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역사기억여행 (2010~) <여행지> 170

남산 인권길 3 (옛 중앙정보부장 공관, 6국 취조실 기억공간)

과거 중앙정보부가 소유하고 있었던 부지 일부는 '인권숲'이라는 이름으로 산책로로 조성되어 있다. 중정 부장의 공관으로 쓰던 집은 현재 문학의집으로 조성되어 있다. 소방재난본부 건물 인근에 있으며 누구나 방문할 수 있고 지하에는 카페가 영업 중이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민간의 방첩 활동까지 육군 특무대에서 수행했기 때문에 인권 및 월권 문제로 말이 많았던 터라 순수하게 민간의 방첩 업무를 수행하고자 하는 기관의 창설이 필요했다. 제2공화국 당시부터 이런 계획이 있었는데, 이는 5.16 군사정변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쿠데타 며칠 뒤 중앙정보부가 창설되었다. 제2공화국 하에서 이런 정보기관의 창설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이후락이다. 실제로 이후락은 5.16 군사정변 직후 체포되기까지 했다. 제..

남산 인권길 2 (기억의 터, 통감 관저 터, 위안부 할머니 기억공간)

구 통감관저 경술국치 이후 통감관저는 조선총독관저로 쓰였다. 1939년 새 총독관저를 경복궁 옛 후원 자리(현재 청와대 자리)에 세운 뒤부터는 역대 통감과 총독들의 업적이라 쓰고 만행이라 읽는다을 기리고 유물을 전시하는 시정기념관으로 쓰였다. 당시 《매일신보》에서는 시정기념관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2층에는 17점의 사군자폭(四君子幅)이 걸려 있다. 이것을 보아가던 기자는 우뚝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는 방 안에 나섰다. 이 방은 합병조인실(合倂調印室). 이 방이 바로 30년 전 일한합병의 도장을 찍던 그 한순간을 가졌던 방인 것이다. 오늘의 조선을 낳아놓던 역사적 산실(産室)이요, 이 강산 백의인에게 새길을 밝혀준 봉화대(烽火臺)도 되었던 것이다. 여섯 칸 남짓한 방 안에 거울을 좌우로 이토공..

남산 인권길 1 (수방사령부 터, 소릿길 터널, 옛 중앙정보부 제5별관)

서울특별시 관악구 남현동을 근거지로 하는 대한민국 육군 소속 군단급 기능/작전사령부. 애칭은 방패부대. 별칭은 충정대(忠正臺). 1961년 6월 1일 창설되었으며, 2개의 사단과 1개의 여단을 예하에 두고 있다. 2022년 현재 사령관은 김규하 육군 중장(육사 47기)이다. 수방사 창설 이전 이 수방사 이전에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지키는 부대들은 당연히 존재했고, 첫 주자는 1948년 창설된 (구)수도경비사령부(지금의 수도사단)와 1949년 5월 12일 (구)수도사단으로 승격한 7여단(지금의 제7보병사단)이 있었다. 그러나 (구)수도사단이 그 명칭답게 경기도 동두천과 포천 전방 경계를 맡던 도중 한국전쟁이 발발해 적의 보전 공격을 맞이했는데, 문제는 부실한 대전차 장비와 병력차[2]로 동두천과 포천에서..

남한산성 해공신익희선생 동상

해공 신익희 선생 동상 1908년 한성 외국어 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들어가 한국 유학생들과 학우회를 조직하고 총무, 평의회장, 회장. 등을 역임, 기관지인 을 발간하여 학생운동을 하였다. 1913년 졸업과 동시에 동명 강습소를 열었으며, 서울 중동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7년 보성 법률 상업학교 교수가 되었다. 1918년 최린, 송진우 등과 독립운동 방향을 논의,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해외와의 연락 업무를 맡았다. 그 해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수립과 동시에 내무차장. 외무차장. 국무원 비서장. 외무총장 대리. 문교부장 등을 역임 내무부장으로 있으면서 광복과 더불어 귀국, 김구 등 임시정부 계통과는 노선을 달리하여 정치 공작대, 정치위원회 등을 조직하여 이승만과 접..

운산 장덕수의 묘

장덕수 (張德秀, 1894~1947) 한국의 친일파, 정치인, 교육자, 학자, 언론인이다. 일본 유학 후 귀국 상하이로 건너가 신한 청년당과 상하이 임시정부에 가담하였다가 귀국 후 체포되어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에 유재 당하였다. 그 뒤 임정 외무부 차장 여운형의 통역으로 일본에 다녀오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미국에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도한 미국에서는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보좌하였고, 구미 위원부 폐지령으로 궁지에 몰린 이승만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중일전쟁 이전까지 합법적인 공간에서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 사회계몽운동 등에서 활동하였으나 흥업구락부 사건을 계기로 친일파로 변절했고, 일제 강점기 전시 체제 시기에 친일 사회주의 활동에 참여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에 ..

도산안창호의 묘

도산 안창호의 묘 - 애국지사. 임시정부 내무총장 평남 강서출생, 평생을 나라의 근대화와 독립운동에 헌신한 위대한 지도자로 건국훈장 최고의 대한민국장을 추서 받았다. 1895년 구세학당 (경신고)에 들어가 기독교인이 되고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 평양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약관의 명 연설가로 이름을 떨쳤다. 1902년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교포들의 권익보호와 생활향상에 전력하다. 을사조약 후에 귀국하여 1907년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고 "105인 서건'으로 신민회가 해체되자 1913년 흥사단을 조직하였다. 3.1 운동 직후 상해 임시정부 조직에 참가하여 내무총장. 국무총리서리를 지내며 1919년 9월 통합 임시정부 출범에 크게 공헌했다. 1924년 도미하여 흥사단 조직을 강화한 후 192..

근대화단의 귀재 이인성

화가 이인성 (1912~1950) 대구 출생, 보통학교 시절부터 뛰어난 재능을 드러낸 그는 16세 때 방정환 등의 색동회가 주최한 세계 아동 전람회에서 [촌락의 풍경]으로 특선을 하며 비로소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일본 유학 시절에는 제국 미술전람회에 불과 19세의 나이에 수채화 [여름의 어느 날]로 입선해 천재화가로서 크게 명성을 떨치고, 24세 때는 조선 미술전람회에서 [경주의 산곡에서] 최고상인 창덕궁상(1935년)을 수상했으며 1937년 제16회 선전에서는 최연소 추천작가가 되었다. 해방 후에는 이화여중과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가르치며 1949년 가을 국전 창설의 주역으로 활동했으나 1950년에 불과 38세의 나이로 화려한 일생을 마감했다, ,1988년 2월호>은 고인을 근대 유화가 1위로 꼽..

망우리 역사전망대

역사의 전망대 풍수적으로 이곳 망우리가 배산임수의 명당임을 확인할 수 있는 장소이다. 역사적으로는 아차산에서 온돌장군이 전사했다는 전설과 아차산 능선에 산재한 고구려의 보루 유적이 말해 주듯 한강유역은 중국과의 교역로이며 땅은 비옥하고 전쟁에 유리한 지형으로 삼국시대의 지정학적 요충지였다. 백제와 고구려(475~553, 장수왕)에 이어 신라(진흥왕)가 이곳을 차지하여 한반도의 주인이 되었고 조선시대의 외사산 (外四山)의 좌청룡의 자리로 한양을 병풍처럼 크게 둘러싸며 조선500년을 지켜왔다. 그리고 일제가 만든 시립공동묘지(1933~1973)의 어둠을 벗어나 아름다운 경관 속에 선진 한국의 새벽을 여신 분들이 모여 있는 우리 근현대사의 성지가 되었으니 이곳에서는 맞는 해돋이는 그 어는 곳보다도 의미가 깊다.

통일의 선구자 문익환 목사

문익환 (文益煥) 문익환 (文益煥)(1918년 6월 1일~1994년 1월 18일) 은 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이다. 통일운동가. 사회운동가이며 참여시인이었다. 본관은 南平이고 호는 "늦봄"이다. 문익환 목사는 통일이 되지 않으면 민주화가 되지 않은다는 진보적 기독교인들의 신념에 따라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참여했기 때문에 기독교 사상에 근거한 사회운동을 한 정도로만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성서학자로도 활동하였다. 그 실례로 문익환 목사는 감리교 목사인 이현주 목사와 함께 공동번역 성서 번역에 개신교 측 번역자로 참여했으며, 구약성서를 다윗, 사무엘 등의 영웅들에게 가려진 민중의 관점에서 알기 쉽게 설명한 , 를 저술하였다. 1994년 1월18일 20시 20분 향년 77세 일기로 심장마비에 의해 별세하였다.

고 노회찬 국회의원

노회찬 노회찬 (魯會燦) 1956년 8월 31일 ~2018년 7월 23일)은 대한민국 정치인이다 1982년 용접기술을 배워 노동자로 생활하다가 1989년 인천 지역민주노동자 연맹사건으로 구속돼 3년간 수감되었다. 이후로도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다가 3선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2013년 독수 독과 이론에 의거해 의원직을 퇴직당했다가 2016년 20대총선에서 당선되었다. 원외에 있을 때에는 유시민, 진중권과 함께 팟캐스트 방송 , 노유진의 정치카페> 진행자로 활동하였다. 2018년 드루킹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특검 수사가 진행되던 중 7월 23일 오전 9시 38분 신당도 한 아파트의 17층과 18층 사이에서 투신해 사망하였다.

민주주의자 김근태

김근태의 생애 김근태는 1947년 2월 4일 경기도 부천시에서 태어났다. 1965년에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1960년대 무렵에 학생운동을 주도하여 손학규, 조영래와 함께 "서울대 운동권 3 총사"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까지 각종 재야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수배와 투옥을 반복하였다. 전두환 정권시절이던 1985년 9월 39세에 민청학련 사건으로 23일간 경기도 경찰국의 고문 시술자 이근안 경감에게 고문받았다. 서울민사 지방법원 합의 41부 (재판장 고현철 부장판사)는 1990년 전민련 결성 사건과 관련하여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홍성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전 민청연 의장 김근태 (46)가 ' 1985년 9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치안본부 (현 경찰청)..

전태일 열사

전태일 全泰壹 전태일 全泰壹 (1948년 9월 28일 ~1970년 11월 3일) 은 대한민국 봉제노동자이자 노동운동가, 인권운동가이다. 1960년대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재봉사, 재단사로 일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였다.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여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와 청계천 피복공장에 취직하였다. 1965년에는 청계천내 삼일 회사 재봉사로 일하다가 강제로 해고된 여공을 돕다가 함께 해고되었다. 이후 한미사의 재단보조로 있다가 재단사가 사장과의 갈등으로 해고되자, 그가 재단사가 되었다. 1968년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어 1969년 7월부터 노동청을 방문,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개선과 위생환경 개선을 요구하였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1969년 6월 청계천 공장단지 노동자들의 노동운동조직..

민주열사 박종철

박종철 朴鐘哲 박종철 朴鐘哲 (1964년 4월1일 ~1987년 1월14일 부산출생) 은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가로,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회장이던 그는 제5공화국 말기인 1987년 고문으로 인해 사망했다. 1941년 4월1일 부산서구 아미동에서 태어났으며 부산혜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4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언어학과에 입학해 언어학과 하생회장으로 활동했다. 1986년 노학연대 투쟁에 활동하던중 1986년 4월1일 청계피복노조 합법화 요구시위로 구속되었다가, 1986년 7월15일 징역 10개월 (집행유해 2년)을 선고 받고 출소했다. 박종철은 2001년 2월26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유족과 당시 학생운동 동지들은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에 가묘를 만들어 그를 기리고 있..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

마석 모란공원 민족 민주열사 묘역 모란공원은 1966년 우리나라에서 사설묘지로 전국 최초로 조성되었다. 현재는 부지 100여 만평에 민족민주열사를 포함한 13,000기의 묘소가 안치되어 있다. 민족민주열사 묘역으로는 1969년 권재혁 선생을 시작으로 1970년에 전태일 열사가, 1971년에는 김진수 열사가, 1973년에는 최종길 열사가 모셔진 이후로 지금까지 민주화와 민중해방을 향한 삶을 살다 돌아가신 150여분의 열사들이 모여 계시다. 특히나 1986년에 전태일 정신을 따라 투쟁을 벌이다가 산화하신 박영진 열사를 전태일 열사가 계신 이곳에 모시기 위해 한 달야에 걸쳐 30여 명이 구속되는 강력한 장례투쟁을 벌였다. 이후 이 투쟁 소식이 전파되면서, 민중들의 참 삶과 해방을 위해 투쟁하다 돌아가신 노동자..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 박영효묘)

박영효 朴泳孝 박영효 朴泳孝 (1861년~1939년 양력 9월 21일) 조선말의 문신, 정치인, 사상가로 급진개화파이다. 철종의 부마로 고종의 친척 매제가 되며 금릉위상보국승록 대부에 올랐다. 갑신정변을 일으켰고 갑오개혁을 주도했으며 모두 실패해 도합 20여 년이 넘는 일본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1882년 도일 (渡日)중 배에서 고종의 명으로 제작된 '이응 준태 극기" 중 4괘(卦)의 좌. 우를 바꿔 재 도안했고 이것이 태극기의 원형이 됐다. 1884년 김옥균, 홍영식, 윤치호, 서재필, 서광범 등 동문 수학들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일본에 망명했다가, 청일 전쟁에 승리한 일본을 등에 업고 귀국해 다시 갑오개혁을 주도했다. 장장 13만 8천 자에 달하는 개혁 상소문을 올려 세상을 놀랬지만 호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