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역사문화기행 (2006~) <여행지> 465

의금부 금오계첩

전시를 열며 공평 도시유적관은 도심의 정비사업에서 출토된 도시유적을 원위치에 전면 보존한 현장 박물관입니다. 전시관 개관 1주년을 맞아 첫 기획전 "의금부 금 오계첩"을 개최합니다. 전시관 길 건너편 건평 방 건평 방 에 자리 잡은 조선시대 최고의 사법기관이었던 의금부 義禁府의 기능과 활동, 의금부도사 義禁府都事 들이 신입 관료의 신고식인 면신례 과정에서 게첩을 제작해 동료들과 나누어 가졌던 모습과 각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을 모아 전시에 담아냈습니다. 이번 전시가 이라는 기록물을 통해 의금부와 관료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으면 합니다. 서울역사박물관장 송인호 한양도성 내부 지역에서 발굴된 유적의 성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도심지역에서 발굴된 다양한 생활유적이며,..

중랑구 선빈안씨 숙선옹주묘

선빈안씨 (善嬪安氏) 숙선옹주 (淑善翁主)묘 태종 (太宗)의 후궁. 검교 판한성부사 (判漢城府事) 안의 (安義)의 딸, 1421년 (세종3년)에 숙선옹주 (淑善翁主)로 책봉, 소생으로는 익녕군 이치 (益寧君 李袳> 태종의8남)와 소숙옹주 (昭淑翁主), 경신옹주(敬愼翁主)가 있음. 현위치 : 서울시 중랑구 공릉로 2라길 48. 산 37-3

봉화산 옹기마을

옹기가마 유래 서울에서 1990년대 초까지 가장 최후에 옹기점이 남아있던 지역은 신내동, 망우리 이며 중화초등학교와 능산길을 중심으로 번창 하였고 이일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약 200여명이 넘었다. 산림녹화 차원의 입산금지령에 의해 땔감 구하기 등 어려움을 겪다가 양은 플라스틱 뿐 아니라 최근 속속들이 출시되는 신소재 제품의 빠른 유통으로 생활의 뒷전으로 밀려났고, 옹기가마들이 있던 지역에서는 지속적으로 옹기점을 유지하기가 곤란하여 페점되거나 1990년대 초 경기도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본 전통옹기가마는 신내동에 거주하는 서울시 무형문화제 제30호 옹기장 배요섭씨 (1926년생)의 자문을 받아 전통옹기가마를 복원 하였으며 옹기가마 유형은 중부지역의 특징인 용가마 형태이다. 부엌 한켠에서 혹은 널찍한 ..

강서구 소악루

소악루 (小岳樓) 소재지 : 서울 강서구 가양동 소악루는 조선영조 (1724~1776, 재위)때 동복 현감을 지낸 이유가 양천현아 뒷산 기슭 강변 악양루터에 재건한 것이었다. 당시 이 누각에 이르면, 안산, 인왕산, 남산, 관악산 등이 한눈에 보이고 탑산, 선유봉 및 드넓은 한강줄기가 끝없이 이어지는 들 진경이 펼쳐져 조관빈, 윤봉구,이병연 등 당대 명사들이 이곳을 찿았다. 하며,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제정선이 이곳 현령으로 있을적에 그린 산수화 에서 당시의 경관을 볼 수 있다. 소악루 현위치는 ,와 정선이 그림 소악루, 소악후월 등의 그림으로 짐작해 볼때 강서구 가양동 산6-4 (일명 세숫대바위) 근처로 추정되나 주변의 변화가 극심하여, 한강변 경관 조성 및 조망을 고려하여 현 위치에 1994년 신축하..

강서구 양천향교

양천향교 소개 양천행교는 태종11년(서기1411년)에 유학을 토대로한 교육기관이 건립되었다. 대성전에는 공자님을 비롯한 4성위와 송조4현,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음력2월과 8월 상정일에 석전을 봉행하며 문묘기능을 하며 유학을 연구 강론하는 지방교육기관으로서의 역활을 하였다. 년중 제일 큰행사인 석전 댖제를 지방수령이 석전제를 올리는 것을 전통으로 본 향교는 강서구청장이 초현관으로 석천제를 올린다.구한말 갑오개혁 (1894년)으로 과거제도가 페지됨으로 인해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은 상실되고 문묘기능만 남아 있다 - 1411년 (태종11년) 양촌향교 창건- 1945년 교궁 중수- 1963년 행정구역변경 경기도 김포군 양동면 가양리에서 서울특별시로 편입- 1965년 대성전, 외삼문 보수- 1977년..

연산군묘 - 도봉구

연산군묘 연산군묘는 조선 10대 연산군 (1476~1506. 1494~1506재위) 과 거창군부인 신씨 (1476~1537)의 묘역이다. 연산군은 성종과 페비윤씨의 아들로 태어나 1494년 왕위에 올랐다. 붓글씨를 잘 쓰고 시를 잘 지어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그러나 두번의 사화로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반정으로 폐위 (1506년-중종1년) 되고 이복동생중종이 왕위에 올랐다. 이후 연산군으로 강등되고 강화도로 유배되어 그 해 31세로 세상을 떠났다. 1512년 (중종7년) 부인 신씨가 묘를 강화도에서 이곳으로 옮겨줄 것을 요청하여, 중종은 1513년(중종8년) 왕자의에에 따라 묘를 옮기고 양주군의 관원이 제사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왕릉보다는 간소하나 왕자의 묘제에 따라 곡장, 혼유석, 장명등, 문석인, 재..

정의공주묘역 - 도봉구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 지정번호: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0호 / 시대: 15세기후반 소 재 지: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3번지 1호 이 묘역은 양효공(良孝公) 안맹담 (安孟聃: 1415~1462)과 그의 부인 정의공주 (貞懿公主?~1477)를 합장한 곳이다. 이 묘역의 봉분은 쌍분이고, 신도비 묘표2기. 상석2기, 문인석 2쌍, 3단 게체석 등의 석물이 남아 있다. 양효공의 본관은 죽산(竹山)으로 함길도 안망지(安望之)의 아들이다. 1428년 (세종100에 14세의 나이로 세종의 둘째딸 정의 공주와 결혼하였는데 부부의 금슬이 매우 좋았다고 전한다. 세종은 그에게 한강 가운데 있는 저자도와 낙천정을 하사하였다. 그는 초서를 잘써서 서예가로 이름이 높았고 음악과 의학에도 통달하였다. 묘역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