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어 (1860~1906)
무어는 "백정 전도의개척자"이자 "백정 해방운동의 조력자"로 알려져 있다. 무어는 매코믹신학교 재학시절, 언더우드로 부터 한국선교에 대한 도전을 받고, 신학교를 졸업한 후 믹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1892년 한국에 들어 왔다. 무어는 서울에서 노방전도를 통해 100여명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며,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쳤다. 학생들중 백정의 아들이 있었는데, 무어는 그 학생의 아버지가 장티푸스에 걸려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당시 고종의 시의였던 에비슨 선교사와 함께 그를 치료하여 완쾌시켰다. 그가 박성춘이었다.
천민으로 천대받던 자신을 왕의 시의를 통해 직접 치료해 준 것에 감격한 박성춘은 무어가 세운 곤당골교회에 출석하였다. 이후 무어와 박성춘은 신분차별로 설음 당하던 백정들을 대상으로 전도활동을 펼쳐 백정들을 교회로 인도 했다. 교회는 백정출신자가 늘어나자 양반교인들은 백정과 한 자리에 앉아서 예배드릴 수 없다면서 양반의 자리를 따로 마련해 달라고 무어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무어는 복음안에서 신분차별은 있을 수 없다고 거절했으며, 결국 이들은 따로 교회를 세우고 갈라졌다. 이후 백정으로 천시받던 박성춘은 승동교회(곤당골교회)에서 장로가 되었고, 그의 아들 박서양은 에비슨이 세운 제중원 의학교(세브란스의대의 전신)
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 무어의 사역이 거두어들인 열매들이다. 무어선교사는 곤당골교회를 비롯해 20여개의 교회를 세웠다. 무어는 1906년 장티푸스에 걸려 제중원에서 숨을 거두었고,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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