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무허가 판자촌
조선 후기 청계천 다리 밑과 오간수문 양쪽의 가산(假山)은 거지들의 공간이었고, 아랫대는 군병(軍兵)등 가난한 사람들의 주거지였다. 근대화 과정에서도 서울에 인구가 급증할 때마다 청계천은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쉴자리를 내 주었다. 가산은 일제강점기에 사라졌으나 청계천 다리 밑에서는 해방 후까지도 거지들이 모여살았고, 일제강점기에는 청계천 하류 제방위 곳곳에 토막(土幕) 들이 들어섰다. 해방 직후에는 전재민 (戰災民)들이, 한국전쟁 이후에는 월남민들과 상경민들이 청게천변에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청계천변 판자촌은 주거지일 뿐만 아니라 시장이자 산업지대이기도 했다. 천변사람들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물건들을 사고 팔았고 폐품을 재활용하여 새 상품을 만들어 냈다. 해방과 전쟁을 겪은 뒤의 산업화 과정에서 청게천 변은 시골사람이 서울사람으로 바뀌고 농민이 노동자로 개조되는 전이(轉移) 지대였다.
삶의 터전, 청계천 판자촌
모든 판잣집이 불량 주택이었지만, 천변 판잣집은 특히 심했다. 하천 바닥에 세운 기둥에 위태롭게 의지한 집들은 홍수에 쉽게 떠내려가곤 했다.집안에 화장실을 만들기 어려웠고, 이궁이를 설치하는 것도 쉽지않았다.
몇 안 되는 공동변소 앞은 아침마다 장사진을 이루었다. 난로가 과열되거나 화로가 엎어져 화재가 나는 일도 잦았다. 하루 사이에 판잣집 몇 채가 사라지면, 다음날 또 몇채가 들어서곤 했다. 비록 열악한 환경이지만 판자촌 사람들에겐 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며 삶을 구려가는 보금자리 였다.
천변 도깨비 시장
해방 후 일본인이 물러감에 따라 수많은 생산시설이 가동중단 상태에 빠졌다. 그런 상태에서 청계천변에는 생계를 위해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물건들을 파는 노점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청계천변 노점시장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크게 확대되어 합법적인 상품이든 불법적인 물건이든 가리지 않고 구할 수 있는 시장이 되었다. 이 시장의 상점 주인돠 종업우너들 다수는 천변 판잣집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청계천변 노점시장은 평화시장, 공구긱계상가, 황학동 벼룩시장 등의 기원이 되었다.
도시개발의 걸림돌, 청계천
청계천변 판자촌은 1950~60년대 서울을 대표하는 슬럼이었다. 주민 중에는 변든 사람들, 죄 짓고 숨어사는 사람들, 성매매 여성들도 많았다.천변에 소규모 산업 시설들이 늘어 남에 따라 물도 계속 더러워 졌다.
청계천과 천변은 서울에서 가장 부끄러운 장소가 되었다. 서울을 현대도시로 가꾸기 위해서나 천변시민들의 안전을 위해서나, 청게천 복개와 천변 판자촌 철거는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로 인식되었다. 청계천 복개공사는 서울 도심부의 재개발을 위한 기초 작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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