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공주 善花公主
선화공주
백제의 24대 / 30대 왕비
재위 미상 / 전임 사택왕후(沙宅王后) / 후임 은고(恩古) / 부왕 진평왕(眞平王)
이름
휘 선화(善花) / 별호 미상
신상정보
출생일 미상 / 출생지 미상 / 사망일 미상 / 사망지 미상
왕조 신라(新羅) 백제(百濟) / 가문 김씨 / 부친 진평왕(眞平王) / 모친 마야부인(摩耶夫人) / 배우자 무왕(武王) / 자녀 의자왕(義慈王)
종교 미상
선화공주(善花公主, ?~?)는 삼국유사 기록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이자, 무왕의 왕후이다.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에 의하면 무왕의 왕후는 사택왕후로 기록되었기에 그 실존 여부에 관한 논란이 있다.
생애
신라 진평왕과 마야부인의 딸이자 선덕대왕과 천명공주의 동생이며 화랑세기에서 등장하는 천화공주의 언니이다.
고려 시대 승려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의 설화에 따르면, 미모가 매우 뛰어나 백제의 서동이 사모하여, 두 사람이 남 몰래 밤에 만나곤 한다는 〈서동요〉를 지어 금성(지금의 경주)에 퍼뜨렸다고 한다. 공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유배되어 가던 중 서동을 만나 결혼하고 백제에 가서 왕비가 되었으며, 이후에는 미륵사의 창건을 무왕에게 부탁하였다고 한다. 무왕이 사망하자 못난 의자왕은 기다렸다는 듯이 동생을 포함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고, 이것은 의자왕과 선화공주 간의 갈등과 늦은 나이에 태자로 책봉된 이유를 암시한다는 주장도 있다.
일설에는 무왕이 아닌 동성왕라고도 하며, 그녀의 신분에 대해서도 신라의 공주가 아니라 백제의 옹주, 귀족, 지방 호족의 딸 등 다양한 가설이 있다.
논란
사택왕후
2009년, 미륵사지 석탑에서 금제사리봉안기가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에 따르면 미륵사 창건의 주체인 '좌평 사택적덕의 딸' 사택왕후가 무왕의 왕후라 기록하고 있어 선화공주의 존재를 뿌리부터 위태롭게 하였다. 이에 학자들은 선화공주의 실존 여부에 대해 대립하기도 하였다. 일부 학자는 설화가 어느 정도의 역사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미륵사를 처음 짓기 시작한 것은 선화공주나, 선화공주가 죽은 뒤 사택왕후가 절을 완성했다는 새로운 가설을 내놓았다. 같은 맥락에서 학자들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무왕이 신라와 혼인 관계를 맺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 신라 선화공주가 백제를 다스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고 있다.
가계
조부 : 동륜태자(銅輪太子, ? ~572)
조모 : 만호부인(萬呼夫人)
부왕 : 진평왕(眞平大王, 567~632, 재위:579~632)
모후 : 마야부인(摩耶夫人)
언니 : 선덕여왕(善德大王, ? ~647, 재위:632~647)
언니 : 천명공주(天明公主, 文貞太后)
조카 : 태종무열왕(太宗武烈大王, 604~661, 재위:654~661)
조카 며느리 : 문명왕후(文明王后)
남편 : 남부여 제30대 왕 무왕(武王, ? ~641, 재위:600~641)
아들 : 남부여 제31대 왕 의자왕(義慈王, 599~660, 재위:641~660)
<<서동요 (薯童謠) >>
발매일 신라 진평왕(眞平王) / (599년 이전)
장르 동요
작사·작곡 백제 무왕(武王)
서동요(薯童謠)는 신라 진평왕(眞平王) 대(599년 이전)에 이루어진 동요, 혹은 참요(시대적 상황이나 정치적 징후 따위를 암시하는 민요)이다. 이는 백제 무왕(武王)이 소년 시절에 지어 아이들에게 널리 부르게 했다고 알려져 있다. 서동(무왕의 아명)이라는 개인의 음모로 당시 아동들에게 불린 동요이기는 하나, 전대에 그러한 형식의 민요가 널리 불려 이것이 4구체의 향가로 정착된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서동요는 향가 중의 가장 오랜 형태로 그 형식은 4구체로 알려져 있다. 고려 시대의 승려 일연이 저술한 《삼국유사》에 수록되어 있다.
‘서동’은 서여(薯蕷, 마)를 비롯한 산약과 산나물을 캐어 생활을 이어가던 소년의 무리를 지칭하던 보통명사로서 초동(樵童)·목동(牧童) 등과 같은 종류의 집합명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서동요」는 서동들에 얽힌 이야기, 그 속에 들어 있는 하나의 노래로 전승된 것이라 하겠다. 즉, 「서동요」는 서동들의 노래로서 구체적인 작자를 찾을 수 없는 공동으로 제작되어 전승된 민요적 성격을 띠고 있다.
줄거리
백제 무왕의 이름은 장(璋). 일찍이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서라벌)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던 중 그 연못의 용(龍)과 정을 맺어 그를 낳았다. 아명(兒名)은 서동(薯童). 그 도량이 비상하고 항상 서여(마)를 캐어 팔아서 생계로 삼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아명을 그리 부른 것이다.
그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선화(善花)공주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더벅머리를 깎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고는 동네 아이들에게 마(麻)를 주며 자신을 따르게 했다. 드디어 노래 하나를 지어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다.
원문 양주동 역 홍기문 역 김완진
善化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夘乙抱遣去如 善化公主선화공주니믄
ᄂᆞᆷ 그ᅀᅳ지 얼어 두고
맛둥바ᄋᆞᆯ
바ᄆᆡ 몰 안고 가다 善化公主선화공주니ᄆᆞᆫ
ᄂᆞᆷ 그ᅀᅳ기 얼어 두고
셔동 지블
바므란 안고 가다 善化公主선화공주니리믄
ᄂᆞᆷ 그ᅀᅳᆨ 어러 두고
서동 방ᄋᆞᆯ
바매 알ᄒᆞᆯ 안고 가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통정해 두고
맛둥 도련님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시집 가서
서동이를
밤이면 안고 간다.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짝 맞추어 두고
서동방을
밤에 알을 안고 간다.
의미
미륵사 창건설화에 의하면, “무왕과 왕비(선화공주)가 사자사(師子寺)로 가는 도중 연못 속에서 솟아오른 미륵삼존상(彌勒三尊像)을 만나 이를 모시기 위하여 미륵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륵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연못에서 솟아 나왔다는 점이다. 미륵불국토(彌勒佛國土)를 이룰 수 있는 땅이라 여기고, 이를 실현시킬 인물로서 장이 추대되었다. 미륵불국토의 실현은 전쟁의 패배로 지친 백성에게 앞으로의 전생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과 미륵불국토의 실현을 위해서 희생된 자신이 다시 미륵에 의해서 구제받을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무왕은 익산 천도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기를 기도했다. 비록 이는 실패했으나, 관산성 전투 패배 이후 악화된 왕권이 무왕 때 다소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삼국유사』에 인용된 서동설화 속의 무강왕을 무왕이라고 하는데, 서동설화는 동성왕과 관련된 혼인설화와 무왕대의 미륵사 창건 연기설화 외에, 무령왕이 즉위 전 익산 지역의 담로장(擔魯長)으로서 이 지역을 다스린 데서 생겨난 이야기들이 혼재되어 생긴 설화라는 가설도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
사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한국 고대사에서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기란 어렵다. 일연의 《삼국유사》2권 무왕조(武王條)에 따르면 서동요가 서울(서라벌)에 퍼져 대궐에까지 스며들어 갔고, 백관(百官)들이 크게 간(諫)하여 공주를 멀리 귀양보내게 되었다. 떠날 때 왕후는 그 딸에게 순금을 두른 말을 주었다. 공주가 귀양길에 오를 때 서동이 도중에서 나와 맞이하여 시위(侍衛)해 가겠노라 했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온지도 모르나 우연히 믿고 기뻐하며 정을 나누었다. 그 후에야 서동이란 것을 알았다.
함께 백제로 와서 공주는 어머니가 준 금을 내놓으며 장차 생계를 꾀하려 하니 이때 서동은 크게 웃으며 "이것이 무엇이냐?" 했다. 공주는 "이것이 황금이니 가히 백 년을 넉넉히 살 수 있을 것"이라 하자 서동은 말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파던 땅엔 이런 것이 흙과 같이 쌓였다." 하니 공주는 크게 놀라며 그것은 천하의 지보(至寶)이니 그 보물을 부모님이 계신 서라벌 궁궐에 보내는 것이 어떠하냐고 했다.
서동이 좋다 하며 금덩이를 모아 구릉(丘陵)과 같이 쌓아 놓고 용화산(龍華山) 사자사(師子寺)의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금 수송의 방책을 물었다. 법사는 "내 신력(神力)으로 금을 신라로 옮기리라." 하니, 선화공주가 편지와 함께 금덩이를 절간 앞에 갖다 놓았다. 곧 법사가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으로 옮겨 놓았다. 신라의 진평왕은 그의 신이(神異)함을 존경하고, 자주 편지를 보내어 문안을 물었다. 서동은 신라의 도움으로 민심을 얻고 백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서동요와 익산 미륵사 창건 논란
기존에는 일연의 삼국유사를 기반으로 미륵사 창건이 선화공주가 중심이 됐다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2009년 1월 14일 익산 미륵사지 석탑 해체 중 금동사리함 명문이 발견되면서 역사학계에 파문이 일었다. 사리함 명문에는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선인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를 받아 만민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의 동량이 되셨기에 정재를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시고, 기해년(639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라고 적혀있다.
그 결과 미륵사지 석탑의 준공 당시 무왕의 왕비는 선화공주가 아니라 사택왕후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무왕과 선화공주의 결혼이 후대에 꾸며진 허구라는 식의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역사학계에서는 대부분의 설화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전승되어 온 것을 감안할 때, 선화공주의 능이라고 추측되는 쌍릉의 존재가 아직 남아 있으므로 섣부른 결론은 지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Sources Wikipedia
'03.한반도평화사(2024~) [해설서] > 1.삼국시대사 (BC57~AD668)'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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