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대한민국명소 (2006~) <여행지>/1.서울시 관광 113

석파정 石坡亭

석파정 石坡亭 '물과 구름이 감싸 안은 집' 이라 명명된 석파정(石坡亭) 은 조선의 왕이 선택한, 왕의 공간이다. 굴곡진 역사의 흐름과 비바람을 견뎌낸 노송과, 건축물을 넘어 예술적 가치를 지닌 존귀한 공예춤 같은 집. 조선의 마지막왕, 고종은 이곳을 행전이나 행궁 시 임시 거처로 사용하며, 신하들과 함께 국정을 논의 하였고, 집을 둘러싸고 있는 빼어난 산수와 계곡, 사계의 아름다움을 모두 품어내는 궁극의 절경 앞에 자신을 겸허하게 내려 놓았다. 별서와 정자 흥선대원군 별서는 안채와 사랑채, 별채와 같은 살림채로 이루어져 있고 석파정은 중국풍으로 지은 정자이다. 별서의 사랑채는 담으로 둘러쌓인 안채와 떨어져 담 밖에 따로 지었다. ㄱ 자로 꺽어 지은 사랑채의 앞에는 서울시 지정 보호수 60호인 오래된 소..

석파정 石坡亭 : 왕이 사랑한 정원

석파정 (石坡亭) : 도심속 비밀정원 본래 7채의 살림채와 육모정 등 다양한 건축물로 구성된 흥선대원군 별서는 오늘날 안채> 사랑채, 별채와 정자로 4개동만 남아 있습니다. 당대 별서들과는 다르게 안채 이외에 별채가 잇고 이것을 높은 자리에 위치한 구성, 별채로 진입하는 협문, 과거에 있었던 꽃담 등은 왕이 묵던 곳으로서 손색없게 하려는 의도로 읽혀집니다. 대원군 사후 50년간 후손들에게 소유되었다가 한국전쟁 뒤에는 콜롬바 고아원과 병원으로 사용되었으며, 서울 미술관 개관관 함께 2012년 일반에게 공개되었습니다. 석파정은 빼어난 산수를 배경으로 옛 조상들의 풍류 문화와 예술적 정취에 대한 이상을 전해주는 도심속 비밀 정원 입니다. 석파정(石坡亭)은 조선시대에 세워진 흥선대원군 별서(興宣大院君 別墅)에 ..

고려대학교 캠퍼스 방문

고려대학교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 정릉동에 위치한 사립 종합대학이다. 1905년 충숙공 이용익이 고종의 지원을 받아 설립한 근대적 사립 고등교육기관인 보성전문학교에 연원을 두고 있다. 1932년 인촌 김성수가 학교를 인수하였고 해방 후 1946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하며 교명을 고려대학교로 하였다. 약칭은 고대(高大)이며, 영문명 Korea University의 약칭은 KU이고, FM구호는 민족고대이다. 1. 야성, 저돌성, 중후함, 수수함 고려대학교의 교풍은 야성, 저돌성, 중후함, 수수함 등으로 대표되어 왔고, 현재도 통용된다. 대학의 상징동물인 호랑이, 캠퍼스에 서 있는 다수의 육중한 석조건물 등 고대를 대표하거나 '고대' 하면 떠오르는 상징들은 대부분 이러한 특징들과 연관된 경우가 많다. 2. ..

해방촌 (숭실학교 옛터,경성호국신사터,108계단)

해방촌 숭실학교 터 이야기 평양에서 개교한 숭실학교는 1950~70년대 이곳 해방촌에 터를 잡았습니다. 숭실학교는 일제강범기 신사참배거부로 강제 폐교되었습니다. 해방 이후 숭실학교가 남하하여 자리를 잡은 이터는 일제강점기 경성호국신사가 잇던 곳입니다. 일제의 신사가 있던 아픔의 장소에 신사참배를 거부한 학교가 터 잡아 교육의 산실로 거듭났던 것입니다. 한국 현대사의 굴곡진 사연을 간직한 이곳에서, 여러분에게 해방촌 숭실학교 터 이야기와 숭실학교가 배출한 인물을 소개합니다. 학교 터의 이력 경성호국신사: 1943~ 1945-> 숭실학교: 1954~1978 -> 정일학원: 1979~1998 -> 센테니얼크리스찬스쿨: 1989(개교)~2016 -> 미네르바스쿨 2018~ 경성호국 신사터 : 현재 해방모자원 밎..

해방촌 (한신옹기, 해방촌성당, 해방교회,보성여중고,해병대초대교회)

한신옹기 서울미래유산 2017 한신옹기는 녹사평로에서 해방촌 진입부에 위치한 도기상점으로 항아리, 도자기, 찻잔 등을 판매한다. 한신옹기는 1967년에 개업하여 해방촌 서민들의 삶의 " 추억을 담고, 전통을 저장해온" 마을의 대표상점으로서, 미군부대 경계벽을 따라 샇여 있는 옹기들은 마을과 도시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한신옹기는 "서울시민의 기억과 감성이 담긴 가치 있는 근.현대 문화유산으로 평가되어 '서울미래유산(2017)" 으로 선정되었다. 해방촌성당 천주교 해방촌교회 해방촌성당(1954)은 1950년대 초 신자의 주택에서 첫 예배를 드리면서 설립되어 서울대교구 소속의 성당으로 1983년에 본당을 신축하며 나눔의 공동체로 기능해 왔다. 측히 해방촌 성당은 마을 어르신을 위한 노인대학, 독거노인을 ..

성균관 대학교 명륜당

성균관 대학교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성균관로 25-2 및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서부로 2066 소재의 4년제 사립대학교. 1398년[8] 개성에서 한성부 숭교방으로 성균관이 이전되었고, 기존의 개성 성균관은 향교로 격하되었다. 1895년 갑오개혁 이래 성균관에 경학과[9]가 설치되었으며 근대적 제도 개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경술국치 이후 성균관은 경학원(經學院)으로 개칭되었으며 근대적 대학 교육의 기능도 중단되었다. 이후 유림들에 의한 성균관 교육기능의 회복 움직임의 영향으로 부설된 교육기관인 명륜전문학교 마저도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1943년 폐교되었다. 비로소 광복 후 군정법령]에 의해 명칭이 성균관으로 회복되었고, 명륜전문학교가 부활하였다. 이후 전국유림대회를 통해 유림 천여 명은 성균관대학..

심우장 尋牛莊 (만해 한용운)

만해 한용운 연혁 1979 8.29 충남 홍성군 결성면에서 출생 1906 인제 백담사에서 출가 1919 3.1운동시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참여하여 독립선언서를 발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1921 속초신흥사 승려로 원적을 둠 1926 님의침묵 회동서관에 발행 1933 성북구 심우장을 지어 정착, 민족지사와의 교류 밎 문학활동 1944 6.29 심우장에 입적, 망우리 묘소에 봉안 만해 한용운 심우장 등록번호 : 사적 550호 / 시대 1933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로 29길 24 이 집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중 한분이자 의 시인 만해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이 1933년부터 1944년까지 살았던 곳이다. 동쪽으로 난 대문으로 들어가면 북쪽으로 향한 기와집인 심우장과 관리동 그리고..

서울 중랑구 용마폭포공원

용마폭포공원은 용마산 중턱 347m에 위치해 있으며, 5만여평의 채석장 부지에 지난 1991년에 조성되었다. 축구장, 테니스장,게이트볼장, 베드민턴장과 대형 잔디광장이 있어 지역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된다. 1997년 높이 51m의 인공폭포가 조성되면서 용마폭포공원으로 새롭게 단장했다. 용마폭포좌측에는 21.4m의 백마폭포가, 그리고 7백여평의 연못이 설치되어 있다.

우표박물관

우표의 탄생 세계 최초의 우표는 1840년 5월 6일 영국에서 탄생하였습니다. 교육자이자 개혁가인 '로랜드 힐 셔 1795~1879)의 제안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우표는 받는 사람이 우편요금을 지불하도록 되어 있는 종전의 불편한 점을 개선하고자 만들어진 것입니다. 영국의 국왕이었던 빅토리아 여왕의 초상을 감은 최초의 우표는 액면이 1 페니인 흑색과 2펜스인 청색 우표가 두 가지로 발행되었으며 각각 페니 블랙과 팬스 블루라는 애칭으로 불립니다. 최초의 우표 - 세계 최초의 우편봉투 세계 최초의 우표는 액면 가격이 1페니인 흑표 우표와 2펜스인 청색 우표 두 가지로 1840년 영국에서 발행되었으며, 각각 페니 블랙과 펜스 블루라는 애칭으로 불립니다. 그리고 같은시기에 우편요금을 미리 표시한 우편봉투도 최초..

서울시장의 공관

서울시장의 공관 혜화동 옛 시장공관은 다양한 서울시의 정책이 논의되는 일터이자, 서울시장이 하루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는 집이었다. 공관은 국내외의 손님이 초대되는 행사장이었고, 동네의 일원으로서 반상회를 개최하거나 새해에 떡국을 나누는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텃밭을 가꾸고 평상에 한숨을 돌리는 일상의 공간이었다. 1981년부터 2013년까지 13명의 역대 서울시장이 거주하였으며 이곳에서 논의된 다양한 정책들은 서울시의 역사이자 우리나라의 현대사가 되었다. 혜화동 엣시장공관

한양도성 (낙산~혜화)

서울 한양도성 지정번호 : 사적 제10호 (서울한양도성) 시대 : 1396년 (태조9)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왕조의 권위를 드러내며 외부의 침입을 막기위해 축조된 성이다. 1396년 (태조5년)에 백악 (북악산). 낙타(낙산). 목멱(남산). 인왕의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쌓은 이후 여러차례 고쳤다. 평균 높이 약 5~8m, 전체길이 약 18.6km에 이르며, 현존하는 전세계의 도성중 가장 오래도록 (1396~1910, 514년) 성의 역할을 다한 건축물이다. 한양도성의 성벽에는 낡거나 부서진 것을 손보아 고친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성벽 돌에 새겨진 글자들과 시기별로 다른 돌의 모양을 통해 축성시기와 축성기술의 발달 과정을 알수 있다. 한양도성에는 사대문 (..

한양도성 박물관

한눈에 보는 한양도성 한양도성은 조선왕조가 한양에 새 도읍지를 정한 1394년부터 쌓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600여 년간 지속적으로 보수 관리되어 온 성이다. 전체 길이는 18,627km, 성벽높이는 5~8m이다. 성벽은 백악, 낙타(낙산), 목멱(남산), 인왕 네 산의 능선을 따라 축조하여 자연의 형상과 일체화하였으며, 각각 독특한 건축미를 지닌 8개의 성문과 2개의 수문水門을 내었다. 성벽의 일부 구간에는 치성雉城을 쌓았고, 곳곳에 군사용 성랑城廊을 지었다. 19세기 말부터 전타, 자동차 등 근대적 교통수단이 도입되고 도시의 영역이 성벽 바깥으로 확장됨에 따라 평지 구간의 성벽은 대부분 철거 되었지만, 산지의 성벽은 크게 훼손되지 않았다. 현재 13,370km의 성벽이 남아있는데, 현존하는 세..

한양도성의 각자상석(동대문)

한양도성의 각자 상석 여기 있는 각자성석은 숙종 32년 (1706년) 4월 훈련도감의 관리인 한필 영이 공사를 총괄하고, 1구간은 성세각, 2구간은 전수선, 3구간은 유제한이 공사를 이끌었고, 석수의 우두머리는 오유선이며, 1 구산 석수는 양육오, 2구간은 황승선, 3구간은 김정립이 참여하여 고쳐쌓았다는 기록이다. 석재의 운반을 담당한 관리들의 명단은 유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축성과 관련된 기록이 새겨진 성돌은 각자성석이라고 한다. 한양도성에 남아 있는 각자성석은 천자문의 극자로 축성구간을 표시한 것 (14C)과 축성을 담당한 지방의 이름을 새긴 것 (15C) 축성 책임 관리와 석수의 이름을 새긴것 (18C이후)으로 나눌 수 있다. 한양도성에는 이처럼 다양한 시기의 유형의 각자 상석이 280개 이상 전해..

태화관 중앙발딩 승동교회 YMCA

이 집터는 본래 중종 때 순화 공주의 궁터라 불행하게도 을사 경술 두 조약 때 매국 대신들의 모의처로 사용되더니 삼일운동 때에는 그 조약을 무효화시킨다는 뜻으로 여기에서 독립 선언식이 거행되었다. 즉 기미년 삼월일일 정오 탑골공원에서 터진 민족의 절규와 함께 민족대표 일동은 여기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서 대한독립을 알리는 식을 거행하는 동시에 미리 서명해 두었던 선언서를 요로에 발표하고 급히 달려온 일경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제청하고 일제히 사로 잡혔다. 그 뒤 남 감리교회는 이터를 매수하여 태화기독교 사회관 건물을 지었으며 일제 말기에는 침략의 도구로 징발되었으나 팔일오 해방과 더불어 이를 되찾아 사업을 계속했다. 그러나 도시 재개발계획에 건물이 헐리게~

공평도시유적 전시관

공평 도시유적전시관 보존의 상생 - 공평동 일대는 1978년 "공평구역 도심 재개발지구"로 총 19개 지구가 지정되었고, 2010년까지 6개 지구의 재개발사업이 완료되었다. 2014~15년 재개발 사업 시행에 따른 문화재 발굴조사가 제1.2.4 지구에서 진행되었다. 조사 결과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4개의 시대별 문화층에서 건물지와 도로 등 유구와 다양한 유물이 확인되었다. 그중 유구의 상태가 가장 온전히 남아있는 iv문화층 (16~17세기) 유구를 전시관 내부로 이전하여 복원하였다. 공평동 도시 유적관은 도심정비 사업에서 발굴되는 매장문화재를 최대한 " 원위치 전면 보존" 한다는 원칙을 적용한 첫 사례이다. 능성 구 씨 가옥의 변천 능성구씨 가옥은 구수영의 증손인 구사안이 동생 구사맹에게 대지의 서..

종각 피맛골 역사투어

국가에서 점포를 건설하여 상인들에게 임대하고 세금을 받는 관설 시장을 시전(市廛) 이라한다. 조선 태종 [태종 재위 1400~1418] 종로에 양쪽 건물이 길게 늘어선 행랑을 조성하여 이곳에서 장사를 하게 하였다 의금부 터 (義禁府 跡) 의금부는 조선시대왕명을 받들어 죄인을 추국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었으며, 금부, 금오, 왕부라 부르기도 하였다.박해시기 천주교 신자들은 서울의 좌. 우포도청과 지방의 각 진영 및 군.현에서 문초를 받았다. 그들 가운데 중죄인 즉, 주교와 신부, 평신도 지도자들은 국왕의 특별한 명령에 의해 의금부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앗다. 1791년 신해박해 때 이승훈 베드로가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고, 1801년의 신유박해 때 권철신 암브로시오가 순교한 아래 많은 천주교 선교사와 지도층..

식민지 역사박물관

식민지역사박물관 기획전 기억을 둘러싼 투쟁 친일인명사전, 그 후 10년 2019.1118.(금) ~2020.3.8 (일) 식민지 역사박물관 돌모루 홀 전시회를 열며 2009년 11월 8일 온갖 난관을 뚥고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되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청산의 기치를 높이 든 지 18년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가 출범한 지 8년 만에, 4,389명에 이르는 친일 인물들의 행적과 경력을 집대성한 역사정의 실현의 이정표가 세워진 것입니다. 친일경찰의 습격으로 반민특위가 와해되면서 오랜 기간 금단의 영역으로 남아있었던 친일파들의 죄적이 백일하에 드러난 역사적 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오직 시민의 힘만으로 '오욕의 역사'를 정리해 낸 세계사에 유례없는 역사운동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며 정직한 역사에 대한 시민들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