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자본.경제.기업. (독서>책소개)/6.경제사상

엘버트 허시먼 - 반동에 저항하되 혁명을 의심한 경제사상가

동방박사님 2022. 12. 15.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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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거대 기획’의 오만에 도전하며
현장의 역동성에 주목한 실천적 지식인의 생애와 사상


독보적 경제학자 앨버트 O. 허시먼의 파란만장한 일대기. 허시먼은 사상적 뿌리가 마르크스주의에 닿아 있음에도 공산주의적 유토피아에 동조하지 않았고, 제3세계에 파견된 ‘외국인 전문가’였지만 ‘외국인 전문가’의 과도한 역할을 비판했으며, 시장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음에도 시장만능주의에 휩쓸리지 않았고, 경제학자이면서도 그 경계 안에 안주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20세기 지성사의 특별하고 비범한 존재였다.

독창적인 관점으로 제3세계 경제발전 현장을 연구한 개발경제학자이자 유토피아를 향한 거대 기획을 회의하며 실현가능한 개혁을 추구한 경제사상가 앨버트 허시먼의 생애는 그 자체가 시대의 역사였다. 이 책은 대공황과 파시즘, 혁명과 전쟁, 경제개발과 독재 등 20세기를 특징짓는 온갖 격동의 현장을 온몸으로 겪어낸 바로 이 ‘숙고하는 활동가’이자 ‘행동하는 지식인’의 치열한 지적?실천적 여정을 추적한다.

 

목차

들어가는 글: “모 쥐스트” 가장 적확한 단 하나의 표현을 찾아서

1장 교양 있고 낙천적인 유대인 소년 ‘오토 알베르트’ (1915~32)
2장 나치 집권을 막으려 분투한 청년 사회주의자 (1930~33)
3장 ‘프티 이데’: 추상적 이론에서 관찰적 실천으로 (1933~35)
4장 유렵의 국경을 넘나든 지적·실천적 여정 (1935~38)
5장 유대인 구출 활동의 수완꾼 ‘비미시’(1938~40)
6장 팽창주의를 제어할 무역 질서를 찾아서 (1941~42)
7장 다시 총을 잡은 ‘행동하는 지식인’(1943~45)
8장 유럽부흥계획의 막후에서 (1946~52)
9장 매카시즘의 그늘 (1943~66)
10장 ‘숙고하는 활동가’를 매혹한 콜롬비아 현장 (1952~56)
11장 주류에 도전한 독창적 개발 이론 (1956~58)
12장 라틴아메리카의 개혁가들과 더불어 (1958~62)
13장 세계의 개발 프로젝트 현장을 누비며 (1963~67)
14장 사회계약과 시장 사이의 연결고리(1967~71)
15장 박해받는 남미의 동료들을 위하여(1971~76)
16장 고전 경제사상의 재해석 (1972~77)
17장 건강한 신체가 내뿜는 우아한 매력
18장 정치와 경제를 관통하는 집합행동 이론 (1977~82)
19장 풀뿌리 현장에서 일궈낸 ‘손주들을 위한 사회과학’(1979~85)
20장 좌우 극단주의에 맞선 마지막 외침 (1985~91)

맺는 글: 마르크 샤갈의 키스 (1995~2012)
후기: 돌풍 속으로 배를 몰다

앨버트 O. 허시먼 연보
미주
참고문헌
찾아보기

 

 

저자 소개

저 : 제러미 애덜먼 (Jeremy Adelman)
 
프린스턴대학교 역사학 교수이자 같은 대학교 글로벌역사연구소 소장이다. 프린스턴대학교의 역사학 학과장, 국제교육연구협의회 의장, 라틴아메리카연구프로그램 책임자를 역임했다. 전문 연구 분야는 라틴아메리카사와 세계사다. 토론토대학교를 졸업하고 런던정경대학교에서 경제사로 석사 학위를, 옥스퍼드대학교에서 현대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아르헨티나의 토르콰토 디텔라 연구소, 영국의 에식스대학교 등을 거쳐 1992년...
 
역 : 김승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경제부와 국제부 기자로 일했으며, 미국 시카고 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옮긴 책으로 『친절한 파시즘』, 『계몽주의 2.0』, 『그날 밤 체르노빌』,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 『20 vs 80의 사회』, 『앨버트 허시먼』, 『예언이 끝났을 때』, 『기울어진 교육』, 『불복종에 관하여』, 『우리는 실내형 인간』 등이 있다.
 
 

책 속으로

허시먼은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대한 변증법적 ‘반명제’라고 생각했고 헤겔의 영향도 그에게 지속적으로 남아 있었다. (…) 하지만 허시먼은 마르크스와 헤겔의 영향을 받았으되 이들 모두와 대비되는 독자적인 사상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 사상을 우리는 ‘실천적 관념론pragmatic idealism’ 혹은 ‘실용적 이상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pp.19~20 「시작하기 전에」중에서

허시먼은 꿈꾸는 자였다. 하지만 현실세계에 깊이 발을 딛고서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대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실천에 나섰던 꿈꾸는 자였다.
--- p.43 「들어가는 글: “모 쥐스트” 가장 적확한 단 하나의 표현을 찾아서 」중에서

1930년대 초가 되면 히르슈만 가족 위를 때때로 지나가던 먹구름이 한층 더 두껍고 어두워졌다. 마치 히르슈만 가족의 운명이 그들 모두가 굳게 믿었던 바이마르공화국의 운명과 나란한 길을 가고 있었던 듯하다. 계몽주의와 동화주의적 삶의 이상적인 사례로서, 오토 알베르트의 어린 시절은 바이마르공화국의 낙관주의, 교양 있는 가정생활, 열심히 일하면 더 좋은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는 믿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그 믿음의 이유가 생각보다 얼마나 깨지기가 쉬운 것이었던지가 너무나 명백하지만, 1930년대에 접어들던 시기에는 청소년 오토 알베르트를 포함해 히르슈만 가족 중 어느 누구도 그들 앞에 펼쳐질 날들이 정말로 얼마나 암울할지 미처 알지 못했다.
--- p.110 「1장 교양 있고 낙천적인 유대인 소년 ‘오토 알베르트’(1915~32)」중에서

히르슈만은 절차나 의회적 규범을 극도로 경멸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공산주의자와 나치가 거울처럼 닮았다고 생각했다. 둘 다 세상에 대해 근본적인 ‘진리’를 알고 있다고 자처하면서, 신중함을 주장하고 복잡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혹은 절차를 통한 개혁을 원하는 사람들을 경멸하고 있었다. (…) 극단주의자들[나치와 공산주의자]은 바이마르공화국의 다원주의와 개혁주의적인 가치를 너무 혐오스러워했기 때문에 그것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데서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있었다. 여기에서 히르슈만은 개혁에 대한 희망을 모두 부수기 위해 편리하게 동원되는 순환논리를 읽을 수 있었다.
--- pp.144~145 「2장 나치 집권을 막으려 분투한 청년 사회주의자(1930~33)」중에서

그는 좌파 연대의 필요성을 여전히 믿고 있었지만 공산주의자들의 권위에 항복하면서 자율성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 p.254 「4장 유렵의 국경을 넘나든 지적·실천적 여정(1935~38)」중에서

세계은행이 자금을 지원해 식민지에서 갓 벗어난 나라들이 빈곤과 후진성에서 탈피하는 것을 도울 기회가 있었다. 개발계획을 수립하고 지원해 제3세계 국가들이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지킬 수 있게 도움으로써 공산화를 막는다는 것이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중앙 계획경제가 특징인] ‘공산화’를 저지하기 위해 ‘거대 계획’을 도입하려고 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 p.524 「10장 ‘숙고하는 활동가’를 매혹한 콜롬비아 현장(1952~56)」중에서

문제의 원천 중 하나는 ‘계획’이 가진 비전이었다. ‘계획’은 외국인 전문가들이 (미심쩍으나마) 인상적인 통계수치들을 가지고 만드는 것으로 상정되어 있고, 정작 그것을 실행하고 관리해야 할 콜롬비아 현지 사람들이 가진 지식은 부차적이거나 비과학적이거나 혹은 아예 그보다도 못한 것으로 치부되고 있었다. 현지인들은 변화에 기여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변화시켜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중간에 낀 허시먼은 개발경제학이 가지는 독특한 문제를 일찌감치 목격한 셈이 되었다. 허시먼은 그 자신도 ‘외국인 전문가’이지만 콜롬비아 사람들과 일하면서 콜롬비아의 행정가들과 민간 분야 행위자들을 점점 더 존경하게 되었고, ‘외국인 전문가’인 동료들 및 그들이 만든 계획에 맞서 싸움을 벌여야 했다.
--- p.541

급히 해결하고 서둘러 바로잡고 빠르게 고치고자 하는 충동은 사람들이 대안을 고려하는 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방해가 되었다.
--- p.599 「11장 주류에 도전한 독창적 개발 이론(1956~58) 」중에서

개혁에 대한 허시먼의 접근은 기존의 이론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기존의 이론에서는 변화를 가로막는 긴장들을 제거하는 것이 개혁의 목표였고, 여기에서 변화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매끄럽게 이동하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허시먼은 개혁이란 변화를 강제하고 추동해낼 수 있는 긴장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변화는 긴장에 의해 동력을 얻으며, 긴장이 없으면 변화는 정체 상태에 빠지게 될 터였다.
--- p.603

그가 보기에, 저개발사회에서 희소한 것은 자본도, 중산층도, ‘기업가 정신’도, 개인주의적 근대성의 토대를 닦을 올바른 문화도 아니었다.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의지와 기량, 즉 ‘개발과 관련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다. 균형성장론은 빈곤의 악순환이 발생하는 핵심 요인을 자본의 부족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허시먼은 사람들이 기회를 ‘인식’하지 못한 나머지, 있는 자본도 저사용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희소한 것은 자본이 아니라 “개발을 위한 의사결정과 행동을 협업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가뜩이나 이 능력이 부족한데, 종합적이고 광범위하게 모든 전선에서 ‘빅 푸시’를 가하지 않으면 경제개발이 성공할 수 없다고 설파하는 전문가들 때문에 이 상황은 더 악화되고 있었다. 빅 푸시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사람들은 다른 기회를 인식하지 못하게 되고 스스로의 힘으로 효과적인 의사결정을 할 역량이 없다고 느끼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pp.611~612

허시먼은 이 프로젝트가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되고 곧 나이지리아가 끔찍한 내전으로 치닫게 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가 출장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논쟁으로 시작된 분쟁은 곧 전면적인 내전으로 격화되었고 3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허시먼은 충격을 받았고 자책했으며 적지 않게 겸손해졌다. 개인적으로 개발이 초래할 수 있는 재앙을 보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세계은행의 의뢰로 진행한 연구에서도 이 점을 평가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후 허시먼이 그의 가장 대표적인 저서인 《이탈, 발언, 충성심》(1970)을 쓰는 직접적인 동기가 된다.
--- p.696 「13장 세계의 개발 프로젝트 현장을 누비며(1963~67)」중에서

고통에 직면했을 때 어떤 사람은 근본적으로 자신에게는 잘못된 것이 없다고 믿으면서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아스피린만 복용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근본적으로 자신에게 모든 잘못이 있다고 생각해서 가벼운 치료만 하면 되는데도 극약 처방을 쓴다. 후자가 당시의 남미 상황이었다. 많은 사회과학자들이 내수 시장을 성장시키려는 기존의 산업화 모델이 끝났으며 그에 따라 그 정책을 추진했던 포퓰리스트 정치 지도자 페론[아르헨티나]과 바르가스[브라질]도 힘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남미에는 이런 식의 근본주의적 진단을 하는 경향이 강했다. 따라서 ‘위기’는 만성적인 것이며 모든 문제가 뿌리 깊은 근원에서 비롯한다고 여겨졌다. 이런 견해가 너무나 팽배해서 심지어 허시먼도 ‘구조주의자’로 여겨지고 있었다. 한번은 아르헨티나 출장 중에 만난 군부의 고위 당국자가 허시먼에게 쾌활하게 말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바로 당신이 개진한 불균형성장론의 개념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아르헨티나에서 우리는 모든 정치적?사회적?경제적 목적을 한꺼번에 달성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단계별로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불균형성장 과정처럼 말이지요.” 허시먼은 불균형과 불균등에 대해 그가 개진한 개념을 아르헨티나의 군부가 진보를 방해하는 데 사용하고 있는 것에 너무 놀라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 pp.724~725

쿠데타에 대한 소문은 몇 달 전부터 있었지만 군부가 자행할 폭력과 억압의 규모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닉슨이 베트남을 무차별 폭격했을 때처럼, 이 사건은 허시먼의 심경을 한층 더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무고한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어서이기도 했지만, 개혁에 대한 희망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허시먼은 카티아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잔인하고 야만적인 억압이 자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끔찍한 뉴스들뿐 아니라 불발된 기회la chance ratee에 대해 느끼게 되는 낙담과 절망도 크구나.” 나중에 피노체트 정권이 시카고학파의 통화주의 이론(때로는 ‘정통 경제학’이라는, 몹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용어로 불리는 이론)의 영향을 받았음이 드러나자 허시먼은 거짓 확실성을 팔아먹는 약장수들을 가차없이 비판했다. 그들은 1950년대의 고고하고 해맑은 계획가들을 연상시켰다. 게다가 이번에는 훨씬 더 위험했다. 허시먼은 밀턴 프리드먼이 주창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협소한 틀에 도전해야겠다는 의지가 더욱 강해졌다.
--- p.829 「15장 박해받는 남미의 동료들을 위하여(1971~76)」중에서

허시먼은 스미스의 키워드들을 찾아가면서 스미스의 주장이 어떻게 진화해 갔는지를 추적했을 뿐 아니라, 공화주의적인 미덕의 개념을 곧 도래할 자유주의 사상에서 주요 개념이 되는 ‘권리’ ‘제한된 정부와 시민 종교’ ‘다양하고 이질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로서의 사회’와 같은 개념과 조화시키고자 애쓰면서 스미스가 느꼈을 양면적인 감정도 나타내고자 했다. 18세기 사상가들 사이에서 쓰이던 전통적인 정치론의 어휘와 이후 자유주의 시대에 사용될 어휘 사이에서 간극이 벌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스미스의 내적인 갈등에 허시먼은 크게 흥미를 느꼈다. 그리고 자본주의를 시민적 휴머니즘과 결합하려던 도덕주의자 스미스는 배제하고 이기심의 사도인 스미스만 인정하려 하는 현대의 표백된 해석으로부터 ‘갈등하는 스미스’의 모습을 되살려내고자 했다. 따라서 허시먼이 재발견한 스미스는 정치적인 시사점도 가지고 있었다.
--- pp.905~906 「16장 고전 경제사상의 재해석(1972~77)」중에서

허시먼은 이 세상에서 실망을 없애기보다는 실망의 필요성에 관심을 불러일으키려고 했다. 불만족과 후회라는 요인을 포함하지 않는 이론을 추구하다가는 희망 또한 제거해 버리게 될 터였다. 유토피아주의적 사고의 문제도 바로 이것이었다. (…)
허시먼은 어느 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보았다. 행복은 결코 영원히 존재하지 않으며 행복의 분배 또한 불균등했다. 따라서 그것의 반대편 요인인 실망을 끌어낼 수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실망도 균형점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고질적인 ‘쾌락 추구자’이기도 하지만 고질적인 ‘프로젝트 메이커’이기도 했다. (…)
그는 다른 종류의 서사를 만들어냄으로써, 즉 근대적 인간을 영구적으로 분열된 심장을 가진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이분법적 범주들을 사용하지 않는 정치경제학을 만들어냄으로써, ‘사랑스럽고’ ‘비극적이며’ 더 ‘복잡한’ 인간 주체를 되살리고자 했다.
--- pp.975~976 「18장 정치와 경제를 관통하는 집합행동 이론(1977~82)」중에서

학생들은 인간 본성을 “경제학자들이 좋아하는 합리적 행위자”라는 용어로 설명하는 것에 더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허시먼이 인간을 “실수하는 이상주의자, 이해관계와 정념 둘 다를 가진 자”로 묘사하자 이것을 도덕적인 주장으로 여겼다. 양자택일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허시먼의 이야기는 혼란스럽고 뒤죽박죽으로 보였다. 하지만 허시먼이 원한 것은 인간 행위자를 “더 사랑스러운 인물로, 어느 정도 안쓰러운 인물로, 그러면서도 약간 무서운 인물로, 따라서 비극적인 인물로” 그리는 것이었다.
이 인물은 때로 도움을 필요로 한다. 여기에서 건설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지식인이다.
--- p.994

앨버트는 경제학자들의 문제 중 하나가 “사랑을 경제적으로 효율화하려는 것”이라는 너무 뜻밖의 말을 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애니스는 “어안이 벙벙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웅성거림이 잦아들자 허시먼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개발 업무를 진행하는 사람들이 좌절하는 흔한 원인 중 하나는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를 수량화가 가능한 것 위주로 측정해야 한다는 데 있다. 그러느라 다른 점들, 예를 들면 사랑이라든가 시민적 추구 같은 것들(허시먼의 어린 시절이었다면 ‘빌둥’이라고 불렸을 것들)이 간과되어 버린다. 그것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자기육성과 향상, 머리와 심장을 조화시키고 자아와 사회를 조화시키기 위한 개선 등이 평가에서 누락되는 것이다. 하지만 때로 사람들은 비경제적인 이유로 경제활동을 하며 경제적인 이유로 비경제적인 행동을 한다. 즉 프로젝트의 평가는 정해진 비용-편익 모델에 꼭 맞아떨어지지 않는 활동과 동기들에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 허시먼이 말하고자 하는 바의 핵심이었다.
--- p.1026 「19장 풀뿌리 현장에서 일궈낸 ‘손주들을 위한 사회과학’(1979~85)」중에서

허시먼은 경제학자들이 늘 ‘희소한 자원’ 운운하면서도 “그들 자신의 용맹이 가진 한계는 알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 p.1047
 

출판사 리뷰

- 말콤 글래드웰 선정 『가디언』 올해의 책
- 『파이낸셜타임스』 올해의 경제경영서
- 『블룸버그/비즈니스위크』 올해의 책
- 미국서점협회 프로즈어워즈 우수상
- 『넛지』 저자 캐스 선스타인 강력 추천


20세기 가장 비범하고 독창적인 지식인, 가장 생산적인 지성으로 평가받는 경제사상가 앨버트 허시먼의 생애와 사상을 예리하게 통찰한 대작이다. 허시먼은 사상적 뿌리가 마르크스주의에 닿아 있음에도 공산주의적 유토피아에 동조하지 않았고, 제3세계에 파견된 외국인 전문가였지만 외국인 전문가의 과도한 역할을 비판했으며, 시장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음에도 시장만능주의에 휩쓸리지 않았고, 경제학자이면서도 그 경계 안에 안주하지 않았으며, 명문 대학의 교수를 지내면서도 권위와는 거리가 멀었던 ‘활동가-지식인’이었다, 또한 싸워야 할 적이 분명할 때 망설임 없이 총을 잡았으며, 이론가들이 간과하기 일쑤이던 현장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언제나 연구의 중심에 두었고, 허황된 거대 기획보다는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해 주는 실현가능한 작은 변화에 주목했던 ‘지식인-활동가’였다.

베를린에서 태어나 바이마르 시대의 희망과 불안 속에서 성장기를 보낸 허시먼은, 사회민주당 청년 조직에서 활동하며 베를린대학에 입학했으나 나치의 집권으로 유대인 탄압이 본격화되던 1933년 독일을 탈출했다. 파리경영대학과 런던정경대학에서 수학했으며, 이탈리아 트리에스테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업을 이어가는 와중에, 에스파냐내전이 발발하자 참전해 전투를 치르기도 했으며 트리에스테 시절에는 반파시즘 저항 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프랑스군에 입대했으나, 프랑스가 항복한 뒤에는 마르세유에서 유대인 예술가·지식인들을 미국으로 탈출시키는 활동을 펼쳤으며, 곧 자신도 미국행 배에 몸을 실었다.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캠퍼스에서 첫 저서 『국가권력과 교역 구조』를 위한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다가 독-소 개전 이후 미군에 입대해 세 번째 참전을 감행했다. 종전 후에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에서 일하던 중 경제협조처에 파견되어 마셜 플랜의 입안을 위한 기초 연구 실무자로 활약했다. 그러나 매카시즘의 광풍에 휩쓸려 정부 기관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이때 마침 세계은행이 파견하는 콜롬비아 정부의 경제 자문관을 맡아 라틴아메리카 경제개발 현장과 인연을 맺게 되면서 전화위복의 계기를 맞았다.

이후 예일대학 방문교수를 시작으로, 컬럼비아대학과 하버드대학 교수를 지내며 개발경제학에 큰 족적을 남긴 연구와 저술로 학문적 명망을 얻었다. 하지만 대학 제도가 요구하는 강의 형식에 적응하지 못해 곤란을 겪자 강의 부담이 없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로 옮겨 가 은퇴할 때까지 종신연구원으로 재직했다. 그 결과 경제학의 협소한 영역을 뛰어넘어 인접 사회과학과 학제적 연결을 시도하는 경제사상가로서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게 되었다.
첫 저서 『국가권력과 교역 구조』에서 제국주의와 전쟁의 경제적 원인을 탐구한 허시먼은, 개발경제학의 원칙과 정책, 구체적인 프로젝트를 차례로 담아낸 3부작 『경제발전 전략』 『진보를 향한 여정』 『개발 프로젝트 현장』을 통해 개발경제학자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이어 퇴보하는 조직에서 나타나는 행동유형을 분석한 『이탈, 발언, 충성심』, 자본주의 정신의 기원을 지성사적으로 탐구한 『정념과 이해관계』, 정치적 수사학의 근본적 패턴을 분석한 『반동의 화법』 등을 내놓으며 특유의 개혁사상을 발전시켜 나갔다. 이 저서들은 각각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 『열정과 이해관계』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로 번역되어 한국 독자들에게도 소개된 바 있다.

이 밖에 『참여의 시계추 운동』에서는 정치학과 경제학의 연결을 꾀했다. 그 문제의식을 오랜 독재를 딛고 일어서는 남미에서 싹트던 ‘아래로부터의 움직임’으로 실증한 『집단적으로 앞으로 나아가기』 집필을 위해 은퇴 직전까지 정력적인 현장 연구를 펼쳤다.
 

추천평

비범한 책이다. 허시먼의 지적·정치적 여정이 예리하고 통찰력 있게 묘사된다. 가족생활, 문화적 조우, 그리고 평생의 족적이 20세기 가장 독창적인 지식인 중 한 사람의 중요성과 의의를 환히 밝힌다. 나를 포함해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허시먼에게 심오한 영향을 받았다.
- 페르난두 엔히케 카르도주 (사회학자, 전 브라질 대통령)

바이마르공화국 몰락기부터 베를린 장벽 붕괴까지 앨버트 허시먼은 20세기 정치적 소용돌이의 목격자였다. 그 굽이굽이마다 학계의 인습과 지배적인 이론들에 저항하면서 허시먼은 자신의 지적 궤적을 형성해 갔다. 이 책은 그 시대의 가장 생산적인 지성에 대한 평전이자 그 시대의 정치와 학문을 모두 아우르는 역사서이다.
- 대니 로드릭 (하버드대학교 케네디스쿨 국제정치외교학 교수)

오늘날의 세계를 낳은 정치적 사건들을 온몸으로 경험하고,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온 결함 있는 이데올로기들을 낱낱이 목격하고 명확히 이해한 인물, 그리고 미래에 우리를 타락으로 이끌 수 있는 이데올로기들을 식별하고 피하는 방법을 가장 비판적으로 파악해낸 인물에 대한 대단히 소중하고 훌륭한 전기다.
- 윌리엄 번스타인 (금융사상가, 『투자의 네 기둥』 『무역의 세계사』 저자)

놀랍고 감동적인 전기. 수많은 갈림길과 믿을 수 없이 놀라운 전환으로 가득한 여정을 상세한 내러티브로 보여준다.
- 캐스 선스타인 (하버드대학교 로스쿨 교수, 『넛지』 저자)

허시먼이 지닌 무게와 가치에 걸맞은 평전. 20세기 가장 비범한 지식인의 잊을 수 없는 초상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 말콤 글래드웰 (경영사상가, 『타인의 해석』 『아웃라이어』 저자)

이 놀라운 평전 덕분에, 우리는 이제 허시먼이라는 인물과 그의 작품에 대한 종합적인 관점을 처음으로 가지게 되었다.
- 세일러 벤허비브 (예일대학교 철학 교수)

비상한 시대를 살아간 위대한 지식인의 삶. 이 책은 세계의 포괄적인 역사인 동시에 매우 개인적인 역사이다.
- 에이미 오프너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역사학 조교수)

역사와 정치와 문화라는 맥락에 근거해서 그리고 철학을 비롯한 여러 주제에 대한 폭넓은 독서에 근거해서 자신의 학문을 구축해 간 한 경제학자의 초상.
- 다이앤 코일 (케임브리지대학교 공공정책 교수)

이 책의 아름다움은 앨버트 허시먼이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한 사상가로서 생생히 살아나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점이다.
- 크레이그 캘훈 (애리조나주립대학교 사회학 교수)

내가 1년 내내 기다렸던, 내 기대에 부응하는 바로 그 책이다.
- 타일러 카우언 (조지메이슨대학교 경제학 교수, 『거대한 분기점』 저자)

빛나는 책이다. 스릴 넘치는 이야기, 영감과 멜랑콜리가 넘쳐나는 지적 평전이자, 20세기 공적인 삶과 사회과학 사이의 변화무쌍한 관계를 다룬 역사서이기도 하다.
- 에마 로스차일드 (하버드대학교 경제사 교수)