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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파국이 온다』는 국내 최초로 번역 소개되는 유럽의 가치비판론자 안젤름 야페가 2017년 영문으로 펴낸 에세이 모음집이다. 이 책은 왜 민주적인 나라마저 결국 ‘국가의 실패’를 겪을 수밖에 없는지, 소련이나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조차 상품가치 내지 교환가치 논리를 극복해내지 못한 까닭은 무엇인지 궁구한다. 또한 건강한 시민이라 자부하는 사람들마저 왜 속물주의나 물신주의에서 벗어나기가 그토록 어려운지, 왜 온 세상이 자본주의 심화와 더불어 야만주의와 파국 상태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해낸다. 나아가 ‘자본주의’를 넘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진정으로 조화롭게 살아가려면 근본적으로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지에 대해, 단순히 흥미로운 정도를 넘어 뼛속까지 서늘해지는 현실적인 분석을 내놓는다.
목차
차례
*옮긴이 해제 _ 자본주의 비판, 그 마지막 퍼즐
*지은이 서문 _ 역사적 수명이 끝난 자본주의
I부 자본주의가 자본주의를 파괴하다_자본주의 해체의 경향과 그 징후
1장 오늘날 다시 읽는 『클레브 공작 부인』
“우리”와 “그들”, 200년 동안 적대해온 두 사회집단 | 자본주의 사회의 양적 평등성과 “계급투쟁” 개념 | 자본주의를 ‘지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 ‘다중’은 과연 혁명의 주체인가 | 자본주의는 자기 자신을 삼키는 괴물 53 | 변화된 전선, 붕괴하는 이분법 | 유일한 희망은 자본주의의 완전한 폐기
2장 정치 없는 정치
최종 심급으로서의 정치? | 투표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들 | 현대 자본주의의 문제 | 정치적 재구성-물신성을 넘어 인간성으로
3장 무엇을 위한 폭력이며 누구를 위한 합법성인가
제도화된 폭력 | 다시 경찰국가로? | 게임의 유일한 지배자가 된 ‘국가’ 혹은 국가 폭력 | 국가에 대한 ‘올바른’ 투쟁? | 사보타주와 합법성의 한계-타르낙 사건과 『반란의 조짐』 | 저항하지도 탈주하지도 않는 현대인들
4장 재앙을 예고하는 대자보
그것은 ‘우리의’ 부채가 아닌 ‘자본의’ 부채 | 종말의 예감, 그러나 반복되는 ‘자본주의 구하기’ | 자본주의에는 애초 탈출구가 없다 | 질주하는 자본주의, 그 끝은 어디일까 | 자본주의 시스템의 생명 연장 비결 | 반복되는 자본주의 위기의 실체 | 이 지구에서 불필요한 존재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 인류 자신의 혁명이 필요하다 | “마침내 탈출구를 찾다!”-미지의 세계로 도약하기
II부 자본주의, 이해하거나 오해하거나?_다양한 대응 논리와 그 한계
5장 호모 에코노미쿠스와 가치의 그늘
선물 이론과 마르크스주의 | 노동운동과 마르크스주의 | 마르크스의 가치 이론-가치, 추상노동, 물신주의 | 가치와 비非가치의 변증법 |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이뤄지는 ‘그림자 노동’ | 상품 형태에 종속된 삶을 벗어던지기
6장 장클로드 미셰아의 ‘자본주의 비판’과 ‘좌파 비판’에 대하여
현 단계의 자본주의는 팽창인가 몰락인가? | 좌파는 자유주의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 | 장클로드 미셰아의 한계 1-정치경제 비판에 근거하지 않는다 | 장클로드 미셰아의 한계 2-‘공동의 품위’와 ‘보통 사람들’에 관한 문제 | 초창기 사회주의로 회귀하는 것이 답일까? | 차악의 선택-“덜 터무니없는” 미래의 가능성? | 두려움과 원망, 원한을 넘어
7장 탈성장론자가 진정한 혁명가가 되는 길
“탈성장” 담론의 매력 | 상품 자본주의의 양면성과 상쇄 메커니즘 |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헛된 희망 | 두 갈래의 희망
8장 끔찍하고 위대한 이 유토피아에 저항하기
초고속열차 논란-기존 사회를 비판적으로 활용해야 할까? | 반유토피아적 비판-다른 세상을 상상하기의 어려움 | 정말 끔찍하게 유토피아적인 것
III부 자본의 독재와 ‘예술’이라는 상품_자본 지배하에서 예술이란 무엇인가
9장 고양이와 쥐, 경제와 문화
고양이와 쥐-물자의 생산과 의미의 생산 | ‘경제’에 항복한 문화와 예술 | 티티테인먼트-잉여들을 위한 노리개? | 인류학적 퇴행, 모든 사람의 나르시시즘 | 가난한 사람도 문화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 상품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다? | “위대한 예술”과 “대중” 예술, 그 차이의 가능성
10장 예술의 종말 이후의 예술
예술은 끝장났는가-기 드보르와 상황주의자들의 예술 | 현대예술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 상품이 지배하는 사회의 나르시시스트들 | “세상의 부재”-잘못된 관계를 다시 숙고하기 | 예술은 물신주의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인가 | 예술의 주변화를 넘어
*옮긴이 해제 _ 자본주의 비판, 그 마지막 퍼즐
*지은이 서문 _ 역사적 수명이 끝난 자본주의
I부 자본주의가 자본주의를 파괴하다_자본주의 해체의 경향과 그 징후
1장 오늘날 다시 읽는 『클레브 공작 부인』
“우리”와 “그들”, 200년 동안 적대해온 두 사회집단 | 자본주의 사회의 양적 평등성과 “계급투쟁” 개념 | 자본주의를 ‘지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 ‘다중’은 과연 혁명의 주체인가 | 자본주의는 자기 자신을 삼키는 괴물 53 | 변화된 전선, 붕괴하는 이분법 | 유일한 희망은 자본주의의 완전한 폐기
2장 정치 없는 정치
최종 심급으로서의 정치? | 투표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들 | 현대 자본주의의 문제 | 정치적 재구성-물신성을 넘어 인간성으로
3장 무엇을 위한 폭력이며 누구를 위한 합법성인가
제도화된 폭력 | 다시 경찰국가로? | 게임의 유일한 지배자가 된 ‘국가’ 혹은 국가 폭력 | 국가에 대한 ‘올바른’ 투쟁? | 사보타주와 합법성의 한계-타르낙 사건과 『반란의 조짐』 | 저항하지도 탈주하지도 않는 현대인들
4장 재앙을 예고하는 대자보
그것은 ‘우리의’ 부채가 아닌 ‘자본의’ 부채 | 종말의 예감, 그러나 반복되는 ‘자본주의 구하기’ | 자본주의에는 애초 탈출구가 없다 | 질주하는 자본주의, 그 끝은 어디일까 | 자본주의 시스템의 생명 연장 비결 | 반복되는 자본주의 위기의 실체 | 이 지구에서 불필요한 존재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 인류 자신의 혁명이 필요하다 | “마침내 탈출구를 찾다!”-미지의 세계로 도약하기
II부 자본주의, 이해하거나 오해하거나?_다양한 대응 논리와 그 한계
5장 호모 에코노미쿠스와 가치의 그늘
선물 이론과 마르크스주의 | 노동운동과 마르크스주의 | 마르크스의 가치 이론-가치, 추상노동, 물신주의 | 가치와 비非가치의 변증법 |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이뤄지는 ‘그림자 노동’ | 상품 형태에 종속된 삶을 벗어던지기
6장 장클로드 미셰아의 ‘자본주의 비판’과 ‘좌파 비판’에 대하여
현 단계의 자본주의는 팽창인가 몰락인가? | 좌파는 자유주의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 | 장클로드 미셰아의 한계 1-정치경제 비판에 근거하지 않는다 | 장클로드 미셰아의 한계 2-‘공동의 품위’와 ‘보통 사람들’에 관한 문제 | 초창기 사회주의로 회귀하는 것이 답일까? | 차악의 선택-“덜 터무니없는” 미래의 가능성? | 두려움과 원망, 원한을 넘어
7장 탈성장론자가 진정한 혁명가가 되는 길
“탈성장” 담론의 매력 | 상품 자본주의의 양면성과 상쇄 메커니즘 |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헛된 희망 | 두 갈래의 희망
8장 끔찍하고 위대한 이 유토피아에 저항하기
초고속열차 논란-기존 사회를 비판적으로 활용해야 할까? | 반유토피아적 비판-다른 세상을 상상하기의 어려움 | 정말 끔찍하게 유토피아적인 것
III부 자본의 독재와 ‘예술’이라는 상품_자본 지배하에서 예술이란 무엇인가
9장 고양이와 쥐, 경제와 문화
고양이와 쥐-물자의 생산과 의미의 생산 | ‘경제’에 항복한 문화와 예술 | 티티테인먼트-잉여들을 위한 노리개? | 인류학적 퇴행, 모든 사람의 나르시시즘 | 가난한 사람도 문화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 상품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다? | “위대한 예술”과 “대중” 예술, 그 차이의 가능성
10장 예술의 종말 이후의 예술
예술은 끝장났는가-기 드보르와 상황주의자들의 예술 | 현대예술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 상품이 지배하는 사회의 나르시시스트들 | “세상의 부재”-잘못된 관계를 다시 숙고하기 | 예술은 물신주의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인가 | 예술의 주변화를 넘어
책 속으로
이 책의 모든 논의를 한마디로 ‘낙관적’이라거나 ‘비관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한편에서 가치비판론은 늘 자본주의의 추락 경향을 예측해왔다. 심지어 파국적 상황이 이어질 것이라고 보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다니엘서 5장 25절)과 같은 ‘파국의 예고’라 할 수 있다. 성서에 나오는 이 신비한 말은 어떤 초자연적인 손이 바빌론 벨사살왕의 궁전 촛대 앞 석회벽에 쓴 것이다.
--- p.24
언젠가 파시즘이 한창 승리의 나팔을 불던 시기에 발터 베냐민이 한 말이 생각난다. “마르크스가 말하길, 혁명은 세계 역사의 기관차라 했다. 하지만 (…) 이제 혁명은 (인류 전체를 상징하는) 그 기차를 탄 승객들이 급브레이크를 작동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과연 이 급브레이크는 어떻게 작동할 수 있을까? 매주 토요일 데모 같은 것만으론 결코 가능하지 않다. 해가 멀다 하고 돌아오는 선거(투표)나 “소비자의 선택” 같은 걸로는 어림없다. 그런 방식으로는 절대 세상이 바뀔 리 없는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 우리가 근본을 놓치고 있어서다.
--- p.34
상품 사회 속 우리 삶의 토대란 무엇인가? 노동이 자본으로 전화하고 또 자본이 노동으로 전화하는, 일종의 영구운동이다. 즉 자본은 인간의 살아 있는 노동을 고용하여 생산적으로 소비함으로써 더 큰 자본을 만들어가고, 인간은 자신의 살아 있는 노동력을 팔아 자본의 몸집을 불려주는 대신 임금을 받아 소비를 통해 생계를 유지한다. 그런데 바로 우리 눈앞에서 나날이 벌어지는 일들은, 인간의 산 노동living labor을 기술로 대체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인간의 살아 있는 노동이 자본의 생산과정으로부터 추방당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 가치 생산의 토대가 붕괴되는 것에 다름 아니다.
--- p.54
오히려 자본주의는 각종 “예술적” 저항을 얼마든지 자기 이익에 맞게 활용해, (질서가 아니라) 혼란(카오스)까지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전통적 가족의 해체, 이른바 “대안” 교육, 확실한 양성 평등, “도덕성” 개념의 소멸 등 이 모든 변화조차 (사회 해방의 방향이 아니라) 일단 상품 형태로 변환되기만 하면 결국 자본주의에 이득을 안겨주게 된다.
--- p.65
오늘날은 삶의 모든 영역이 돈에 의존할 뿐 아니라 더 나쁘게도, 부채(신용)에 의존하고 있다. 만일 우리 삶의 실질적 재생산이 완전히 “가상 자본”에만 의존하거나, 또 각종 사업체나 기관, 정부 조직 역시 신용등급에 의해서만 생존이 가능해진다면 금융위기가 올 때마다 증권 시장 참여자들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수많은 사람이 치명타를 입을 것이고, 여기에는 표면적 일상만이 아니라 자기 삶의 가장 고요한 시공간까지 해당한다.
--- p.136
사실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엄청난 두려움을 부른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단지 돈이 너무 없어 탈이라 생각할 뿐 그 이상은 상상하지 못한다. 각 개인들은 자기 돈의 가치가 떨어져 사회생활에 지장을 줄 때 자기 존재가 위협을 받는다고 느낄 뿐이다(한편으로는 근시안 때문에, 또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움 때문에 시스템 전반의 구조나 원리에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 p.139
이런 맥락에서 “가치”는 결코 사회생활의 특정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거의 칸트적 의미에서 일종의 “선험적 형태”라고 해야 옳다. 달리 말해, 상품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일정량의 가치로 인식됨으로써만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 만물이 일정량의 화폐로만 보인다. 모든 것을 가치형태로 바꾸는 것, 이것이 인간과 세상 사이에 보편적 매개자인 양 끼어드는 셈이다. 또다시 칸트 식으로 말해, 가치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의 포괄적 “종합 원리”처럼 되어버렸다.
--- p.167
상품 사회의 맹목적 물신주의 논리는 (“자본가계급”이라는 거대 주체의 전략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신의 동력에 의해) 궁극적으로 이런 공간을 소멸로 내몬다. 이런 면에서 가치란 점점 더 커지는 어떤 “실체substance”라기보다 오히려 일종의 “공허nothing”라 할 수 있다. 이 공허는 삶의 구체성을 먹고살며 그것을 지속적으로 소비한다. (…) 만일 자본이 정말로 ‘모든’ 것을 가치형태(노동, 상품, 화폐 등)로 바꾸는 데 성공한다면 아마도 이 성공은 바로 그 자신의 종말을 뜻할 것이다.
--- p.171
상품 사회에서 비상품 영역이 존재할 수 있으려면 그것은 오로지 종속적이고 불구화한 영역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즉, 비상품 영역은 결코 자유의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상품 영역에 의해 경멸을 당하면서도 상품의 화려한 세계를 위해 봉사해야 하는 필연성 때문에 존재하는 영역에 불과하다. 이런 의미에서 비상품 영역은 결코 가치의 대항물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전제다. 그리하여 가치의 영역과 비가치 영역은 함께 가치 사회, 즉 자본주의 상품 사회를 형성한다.
--- p.173
우리의 입장은 이런 사회관계가 지닌 해방적 잠재력이 올바로 실현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회 전체가 추상노동과 단호히 단절할 때라고 말한다. 그것은 이 추상노동이 온갖 사회관계를 철저히 물신화하고 결국 제 스스로 독립적 지배력을 행사하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문제 삼는 것은 이 상품 시스템이나 그 내부의 구성원들이 “감사할 줄 모르고 배은망덕하다”라고 보는 식의 도덕적 차원이 아니다.
--- p.179
언젠가 알랭 카유는 전체주의 체제를 거론하며 이렇게 말했다. “쓸모를 기초로 구성되는 사회에서 잉여가 된다는 느낌보다 더 나쁜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노동에 기초한 현재의 상품 전체주의 사회야말로 갈수록 더 많은 사람을, 결국에는 인류 전체를 잉여로 만들고 있는 게 아닌가?
--- p.180
자본주의는 단지 국가, 시장, 법과 질서 등과 동일시되거나 또는 반대로 위법, 탈선 등과만 동일시될 수는 없다. 자본주의는 언제나 이 둘의 변증법적 통일이다.
--- p.209
소비자의 돈을 지갑 밖으로 끌어내기 위한 싸움은 얼마나 격렬한가? 그런데 자본주의 시스템이 원활히 작동하는 것은, 그것이 인간 주체들의 동의를 얻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주체들이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대안들을 모조리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주요 관심사가 자신의 매력을 뽐낸다거나 그 진정한 본질을 숨기는 것이라 믿는다면 오류다.
--- p.209
만일 예술이 물신주의적이고 나르시시즘적인 개인들의 견고함을 진정으로 부수고자 한다면 역설적으로 예술 자체가 좀 더 견고해지고 어려워질 필요가 있다. 이 말은 예술이 멋대로 난해해져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좀 까탈스러워질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다. 같은 맥락에서 예술이 현재의 (상품 물신주의) 세상을 맹목적으로 수용하지 않으려면, 이른바 “대중people”에 영합하기를 멈춰야 한다. 다시 말해 그들의 삶을 더 쉽게 만든다거나 사회를 더 멋지게 꾸민다거나 더 쓸모 있게 만드는 일, 나아가 대중을 위한 기쁨조 되기 등을 그만둬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이 대중과 너무 손쉬운 소통을 하지 않으려 할 때, 그리고 대중에게 참된 자신의 모습보다 더 “위대한” 뭔가를 억지로 보여주려 하지 않을 때 비로소 예술은 자신의 본업vocation에 충실해질 수 있다.
--- p.24
언젠가 파시즘이 한창 승리의 나팔을 불던 시기에 발터 베냐민이 한 말이 생각난다. “마르크스가 말하길, 혁명은 세계 역사의 기관차라 했다. 하지만 (…) 이제 혁명은 (인류 전체를 상징하는) 그 기차를 탄 승객들이 급브레이크를 작동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과연 이 급브레이크는 어떻게 작동할 수 있을까? 매주 토요일 데모 같은 것만으론 결코 가능하지 않다. 해가 멀다 하고 돌아오는 선거(투표)나 “소비자의 선택” 같은 걸로는 어림없다. 그런 방식으로는 절대 세상이 바뀔 리 없는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 우리가 근본을 놓치고 있어서다.
--- p.34
상품 사회 속 우리 삶의 토대란 무엇인가? 노동이 자본으로 전화하고 또 자본이 노동으로 전화하는, 일종의 영구운동이다. 즉 자본은 인간의 살아 있는 노동을 고용하여 생산적으로 소비함으로써 더 큰 자본을 만들어가고, 인간은 자신의 살아 있는 노동력을 팔아 자본의 몸집을 불려주는 대신 임금을 받아 소비를 통해 생계를 유지한다. 그런데 바로 우리 눈앞에서 나날이 벌어지는 일들은, 인간의 산 노동living labor을 기술로 대체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인간의 살아 있는 노동이 자본의 생산과정으로부터 추방당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 가치 생산의 토대가 붕괴되는 것에 다름 아니다.
--- p.54
오히려 자본주의는 각종 “예술적” 저항을 얼마든지 자기 이익에 맞게 활용해, (질서가 아니라) 혼란(카오스)까지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전통적 가족의 해체, 이른바 “대안” 교육, 확실한 양성 평등, “도덕성” 개념의 소멸 등 이 모든 변화조차 (사회 해방의 방향이 아니라) 일단 상품 형태로 변환되기만 하면 결국 자본주의에 이득을 안겨주게 된다.
--- p.65
오늘날은 삶의 모든 영역이 돈에 의존할 뿐 아니라 더 나쁘게도, 부채(신용)에 의존하고 있다. 만일 우리 삶의 실질적 재생산이 완전히 “가상 자본”에만 의존하거나, 또 각종 사업체나 기관, 정부 조직 역시 신용등급에 의해서만 생존이 가능해진다면 금융위기가 올 때마다 증권 시장 참여자들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수많은 사람이 치명타를 입을 것이고, 여기에는 표면적 일상만이 아니라 자기 삶의 가장 고요한 시공간까지 해당한다.
--- p.136
사실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엄청난 두려움을 부른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단지 돈이 너무 없어 탈이라 생각할 뿐 그 이상은 상상하지 못한다. 각 개인들은 자기 돈의 가치가 떨어져 사회생활에 지장을 줄 때 자기 존재가 위협을 받는다고 느낄 뿐이다(한편으로는 근시안 때문에, 또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움 때문에 시스템 전반의 구조나 원리에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 p.139
이런 맥락에서 “가치”는 결코 사회생활의 특정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거의 칸트적 의미에서 일종의 “선험적 형태”라고 해야 옳다. 달리 말해, 상품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일정량의 가치로 인식됨으로써만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 만물이 일정량의 화폐로만 보인다. 모든 것을 가치형태로 바꾸는 것, 이것이 인간과 세상 사이에 보편적 매개자인 양 끼어드는 셈이다. 또다시 칸트 식으로 말해, 가치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의 포괄적 “종합 원리”처럼 되어버렸다.
--- p.167
상품 사회의 맹목적 물신주의 논리는 (“자본가계급”이라는 거대 주체의 전략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신의 동력에 의해) 궁극적으로 이런 공간을 소멸로 내몬다. 이런 면에서 가치란 점점 더 커지는 어떤 “실체substance”라기보다 오히려 일종의 “공허nothing”라 할 수 있다. 이 공허는 삶의 구체성을 먹고살며 그것을 지속적으로 소비한다. (…) 만일 자본이 정말로 ‘모든’ 것을 가치형태(노동, 상품, 화폐 등)로 바꾸는 데 성공한다면 아마도 이 성공은 바로 그 자신의 종말을 뜻할 것이다.
--- p.171
상품 사회에서 비상품 영역이 존재할 수 있으려면 그것은 오로지 종속적이고 불구화한 영역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즉, 비상품 영역은 결코 자유의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상품 영역에 의해 경멸을 당하면서도 상품의 화려한 세계를 위해 봉사해야 하는 필연성 때문에 존재하는 영역에 불과하다. 이런 의미에서 비상품 영역은 결코 가치의 대항물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전제다. 그리하여 가치의 영역과 비가치 영역은 함께 가치 사회, 즉 자본주의 상품 사회를 형성한다.
--- p.173
우리의 입장은 이런 사회관계가 지닌 해방적 잠재력이 올바로 실현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회 전체가 추상노동과 단호히 단절할 때라고 말한다. 그것은 이 추상노동이 온갖 사회관계를 철저히 물신화하고 결국 제 스스로 독립적 지배력을 행사하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문제 삼는 것은 이 상품 시스템이나 그 내부의 구성원들이 “감사할 줄 모르고 배은망덕하다”라고 보는 식의 도덕적 차원이 아니다.
--- p.179
언젠가 알랭 카유는 전체주의 체제를 거론하며 이렇게 말했다. “쓸모를 기초로 구성되는 사회에서 잉여가 된다는 느낌보다 더 나쁜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노동에 기초한 현재의 상품 전체주의 사회야말로 갈수록 더 많은 사람을, 결국에는 인류 전체를 잉여로 만들고 있는 게 아닌가?
--- p.180
자본주의는 단지 국가, 시장, 법과 질서 등과 동일시되거나 또는 반대로 위법, 탈선 등과만 동일시될 수는 없다. 자본주의는 언제나 이 둘의 변증법적 통일이다.
--- p.209
소비자의 돈을 지갑 밖으로 끌어내기 위한 싸움은 얼마나 격렬한가? 그런데 자본주의 시스템이 원활히 작동하는 것은, 그것이 인간 주체들의 동의를 얻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주체들이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대안들을 모조리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주요 관심사가 자신의 매력을 뽐낸다거나 그 진정한 본질을 숨기는 것이라 믿는다면 오류다.
--- p.209
만일 예술이 물신주의적이고 나르시시즘적인 개인들의 견고함을 진정으로 부수고자 한다면 역설적으로 예술 자체가 좀 더 견고해지고 어려워질 필요가 있다. 이 말은 예술이 멋대로 난해해져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좀 까탈스러워질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다. 같은 맥락에서 예술이 현재의 (상품 물신주의) 세상을 맹목적으로 수용하지 않으려면, 이른바 “대중people”에 영합하기를 멈춰야 한다. 다시 말해 그들의 삶을 더 쉽게 만든다거나 사회를 더 멋지게 꾸민다거나 더 쓸모 있게 만드는 일, 나아가 대중을 위한 기쁨조 되기 등을 그만둬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이 대중과 너무 손쉬운 소통을 하지 않으려 할 때, 그리고 대중에게 참된 자신의 모습보다 더 “위대한” 뭔가를 억지로 보여주려 하지 않을 때 비로소 예술은 자신의 본업vocation에 충실해질 수 있다.
--- p.277
출판사 리뷰
1. 현재 혹은 미래의 자본주의에 관한 놀랍도록 뼈아픈 분석
- 국내 최초로 번역되는, 가치비판론자 안젤름 야페의 열정적 에세이
『파국이 온다』는 국내 최초로 번역 소개되는 유럽의 가치비판론자 안젤름 야페가 2017년 영문으로 펴낸 에세이 모음집이다. 원제는 ‘더 라이팅 온 더 월(The Writing on the Wall)’로, ‘파국 혹은 재앙의 예고’를 뜻하는 말이자 ‘대자보’라고도 해석될 수 있는 제목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구약성경 다니엘서의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Mene Mene, Tekel, Upharsin: 세고, 달고, 나눠 주다)”을 언급한다. 바빌론 벨사살왕의 궁전 촛대 앞 석회벽에 나타났던 그 글귀다. 저자는 벨사살왕이 최전성기라 생각하며 흥청망청 잔치까지 벌이던 때에 신이 이 글귀를 내렸다는 데 주목한다. 결국 그날 밤 벨사살왕은 적에게 죽임을 당했으며 바빌론 왕국은 무너진다.
자본주의의 파국적 경향을 그 누구보다 ‘근본’에서 추적해온 가치비판론 학파 철학자 안젤름 야페의 책을 읽고 “전율을 느껴” 직접 번역에 나선 강수돌 고려대 명예교수는, 국내 독자들에게는 다소 낯선 학자 안젤름 야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 독일 출신이지만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공부했고, 국경을 넘나들며 강의한다. 독일어, 영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등을 마음껏 구사한다는 점도 놀라웠지만, 책을 읽어보니 지금까지 나온 모든 자본주의 비판을 종합적으로 정리하는 한편,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사회과학자라는 데서 또 한 번 놀랐다. 입이 딱 벌어졌다. ‘대체 어떤 사람인가’ 궁금해졌다.”
안젤름 야페는 독일의 비판적 지식인 그룹 ‘크리시스’와 함께하며, 카를 마르크스의 가치론을 새롭게 재해석하는 이론인 ‘가치비판론’ 학파의 핵심 이론가다. 가치비판론이란 마르크스가 정립한 가치법칙을 바탕에 두고 자본주의를 근본에서 통찰, 비판하는 이론적 관점이다. 마르크스의 가치법칙에 따르면 18세기 이후 자본주의 사회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상품, 특히 교환가치가 인간 삶을 지배하게 되었다.
불과 300~400년밖에 안 된 자본주의이건만, 우리 삶은 자본주의가 창조한 구성 요소인 상품·화폐·노동·자본을 당연시하거나 중시하게 되었고, 시장·국가·고용·경쟁을 자연스럽게 수용하며 살아간다. 저자가 분석한 대로, 우리들 대부분이 자본주의의 가치인 교환가치, 즉 ‘돈의 논리’를 내면화(internalization)한 것이다. 그렇지만 저자가 책에서 거듭 문제를 제기하듯, 과연 자본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도 발전하고 있는가? 자본주의의 성장과 더불어 인간도 성장하고 있는가? 자본주의의 자유와 더불어 인간의 자유도 확장하고 있는가?
이 책은 왜 민주적인 나라마저 결국 ‘국가의 실패’를 겪을 수밖에 없는지, 소련이나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조차 상품가치 내지 교환가치 논리를 극복해내지 못한 까닭은 무엇인지 궁구한다. 또한 건강한 시민이라 자부하는 사람들마저 왜 속물주의나 물신주의에서 벗어나기가 그토록 어려운지, 왜 온 세상이 자본주의 심화와 더불어 야만주의와 파국 상태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해낸다. 나아가 ‘자본주의’를 넘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진정으로 조화롭게 살아가려면 근본적으로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지에 대해, 단순히 흥미로운 정도를 넘어 뼛속까지 서늘해지는 현실적인 분석을 내놓는다.
이 책에는 여전히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는 질문들도 담겨 있다. 예를 들어 (경제위기는 물론 기후 위기, 에너지 위기, 식량 위기, 사회 위기, 도덕 위기, 정치 위기 등) 다양한 위기 국면에 빠진 자본주의가 몰락하면서 마침내 인간도 (그리고 지구도) 결국 멸망하고 말 것인가? 인간 구원의 탈출구는 없는 것인가? 변화를 바라는 열망은 이토록 높은데 어째서 실제로는 아무런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 것인가? 진정한 민주주의나 인간 해방의 필요성은 (…) 소리 높여 외쳐지는데 어째서 우리 스스로는 (느낌, 가치, 생각, 기억, 행동 등 모든 차원에서) 진정으로 해방된 삶을 살고 있지 못할까? 안젤름 야페가 이 책에서 던지는 이 질문들은 결코 그의 것만은 아니다. - 본문 12쪽, 「옮긴이 해제_자본주의 비판, 그 마지막 퍼즐」에서
2. 자본주의를 무너뜨리는 건 자본주의 자신이다
- 자본주의가 결국 해체되거나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는 이유
『파국이 온다』는 안젤름 야페가 프랑스 저널에 발표했던 에세이들을 엮은 것으로, 총 열 편이 실려 있는데 2017년 영문판 발간 시 저자가 많은 부분 수정, 보완했다. 다양한 주제 아래 쓰인 글이지만, 기본적으로는 동일한 질문을 다룬다. 즉, 현대 ‘자본주의의 해체decomposition’와 ‘그 해체가 야기하는 다양한 대응’을, 가치비판론 관점에서 근본적으로 새롭게 따져본다.
아니나 다를까, 지금 우리는 ‘무너져가는 자본주의’를 목도하고 있다. 18세기 고전적 자유주의를 시작으로 19세기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거쳐 이후 1970년대까지 포드주의와 케인스주의, 복지국가 자본주의 등으로 30년간 최고조기를 누리던 자본주의는 1980년대 신자유주의 단계에 이르러 쇠퇴기로 접어들더니 급기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함께 사실상 파산 선고가 내려지고 말았다. 저자의 보고에 따르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은행권 구제금융의 규모는 과거 1980년대에 시장을 뒤흔들던 적자 규모의 열 배인 반면 GDP로 표시되는 실물경제 생산은 약 20~30퍼센트밖에 증가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말해 1980년대나 1990년대의 “경제성장”은 그저 금융 거품의 결과다. 만일 그 거품마저 모두 터진다면 가까스로 버티던 자본주의 세상은 과연 어찌 될 것인가.
그런데 저자의 냉정한 진단에 따르면, 이러한 파괴나 해체는 그간 자본주의를 비판하던 세력들의 예언이 적중한 것이라기보다 그들마저 그 비판의 와중에 길을 잃어 역사의 쓰레기통 속으로 함께 휘말려 들어간 형국으로 전개되고 있다. 야페는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야말로 가치비판론의 타당성을 입증해준다고 말한다. 즉 가치비판론에서 말한바, “자본주의 생산에 내재적 한계가 있다”라는 주장이 결국 옳았음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이 책의 1부에 실린 네 편의 에세이(1~4장)에서 저자는 자본주의의 점진적 해체 경향과 그것이 2008년의 글로벌 위기에서 정점을 찍은 현상을 다룬다. 아울러 전통적 자본주의 비판 세력의 견해에 대한 독자적 분석과 현 상황에 대한 근본적 재해석을 담아내는데, 이를테면 ‘정치’나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흐름, 자본주의의 야만성을 자기들의 무기로 박살내겠다며 또 다른 폭력을 사용하는 것 등을 ‘포퓰리즘’이라는 용어 아래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저자는 기존의 비판 세력이 내건 운동이나 그 구호가 얼핏 보기에는 상당히 근본적인 요구를 내세우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것도 자본주의 생산의 토대 자체를 제대로 비판해내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다고 말한다.
이 책의 2부에 실린 네 편의 에세이(5~8장)는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가 처한 ‘진퇴양난’ 상황에 대해, ‘상품 사회에 대한 근본 비판’이라는 관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는 대응 방식들을 검토한다. 이 네 편의 글을 통해 저자는 자본주의 사회를 진정으로 ‘지양’하는 길과 새로운 방향을 암시하는 한편, ‘비판적 대화’를 시도한다. 그중 5장 「호모 에코노미쿠스와 가치의 그늘」은 ‘오늘날 마르크스에 관해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프랑스 모스 그룹의 ‘선물 이론’과 ‘가치비판론’을 비교 검토하는데, 저자 스스로 이 책에서 가장 먼저 읽으면 좋을 에세이로 추천한다. 이 글이 저자가 이론적 기반으로 삼는 가치비판론의 핵심을 소개하고 있어서다. 7장 「탈성장론자가 진정한 혁명가가 되는 길」도 주목할 만한 에세이로, 탈성장 운동의 실태 조사에 대한 응답 형식으로 쓰인 이 글은 요즘 대두되고 있는 탈성장 운동의 강점과 한계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을 담고 있다.
끝으로 3부에 실린 두 편의 에세이(9~10장)에서 저자는 특정 영역을 집중해서 다루는데, 바로 현대의 문화예술 영역이다. 저자에 따르면, 자본주의 쇠퇴 혹은 해체라는 상황에서 문화가 어떤 역할을 하느냐는 매우 중요한 검토 대상이다. 여기서 저자는 현대예술에 관해 이야기할 뿐 아니라, 예술이 삶의 상품화로 인해 하위 부속물이 되어버린 현실에 대해 가혹한 비판을 제기한다. 또 오늘날의 ‘문화예술’이 미래를 위해 시도해야 할 작업이 무엇인지 제시한다. ‘가끔은 단 하나의 문장이 상당히 큰 파급력을 갖는 법!’이라는 말을 기억하며 읽을 만한 문장들로 가득하다.
저자는 말한다. 과거의 혁명가 세대에게는 엄청난 무기를 지니고 있던 지배 질서를 정면 공격함으로써 큰 타격을 입히는 것이 중요한 과업이었다. 이 관점에 따르면 자본주의 체제를 붕괴시키는 데 필요한 유일한 것은 그 제거를 단호히 결심하고 이를 성공적으로 진행할 역량을 지닌 계급의 존재였다. 즉, 대중 계급이 “공산주의에 대한 열망”으로만 충만하면 자본주의 붕괴는 식은 죽 먹기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본주의의 종말과 해방 사회의 시작이 정확히 일치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 역사적 경로는 이제 방향을 잃었으며,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수백 년 전 초창기 때의 본질을 오히려 이제는 겉으로도 잘 드러내는 형국이 됐다. 그 본질이란 바로 자기 자신을 삼키는 괴물,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기계, 나아가 장기적으로는 사회생활의 근거 자체를 소멸시키는 사회의 모습이다. 자본주의의 내파, 곧 스스로를 소멸시키는 사회가 어떻게 가능할까. 저자는 이 사회가 ‘가치 축적’이라는 자본의 메커니즘을 지속시키기 위해 자연 자원은 물론 인간적 유대까지 모두 소모해버리고 말 것이기에 결국에는 그 일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라 말한다. 즉, 자본주의는 나날이 자신의 토대를 좀먹고 있는 셈이다.
고삐 풀린 말처럼 아무 규제도 없이 달리는 자본주의 상품 사회는 끝내 아득한 심연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상품 사회의 위기나 몰락이 바로 상품 사회 중심부에 내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대 자본주의의 문제는 단순히 경제적 불의에만 있지 않고, 자본주의가 범한 악행 또한 그것이 초래한 수많은 환경 참사로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현대 자본주의가 경제적·환경적 문제를 넘어 인류 문화의 상징적·심리적 토대까지 파괴하고 있다고 말한다.
3. 자본주의가 낳은 인류, “투표밖에 할 줄 모르는” 나르시시스트들
- 상품 물신주의와 더불어 ‘유아화’하고 ‘퇴행’하는 인류 문명의 위기에 관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고유한 특성은 단순히 한 계급(이를테면 ‘자본가’계급)이 다른 계급(‘노동자’계급)을 착취하는 사회라는 데 있지 않다. 물론 이런 착취는 분명 존재하지만, 그것이 자본주의에만 고유한 특성인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를 역사적으로 특이하게 규정 짓는 것은 무엇인가? 자본주의 사회 전반에 번져 있는 경쟁,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상품 관계, 화폐 등을 기반으로 구성된 사회라는 점이다. 이 상품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일정량의 가치로 인식됨으로써만 존재한다. 그 결과, 만물이 일정량의 화폐로만 보인다. 모든 것을 가치형태로 바꾸는 것, 이것이 인간과 세상 사이에 보편적 매개자인 양 끼어든다.
모든 것이 가치형태로, 즉 상품 논리로 전환되는 사회에서는 그에 대한 비판마저 이미 그 범주 안에 있다. 저자는 기존의 자본주의 비판 세력이 가진 한계, 곧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을 부르짖으며 정치적 혁신을 꾀하는 그들 자신도 자본주의의 상품 물신주의 범주에 ‘묶여’ 있지 않은가를 되물으며, 오늘날 사회비판에서 진정 핵심적인 것은 무엇인지 따진다. 그리하여 우리가 현대 자본주의와 진정한 대결을 벌이려면 그 ‘근본 범주’와 단절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 그는 상품 물신주의, 가치, 화폐, 시장, 국가, 경쟁, 민족, 가부장제, 그리고 노동 등에 대한 근본적 비판에 무게중심을 둔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모든 사회 구성원에 의해 널리 수용된 ‘자본주의’라는 삶의 방식 아래서는 분배 형태를 바꾼다든지 선거를 통해 정치인을 바꾼다든지 하는 것이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 선거철이 되면 자신의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함으로써 세상을 더 낫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지만, 기실 이 선택이란 약간 더 달콤한 유혹을 해 오는 정치인의 손을 잡아주는 일에 불과하다. 거기에 과연 진정한 ‘정치’가 있는가. 어느새 우리는 “투표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저자는 벨 에포크 시대의 작가 옥타브 미르보가 1888년에 했던 말을 상기시킨다. “그들은 어제처럼 내일도 투표할 것이다. 투표밖에 할 줄 모른다. 양들을 보라. 그들은 도살장으로 간다. 아무 말도 없고 아무 기대도 없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죽일 도살자를 위해, 나아가 자신들을 맛있게 먹을 부르주아를 위해 투표하진 않는다. 이에 비하면 오늘날 유권자들은 가축보다 더 우둔하고 양보다 더 양 같다. 이들은 자신을 죽이는 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하고 자신을 지배하는 부르주아를 굳이 선택한다. 이들은 고작 이렇게 할 권리를 위해 혁명까지 하며 투쟁했던 것인가.”
또한 저자는 각 사람이 자본주의적 상품 관계와 물신주의를 내면화함에 따라 점차 ‘자본주의의 자동주체’가 되어가는 탓에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유치화 현상과 나르시시즘 경향을 띠게 되었다는 점, 그리고 이것이 사회 전반에 걸친 야만주의로 귀결되어 결국 인류문명의 퇴행을 가져오고 있음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같은 반 친구가 방금 버스에 치여 죽었는데도 응급 대처는커녕 그 장면을 핸드폰 동영상으로 찍으면서 킬킬거리는 아이를 떠올려보라. 어쩌면 그 아이는 나중에 그걸 유튜브에 올릴지도 모른다.
이렇듯 현재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상당히 일반화된 “인류학적 퇴행”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 저자의 시각이며, 저자는 이것이 근본적으로 상품 물신주의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이 상품 물신주의가 각 개인들이 세상과 맺는 관계 내지 상호작용 과정에 개입함으로써 진정한 인간관계를 손상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상품 물신주의”는 이제 글자 그대로 이해된다. 현대인들은 자신이 만든 생산물(상품)을 신으로 숭배한다. 그 생산물에다 하나의 독립적 정체성과 (또 역으로 그들을 지배할 수 있는) 권력까지 동시에 부여함으로써 말이다. 이 현상은 결코 환상이나 속임수가 아니다. 오히려 상품 사회가 작동하는 실제 현실이다. 바로 이 상품 논리가 경제 분야를 넘어 온 사회로 확장되면서 우리 삶의 모든 분야를 지배해왔다. 상품으로서, 모든 사물과 모든 활동은 평등하다! 이들 상품이 구분되는 것은 오로지 그 속에 축적된 노동의 양, 따라서 돈의 크기일 뿐이다. - 본문 271쪽, 「10장_ 예술의 종말 이후의 예술」에서
하나의 추상적이고 공허하며 불변의 형태이자 질적 특성 없이 순수한 양만으로 존재하는 화폐가, 이 세상의 무한하면서도 구체적이고 다양한 것들 위에 ‘가격’이라는 이름으로 덧씌워진다. 상품과 화폐는 구체적 세상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상품과 화폐의 입장에서 세상이란 그저 자신들이 써먹을 원자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각종 법률과 사람들의 저항까지 포함해 구체적 세상이라는 그 존재 자체가 궁극적으로 자본축적(오로지 축적만이 목적인 그것)에 걸림돌일 뿐이다.
이 상품 물신주의가 개인의 심리적 삶 속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인류적 퇴행으로서 나르시시즘이다. 주지하다시피 심리분석 분야에서 나르시시즘은 심각한 병리적 상태를 상징한다. 사람들은 어린 시절의 인성 발달 과정에서 자아와 세상을 잘 구분하지 못한 경우 나중에 어른이 되더라도 그 어린 시절 초기의 심리구조를 그대로 유지한다. 그렇게 나르시시스트가 만들어지면, 그에게 외부 사물은 단지 투사물로서만 경험되고 자아는 극단적 결핍을 경험한다. 이는 그 자아가 외부 사물과 참된 관계를 맺지 못해 결코 풍요로워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현대인이 직면한 진짜 문제는 존재의 물신주의 형태 안에서 일어나는 전반적 고립이다. 따라서 저자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확고히 자리 잡은 이 물신주의 형태를 끊어내고자 하는 단호한 싸움이 지금 시점에선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구체적으로 말해 돈과 상품, 경쟁과 노동, 국가와 “발전”, 진보와 성장 등이 뒤집어쓰고 있는 가면을 철저히 벗겨내는 작업이 긴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싸움을 제대로 해내려면 “이론”과 “실천” 사이의 통상적 대립을 뛰어넘는 “이론적 투쟁”을 더 철저히 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이 책이 바로 그 ‘이론적 투쟁’의 결과물이다.
사람들의 생각과 느낌은 행위에 우선한다. 따라서 어떻게 행동하느냐는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런 맥락에서 사람들이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을 변화시킨다면 이는 그 자체가 이미 행위의 한 형태, 즉 실천의 한 형태다. 예컨대 적어도 소수자들 사이에서 어떤 행위의 목표가 무엇인지 생각이 분명해지면 그다음은 일사천리다. 이런 면에서 1968년 5월이 불현듯 떠오른다. 당시 온 유럽과 미국까지 들썩거리게 만든 68운동은 얼핏 보기에 어느 날 갑자기 터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뚜렷한 신념을 지닌 소수자들이 오랫동안 조용히 준비해온 싸움이었다. - 본문 82쪽, 「2장_ 정치 없는 정치」에서
저자는 상품화의 ‘근본을 질문하는’ 작업을 요즘은 어느 누구도 하지 않고 있다고 토로한다. 오늘날 지구의 오존층에 구멍을 내는 주범이 바로 자본주의 산업사회라는 점을 잘 알면서도 그것이 인간 존재의 유일한 가능태인 것처럼 우리들 스스로 그렇게 만들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제 우리는 그 굴레에서 빠져나갈 탈출구를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어떤 정치적 행위의 전망을 다시 만들기 위해서라도 모든 제도화된 의미의 “정치”와 확실히 단절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오늘날 유일하게 가능한 “정치” 형태가 있다면 기존 정계나 제도들과의 근본적 결별, 그리고 대변의 정치나 위임의 정치와도 근본적 결별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형태의 직접행동을 만들어내고 기존의 낡은 정치를 완전히 바꿔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시급한, 그리고 참된 정치 행위라는 주장이다.
- 국내 최초로 번역되는, 가치비판론자 안젤름 야페의 열정적 에세이
『파국이 온다』는 국내 최초로 번역 소개되는 유럽의 가치비판론자 안젤름 야페가 2017년 영문으로 펴낸 에세이 모음집이다. 원제는 ‘더 라이팅 온 더 월(The Writing on the Wall)’로, ‘파국 혹은 재앙의 예고’를 뜻하는 말이자 ‘대자보’라고도 해석될 수 있는 제목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구약성경 다니엘서의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Mene Mene, Tekel, Upharsin: 세고, 달고, 나눠 주다)”을 언급한다. 바빌론 벨사살왕의 궁전 촛대 앞 석회벽에 나타났던 그 글귀다. 저자는 벨사살왕이 최전성기라 생각하며 흥청망청 잔치까지 벌이던 때에 신이 이 글귀를 내렸다는 데 주목한다. 결국 그날 밤 벨사살왕은 적에게 죽임을 당했으며 바빌론 왕국은 무너진다.
자본주의의 파국적 경향을 그 누구보다 ‘근본’에서 추적해온 가치비판론 학파 철학자 안젤름 야페의 책을 읽고 “전율을 느껴” 직접 번역에 나선 강수돌 고려대 명예교수는, 국내 독자들에게는 다소 낯선 학자 안젤름 야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 독일 출신이지만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공부했고, 국경을 넘나들며 강의한다. 독일어, 영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등을 마음껏 구사한다는 점도 놀라웠지만, 책을 읽어보니 지금까지 나온 모든 자본주의 비판을 종합적으로 정리하는 한편,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사회과학자라는 데서 또 한 번 놀랐다. 입이 딱 벌어졌다. ‘대체 어떤 사람인가’ 궁금해졌다.”
안젤름 야페는 독일의 비판적 지식인 그룹 ‘크리시스’와 함께하며, 카를 마르크스의 가치론을 새롭게 재해석하는 이론인 ‘가치비판론’ 학파의 핵심 이론가다. 가치비판론이란 마르크스가 정립한 가치법칙을 바탕에 두고 자본주의를 근본에서 통찰, 비판하는 이론적 관점이다. 마르크스의 가치법칙에 따르면 18세기 이후 자본주의 사회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상품, 특히 교환가치가 인간 삶을 지배하게 되었다.
불과 300~400년밖에 안 된 자본주의이건만, 우리 삶은 자본주의가 창조한 구성 요소인 상품·화폐·노동·자본을 당연시하거나 중시하게 되었고, 시장·국가·고용·경쟁을 자연스럽게 수용하며 살아간다. 저자가 분석한 대로, 우리들 대부분이 자본주의의 가치인 교환가치, 즉 ‘돈의 논리’를 내면화(internalization)한 것이다. 그렇지만 저자가 책에서 거듭 문제를 제기하듯, 과연 자본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도 발전하고 있는가? 자본주의의 성장과 더불어 인간도 성장하고 있는가? 자본주의의 자유와 더불어 인간의 자유도 확장하고 있는가?
이 책은 왜 민주적인 나라마저 결국 ‘국가의 실패’를 겪을 수밖에 없는지, 소련이나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조차 상품가치 내지 교환가치 논리를 극복해내지 못한 까닭은 무엇인지 궁구한다. 또한 건강한 시민이라 자부하는 사람들마저 왜 속물주의나 물신주의에서 벗어나기가 그토록 어려운지, 왜 온 세상이 자본주의 심화와 더불어 야만주의와 파국 상태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해낸다. 나아가 ‘자본주의’를 넘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진정으로 조화롭게 살아가려면 근본적으로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지에 대해, 단순히 흥미로운 정도를 넘어 뼛속까지 서늘해지는 현실적인 분석을 내놓는다.
이 책에는 여전히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는 질문들도 담겨 있다. 예를 들어 (경제위기는 물론 기후 위기, 에너지 위기, 식량 위기, 사회 위기, 도덕 위기, 정치 위기 등) 다양한 위기 국면에 빠진 자본주의가 몰락하면서 마침내 인간도 (그리고 지구도) 결국 멸망하고 말 것인가? 인간 구원의 탈출구는 없는 것인가? 변화를 바라는 열망은 이토록 높은데 어째서 실제로는 아무런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 것인가? 진정한 민주주의나 인간 해방의 필요성은 (…) 소리 높여 외쳐지는데 어째서 우리 스스로는 (느낌, 가치, 생각, 기억, 행동 등 모든 차원에서) 진정으로 해방된 삶을 살고 있지 못할까? 안젤름 야페가 이 책에서 던지는 이 질문들은 결코 그의 것만은 아니다. - 본문 12쪽, 「옮긴이 해제_자본주의 비판, 그 마지막 퍼즐」에서
2. 자본주의를 무너뜨리는 건 자본주의 자신이다
- 자본주의가 결국 해체되거나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는 이유
『파국이 온다』는 안젤름 야페가 프랑스 저널에 발표했던 에세이들을 엮은 것으로, 총 열 편이 실려 있는데 2017년 영문판 발간 시 저자가 많은 부분 수정, 보완했다. 다양한 주제 아래 쓰인 글이지만, 기본적으로는 동일한 질문을 다룬다. 즉, 현대 ‘자본주의의 해체decomposition’와 ‘그 해체가 야기하는 다양한 대응’을, 가치비판론 관점에서 근본적으로 새롭게 따져본다.
아니나 다를까, 지금 우리는 ‘무너져가는 자본주의’를 목도하고 있다. 18세기 고전적 자유주의를 시작으로 19세기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거쳐 이후 1970년대까지 포드주의와 케인스주의, 복지국가 자본주의 등으로 30년간 최고조기를 누리던 자본주의는 1980년대 신자유주의 단계에 이르러 쇠퇴기로 접어들더니 급기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함께 사실상 파산 선고가 내려지고 말았다. 저자의 보고에 따르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은행권 구제금융의 규모는 과거 1980년대에 시장을 뒤흔들던 적자 규모의 열 배인 반면 GDP로 표시되는 실물경제 생산은 약 20~30퍼센트밖에 증가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말해 1980년대나 1990년대의 “경제성장”은 그저 금융 거품의 결과다. 만일 그 거품마저 모두 터진다면 가까스로 버티던 자본주의 세상은 과연 어찌 될 것인가.
그런데 저자의 냉정한 진단에 따르면, 이러한 파괴나 해체는 그간 자본주의를 비판하던 세력들의 예언이 적중한 것이라기보다 그들마저 그 비판의 와중에 길을 잃어 역사의 쓰레기통 속으로 함께 휘말려 들어간 형국으로 전개되고 있다. 야페는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야말로 가치비판론의 타당성을 입증해준다고 말한다. 즉 가치비판론에서 말한바, “자본주의 생산에 내재적 한계가 있다”라는 주장이 결국 옳았음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이 책의 1부에 실린 네 편의 에세이(1~4장)에서 저자는 자본주의의 점진적 해체 경향과 그것이 2008년의 글로벌 위기에서 정점을 찍은 현상을 다룬다. 아울러 전통적 자본주의 비판 세력의 견해에 대한 독자적 분석과 현 상황에 대한 근본적 재해석을 담아내는데, 이를테면 ‘정치’나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흐름, 자본주의의 야만성을 자기들의 무기로 박살내겠다며 또 다른 폭력을 사용하는 것 등을 ‘포퓰리즘’이라는 용어 아래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저자는 기존의 비판 세력이 내건 운동이나 그 구호가 얼핏 보기에는 상당히 근본적인 요구를 내세우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것도 자본주의 생산의 토대 자체를 제대로 비판해내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다고 말한다.
이 책의 2부에 실린 네 편의 에세이(5~8장)는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가 처한 ‘진퇴양난’ 상황에 대해, ‘상품 사회에 대한 근본 비판’이라는 관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는 대응 방식들을 검토한다. 이 네 편의 글을 통해 저자는 자본주의 사회를 진정으로 ‘지양’하는 길과 새로운 방향을 암시하는 한편, ‘비판적 대화’를 시도한다. 그중 5장 「호모 에코노미쿠스와 가치의 그늘」은 ‘오늘날 마르크스에 관해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프랑스 모스 그룹의 ‘선물 이론’과 ‘가치비판론’을 비교 검토하는데, 저자 스스로 이 책에서 가장 먼저 읽으면 좋을 에세이로 추천한다. 이 글이 저자가 이론적 기반으로 삼는 가치비판론의 핵심을 소개하고 있어서다. 7장 「탈성장론자가 진정한 혁명가가 되는 길」도 주목할 만한 에세이로, 탈성장 운동의 실태 조사에 대한 응답 형식으로 쓰인 이 글은 요즘 대두되고 있는 탈성장 운동의 강점과 한계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을 담고 있다.
끝으로 3부에 실린 두 편의 에세이(9~10장)에서 저자는 특정 영역을 집중해서 다루는데, 바로 현대의 문화예술 영역이다. 저자에 따르면, 자본주의 쇠퇴 혹은 해체라는 상황에서 문화가 어떤 역할을 하느냐는 매우 중요한 검토 대상이다. 여기서 저자는 현대예술에 관해 이야기할 뿐 아니라, 예술이 삶의 상품화로 인해 하위 부속물이 되어버린 현실에 대해 가혹한 비판을 제기한다. 또 오늘날의 ‘문화예술’이 미래를 위해 시도해야 할 작업이 무엇인지 제시한다. ‘가끔은 단 하나의 문장이 상당히 큰 파급력을 갖는 법!’이라는 말을 기억하며 읽을 만한 문장들로 가득하다.
저자는 말한다. 과거의 혁명가 세대에게는 엄청난 무기를 지니고 있던 지배 질서를 정면 공격함으로써 큰 타격을 입히는 것이 중요한 과업이었다. 이 관점에 따르면 자본주의 체제를 붕괴시키는 데 필요한 유일한 것은 그 제거를 단호히 결심하고 이를 성공적으로 진행할 역량을 지닌 계급의 존재였다. 즉, 대중 계급이 “공산주의에 대한 열망”으로만 충만하면 자본주의 붕괴는 식은 죽 먹기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본주의의 종말과 해방 사회의 시작이 정확히 일치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 역사적 경로는 이제 방향을 잃었으며,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수백 년 전 초창기 때의 본질을 오히려 이제는 겉으로도 잘 드러내는 형국이 됐다. 그 본질이란 바로 자기 자신을 삼키는 괴물,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기계, 나아가 장기적으로는 사회생활의 근거 자체를 소멸시키는 사회의 모습이다. 자본주의의 내파, 곧 스스로를 소멸시키는 사회가 어떻게 가능할까. 저자는 이 사회가 ‘가치 축적’이라는 자본의 메커니즘을 지속시키기 위해 자연 자원은 물론 인간적 유대까지 모두 소모해버리고 말 것이기에 결국에는 그 일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라 말한다. 즉, 자본주의는 나날이 자신의 토대를 좀먹고 있는 셈이다.
고삐 풀린 말처럼 아무 규제도 없이 달리는 자본주의 상품 사회는 끝내 아득한 심연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상품 사회의 위기나 몰락이 바로 상품 사회 중심부에 내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대 자본주의의 문제는 단순히 경제적 불의에만 있지 않고, 자본주의가 범한 악행 또한 그것이 초래한 수많은 환경 참사로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현대 자본주의가 경제적·환경적 문제를 넘어 인류 문화의 상징적·심리적 토대까지 파괴하고 있다고 말한다.
3. 자본주의가 낳은 인류, “투표밖에 할 줄 모르는” 나르시시스트들
- 상품 물신주의와 더불어 ‘유아화’하고 ‘퇴행’하는 인류 문명의 위기에 관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고유한 특성은 단순히 한 계급(이를테면 ‘자본가’계급)이 다른 계급(‘노동자’계급)을 착취하는 사회라는 데 있지 않다. 물론 이런 착취는 분명 존재하지만, 그것이 자본주의에만 고유한 특성인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를 역사적으로 특이하게 규정 짓는 것은 무엇인가? 자본주의 사회 전반에 번져 있는 경쟁,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상품 관계, 화폐 등을 기반으로 구성된 사회라는 점이다. 이 상품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일정량의 가치로 인식됨으로써만 존재한다. 그 결과, 만물이 일정량의 화폐로만 보인다. 모든 것을 가치형태로 바꾸는 것, 이것이 인간과 세상 사이에 보편적 매개자인 양 끼어든다.
모든 것이 가치형태로, 즉 상품 논리로 전환되는 사회에서는 그에 대한 비판마저 이미 그 범주 안에 있다. 저자는 기존의 자본주의 비판 세력이 가진 한계, 곧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을 부르짖으며 정치적 혁신을 꾀하는 그들 자신도 자본주의의 상품 물신주의 범주에 ‘묶여’ 있지 않은가를 되물으며, 오늘날 사회비판에서 진정 핵심적인 것은 무엇인지 따진다. 그리하여 우리가 현대 자본주의와 진정한 대결을 벌이려면 그 ‘근본 범주’와 단절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 그는 상품 물신주의, 가치, 화폐, 시장, 국가, 경쟁, 민족, 가부장제, 그리고 노동 등에 대한 근본적 비판에 무게중심을 둔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모든 사회 구성원에 의해 널리 수용된 ‘자본주의’라는 삶의 방식 아래서는 분배 형태를 바꾼다든지 선거를 통해 정치인을 바꾼다든지 하는 것이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 선거철이 되면 자신의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함으로써 세상을 더 낫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지만, 기실 이 선택이란 약간 더 달콤한 유혹을 해 오는 정치인의 손을 잡아주는 일에 불과하다. 거기에 과연 진정한 ‘정치’가 있는가. 어느새 우리는 “투표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저자는 벨 에포크 시대의 작가 옥타브 미르보가 1888년에 했던 말을 상기시킨다. “그들은 어제처럼 내일도 투표할 것이다. 투표밖에 할 줄 모른다. 양들을 보라. 그들은 도살장으로 간다. 아무 말도 없고 아무 기대도 없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죽일 도살자를 위해, 나아가 자신들을 맛있게 먹을 부르주아를 위해 투표하진 않는다. 이에 비하면 오늘날 유권자들은 가축보다 더 우둔하고 양보다 더 양 같다. 이들은 자신을 죽이는 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하고 자신을 지배하는 부르주아를 굳이 선택한다. 이들은 고작 이렇게 할 권리를 위해 혁명까지 하며 투쟁했던 것인가.”
또한 저자는 각 사람이 자본주의적 상품 관계와 물신주의를 내면화함에 따라 점차 ‘자본주의의 자동주체’가 되어가는 탓에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유치화 현상과 나르시시즘 경향을 띠게 되었다는 점, 그리고 이것이 사회 전반에 걸친 야만주의로 귀결되어 결국 인류문명의 퇴행을 가져오고 있음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같은 반 친구가 방금 버스에 치여 죽었는데도 응급 대처는커녕 그 장면을 핸드폰 동영상으로 찍으면서 킬킬거리는 아이를 떠올려보라. 어쩌면 그 아이는 나중에 그걸 유튜브에 올릴지도 모른다.
이렇듯 현재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상당히 일반화된 “인류학적 퇴행”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 저자의 시각이며, 저자는 이것이 근본적으로 상품 물신주의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이 상품 물신주의가 각 개인들이 세상과 맺는 관계 내지 상호작용 과정에 개입함으로써 진정한 인간관계를 손상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상품 물신주의”는 이제 글자 그대로 이해된다. 현대인들은 자신이 만든 생산물(상품)을 신으로 숭배한다. 그 생산물에다 하나의 독립적 정체성과 (또 역으로 그들을 지배할 수 있는) 권력까지 동시에 부여함으로써 말이다. 이 현상은 결코 환상이나 속임수가 아니다. 오히려 상품 사회가 작동하는 실제 현실이다. 바로 이 상품 논리가 경제 분야를 넘어 온 사회로 확장되면서 우리 삶의 모든 분야를 지배해왔다. 상품으로서, 모든 사물과 모든 활동은 평등하다! 이들 상품이 구분되는 것은 오로지 그 속에 축적된 노동의 양, 따라서 돈의 크기일 뿐이다. - 본문 271쪽, 「10장_ 예술의 종말 이후의 예술」에서
하나의 추상적이고 공허하며 불변의 형태이자 질적 특성 없이 순수한 양만으로 존재하는 화폐가, 이 세상의 무한하면서도 구체적이고 다양한 것들 위에 ‘가격’이라는 이름으로 덧씌워진다. 상품과 화폐는 구체적 세상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상품과 화폐의 입장에서 세상이란 그저 자신들이 써먹을 원자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각종 법률과 사람들의 저항까지 포함해 구체적 세상이라는 그 존재 자체가 궁극적으로 자본축적(오로지 축적만이 목적인 그것)에 걸림돌일 뿐이다.
이 상품 물신주의가 개인의 심리적 삶 속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인류적 퇴행으로서 나르시시즘이다. 주지하다시피 심리분석 분야에서 나르시시즘은 심각한 병리적 상태를 상징한다. 사람들은 어린 시절의 인성 발달 과정에서 자아와 세상을 잘 구분하지 못한 경우 나중에 어른이 되더라도 그 어린 시절 초기의 심리구조를 그대로 유지한다. 그렇게 나르시시스트가 만들어지면, 그에게 외부 사물은 단지 투사물로서만 경험되고 자아는 극단적 결핍을 경험한다. 이는 그 자아가 외부 사물과 참된 관계를 맺지 못해 결코 풍요로워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현대인이 직면한 진짜 문제는 존재의 물신주의 형태 안에서 일어나는 전반적 고립이다. 따라서 저자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확고히 자리 잡은 이 물신주의 형태를 끊어내고자 하는 단호한 싸움이 지금 시점에선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구체적으로 말해 돈과 상품, 경쟁과 노동, 국가와 “발전”, 진보와 성장 등이 뒤집어쓰고 있는 가면을 철저히 벗겨내는 작업이 긴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싸움을 제대로 해내려면 “이론”과 “실천” 사이의 통상적 대립을 뛰어넘는 “이론적 투쟁”을 더 철저히 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이 책이 바로 그 ‘이론적 투쟁’의 결과물이다.
사람들의 생각과 느낌은 행위에 우선한다. 따라서 어떻게 행동하느냐는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런 맥락에서 사람들이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을 변화시킨다면 이는 그 자체가 이미 행위의 한 형태, 즉 실천의 한 형태다. 예컨대 적어도 소수자들 사이에서 어떤 행위의 목표가 무엇인지 생각이 분명해지면 그다음은 일사천리다. 이런 면에서 1968년 5월이 불현듯 떠오른다. 당시 온 유럽과 미국까지 들썩거리게 만든 68운동은 얼핏 보기에 어느 날 갑자기 터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뚜렷한 신념을 지닌 소수자들이 오랫동안 조용히 준비해온 싸움이었다. - 본문 82쪽, 「2장_ 정치 없는 정치」에서
저자는 상품화의 ‘근본을 질문하는’ 작업을 요즘은 어느 누구도 하지 않고 있다고 토로한다. 오늘날 지구의 오존층에 구멍을 내는 주범이 바로 자본주의 산업사회라는 점을 잘 알면서도 그것이 인간 존재의 유일한 가능태인 것처럼 우리들 스스로 그렇게 만들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제 우리는 그 굴레에서 빠져나갈 탈출구를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어떤 정치적 행위의 전망을 다시 만들기 위해서라도 모든 제도화된 의미의 “정치”와 확실히 단절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오늘날 유일하게 가능한 “정치” 형태가 있다면 기존 정계나 제도들과의 근본적 결별, 그리고 대변의 정치나 위임의 정치와도 근본적 결별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형태의 직접행동을 만들어내고 기존의 낡은 정치를 완전히 바꿔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시급한, 그리고 참된 정치 행위라는 주장이다.
추천평
“가치비판론자인 안젤름 야페의 열정적 에세이를 엮은 책으로, 그는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에 막대한 기여를 해온 학자다. 확고한 반反자본주의자로서 야페는 이 책에서 자본주의 시스템이 삶의 모든 측면을 시장관계 아래 복속시킴으로써 인간 공동체와 자연환경을 파괴할 수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 미카엘 뢰비(사회학자, 철학자)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안젤름 야페를 더 많은 독자와 나누고 싶은 마음에 이 책의 번역에 나섰다. 지금까지 읽어본 그 어떤 인문학 내지 사회과학 책보다 깊이 파고드는 것 같았다. 야페는 묻는다. 과연 자본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도 발전하는가. 자본주의의 성장과 더불어 인간도 성장하는가. 자본주의의 자유와 더불어 인간의 자유도 확장하는가.”
- 강수돌(고려대학교 명예교수)
- 미카엘 뢰비(사회학자, 철학자)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안젤름 야페를 더 많은 독자와 나누고 싶은 마음에 이 책의 번역에 나섰다. 지금까지 읽어본 그 어떤 인문학 내지 사회과학 책보다 깊이 파고드는 것 같았다. 야페는 묻는다. 과연 자본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도 발전하는가. 자본주의의 성장과 더불어 인간도 성장하는가. 자본주의의 자유와 더불어 인간의 자유도 확장하는가.”
- 강수돌(고려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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