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대한민국명소 (2006~) <여행지> 625

조계사주변 (보성사터, 숙명여학교터, 신흥대학터. 중동중학교터, 우정총국터, 도화서터, 민영환집터)

보성사 1910년 서울에 설립되었던 인쇄소이다. 천도교와 보성사 당시 천도교에서는 중앙교당에 창신사(彰新社)를 설립하고 천도교관계 서적 및 교회기관지인 『천도교월보(天道敎月報)』를 간행하였다. 1910년 말 천도교에서 보성학원(普成學院)의 경영권을 일체 인수하면서 학교에 있던 보성사인쇄소를 창신사와 병합하고 그 명칭은 그대로 보성사라 하였다. 보성사는 최남선(崔南善)이 설립한 광문회(光文會)의 신문관(新文館)과 더불어 당시 인쇄계를 주도하였다. 보성사는 비단 『천도교월보』나 교회서적 및 학교교과서의 인쇄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한국출판문화 향상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그러나 한때 보성사의 적자가 누적되자 교회 간부가 손병희(孫秉熙)에게 보성사의 폐쇄를 건의한 적도 있었다. 독립선언서 인쇄 보성사의 가장 큰 ..

자유공원내 (송학동 옛 시장관사) 02-12

송학동 옛 시장관사 중구 응봉산 기슭에 있는 송학동 옛 시장관사는 1883년 인천 개항 후 한세기의 역사적 흔적을 간직한 곳이다. 이곳은 인천항이 내려다보이는 수려한경관과 정원으로 이름이 나 있다. 송학동 옛 시장관사는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다. 1900년쯤에는 일본인 사업가의 일본식 저택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광복 후에는 동양장이라는 서구식 레스토랑과 송학장이라는 사교클럽으로 활용되었다. 또한 1965년 인천시에서 부지를 매입하여 한옥 건물을 신축하고 1966년부터 35년간 인천 시장공관으로 사용하였다. 이곳에서 총17명의 시장이 생활했다. 2001년부터는 인천직할시 승격 40주년을 기념하면서 재단장하여 시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복합 문화공간으로 탄생 하였다.

자유공원 (제물포 구락부) 02-12

구) 제물포 구락부 인천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도시였다. 다른 개항장과 달리 서양 각국의 외교력과 경제활동이 청.일을 압도적으로 견제하면서 자주적인 개항장으로써의 가능성과 희망을 품게 해준 도시였으며, 1901년 6월 응봉산 자락에 건축된 제물포구락부는 그 구심점 역할을 담당한 상징적 공간이었다.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 그리고 인천상륙작전 등 지난 한 근현대사를 시민과 함께 해왓으며, 건축 당시의 외형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동북아시아와 러시아의 건축양식이 결합된 독특한 근대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1953년 4월부터 1990년 5월까지는 시립 박물관으로 활용되며 인천 시민의 사랑을 한껏 받기도 했었다.2020년 제물포구락부는 인천시의 문화재 활용정책 제1호 사업으로 재개관을 했으며, 자주적 개항의 꿈..

자유공원 (조미수호통상조약체결지. 한미수호 100주년기념탑. 자유공원 맥아더동상) 02-12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영어: Treaty of Peace, Amity, Commerce and Navigation, United States–Korea Treaty of 1882)은 1882년(고종 19년) 조선과 미국 간에 조인된 조약이다. 1882년 5월 22일(음력 4월 6일) 조선의 전권위원 신헌, 김홍집과 미국의 전권위원 로버트 윌슨 슈펠트 간에 제물포에서 체결되었다.이 조약은 조선이 서양 국가와 맺은 최초의 수호 통상 조약이다. 미국 정부의 명을 받은 슈펠트는 처음에 일본을 통하여 조선과 수호 조약을 맺으려고 일본 외무경(外務卿) 이노우에 가오루(井上聲)의 소개장을 가지고 부산에 입항하였다. 그는 일본 영사(領事) 곤토(近藤眞鋤)로 하여금 동래부사를 방문하고..

차이나타운 (공화춘 : 짜장면 박물관) 02-12

인천 선린동 공화춘 共和春 공화춘의 전신은 산동회관으로 중국인 전용 주거지인 청국 조계지에서 음식점과 호텔의 혼합형 숙식업소로 시작하였다. 1911년 산동성 출신의 화교 우희광 (于希光)이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여 개업하였다가 이듬해 중화민국의 수립을 기념하여 '공화국의 봄' 이라는 의미의 공화춘으로 개명하였다. 일제강점기 이래 인천과 서울의 상류층들이 이용하는 경인지역 최고급 요리점으로 70여 년간 그 명성을 이어왔고, 6.25전쟁 이후에는 짜장면 등 대중 음식을 보급 하였다. 공화춘은 화강암 석축 위에 벽돌을 쌓아 올린 2층 벽돌조 건물로 화교의 생활 모습을 보여주는 근대문화유산이다. 연안부두 신축으로 인천역 일대 상가가 쇠락하면서 1883년 영업을 중단하였고 2012년부터 짜장면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인천 차이나타운 (의선당) 02-12

의선당 (義善堂) 1883년 청나라 영사관이 인천 선린동에 설립됨에 따라 선린과 북성 두 동은 화교들이 끊임없이 증가하면서 점차 차이나타운(청관)거리가 되었다.. 그해 인천에 체류하던 화교들은 후에 고향의 전통문화를 계승하여 작은 묘당을 건립하였고 '의선당' 이라고 불렀다. 정전은 부처님의 광명이 비추는 과세음보살, 용왕신, 의를 중하게 여기기를 천년에 이어 간다는 관공(관우), 마조선, 호삼할아버지등 다수소상을 모시는 것 외에도 다양한 민간 신앙신을 모신다. 의선당은 중국인들이 현지에 거주하고 바다에서 향해하며 무역의 교류나 오가는 여행객들에게 평안과 화합하기를 기원하고 더욱 화교가 단결하고 정의가 가득하도록 살기 위해 건설한 것이다.

차이나타운 / 인천역 / 동화마을 02-12

착공과 개통 1897년 3월 22일 대한제국은 주한미국전권공사 겸 기업가인 제임스 모스(James R. Morse)에게 사업을 맡겨 기공하였다. 미국이 기공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대한제국 정부가 '국내철도규칙’(1896. 7. 15)을 반포하면서 철도규격을 표준궤로 채택하였는데, 미국 철도가 표준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은 사업권을 가져오기 위해 대한제국 정부 조직이 매우 불안정하여 조만간에 나라로서 지위를 상실할 것이라고(경술국치) 대놓고 소문을 만들어냈는데, 이것이 미국의 대한반도 투자를 크게 위축시켰다. 그리고 1898년에 자금난을 겪어 공사가 잠시 중단되었던 것을 당해 5월 10일에 일본의 '경인철도합자회사'가 양도받아[5] 1899(광무 3)년 9월 18일에 완공시킨다(철도의 날). 당시 ..

이화장 (이승만 대통령사저) - 2023.1.11

이화장 (梨花荘) 지정번호 : 사적 제497호 / 시대 : 1934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화동 1번지 등 이화장은 이승만(1875~1965) 대통령 사저(私邸)로서 대한민국 초대내각이 조직된 곳이기도 하다. 이승만대통령 내외는 1947년 10월 18일부터 이 집에 살았는데 이 집에는 지금도 고인의 유품이 소장되어 있다. 현재 이화장에는 조각당 (組閣堂), 전시관으로 쓰고 있는 안채, 별채, 그리고 새로 지은 살림채가 있다. 조각당은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건물이다. 조각당은 ㄱ자형의 아담하고 소박한 건물로서 대한민국 초대내각이 조직된 곳이다. ㄷ자형 안채는 현재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 재현된 이승만 대통령의 서재, 침실 등은 검소한 생활 모습을 느끼게 한..

대학로 방송통신대학교 KNOU - (2023.1.11)

설립취지 현대사회는 학문과 과학기술 분야는 물론, 문화예술 분야를 포함한 모든 생활영역에 끊임없는 변화의 물결이 굽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존교육체제의 근본적인 혁신, 즉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의 연계, 분야별ㆍ영역별ㆍ수준별 교육과정을 통합한 전 생애에 걸친 학습의 지속화 등을 핵심으로 하는 평생교육체제로의 전환이 요구됩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설립된 한국방송통신대학교는 배우고자 하는 모든 국민들에게 다양한 영역에 걸친 대학 수준의 교육 프로그램을 원격교육방법으로 제공함으로써 평생교육체제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습니다.[출처: 방송통신대학교 홈페이지] 한국방송통신대학교(韓國放送通信大學校, Korea National Open Universi..

서울 혜화역 대학로 (2023.1.11)

혜화동에 있는 대학로에 오랫만에 나왔다. 겨울이라 차가운 느낌이 있었지만 젊은이들은 여기저기서 활기있는 모습이 좋아보였다. 잠시 시간여행하는 기분이었다. 내가 오늘 여기에 온 이유는 이승만 대통령 개인사저가 있는 이화장에 가고자 왔으나. 이화장은 외관에서만 볼수 있고 안에는 돌아볼수 없는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잠시 시선이 방송통신대학교에 머므렀다. 우리나라의 국립대학 방송송통신대학은 학구열이 있는대 여러가지 환경으로 배움의 시간을 놓치고 사회생활하면서 자신의 꿈을 일구어낸 산실이기도 하다. 대학로에는 연극의 산실이기도 하다 여전히 여기저기 연극포스터와 선전물이 있고 추위를 잠이녹이려는 오뎅가게 떡복이 튀김가게 포장마차 들이 보인다. 오늘도 이렇게 잠시 시간여행을 했다. 대학로(大學路, Daehak-ro..

서소문 역사공원 (2022 1.3)

한국 최대의 순교성지 사계절 내내 다양한 종류의 수목을 자랑하는 도심 속 휴식 공간이다. 서소문 역사공원은 박물관의 하늘광장 등 주요지점이 지상과 연결되어 존재함으로써 지하 문화 공간의 역사적 당위성과 무게감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서소문 밖 역사 유적지의 교회사적 의의 조선시대에 소의문(昭義門)이라고도 불리었던 서소문(西小門)은 남대문과 서대문 사이에 있었던 간문(間門)이었으며, 도성 안의 시신을 밖으로 들어내는 문 즉, 시구문(屍軀門)이기도 하였다. 아현에서 서소문으로 향하는 길에 위치한 이곳 서소문 밖 네거리 일대는 강화도를 거쳐 양화진·마포·용산 나루터에 도착한 삼남지방(충청·전라·경상)의 물류가 집결되어, 도성으로 반입되는 통로였으며, 도성 내외를 잇는 육로가 교차되어 성저십리(城底十里) 중 가..

손기정 기념관 (2023 1.3)

손기정 기념관은 나라를 잃은 어려운 시절 세계를 재패해 우리 민족의 긍지를 높여준 손기정 선수(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의 뜻을 기리고, 1918년 만리동에 건립된 손기정 선수(21회 졸업)의 모교인 양정의숙 건물을 리모델링 하여 손기정 탄생 100주년인 2012년 10월 14일에 개관하였습니다. 주소 / 관람시간 / 휴관일 서울시 중구 손기정로 101 동절기: 10:00~17:00 하절기: 10:00~18:00 *관람 종료 1시간 전까지 입장가능 1월 1일, 설날, 추석, 매주 월요일 (단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그 다음날), 기타 별도로 정하는 휴관일 손기정은 달리는 사람으로서 기원전 490년 전 마라톤 평야를 처음 내달려간 필리피데스의 벗이었고, 1936년 베를린에서는 한국인으로..

춘천 안마산 (2022.12.2)

안마산 위치 : 춘천시 석사동, 퇴게동, 신동면, 동내면 경계지역 / 높이 : 303m (참고 봉의산 301.5m) /유래 : 말안장을 놓은것 같은 모습이라고 해서 붙여진이름 안마산은 안화산, 아내산, 아나산이라고도 부르는ㄷ데 춘천시에서 원창고개를 넘는 길 옆에 있어 동녘쪽의 관문이 된다. 춘천의 안산인 향로산이 서남쪽의 관문이 되는 것과 비교할 수 있다.

인천 영종역사관

조선 초기 자연도(현재: 영종도)의 삶자연도는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는 중국과의 무역 거점이자 조운수로 (漕運水路)의 역할을 수행하여 송의 사신과 상인들을 접대하던 객관 '경원정'이 있었다. 다라서 자연도에 주둔하던 수군과 말 목장 관리인, 소금을 생산하여 수익을 얻던 주민까지 적지 않은 수의 주민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도한 고려시대 무신정권 이후 조선초기까지 유배지로 쓰였다.당시 섬 주민들은 주로 막집(幕室)이나 초가집에 거주했다. 그러나 조선초, 고려말부터 이어진 왜구의 침략으로 섬 주민을 육지로 이주시켜 섬을 비우고, 국영 말 목장을 설치하는 정책에 다라 적은 수의 주민들만이 살게 되었다. 수군(水軍) 목자(牧子) 염부(鹽夫)등의 집이 30여 호였다는 기록이 세종실리지에 전한다.  병인양요고..

월미도 --> 영종도 유람선 (구읍뱃터)

영종진 화포영종진(永宗鎭)은 국가 보장처였던 강화도의 방비를 목적으로 1653년 남양도호부의 영종진에서 자연도(紫燕島)로 이전 설치 되었다. 그리고 그 명칭을 그대로 사용해야 한다는 요청에 따라 자연도가 영종진이 되었고, 현재의 구읍뱃터 일대에 포대가 배치되었다.영종진 포대에는 자연도로 이설 할 당시의 화포와 1869년 훈련도감에서 보내준 지자총통, 대포, 불랑기 그리고 1874년 운현궁에서 별도 제작하여 강화, 김ㅁ포, 영종에 나눠 준 대포,중포, 소포 등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 되었다.그러나 1875년 일본의 포격에 의해 영종진이 파괴되고 화포 36문을 약탈 당하면서 현재는 그 실물이 전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영종진의 역사성을 재조명하기위해 이 곳에 목원하여 전시된 화포는 김포 덕포진 대포를 복제한..

인천 자유공원 (제물포 구락부)

제물포 구락부1891년 조직된 제믈포 구락부는 각국조계를 미롯한 개항장 일대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친교를 위한 공간이었다. 구락부는 클럽의 일본식 음역어이다. 1890년대만 하더라도 인천에 거주하는 구미인은 해관이나 세창양행의 근무자들과 소수의 미국인 선교사에 불과 했는데, 1900년대 이후 인천항의 대외무역이 1900년대 이후 인천항의 대외무역이 활기를 띠면서 일본인을 포함한 외국인 수가 급증했다. 1900년 지금의 자리에 2층 조적조 건물을 짓기 시작해 이듬해 6월에 회관준공식을 거행했다. 회원은 60명까지 증가 했으며 매월 두 차례 친목 모임과 댄스파티를 열었다. 1914년 조계제도가 폐지되면서 구락부 회관은 여러차례 용도가 바귀었는데, 해방후에는 인천 사립 박물관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2007년 ..

인천 자유공원 (시민애 집) : 고노주택 터, 구)인천시장 공관

(현) 시민애 집 : (구)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제물포구락부 맞은편에 있는 인천역사관 자리에는 잡화상과 석유상을 운영하여 부를 쌓았던 일본인 고노다케노스케의 주택이 있었다. 청일전쟁 직후인 1895년 평양에서 잡화상을 열었던 고노는 1896년 인천으로 이주했다. 그는 조선에서 행상하는 일본인을 보호하고 연락을 도모한다는 명분으로 계림장업단을 조직하고 평양에 지점을 두었다. 그가 조직한 계림장업단은 사실상  일본 정부의 지원금을 받으며 활동한 무장행상단이었다. 이후 고노는 석유판매조합 조합장, 수입상 조합장 인천미두취인소 이사, 아사히 양조 이가, 월미도유원회사 사장 등을 두루 역임하며 경제 침탈의 선두에서 활동 했다.고노주택은 풍광이 좋아 해방이후 송학장 이라는 사교홀로 사용되다가 1966년 인천시가 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