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인물사 연구 (독서>책소개)/3.동양인물평전

로산진 평전 - 요리를 빛낸 도예가

동방박사님 2022. 12. 7.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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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피카소와 채플린이 격찬한 인물
만화 『맛의 달인』의 주인공 유잔의 실제 모델


도자기와 서예, 전각과 칠기, 그림과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한 멀티아티스트, 일본 요리를 세계 최고로 끌어올린 전설적인 요리왕, ‘20세기 최고의 망나니’로 낙인찍힌 희대의 독설가인 기타오지 로산진(北大路魯山人)의 모든 것을 알아본다.

 

목차

프롤로그 1
프롤로그 2
1. 홀로서기
2. 거침없는 주유
3. 일본의 진로가 결정되는 곳, 호시가오카사료
4. 거목, 천하를 얻다
5. 도예의 세계가 꽃피다
6. 미국과 유럽으로
7. 만년과 죽음
8. 로산진의 요리왕국
에필로그
로산진 연보
참고자료

 

저자 소개

저자 : 신한균
도예가. 전통사발의 선구자 고 신정희 옹의 장남으로 태어나 현재 양산 통도사 옆에서 신정희요를 운영하며 사기장으로 일하고 있다. 한국 공예대전에서 특선과 동상,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서울시장상 및 우수상을 수상했으며, 매년 일본, 미국, 영국을 비롯한 세계 유명 화랑에서 초대전을 열고 있다. 에세이 『우리 사발 이야기』와 역사소설 『신의 그릇』을 펴냈으며, 두 책이 모두 일본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이메일: s...
 
저자 : 박영봉
푸드칼럼니스트 겸 시인. 신한균의 소개로 일본의 도예가이자 요리 영웅인 기타오지 로산진(北大路魯山人)을 접한 후 요리와 그릇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의 음식문화를 되돌아보는 글을 신문에 연재하는 등 푸드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에세이 『요리, 그릇으로 살아나다!』를 펴낸 바 있다. (이메일: sogo9257@hanmail.net)

 
 

책 속으로

“뼈를 깎는 노력으로 요리를 해도 그것을 담는 그릇이 죽어 있다면 소용이 없다. 나는 살아 있는 그릇, 죽은 그릇이라 말한다. 그릇을 선택하는 것이 번거롭다고 말하지 마라. 그릇을 사랑하고 다루는 일을 즐겨야 하며, 그릇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요리와 하나로 맺어진다. 그릇이 즐거운 것이 된다면 요리도 즐거운 것이 된다.”
--- p.108

“미국이나 유럽에 뛰어나게 맛있는 것은 없었다. 프랑스 요리를 칭찬하는 사람은 일본의 뛰어난 것을 보지 못한 불쌍한 사람이다. 일본에서 제대로 된 돈가스 하나도 먹어보지 못한 가난한 화가나 작가 들이 프랑스 요리는 맛있다고 떠벌린다. 로산진의 간절한 말을 들어라.”
--- p.175

“가정 요리에는 인생의 진실과 진심이 있고, 요리점의 요리에는 형식과 꾸밈이 있다. 그래도 우리가 요리점의 요리에 감동하는 것은 명배우인 요리사의 열연이 있기 때문이다.”
--- p.204

출판사 리뷰

●요리를 완성하는 것은 그릇이다

최근 요리와 미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부쩍 이와 관련한 TV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다. 유명 셰프들이 요리 대결을 벌이는 프로그램이 있는가 하면 맛집을 소개하거나 미식 여행을 떠나는 프로그램도 있다. 인터넷에서도 요리 관련 블로그나 맛집 소개 블로그는 여전히 인기가 높다. 그런데도 아직 우리의 음식 문화는 합격점을 받기는 커녕 낙제점을 면하기 어렵다고들 한다. 왜일까? 무엇보다도 그 원인은 그릇에 있다. 식당에서 사용하는 주걱과 국자, 뜨거운 음식을 담는 그릇이 플라스틱 또는 멜라민 그릇이기 십상이다.
요리 자체의 풍미도 중요하지만 음식과 그릇의 어울림, 즉 차림멋을 신경 쓰지 않는다면 진정한 요리가 될 수 없다. “그릇은 요리의 기모노다”라고 하면서 요리와 도자기 양면에서 종횡무진 활약해 현대 일본 요리를 완성한 이가 있으니 바로 이 책에서 소개하는 기타오지 로산진이다. 로산진으로 인해 일본 요리는 세계 최고의 수준에 오를 수 있었다.


●세상에 내던져진 아이

1883년 교토에서 태어난 로산진은 어릴 때 버려지다시피 남의 집에 양자로 보내진다. 여러 집을 전전하다 목판업을 하는 후쿠다의 양자로 들어간 로산진은 전각에 눈을 뜨게 된다. 4년제 심상소학교만을 다닌 로산진은 거리에서 간판 한자를 보고 그것을 몇 번이나 손가락으로 쓰면서 기억했다가 집으로 돌아와 아궁이 앞에서 부지깽이로 다시 그리며 익혔다. 그리고 자신이 익힌 한자를 신문에서 찾아내 음과 뜻을 알아나갔다. 서예에 대한 타고난 감각과 틈틈이 익힌 실력으로 양부의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양부의 솜씨를 뛰어넘게 된다. 로산진은 스물한 살 때 일본미술협회에서 개최한 천자문 쓰기 대회에 도전해 우승자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으로 뽑히기도 했다.
서도가 오카모토 가테이의 내제자 생활을 거쳐 도쿄에서 자리잡은 로산진은 전각으로 명성을 얻고 수입도 제법 늘어났지만, 안정적인 생활을 접고 예술 애호가인 유력자의 집에서 식객 생활을 시작한다. 당시 식객 생활은 가난한 예술가에게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릴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로산진은 당대 예술가들로부터 서도와 전각을 인정받는 한편, 타고난 절대 미각을 발휘해 당대의 미식가들을 매료시키는 요리를 선보이기도 했다.


●일본의 요리 영웅이 되다

나카무라 다케시로와의 만남은 로산진의 인생에 있어 큰 전환점이 되었다. 로산진의 예술적인 재능과 미각을 높이 평가한 그는 로산진에게 요리점을 내자고 제안했고 이들은 의기투합해 1921년 다이가도 미술점 2층에 회원제 요리점 ‘미식구락부’를 열었다. 드디어 로산진은 요리사로서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최고의 재료와 그릇을 사용한 미식구락부는 정치가, 소설가, 의사, 변호사 등 도쿄 인텔리들의 화젯거리가 되었고, 회원은 귀족원 의장을 비롯해 200여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성황을 이루던 미식구락부는 1923년 간토 대지진의 여파로 문을 닫게 된다.
미식구락부 이후 일본 최고급 요리점을 향한 로산진의 의지는 더욱 커져갔다. 로산진과 다케시로는 최고급 요리에 어울릴 장소를 빌리고 3만 엔(약 18억 원)의 자금 모집에 들어갔다. 자금 모집에 성공한 다음에 로산진은 직접 디자인한 도자 그릇을 여러 가마에서 주문 제작했는데, 일본 요리점 역사상 유래 없는 5천여 점의 식기를 마련했다. 그리고 드디어 1925년 3월 20일, 사장 나카무라 다케시로, 고문 겸 요리장 기타오지 로산진, 요리사와 그 보조 약 20명, 여종업원 40명, 잡무 보는 이 10명, 회원 약 400여 명으로 역사적인 요정 ‘호시가오카사료(星岡茶寮)’의 문을 열게 된다. “호시가오카사료의 회원이 아니면 일본의 명사가 아니다” “일본의 앞날은 호시가오카사료에서 결정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곳은 정치인이나 경제인, 예술가 등 저명인사를 회원으로 둔 고급 요리점으로 성장했다. 호시가오카사료는 품격 있는 대화를 위한 공간임을 표방해 노래와 춤은 허용되지 않았고 따라서 게이샤도 없었다. 여종업원은 술을 따를 수 없었고, 손님에게 봉사료도 받지 않았다. 그곳은 오로지 요리만 가지고 손님을 만족시켰던 것이다.


●본래 가지고 있는 재료의 맛을 살려라

요리를 한 가지씩 내는 방법은 지금에는 당연한 것이지만 로산진 당시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예전에는 서너 가지 요리가 놓인 셋 정도의 상이 처음부터 모두 나왔으며 그것을 오늘날처럼 한 가지씩 내도록 바꾼 이가 바로 로산진이었다. 현대 일본의 고급 요리점은 기본적으로 로산진이 고안해낸 스타일을 따라 하고 있는 것이다.
호시가오카사료는 일본 현대 요리뿐만 아니라 요리인의 산실이기도 했다. 로산진의 획기적인 요리 철학을 익힌 요리사들이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결국 그것은 오늘날의 일본 요리가 세계 최고 수준에 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로산진의 요리 철학은 “본래 가지고 있는 재료의 맛을 살려라”라는 것인데, 이는 자연의 맛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요리사의 과도한 손길이나 조미료의 지나친 사용을 자제하라는 것이었다.



●요리를 빛낸 도예가

로산진에게 그릇은 아름답고 살아 있는 요리를 위해 필수적인 요소였다. 요리를 맛으로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릇, 인테리어, 서비스 등과 함께 하나의 예술로 승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산진은 요정을 개업한 지 2년 후 가마를 열고 요정에서 사용할 그릇을 직접 제작했으며 요정을 그만둔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도예가의 길을 걸었다. 그의 작품은 해외에서도 널리 알려져 그의 가마로 채플린이 찾아오기도 했고, 1951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현대 일본 도예전’에서는 피카소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로산진의 도자기 작품은 오늘날 식기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거액에 거래되며 독창성과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다.


●독설가 로산진

로산진은 미국 요리와 프랑스 요리를 맛보고는 그것들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미국 요리는 전반적으로 낙제점이었고 경멸한 만한 수준이었다. 일류 요리점인데도 보잘것없는 식기를 썼고, 차림멋에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뷔페식에서는 요리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신선함이라고는 없었으며 불결한 느낌까지 들었다. 로산진이 볼 때 프랑스 요리 역시 식재료가 빈곤했고, 물이 좋지 않았으며, 아름다움이 없었고, 값싼 그릇까지 그의 마음에 드는 것이 별로 없었다.
한편 로산진은 『세이코(星岡)』라는 잡지를 창간해 자신의 예술철학과 미학을 피력했다. 특히 이 잡지에서 로산진은 생활 도자기를 값비싸게 파는 민예파를 신랄하게 공격하고 민예파의 지도적 인물 야나기 무네요시에게 독설을 퍼부어대기도 했다. 로산진은 또 인간국보(무형문화재 기술 보유자) 지정을 거부하는 등 형식과 권위에도 거부감을 드러내 ‘20세기 최고의 망나니’로 불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