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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3년 전 저자는 한국 「평화문제연구소」로부터 연변 고구려 성곽 답사 프로젝트의 진행을 제안 받았다. 허나 자료수집부터 답사 여정까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연변지역의 고구려 성곽 자료는 혼선을 빚고 있었고, 저자는 3년 반 남짓한 시간동안 무려 7만 킬로미터를 왕복했다. 일부 성곽은 접근이 어려워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고, 한·중 간 역사 갈등이 있는 상황에서 '고구려'를 언급하는 것은 편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저자는 결국 고대유적의 현주소를 확인하며 문헌기록에 없는 성곽들을 문자화하고, 성곽에 숨은 옛 기억들을 찾는 데 성공하였다. 이 답사기들은 「평화문제연구소」의 정기 간행물 월간 〈통일한국〉과 중국의 조선문 간행물 〈연변일보〉와 〈중국민족〉에도 일부 전재되었다. 학자들의 충고를 반영하고 재답사 과정을 거치며 보완·수정해 이 책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결국 고대유적의 현주소를 확인하며 문헌기록에 없는 성곽들을 문자화하고, 성곽에 숨은 옛 기억들을 찾는 데 성공하였다. 이 답사기들은 「평화문제연구소」의 정기 간행물 월간 〈통일한국〉과 중국의 조선문 간행물 〈연변일보〉와 〈중국민족〉에도 일부 전재되었다. 학자들의 충고를 반영하고 재답사 과정을 거치며 보완·수정해 이 책이 탄생하게 되었다.
목차
책을 펴내며 - 연변, 그곳에는 고구려가 있었다
천지와 고구려장성
화룡시
안도현
용정시
연길시
왕청현
도문시
훈춘시
천지와 고구려장성
화룡시
안도현
용정시
연길시
왕청현
도문시
훈춘시
출판사 리뷰
1. 연변지역 고구려 성곽은 50여 개에 달한다
길림성 고대유적의 자료내원은 이미 주요하게 공개 발표된 일부 조사보고를 제외하고 대부분 길림성의 각 현과 시 문물지에 의거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지금까지 연변지역에 알려진 크고 작은 고대 성곽은 약 120개에 달한다. 현재 돈화시는 연변지역에 포함되어 있으나 그 전에는 다른 고장이었다. 유적의 분포를 보아도 안도현 동쪽과는 갈래가 전혀 다르다. 따라서 연변지역의 유적 가운데 돈화에 소속된 15개의 성곽을 포함시키지 않더라도 고대 성곽은 100여 개나 된다. 그러나 이중에 고구려 성곽이 확실하게 몇 개나 되는가에 대해서는 한국, 북한, 일본 등의 주변국은 물론 소재국인 중국에서도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일례로 각 현과 시 문물지를 기초로 편찬한 「중국문물지도집·길림분책」이 확정한 연변지역의 고구려 성곽은 연길 북쪽의 흥안고성과 동쪽의 성자산산성 두 개 뿐이다.
연변지역의 고구려 성곽에 대해서 이렇게 혼선을 빚는 까닭은 많은 성곽에서 딱 부러지게 고구려 시기라고 할 수 있는 유물이 잘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런 성들을 전부 발해 시기나 그 후의 시기로 보는 것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한반도의 고구려 유적에도 고구려 기와 등이 전혀 보이지 않는 성과 보루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문헌기재에 따르면 고구려 세력은 책성을 설치하여 북옥저지역을 통제할 정도로 오래 전에 지금의 연변지역에 이르렀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직후인 698년부터 이곳은 또 새로 설립된 발해국의 통치 지역이었다. 고구려와 발해 두 조대의 시간적인 차이는 너무 짧기 때문에 고구려와 발해 두 시기의 문화특점은 구분하기 힘들다. 그래서 연변지역의 각 현과 시 문물지에서 많은 성곽이 발해성곽과 요?금 시기의 성곽으로 판정되고 있다.
「연변문물간편」에서는 “무릇 돗자리무늬와 그물무늬, 노끈무늬가 함께 출토된 유적은 고구려 유적으로 서술해야 한다”는 기준을 세우고 있다. 여기에서 서술한 그물무늬는 네모무늬라고도 한다. 상기 무늬 중 그물무늬와 노끈무늬의 기와는 통상 고구려 유적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이밖에도 성곽의 위치와 특이한 지세, 축성구조, 부근의 유적과 유물 역시 고구려 유적을 판정하는데 묵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런 요소를 감안하면 연변지역의 고구려 성곽은 기존의 수량을 훨씬 벗어난 약 50개에 달한다. 연변이 일찍 동명왕 10년(B.C.28년)에 고구려의 세력권에 들어간 지역이라면 가히 수용할 수 있는 숫자라고 생각한다.
2. 연변지역 고구려 고대유적의 현주소를 확인하다
연변지역의 고구려 유적 답사는 자료수집 뿐만 아니라 답사 자체가 아주 어렵다. 저자가 살고 있는 북경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 수부 연길까지는 약 1,500킬로미터 길이다. 3년 반 남짓한 시간동안 땅으로 하늘로 저자가 이 길을 다녀온 게 거의 스무 차례, 그러니 연길까지만 무려 7만 킬로미터를 왕복한 셈이다. 일부 성곽은 국경지역 혹은 유적 발굴 현장이어서 중앙언론사의 기자 신분으로도 접근 자체가 어려워 많은 곡절을 겪어야 했다. 또 고구려가 민감한 문제로 비화되면서 연변 현지에서 ‘고구려’라는 이름을 거론할 때면 상대방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현실적 어려움이 있었다. 현지의 일부 학자는 고구려 성곽을 답사한다고 하자 아예 만나는 것조차 기피했다고 한다. 여태껏 연변지역 전부의 고구려 유적과 관련한 전문적인 글이 나오지 못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답사를 하며 고대유적의 현주소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문헌기록에 없는 일부 성곽을 찾아 처음으로 문자화 할 수 있었고 성곽에 숨은 옛 기억을 찾을 수 있었으며 또 일부 특이한 유적이나 유물을 발견하여 처음으로 기록할 수 있었던 점이 이 책이 거둔 주요한 성과이다.
3. 고구려장성, 삼백리를 이은 천년의 미스터리
문물지를 비롯한 문헌기록에 따르면 연길 지역의 옛 장성은 서북쪽 팔도향의 쌍봉산과 태얌촌 부근의 평봉산, 동북쪽의 청차관을 거쳐 바로 도문시 장안진의 광흥촌 북산을 지난다. 이 옛 장성은 만리장성과 천리 너머 떨어진 것은 물론이요, 형태도 전혀 달라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으로 알려진다. 또 잔존한 성벽의 상당부분은 길게 뻗은 흙무지나 돌무지 정도로 오인을 받기 십상이다. 그래서인지 마을사람들은 봉화대면 몰라도 장성이 있다는 말은 난생 처음 듣는다는 것이다.
화룡시 서성의 이도구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알려진 옛 장성은 이처럼 연길 동쪽의 하룡촌 부근에서 끝나며 전 구간을 걸쳐 무려 3백리150km에 달한다. 현지 일부 산악인들은 계림 북산부터 도문시 월청진 삼동 부근에 이르는 산등성이에서 10여 개의 봉화대와 토성 등 고대유적을 발견하고, 이를 장성의 동쪽 연속이라 주장하고 있다. 우연한 일치일까, 이전에 밀수꾼들은 북한과 중국을 왕래할 때 바로 이 산등성이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먼 옛날에도 이곳에서 두만강 기슭까지 통하는 오랜 교통로가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혹여 산악인들의 이 발견은 연변장성의 전모를 밝히는데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
솔직히 고구려 3백리의 장성은 명나라 만리장성의 거창한 규모에 전혀 비길 바가 아니다. 또 장기적인 수비를 위한 견고한 방어선이라기보다 변방의 성곽들을 연결하는 보조시설에 불과하다. 그러나 연변에 현존하는 최대의 유적으로서 사상 전대미문의 방대한 군사시설이라는데 의미가 있다. 어마어마한 이런 시설은 약 2백년 후 만주 땅에 또 하나 나타난다. 고구려가 영류왕 14년A.D. 631년부터 당나라의 진공에 대비하여 무려 16년간 부여성지금의 농안부근에서 시작하여 서남으로 바다에 이르기까지 천리장성을 쌓았던 것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때 남자들은 모두 장성축조공사에 나가고 여성들이 밭갈이를 했다고 한다. 천리장성은 규모나 형태가 모두 연변 3백리의 옛 장성과 유사한 걸로 분석된다. 이에 따라 3백리의 옛 장성 토목공사에도 천리장성을 축조할 때의 상황이 엇비슷하게 벌어졌으리라고 볼 수 있겠다.
3백리 옛 장성은 한 마리의 신비한 용처럼 머리와 꼬리는 물론 몸통의 일부까지 숨기고 있었다. 한 조각 두 조각씩의 일부나마 세상에 드러나고 있는 옛 기억의 편린들…… 어쩌면 연변의 산과 들에 그려진 이 미스터리한 거대 유적은 선인들이 후세에 남겨놓은 천년의 타임캡슐 일지도 모른다.
길림성 고대유적의 자료내원은 이미 주요하게 공개 발표된 일부 조사보고를 제외하고 대부분 길림성의 각 현과 시 문물지에 의거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지금까지 연변지역에 알려진 크고 작은 고대 성곽은 약 120개에 달한다. 현재 돈화시는 연변지역에 포함되어 있으나 그 전에는 다른 고장이었다. 유적의 분포를 보아도 안도현 동쪽과는 갈래가 전혀 다르다. 따라서 연변지역의 유적 가운데 돈화에 소속된 15개의 성곽을 포함시키지 않더라도 고대 성곽은 100여 개나 된다. 그러나 이중에 고구려 성곽이 확실하게 몇 개나 되는가에 대해서는 한국, 북한, 일본 등의 주변국은 물론 소재국인 중국에서도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일례로 각 현과 시 문물지를 기초로 편찬한 「중국문물지도집·길림분책」이 확정한 연변지역의 고구려 성곽은 연길 북쪽의 흥안고성과 동쪽의 성자산산성 두 개 뿐이다.
연변지역의 고구려 성곽에 대해서 이렇게 혼선을 빚는 까닭은 많은 성곽에서 딱 부러지게 고구려 시기라고 할 수 있는 유물이 잘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런 성들을 전부 발해 시기나 그 후의 시기로 보는 것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한반도의 고구려 유적에도 고구려 기와 등이 전혀 보이지 않는 성과 보루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문헌기재에 따르면 고구려 세력은 책성을 설치하여 북옥저지역을 통제할 정도로 오래 전에 지금의 연변지역에 이르렀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직후인 698년부터 이곳은 또 새로 설립된 발해국의 통치 지역이었다. 고구려와 발해 두 조대의 시간적인 차이는 너무 짧기 때문에 고구려와 발해 두 시기의 문화특점은 구분하기 힘들다. 그래서 연변지역의 각 현과 시 문물지에서 많은 성곽이 발해성곽과 요?금 시기의 성곽으로 판정되고 있다.
「연변문물간편」에서는 “무릇 돗자리무늬와 그물무늬, 노끈무늬가 함께 출토된 유적은 고구려 유적으로 서술해야 한다”는 기준을 세우고 있다. 여기에서 서술한 그물무늬는 네모무늬라고도 한다. 상기 무늬 중 그물무늬와 노끈무늬의 기와는 통상 고구려 유적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이밖에도 성곽의 위치와 특이한 지세, 축성구조, 부근의 유적과 유물 역시 고구려 유적을 판정하는데 묵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런 요소를 감안하면 연변지역의 고구려 성곽은 기존의 수량을 훨씬 벗어난 약 50개에 달한다. 연변이 일찍 동명왕 10년(B.C.28년)에 고구려의 세력권에 들어간 지역이라면 가히 수용할 수 있는 숫자라고 생각한다.
2. 연변지역 고구려 고대유적의 현주소를 확인하다
연변지역의 고구려 유적 답사는 자료수집 뿐만 아니라 답사 자체가 아주 어렵다. 저자가 살고 있는 북경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 수부 연길까지는 약 1,500킬로미터 길이다. 3년 반 남짓한 시간동안 땅으로 하늘로 저자가 이 길을 다녀온 게 거의 스무 차례, 그러니 연길까지만 무려 7만 킬로미터를 왕복한 셈이다. 일부 성곽은 국경지역 혹은 유적 발굴 현장이어서 중앙언론사의 기자 신분으로도 접근 자체가 어려워 많은 곡절을 겪어야 했다. 또 고구려가 민감한 문제로 비화되면서 연변 현지에서 ‘고구려’라는 이름을 거론할 때면 상대방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현실적 어려움이 있었다. 현지의 일부 학자는 고구려 성곽을 답사한다고 하자 아예 만나는 것조차 기피했다고 한다. 여태껏 연변지역 전부의 고구려 유적과 관련한 전문적인 글이 나오지 못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답사를 하며 고대유적의 현주소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문헌기록에 없는 일부 성곽을 찾아 처음으로 문자화 할 수 있었고 성곽에 숨은 옛 기억을 찾을 수 있었으며 또 일부 특이한 유적이나 유물을 발견하여 처음으로 기록할 수 있었던 점이 이 책이 거둔 주요한 성과이다.
3. 고구려장성, 삼백리를 이은 천년의 미스터리
문물지를 비롯한 문헌기록에 따르면 연길 지역의 옛 장성은 서북쪽 팔도향의 쌍봉산과 태얌촌 부근의 평봉산, 동북쪽의 청차관을 거쳐 바로 도문시 장안진의 광흥촌 북산을 지난다. 이 옛 장성은 만리장성과 천리 너머 떨어진 것은 물론이요, 형태도 전혀 달라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으로 알려진다. 또 잔존한 성벽의 상당부분은 길게 뻗은 흙무지나 돌무지 정도로 오인을 받기 십상이다. 그래서인지 마을사람들은 봉화대면 몰라도 장성이 있다는 말은 난생 처음 듣는다는 것이다.
화룡시 서성의 이도구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알려진 옛 장성은 이처럼 연길 동쪽의 하룡촌 부근에서 끝나며 전 구간을 걸쳐 무려 3백리150km에 달한다. 현지 일부 산악인들은 계림 북산부터 도문시 월청진 삼동 부근에 이르는 산등성이에서 10여 개의 봉화대와 토성 등 고대유적을 발견하고, 이를 장성의 동쪽 연속이라 주장하고 있다. 우연한 일치일까, 이전에 밀수꾼들은 북한과 중국을 왕래할 때 바로 이 산등성이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먼 옛날에도 이곳에서 두만강 기슭까지 통하는 오랜 교통로가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혹여 산악인들의 이 발견은 연변장성의 전모를 밝히는데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
솔직히 고구려 3백리의 장성은 명나라 만리장성의 거창한 규모에 전혀 비길 바가 아니다. 또 장기적인 수비를 위한 견고한 방어선이라기보다 변방의 성곽들을 연결하는 보조시설에 불과하다. 그러나 연변에 현존하는 최대의 유적으로서 사상 전대미문의 방대한 군사시설이라는데 의미가 있다. 어마어마한 이런 시설은 약 2백년 후 만주 땅에 또 하나 나타난다. 고구려가 영류왕 14년A.D. 631년부터 당나라의 진공에 대비하여 무려 16년간 부여성지금의 농안부근에서 시작하여 서남으로 바다에 이르기까지 천리장성을 쌓았던 것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때 남자들은 모두 장성축조공사에 나가고 여성들이 밭갈이를 했다고 한다. 천리장성은 규모나 형태가 모두 연변 3백리의 옛 장성과 유사한 걸로 분석된다. 이에 따라 3백리의 옛 장성 토목공사에도 천리장성을 축조할 때의 상황이 엇비슷하게 벌어졌으리라고 볼 수 있겠다.
3백리 옛 장성은 한 마리의 신비한 용처럼 머리와 꼬리는 물론 몸통의 일부까지 숨기고 있었다. 한 조각 두 조각씩의 일부나마 세상에 드러나고 있는 옛 기억의 편린들…… 어쩌면 연변의 산과 들에 그려진 이 미스터리한 거대 유적은 선인들이 후세에 남겨놓은 천년의 타임캡슐 일지도 모른다.
'21.여행박사 (독서>책소개) > 2.역사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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