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기독교 문화유산 (2016~) <답사지> 343

강화도 갑곶순교성지

강화도와 한국 천주교회강화도는 한국 천주교회 초기부터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1975년 조선 최초 선교사로 입국한 주문모 신부가 철종의 조모  송 씨(은원 군의 처)와 며느리 신 씨에게 세례를 준 것이 조정에 알려져, 왕족이었던 이들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게 된다. 이로 인해 강화도에 귀향해 살던 철종의 조부인 은원 군도 처형되었다. 또한 강화도는 19세기 후반 한국 역사에서 동서양의 사상과 문화가 만나 첨예한 갈등을 빚은 곳으로 상징되는 곳이기도 하다.선교사들의 경유지 갑곶 해안이후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면서 천주교가 유입될 때 이용되던 육로 통행이 여의치 않게 되자, 1845년 5월1일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고 주교의 명으로 선교사를 비밀리 입국시키는 해로를 개척하기 위해 서울 마포를..

순교자들의 행적 증거자 박순집 베드로

박순집 베드로 (1830~1911)갑곶순교성지에서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시는 일에 일생을 바친 '신앙의 증거자, 박순집(베드로)의 묘가 모셔져 있다. 비록 참수 치명자는 아니나 그의 생에는 어으 순교자 못지않은 삶이었다. 새남터와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수 많은 순교자들의 유해를 목숨을 걸고 찿아 안장했으며, 후에 선교자들의 행적을 증언해 유해발굴과 시복시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1890년 인천제물포로 이주해 숙골( 현 도화동)에서 선종할 때 까지 전교활동에 힘쓰며 인천교구의 발전에 초석이 되었다. 박순집 베드로는1830년 10월 9일 서울 남문 밖 (전생서:현 용산구 후암동) 에서 순교자 박 바오로와 김아가다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부모의 신앙을 이어 받으면서 성장하였다.1839년 기해박해때, ..

갑곶순교성지 (순교자:박상손,우윤집,최순복 3위비)

수많은 순교자들이 갑곶 진두에서 효수당하다.1866년 병인박해로 강화도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1868년 프랑스 선교사를 입국시키는데 협력한 최인서, 장치선 회장과 박서방(박순집의 형), 조서방 등이 서울 포청에서 옥살이를 하다 강화 병영지 진무영으로 호송되어 효수당하게 된다. 1866년 대동강에서 통상을 요구하던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불에 타 침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대원군이 천주교를 박해하는 빌미로 삼았고, 이후 미국은 1871년 강화도를 공격하였는데, 이를 신미양요라고 한다. 특히 갑곶 나루터는 당시 많은 신자들이 목을 베어 말뚝에 달아매는 효수터가 되었다 이 째 미국 함대에 왕래한 박상 손, 우윤집, 최순복 등이 첫 번째로 잡혀가 이곶 갑곶 진두에서 효수되었다.

남한산성 순교성지

남한산성 순교 성지남한산성은 한양의 군사적 요지로 천주교 박해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는데, 이미 신해박해 (1791년)때부터 신자들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다는 전승이 내려오고 있으며, 신유박해 때에는 첫 순교자 한덕운 토마스가 탄생하였다. 이어 기해박해와 병인박해에 이르기 까지 약 300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참수, 교수, 장살 등의 방법으로 순교하였는데 안타깝게도 순교자들 가운데 일부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병인박해 때에는 이곳에서 백지사라는 특이한 형벌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사지를 묶고 얼굴에 물를 뿌린 뒤에 한지를덮는 일을 거듭하여 숨이 막혀 죽게하는 형벌이다. 너무 많은 신자들이 잡혀오자 피를 보는 일에 진저리를 낸 포졸이나 군사들이쉽게 처향할 수 있는 방법으로 고안해 낸 것이었다.순교자 ..

명동성당

서울대교구 역사와 공간의 역사1890년 '주교관"으로 신축된 이 건물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의 서양식 벽돌 건축물 중 하나로, 1891년 4월 19일 뮈텔 (제8대 조선 대목구장) 대주교에 의해 축성된 이래 주교관 및 경리부 건물로 사용되며, 한국 천주교 내에서 사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 이름 붙여진 사도회관이라는 명칭은 여기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라리보 주교(제9대 서울 대목구장) 노기 남대 주교 (제10대 서울대교구장)께서도 이곳에 집무를 보고 거주하였다. 교구의 업무 증가와 새 주교관의 필요성에 따라 새로운 주교관 (1927, 현 사회복지관)이 들어서고 사도회관은 성신 대학 의학부, 부제 학교, 가톨릭 출판사, 사회복지회관, 교육관 교구 사무처 및 관리국으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 쓰..

이벽 요한세레자 진묘터와 생가터

광암 이벽 요한 세례자 진묘 터와 생가터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화동로 1079번 길 7 광암 이벽은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가운데 주요 역할을 한 지도자이며, 한국 천주교회는 현재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안건으로 시복을 추진하고 있다. 이벽은 1777년 권철신, 정약전 등과 함께 강학을 하였고, 1784년에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앗다. 1785년 을사 추죠 적발 사건이 발생하자 평소 천주교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유림들이 반발하였고, 이벽도 가족들에게 배교를 강요받았다. 이벽은 자신이 선택한 천주 신앙과 부모에 대한 효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화현리 집에서 아사(餓死) 한 것으로 추정한다. 포천 화현리는 이벽의 부친인 이부만부터 그의 증손까지 4대 묘가 들어선 선영과 이 부 만과 그 후손들이 살..

성 남종삼 요한과 가족묘소

성 남종삼 요한과 가족 묘소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 산 22-2 (천주교 길음동 교회 묘원 위) 이곳은 남종삼 요한 성인과 그 가족의 묘소로, 1978년에 성인의 손자 남상철이 가족 묘역으로 조성하였다. 이곳에는 성인과 함께 순교한 부친 남상교(아우구스티노)와 부인 이조이(필로메나)의 묘와, 창녕으로 유배 갔던 막내아들 남규희의 묘가 있다. 전주 진영에서 순교한 장자 남명희의 묘는 없다. 남종삼 성인은 '승지'라는 직책으로 103위 성인 가운데 가장 높은 벼슬에 올랐던 분이다. 그러나 당시 공직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방해가 되자, 그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관직을 버렸다. 1863년 말경 러시아가 수시로 우리나라를 침범하며 통상을 요구하자, 남종삼은 서양 프랑스의 세력을 이용해 러시아를 물리치자는 ..

갈곡리성당 (파주)

갈곡리 성당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화합로 466번 길 25 갈곡리는 칡이 많아 칡의 계곡(갈곡, 葛谷)으로 불렀고, 우리말로 칡 울이라 하여 공소 이름도 '칠 울 공소'라 불렀다. 풍수원에서 박해를 피해 인근 우골에 청착하였던 신자들이 많아져, 1896년 세 가족이 칠 울로 옮겨, 옹기를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며 교유촌이 형성되었다. 이곳은, 하느님의 종 김치호 베네딕토 신부(베네딕도회, 한국인 최초수도사제, 1950년 10월 5일 순교)와 그의 누이 김정숙 마리안나 수녀(샬트르 성 바오르 수녀회, 1950년 10월 17일 순교)가 태어나고 자란 곳으로, 유서 깊은 신앙촌답게 최창무 안드레아 대주교를 비롯한 많은 사제와 수도자를 배출하였다. 1898년에 교구 공식보고서에 성사 집전 기록이 보고되었고, 19..

참회와 속죄의 성당 (파주)

참회와 속죄의 성당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로 111 참회와 속죄의 성당과 민족화해센터는 한반도의 평화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고 교육하는 장(場)을 마련하자는 김수환 추기경의 제안으로 1990년경부터 건립이 준비되었고, 성당은 2008년에, 센터는 2014년에 완공되었다. 성당의 이름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우리 자신의 참회와 속죄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성당의 외형은 평안북도 신의주 진사동 성당, 내부는 함경남도 덕원의 베네딕도 수도원의 한국전쟁 이전의 모습을 각각 그대로 재현하였다. 또한 민족화해센터는 평양 외곽 서포에 있던 메리놀 선교회 본부 건물을 복원하였다. 성당의 제대 위쪽 유리 모자이크는 남한과 북한 지역의 순교자들이 평화와 복음을 선포하시는 그리스도 왕께 한반도의 평화와 일..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 116-2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는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불렸으며, 16세 어린 나이로 급제하여 정조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천주교의 오묘한 진리에 깊이 매료되어 입교하였고, 그 후 활짝 열려 있던 출세의 길을 마다하고 고난과 박해만이 기다리는 신앙의 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가다 마침내 1801년 순교하였다. 부인 정난주 마리아(정약현의 딸, 정약종과 정약용의 조카)는 대구 대정현에 관노로 유배를 갔고. 외아들 황경환은 추자도에 남겨져 선종하였다. 황사영이 신유박해의 상황과 대비책을 적어 북경 교주에게 보내려고 준비했던 '백서'는 젊은 학자의 용기 있는 표현이며, 귀중한 교회사 사료이다. 황사영의 세례명은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와 달레의 "한국천주..

경기도 남양주 마재성가정성지

. 마재성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 698-44 마재 성지는 거룩한 부르심의 땅이자 성가정 성지로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 주역들의 생활터전이자 가족 모두가 순교하고 시복시성의 영예를 얻게 된 성지이다. 한국 천주교회의 첫번째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 초대 회장이자 최초로 한글 교리서를 쓴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복자와 부인 유선임 제칠리아 성녀, 아들 정철상 가롤로 복자와 정하상 바오로 성인, 딸 정정혜 엘리사벳 성녀 가족을 기념하여 봉헌된 성지이다. 마재의 성가정은 교회의 역사에도 찾아보기 힘든 가정이다. 아버지 정약종으로부터 시작된 신앙이 두 차례의 대박해 속에서도 이어져 내려오며 가족 전체가 목숨으로 신앙을 증언하였다. 더욱이 아버지 정약종은 천주교의 창립 주역의 으뜸이 되었고, 둘째 아들 정하상은 ..

강원도 홍천성당

홍천성당 강원도 홍천읍 마 기지로 54 홍천 성당은 1923년 6월 21일 춘천 고 은려 본당 관할 공소였던 송정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하여 설립되었다. 홍천 본당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송정 공소는 1890년 송정리 버덩말에 서병익 바오로 신부 (1910연 수품)의 친족이 신자 몇 가족과 함께 정착하며 시작되었다. 1923-1924년 보고서에 다르면 송정성당은 인제군 관대리와 부평리, 홍천군을 포함하여 8개 공소를 관할하며 신자가 모두 652명이었다. 송정리에 10여 칸의 한옥으로 지어 교세를 확장하던 송정 본당은 1936년에 현재 위치 홍천읍 희망리로 이전하였고, 명칭도 홍천 본당으로 변경하였다. 이곳은 홍천군, 인제군 본당들의 모 본당 (母本堂)이라 할 수 있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제에 의해 전..

춘천교구 곰실공소

곰실 공소 (춘천교구의 요람) 강원도 춘천시 동내로 220 곰실은 춘천시 동내면 고은리의 옛 지명이며, 공실 공소는 엄주언 마르티노가 세운 공동체로 현 춘천교구의 요람이다. 엄주언은 우연히 접한 [천주실의]와 [주교 요지]에 감명을 받아 천진암에서 교리 공부를 하여 그곳에서 세례를 받았다. 1910년 곰실 윗너부랭이로 이주한 엄주언은 집 옆에 강당을 세우고 가족들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시작하였다. 이후 공동체가 확대되면서 교우 수가 증가하다 엄주언은 공소 아랫 너부렁이로 옮기고, 당시 관할 본당이었던 풍수언 본당의 정규하 아우구스티노 신부에게 사목방문을 부탁하였다. 점차 교우수가 증가하면서 공소에는 신부의 상주가 절실해졌고, 마침내 1920년에 제대로 규모를 갖춘 공소를 세웠다. 그리고 그해 9월 김유룡 ..

포천 순교자 헌양비

복자 홍교만(洪敎萬 프란치스코 하미 에르) 홍인(洪鏔 레오) 순교 헌양비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호국로 1564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1784년) 되었을 당시 경기도 포천 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순교하신 홍교만(1738~1801)과 그의 아들인 홍인(1758~1802) 父子의 순교를 기리는 헌 양비이다. 홍인 레오의 집안은 본래 한양의 이름 있는 집안이었다. 그의 부친이 경기도 포천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1801년 서소문에서 순교한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바로 그의 부친이다. 홍인 부자가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된 것은 1781년 그의 부친이 양근에 살도 있던 고종사촌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우면서부터이다. 홍인은 부친에게서 교리를 배웠는데, 오히려 부친보다 먼저 천주교 신앙을 진리..

양주 신암리 성당

신암리 성당 경기도 양주시 남면 감악산로 489번 길 27-32 이곳은 오래된 교우촌으로, 하느님의 종 이춘근 라우렌시오 신부(베네딕도회)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이춘근 신부는 서울교구 사제로 서품을 받은 뒤에 수도회에 입회하였고, 1950년 10월 5일 평양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진다. 신암리는(新岩理)는 조선말기 박해를 피해 형성된 교우촌으로, 1907년 송도(개성) 성당 관할 공소로 설립되다. 그 뒤 1925년 본당으로 승격되었다가, 1931년 다시 행주성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가, 1946년 덕정리 성당이 의정부동으로 옮기며 의정부 성당 소속이 되었다. 한국 전쟁때 폭격으로 초토화되었으나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신자들의 노력과 영국 군인들의 도움으로 공소를 재건하였다. 이렇게 신앙을 간직해 온..

양주 순교성지 (천주교)

양주 순교성지 경기도 양주시 부흥로 1399번 길 62 양주 순교 성지는 [치명 일기]의 기록을 통해, 병인박해 때 다섯 명이 순교한 치명 지를 2004년 의정부 교구 설립 뒤에 새롭게 찾아내 성역화를 진행하고 있는 성지이다. 1866년에는 김윤호 요한과 권 마르타 부부, 김마리아(중국으로 가서 죽은 최 프란치스코 아내), 박 서방(아들 박사행 부부가 홍주에서 순교), 1868년에는 홍성원 아우구스티노가 순교하였다. 홍성원의 아버지(홍몽노 베드로)는 포천 고 약리에서 공소 회장을 하다가 한양에서, 형 홍성국 요한은 경기도 광주에서, 동생 홍성선은 공주에서 치명하였다. 증언을 통해 오래전에 순교지라는 표지석이 있었던 자리를 확인하고 토지 매입을 진행하여, 2016년 5월 28일 의정부 교구장 이기헌 주교의..

춘천 소양로 성당

춘천 소양로 성당 등록문화재 제161호 1956년 건립 이 건물은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의 제임스 버클리 신부가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게 희생된 앤서니 클리어 초대 주임신부를 기리기 위해 세운 성당이다. 이 성당은 당시의 건축물에서 보기드문 반원형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성당의 내부를 보면 중앙제단을 중심으로 신자석을 부채꼴로 배열하고 *원주면 중앙2층에 성가대석을, 원주면의 좌우 끝 부분에 제의실과 고해실을 덧붙인 형태이다. **아치창과 ***버팀벽 등에서 전통적인 성당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지만 이외의 화려한 장식을 배제했으며, 단순한 형태의 밝고 기능적인 공간을 구성했다는 점에서 근대적인 건축 개념을 적용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성당은 전통적인 중세풍 성당 건축양식에서 벗어나 근대적 건축양식을 ..

춘천죽림동 주교좌성당

춘천죽림동 주교좌성당 등록문화재 제 54호 1953년 건립 이 건물은 춘천교구를 사목하였던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관할의 성당 건축물을 대표한다. 정면 중앙에 종탑이 있는 석조건물로 건물의 높이와 폭에 비해 종축의 길이가 길며, 내부는 열주없이 하나의 강당처럼 형성되어 있다. 주 출입구 아치의 중앙에는 십자가 문양을 돌을 새김한 이맛돌(KEY STONE)을 두어 웅장함을 더하는 등 건축적 완성도가 높으며, 우리나라 1950년대 석조 성당 건축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춘천 죽림동 주교좌성당 현재의 죽림동 주교좌성당은 김유룡신부와 엄회장이 이끈 곰실 교우들이 애써 마련한 아랫터에 보태어 퀸란 토마스신부가 매입한 언덕 위에 건립한 성당이다. 이곳은 춘천지방을 신앙의 요람지로 만드는데 도움을 준 외국인 성직자들..

춘천교구 성직자묘역

춘천교구 성직자 묘역 (6.25 순교자묘역) 이곳은 천주교 춘천교구에서 사목하다가 선종한 사제들과 신앙을 증거하여 목자로서의 소명을 다하고 희생된 순교자들이 잠들어 있는 성스러운 묘역이다. 한국전쟁(1950.6.25~1953.7.27)의 상처는 한국현대사 뿐만 아니라 1939년에 설립되었지만 38선에 의해 관할구역이 분리되는 아픔을 겪고 있던 춘천교구에게도 커다란 아픔으로 남게 되었다. 전쟁시작 직후인 6월 27일, 춘천 소양로 본당의 고 안토니오신부가 피살되고 7월 4일에는 삼척본당의 진 야고보신부, 8월 29일에는 묵호본당의 라 바드리시오신부가 인민군에 의해 살해되었다.10월 9일에는 양양본당의 이광재 티모테오신부가 원산으로 끌려가 순교했으며, 12월 6일에는 손 프란치스코신부가 압록강변 중강진 부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