론, 열매, 견과, 과일 등을 나뭇잎 등으로 엮어 만든 일종의 그릇에 담아 무리가 모인 곳으로 돌아왔다. 어쩌다 한번 씩은 열매와 견과를 채집한 다른 이들과 함께 먹기도 했다. 갓 죽은 동물의 사체를 우연히 발견할 때면 모처럼 포식을 했다. 아마도 고기는 특정한 식욕을 만족시켜 준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농축된 단백질을 섭취함으로써 더 적은 양으로도 그와 같은 만족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식량을 찾아 헤매는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동물 사체를 우연히 발견하게 되기를 기다리는 대신 살아 있는 동물을 좇아가 죽이기 시작했다. (…) 인류학자들의 추측에 따르면, 협력 관계였던 사냥조의 일원들은 안도감과 동시에 살해행위의 황홀감을 함께 맛보았을 것이다. - p.53

그들 간의 연대는 매우 강력해서 그 자체로 어떤 의미(무형의 것이지만 확장된 존재감) 를 띠었을지 모른다. 집단 내에서 토템 신앙이 생겨났고, 수렵, 살해, 섭식 관행이 굳어졌다. 우리가 전통이라 일컫는 것들이 이렇게 생겨났다. 제압한 사냥감에는 마술적인 힘이 있어서 이를 먹으면 그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이 역시 추측이다) 여겼을지 모른다. 수렵자들은 식사 자리에서 고기를 나눠 먹으며 동류의식을 강화했다. 가치를 띠게 된 고기 조각은 최초의 통화가 되었다. 이 같은 방식으로 인류의 조상은 협업, 계획, 소통의 기술을 발달시켰고, 공유하는 습관이 생겼다.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욕구를 조절하는 법도 배웠다. 인내심을 길렀다. 오늘날 우리가 문화라 일컫는 것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p.54
 

출판사 리뷰

종교의 본토인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폭력의 역사
예루살렘을 향한 지독한 탐욕이 인류의 끝없는 살상을 일으켰다!


최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이 10대 유대인 소년 3명을 보복성 납치, 살해한 사건을 두고 가자지구를 무참히 공격했다. 현재 가자지구 사망자는 1400명을 넘어섰으며 이 광기 어린 살육은 전 세계에 끔찍한 충격을 주고 있다. 2차 인티파다(Intifada, 팔레스타인인의 저항운동)가 일어난 2000년부터 지금까지 3일에 1명꼴로 팔레스타인 어린이가 이스라엘 점령군에 의해 살해된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어제오늘의 일만이 아니다. 팔레스타인을 향한 이스라엘군과 유대 정착민의 잔인한 공격성은 무엇에서 비롯되는 걸까. 끝이 보이지 않는 이 갈등은 표면적으로는 아랍인(무슬림)과 유대인 간의 전쟁으로 축소되지만, 이는 종파에 치우친 부정확한 정의다.

지금의 상황을 정확한 시각으로 보기 위해선 먼저 예루살렘에 얽힌 수많은 요소를 파악해야 한다. 왜 성스러운 순례지가 존재하는 예루살렘이 폭력으로 점철되었는지,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모순에 대한 문제제기가 먼저 필요하다.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이 세 종교의 탄생지이자 여전한 종교분열의 핵인 예루살렘을 향한 인류의 지독한 광기는 폭력을 조장하고 세계의 전쟁을 초래했다. 가톨릭 사제였던 캐럴은 예루살렘에 방문한 이후 사제의 옷을 벗고, 샬롬 하트먼 연구소에서 10년 넘게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지도자들의 연례 모임에 참석해 광범위한 시각과 다양한 차원에서 예루살렘의 뿌리를 추적했다. 이 책은 예루살렘의 시작부터 오늘날 중동 지역의 분쟁까지, 예루살렘에서 파생된 모든 역사적 논쟁을 캐럴의 비판적인 시각으로 낱낱이 실었다.

책 소개
한때 가톨릭 사제였던 제임스 캐럴이 예루살렘의 허상을 비판적인 목소리로 고발하다
펜타곤과 미국 패권의 비극을 다룬 《전쟁의 집》 저자 제임스 캐럴이 이번에는 인간의 광기로 얼룩진 폭력의 장소, 예루살렘을 고발한다. 1969년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사제로 지내면서 외려 이분법적인 종교적 사고에 물음을 던지며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러던 때에 그의 마음이 동한 곳은 예루살렘으로, 1973년 초여름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성지순례를 시작한 그는 그곳에서 그토록 갈망하던 신앙에 대한 확신에 환멸을 느끼게 된다. 예루살렘 성지에 있는 모든 교회에 있는 복제화 수점과, 예수가 처형을 선고받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간 고난의 길로 알려진 ‘십자가의 길’ 14지점이 중세 후기 그리스정교회의 관광 독점에 대응하고자 프란체스코회에서 만들어 낸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곳과 연관된 서사들이 허구였음을 깨닫고, 그는 사제직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신이란 지금 내가 있는 현재의 삶 속에 존재함을 믿는다고 캐럴은 말한다.

수 세기 동안 신앙을 들먹이며 예루살렘을 성지로 만든 이는 바로 수많은 인간들이었으며, 그들은 그들 자신의 신앙에 도취되어 예루살렘이라는 땅이 메시아의 재림과 계시라 이루어질 곳이라 여기며 병적인 열광과 집착을 한다는 것이 캐럴의 시각이다. 그 열병은 곧 나와 다른 것에 대한 배타적인 적대감으로 이어지고, 그 적대감은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어 무자비한 살육을 가능케 했다. 인간의 허상이 만들어 낸 예루살렘이라는 땅에 대한 환상은 수차례 지배 세력이 바뀌고 탈환을 반복하는 역사로 이어졌다. 그리고 바로 그 땅에 대한 무서운 광기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이라는 한 획으로 연결된 것이다. 캐럴은 이 모든 것의 바탕이 된 종교의 역사적 기원으로 거슬러 이야기를 전개한다. 종교는 살육을 통해 황홀감과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인간의 타고난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며, 폭력을 제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희생제의가 만들어졌고 그 희생제의가 종교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어지는 폭력과 전쟁의 역사는 종교라는 명분으로 포장되어 행해졌지만 실상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인간이 의식적으로 지키는 종교가 인간에 의해 왜곡되어 전통으로 굳어졌다고 캐럴은 말한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을 위한 인간의 선택일 뿐이라고 저자는 이 책에서 분명히 말한다. 예루살렘에 대한 다소 충격적이면서도 생소하게 느껴지는 그의 시각은 종교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과 반성을 넘어서 예루살렘이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세계에 점철된 폭력의 역사를 정확하게 응시하는 데 도움을 준다. 게다가 이 책은 예루살렘에 대한 정보가 빈약한 국내 독자들에게 고대부터 지금까지 예루살렘을 둘러싼 서구 역사를 관통하는 데 더없이 훌륭한 안내서이다.

종교와 폭력은 하나다
캐럴은 미국과 유럽이 현대에 이르러 정교분리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허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특히나 새 예루살렘으로 개척되었던 미국이라는 땅에서 정치와 종교는 오랜 상관관계의 역사를 이루고 있다. 실상 우리가 알고 있는 링컨의 노예제 반대는 북부 연합을 복구하기 위한 목적을 위해 전쟁으로 이어졌으며, 국민들을 결속해 그 목적을 이루려는 방편으로 종교적 서사와 사명감이 바탕이 되었다. 그렇기에 폭력으로 점철된 예루살렘이라는 땅을 그저 미개한 인식에 사로잡힌 종파 간 대립으로만 치부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이 캐럴의 시각이다. 예루살렘에 얽힌 세계사의 진실을 파헤쳐야만 아직까지 현재진행형인 극악무도한 살상을 바라보는 편향된 시각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예루살렘의 기원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이 당연하며, 그곳을 신성한 도시로 형성한 종교의 기원, 그리고 종교와 폭력의 상관관계부터 짚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캐럴은 인간이 생존 과정에서 경험한 살해를 통해 일종의 정신적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었는데, 인간의 의식 내에 본능적으로 존재하는 폭력과 욕망의 적절한 발산과 통제를 위해 희생제의라는 의식과 종교가 생겨났다고 고고학계와 인류학계의 근거를 들어 말한다. 즉, 종교는 폭력의 어두운 그늘과 지적, 도덕적 고민에서 생겨났다는 결론이다. 종교와 폭력의 관계의 희생제의에 기원을 둔 각종 의식 속에 상징적으로 드러나 있으며,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인간 본성의 근원적 사실이다. 즉, 인간은 타자를 죽임으로써 산다는 것이다. 21세기 들어, 분노로 가득 찬 팔레스타인인들, 그리고 좀 더 광범위하게는, 이슬람 세계 내부의 부정부패와 불신자들에 맞서 전쟁을 벌이는 이슬람 지하디스트들에 의해 급속히 확산된 자살 폭격은 가장 악의적인 돌연변이이자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의 바이러스이다. 군사적 측면에서 볼 때, 자살 폭탄 테러범은 그 어떤 미사일보다도 치명적이다. 10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수천 명이 자기 자신을 군수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자신의 물리적 자아를 무차별적 살상 무기로, 즉 육체를 ‘급조 폭발물’로 기꺼이 삼는 행위에 의식적 동기로 작용하는 것이 바로 종교이다.

갈등과 반목의 도시가 서구의 역사를 만들다
끊임없이 주인이 바뀌어 온, 지상 최고의 도시. 적의 집중포화에 대비하거나 반격할 수 있는 최적의 산등성이로 여겨진 그곳은 동서의 계곡들로 인해 완벽히 보호되는 곳이었다. 남쪽에서 보면 양쪽의 계곡이 마치 쟁기 날처럼 합해지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고고학자들은 요새 형태의 이 도시 국가에 최초로 정착이 이루어진 시기를 기원전 3000년경 기마민족이 처음 등장했던 당시로 본다. 이는 역사 기록의 시초에 해당하는 수메르인들이 재고를 기록한 점토판이 만들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여러 세기를 지나면서 이 도시는 살렘, 에부스, 모리아, 그리고 마침내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다.

예루살렘은 신세계 순례자, 유럽 코뮌주의자, 공산주의자 들이 말하는 사회적 이상향을 통해 천년왕국의 이미지를 투사하는 암시적인 배경으로 머무르게 된다. 결국 20세기와 21세기 동안 계속된 악과의 전쟁 중심에 놀랍게도 예루살렘이 있었던 것이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계속된 여러 형태의 냉전 및 테러와의 전쟁 모두의 구심점이었던 바로 그 예루살렘 말이다. 본래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고대 도시였던 예루살렘은 서구 역사의 자극이 되어 오늘날의 세계를 조성하는 데 그 어떤 도시보다도 큰 역할을 했다. 이곳은 지구상의 그 어떤 곳과도 다르게, 종교적인 열정이 불붙은 곳이다. 바로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이 세 종교의 탄생지이자 끝없는 종교분열의 핵이 바로 예루살렘이다. 예루살렘을 향한 인류의 지독한 광기는 폭력을 조장하고 세계의 전쟁을 초래했다.

‘지금, 여기’를 살기 위한 종교를 제시하다
캐럴은 오늘날 우리가 맹목적으로 믿고 헌신하는 종교에 대한 비판적 시각으로 진정한 종교가 무엇인지, ‘지금, 여기’에서 종교라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자리매김 해야 하는지 고찰한다. 그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전 세계에 만연한 ‘나쁜’ 종교를 지양하고 성서에서 진정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 즉 시대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좋은’ 종교가 갖춰야 할 덕목을 제시한다. 그는 좋은 종교란 죽음 대신 삶을 찬미한다고 말한다. 성서의 맨 마지막장 요한묵시록에 사로잡힌 인간들의 종말론적 환상을 그는 철저하게 비판한다. 염세적이고 허무주의에 사로잡힌 인간들의 내세지향적 삶은 지금 이곳에서의 삶을 죽음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종교가 본질적으로 사랑에 관한 것이며, 좋은 종교는 불가능성에 대한 구원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다음으로 좋은 종교는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종교 역시 양심의 일종으로 나타나는 행위이며, 양심은 강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시대에 좋은 종교는 역설적이게도 세속적 성격을 띨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종교가 현재의 삶을 반영하기 때문에 존재의 형태로서 어느 정도의 종교적 개혁은 불가피함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고착화된 온갖 종교적 형태, 범주, 상징을 비판하는 안목이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종교적 관습, 교리, 제식, 신조, 전통, 예배의 쇄신은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캐럴은 강한 목소리로 주장한다. 예루살렘에 대한 역사적 고찰과 더불어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서구의 역사를 종교적 비판으로 아울렀다는 점에서 이 장대한 서사는 잘못된 환상에 여전히 사로잡인 현대인에게 필수적인 책이다.
 

추천평

성서 시대에서부터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이 어떻게 서구의 영적 상상력을 자극해 왔는가를 다룬,
매혹적인 이야기다.
_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놀라운 책이다! 그 호흡과 깊이에 완전히 압도당했다.
레자 아슬란 (《젤롯》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